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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83화 (83/185)

83화.

이보다 더 완벽한 나락은 없을 것이다. 의현은 자신에게 뻗어지는 수십 개의 손가락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이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의현에게 달려들었다. 의현은 사람들의 손을 피해 달리며 다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마를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여러분 저 사악한 악마를 그냥 보내지 마세……!”

4층 유리창 앞에서 악악 소리치던 부교주는 곧 목이 잘렸다.

포탈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부교주의 목을 으적으적 씹으며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도망가긴커녕 환호하며 자신의 목을 내보였다. 괴물이 사람 같고 사람이 괴물 같아 보였다.

헉헉거리며 예배당을 빠져나간 의현은 숲속으로 들어섰다.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동안, 어디선가 경적이 울렸다.

빵-!

옆을 바라보는 순간, 트럭 헤드라이트가 의현의 얼굴을 비췄다.

“자기! 얼른 타!”

서 팀장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의현을 불렀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의현은 조수석 문을 열고 트럭에 올라탔다. 턱 끝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 동안 서 팀장은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았다. 엄청난 속도를 내며 차가 앞으로 훅 뻗어 나갔다.

“미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돼지 농장 아저씨의 트럭이었다. 의현은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미친 듯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사, 사람들이 너무 모, 못되게 굴어서 버, 벌을 내리신 건가요?”

“뭐야! 깜짝이야!”

뒤에서 쑥 튀어나온 손에 의현은 움찔했다. 좌석 뒤편 공간에 수찬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저거 내가 내린 벌 아니거든? 나도 모르는 일이야!”

“자기가 벌도 내릴 수 있어? 둘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오늘 이 일은 저랑 정말 관계가 없어요. 저도 모르는 일이라서 난감한데 지금…….”

서 팀장의 트럭은 엄청난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사람들이 아무리 빨리 뛰어도 달리는 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포탈 터진 거 알면, 본사에서 난리가 날 거예요. 여기에 들어앉아 있는 팀장이 몇 명인데, 이거 하나 처리 못 했냐고. 또 위원회 소집될 수도 있어요. 팀장님, 저희 지금 내려서 이거 처리해야 해요?”

“……모르겠어.”

괴물이 달려들어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서 팀장의 차는 멈추지 않았다. 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흩트렸다.

“상사잖아요. 뭐든 하라고 하면 저 말 들을게요.”

“…….”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요.”

“…….”

“서 팀장님.”

대답 없이 앞만 보고 운전하던 서 팀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항상 웃고 있던 입매가 밑으로 뚝 떨어져 있었다. 의현이 무어라 말하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서…….

“받아.”

서 팀장은 핸들을 틀다가 의현의 손에 핸드폰 하나를 툭 던져 주었다. 귀여운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핸드폰 화면에서 빨간색 점 하나가 반짝거렸다.

“거기 빨간 점 보이지? 그게 한 팀장 차거든?”

“네?”

“한 팀장 지금 김해수 씨 챙겨서 상층 지구로 튀었어.”

괴물들이 빛을 보고 트럭으로 달려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괴물을 처박으며 다니느라 트럭의 앞 유리가 온통 초록색 피로 오염됐다. 서 팀장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삐걱거리며 트럭은 숲길을 지나 비포장도로로 진입했다.

‘내일 김해수 따라가요. 그럼 형이 궁금한 거 해결할 수 있어.’

김해수가 튀었다고? 한 팀장이랑? 나를 감시한다고 했잖아. 왜…….

머리가 지끈거렸다. 의현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모든 사건이 정재이가 얘기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가끔 미래 비슷한 게 보여요. 막 선명하진 않고.’

김태원처럼 단편적인 미래를 본다고 해도 지금의 의현에겐 단서 하나하나가 절실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의현 본인도 그중 어떤 의문이 풀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현은 가야만 했다. 김해수가 있는 곳으로.

“자기 운전 못 한다고 했지?”

비포장도로는 시내와 연결되어 있었다. 벌써 저 끄트머리에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도의적으로 이걸 밀고 갈 수는 없었다. 트럭을 붙잡으라는 연락이 돈 모양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전부 튀어나와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네, 저 면허 없어요.”

“면허는 성인 되자마자 좀 따 놓지 그랬어. 아, 도련님이라 직접 운전할 필요가 없었던 건가?”

사람이 바글거려 도저히 도로를 지나갈 수가 없었다. 서 팀장은 트럭을 멈추었다. 싸구려 트럭은 덜덜거리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내릴까요? 빨리 처리할게요.”

“무슨 소리야. 자기는 가야지.”

“네?”

“음……. 아무래도 경위서 쓸 각오는 해야겠지?”

예배당 쪽에 있는 괴물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트럭을 발견한 사람들이 의현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서 팀장은 운전석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렸다.

“잠깐만요, 서 팀장님!”

