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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86화 (86/185)

86화.

자신이 누구 손을 잡고 있는지 알았다.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두통을 느끼며 의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이 밝았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와 흩뿌려진 김해수의 피,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직접 닿던 총구의 차가운 감촉까지. 모든 것은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의현아, 오늘 여기서 네 동생을 데려갈 거야.”

커다란 손은 자신보다 한참 작은 아이의 손을 꽉 부여잡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섰다. 낡아 빠진 보육원 간판이 작은 바람결에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세인트 해피 보육원

“네, 좋네요. 정말 기대돼요.”

의현은 환하게 웃으며 권중섭의 손을 맞잡았다. 이번에야말로 이 지겨운 회귀를 끝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 시작점이었다.

바뀌지 않는 설정은 분명히 있었다. 화장실 구석에 갇혀 덜덜 떨고 있는 정재이라든가 관심 끌기 위해 나대는 홍삭, 혹은 저 구석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 신하연 같은 것. 의현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얼마나 증폭되는지를 명확하게 알았고, 이제 그에 따른 실수로 피곤할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재단 후원회를 만든다는 조건은 같았다. 권중섭은 의현이 좋은 의견을 냈다며 이전과 같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의현은 후원회 저택이 세워질 때까지 집에서 정재이를 같이 데리고 있으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권중섭은 원래 집에 자주 없었기에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허락했다. 둘은 차에 정재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 못 하는 정재이를 말하는 정재이로 만들기 위한 의현의 눈물겨운 노력이 다시 시작됐다.

똑같은 학교, 백날 다녔더니 이젠 눈 감고 교과서를 외울 정도였다. 이걸 굳이 다녀야 하나 했지만, 원대한 계획을 위해선 반항심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의현은 정재이에게 교육 담당 선생님을 배정하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왔다.

정재이는 권의현을 사랑했다. 그건 이전 회차를 살면서 몸소 느낀 사실이었다. 이번 생에서 과연 나를 죽일까? 아무 감정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의현은 가능성을 저울에 놓고 무게를 재 봤다.

저울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의현은 이번 생에서도 정재이가 자신을 사랑하게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말 못 하는 정재이를 앞에 앉혀 두고 의현은 방긋 웃었다.

재이야, 너는 김해수를 따라가면 내가 궁금한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지. 네가 알려 주고 싶었던 게 권중섭이 내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니? 그런데 말이야. 나는 한 번도 그게 궁금했던 적이 없었어. 내가 궁금했던 건,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이었거든. 왜 나한테 김해수를 따라가라고 말했어? 네가 나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도대체 뭐야?

의현이 웃자, 정재이는 영문도 모르고 의현을 따라 웃었다. 제대로 못 먹어 홀쭉한 볼, 거친 피부, 부르튼 입술까지. 보이는 모든 게 그간의 빈곤한 일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이름은 권의현.”

“아……. 우으…….”

“네, 이름은 재이야. 정재이.”

의현은 자꾸만 앞으로 쏟아지는 재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기며 속삭였다.

“너를 사랑하도록 노력할게, 재이야.”

뭐라 뭐라 웅얼거리던 정재이가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의현과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지만, 의현은 이제 겁먹지 않고 그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제발 나 좀 도와줘.”

의현은 오래 감춰 왔던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다.

권중섭. 그는 의현이 혼자 맞서기엔 너무 거대한 사람이었다. 절대 이기지 못하리라는 절망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정재이가 도와준다면 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권중섭? 한낱 인간일 뿐이야. 하지만 너는 인간도 아니지. 도대체 어떤 인간이 제 마음대로 시간을 돌려? 어떤 인간이 미래를 봐? 도대체 어떤 인간이 운명을 개척해? 말도 안 돼. 정재이는 인간이 아니야.

하지만 인간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어. 예를 들면, 시초 능력자의 재림에 눈이 멀어 버린 정신 나간 사이비 신도들을 흡수하는 것들. 재이야. 세상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아. 누군가는 제대로 미쳐서 자기가 믿는 게 진짠지 가짠지도 구분 못 하고 달려들어. 깨우려고 해도 깨어나기 싫대. 그렇다면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 것도 하나의 구원이지 않을까?

네가 완벽한 존재가 되는 날을 기다릴게.

너는 네게 주어진 일을 해.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리는 통쾌하게 복수를 하는 거야.

* * *

“수찬이도 함께 가는 거예요?”

“응.”

“왜요?”

윤화는 발을 달랑거렸다. 한 짝이 벗겨진 운동화가 아슬아슬하게 발에 걸려 있었다. 의현은 괴물을 보고 기절한 수찬을 흘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 업보거든.”

“수찬이는 저를 별로 안 좋아해요. 못되게 굴고 화도 내는걸요.”

“그건 몰라서 그런 거야. 알려 주면 돼.”

의현은 언젠가 윤화가 제게 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윤 기사와 함께 주방을 빌려 오므라이스를 만들던 때였다.

‘원래 처음에 하는 건 다 못해, 형아. 처음부터 잘하는 게 이상한 거야.’

‘내가 요리 열심히 배울게! 그래서 형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

과거 수감 시설에서의 윤화를 다신 볼 수 없던 것처럼, 의현의 형편없는 요리 실력을 다정하게 보듬어 주던 윤화도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다. 의현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허무하게 과거를 흘려보냈다.

“그런데, 형아.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포탈이 내려앉은 18지구를 떠나 올라오는 길이었다. 의현이 으름장을 놓은 덕에 택시 기사는 심심하다며 주택가로 들어가지 않았고, 그 덕분에 의현이 사이비 교주를 마주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윤화와 수찬을 데리고 18지구를 빠져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아주 짧았다.

“위로.”

“위?”

“위로 올라가는 거야.”

“왜요?”

“교육받을 수 있게 해 줄게. 괜찮은 선생님 밑에서.”

“엑! 나는 공부는 싫은데요?”

“공부만 하고 살라는 거 아니야. 네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얼른 자.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을 테니까.”

윤화는 꼬물꼬물 다가와 의현의 몸에 제 머리를 기댔다.

“……형아는 꼭 어른 같아요.”

민들레 홀씨 같은 빨간 머리카락이 붕붕 휘날렸다. 너무 선명한 빨간색이라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의현은 손을 올려 윤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도 며칠 자면 어른 돼.”

“정말요? 며칠이나요?”

“너 숫자 몇까지 셀 수 있다고 했지?”

“백까지요.”

“그럼 백일 하고 하루 정도 더 자면 되겠네.”

윤화는 입을 잔뜩 내밀고 뭐라고 투덜거렸다. 옛날 생각이 나서 의현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얼른 자.”

“네에…….”

윤화는 말꼬리를 늘였다. 택시는 익숙한 18, 17지구를 지나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기억들을 더듬으며 의현 역시 피곤한 눈을 감았다.

후원회 저택은 건설 중이었다. 권중섭이라면 죽었다 깨나도 수찬을 후원회 저택에 들여놓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쯤에서 의현은 대리인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 미성년자의 몸으로는 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야, 의현아!”

수업 내내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느라,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줄도 몰랐다.

“어, 어. 왜?”

얼떨떨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의현은 딸칵거리고 있던 볼펜을 손에서 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끝나고 우리 놀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 거냐고.”

“아냐, 난 안 가.”

“왜? 같이 가자. 공부만 하고 어떻게 살아?”

어린 얼굴의 동민이 실실 웃으며 의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의식적으로 동민의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의현은 금세 시선을 뗐다.

“오늘 끝나고 해야 할 거 있어.”

“뭔데? 재밌는 거면 나도 같이 가서 하게.”

“재미없을 거야. 네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니까.”

“난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 편인데, 뭐지? 음…….”

동민은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진심으로 고민했다. 같이 놀기로 했던 애들이 뒷문에 모여 동민의 이름을 불렀다. 야! 차동민, 얼른 나와! 이러다가 늦겠다!

“나 진짜 모르겠다. 뭔지 말해 줄 수 있어?”

닦달하는 애들이 보이지도 않는 건지 동민은 눈을 빛내며 물어 왔다. 의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잘 거야.”

“잔다고? 야! 그럴 거면 그냥 우리랑 같이 놀자!”

“잘래, 피곤해.”

의현은 다 죽어 가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달 내던 애들이 기어코 교실 안으로 들어와 동민을 질질 끌고 나갔다.

“주말 잘 보내! 월요일에 보자-!”

동민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멀리서 봐도 성격 좋은 게 티가 났다. 이러니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달라붙지. 내가 사이비여도 차동민한테 홍보 전단지 나눠 주고 싶겠어. 의현은 혀를 차고 설렁설렁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도련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셨나요?”

교문을 나서는 의현의 옆에 윤 기사가 바짝 따라붙었다. 가방을 옮겨 받고 차 문을 열어주는 일련의 행위들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집으로 가 주세요.”

“네.”

의현은 뒷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윤 기사는 차에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주행을 시작했다.

[새 메일을 작성하시겠습니까?]

이게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일까? 뒤통수 맞으면 어떡하지? 머릿속에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의심들이 새끼 쳤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괜히 위험하게 일을 벌이는 건 아닐까…….

‘자기는, 악당이 아니야.’

‘바닥 쳤으면 다시 올라가. 밑에서 놀지 마.’

‘경위서 쓸 각오는 해야겠지?’

하지만, 의현은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제목 : 안녕하세요, 서주연 팀장님.]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그리고 원래 많이 망가져 있는.

서 팀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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