의현이 따라 내리려는 걸 수찬이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저, 저분이 시, 신님 살리려면 위, 위로 올라가야 한대요…….”

수찬은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왔다. 순식간에 운전석이 꽉 찼다.

서 팀장은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들이 몰린 곳으로 향했다.

“저, 저는 신님 살려야 해요. 저, 구, 구원받고 싶어요…….”

“수찬아. 구원 같은 건 없어. 미안한데, 나는 신이 아니야.”

의현은 더 이상 수찬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허구를 파는 것이 사이비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미친 짓.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시, 신님인데요?”

“너랑 똑같아. 나도 그냥 사람이야. 다치면 피 나고 늙으면 죽어.”

의현의 말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수찬은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았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못 들었어? 나 신 아니야. 사람이라니까. 사람이라고.”

“드, 들었어요…….”

서 팀장은 하늘로 손을 뻗었다. 정신 놓고 트럭으로 달려들던 사람들의 몸이 한순간에 멈췄다. 단체 조작 능력이었다.

“하, 하지만 어, 얼굴을 다, 닦아 주셨잖아요.”

“…….”

“아무도 그, 그런 사람 없었어요.”

“…….”

“오, 오직 그분만이 너희의 구, 궁핍한 마음을 풍요롭게 할지니!”

“…….”

“궁핍! 나같이 하등 불쌍한 놈! 풍요! 안식! 좋은 거!”

“…….”

“가슴이 따, 따뜻했다고요! 죽어도 조, 좋을 만큼!”

수찬이 밟은 트럭은 아주 빠른 속도로 비포장도로를 지났다. 사람들은 넋이 나간 채로 양쪽으로 갈라졌다. 아니, 비켜 준 게 맞았다. 깔끔하게 갈라진 그 괴이한 틈을 지나면서 의현은 얼굴을 빼고 서 팀장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후회하지 마.’

서 팀장은 선명하게 입을 벙긋거렸다. 한 번에 큰 능력을 사용해서 그런 건지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손에 들린 핸드폰의 빨간 점은 자꾸만 멀어졌다. 의현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 않을게요!

서 팀장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의현을 태운 트럭은 지독한 어둠 속으로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남자에 눈이 멀어, 기어코 일을 치는구나. 서주연…….”

서 팀장은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수찬은 의현을 태우고 달렸다. 17지구 근처에 사는 시초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들은 포탈에 질겁하며 도로로 튀어나왔다. 다른 곳으로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도로가 꽉 막혔다.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팀장 무리도 그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건지 중앙 도로가 아닌 샛길로 차를 돌렸다. GPS를 보고 있던 의현도 같은 방향으로 빠졌다.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는데도 수찬은 그런 것쯤은 크게 신경 안 쓴다는 듯 굴었다. 갑작스럽게 많은 사건이 한꺼번에 터져 의현이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는 동안, 수찬은 앞만 보고 운전했다.

날씨도 변덕을 부렸다. 톡톡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몇 시간 후 장대처럼 쏟아졌다. 의현의 개인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지잉, 징-.

수찬은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흘끗했다. 의현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의현은 핸드폰 전원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굳이 지금 이 전화를 받아 상황을 어렵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운전은 언제 배웠어?”

“저, 전에 있던 예배당에서 차 우, 운전할 사람이 필요해서요. 그때 배웠어요…….”

“면허를 딴 거야?”

“글을 모르는데, 며, 면허를 딸 수 있나요? 저 사, 살던 데서는 다들 그냥 운전하던데요. 면허 없이요.”

하긴 운전면허 시험장도 없을 것 같은데, 면허를 제대로 따고 운전할 리 없었다. 의현은 이것저것 캐물으려던 걸 후회하며 입을 다물었다.

“근데, 위, 위로 올라가면 무슨 이, 일이 있는 건가요?”

와이퍼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빗물을 밀어냈다. 이렇게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도 궁금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을 건지.”

“머, 먼저 가신 분들이 뭔가 나쁜 지,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수찬은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럴 사, 사람으로는 안 보였어요. 자, 작은 남자분은 저한테 자, 잘해 주셨고. 큰 나, 남자분도 친절하게…….”

“수찬아. 나쁜 사람도 너한테 잘해 줄 수 있어.”

“하지만…….”

“사람 속이는 게 얼마나 쉬운데. 나도 너 속였잖아.”

“…….”

“사람 너무 믿지 마.”

한 팀장과 김해수가 수찬에게 잘 대해 줬던 이유는 하나다. 어떻게 해도 진창에 처박힐, 갱생의 여지가 없는 수찬의 인생이 불쌍해서. 딱 거기까지다. 수찬의 말대로 그들이 정말 착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상황에 제일 먼저 상층 지구로 도망치듯 올라가진 않았겠지. 여기에 이렇게 모두를 버려두고.

“……무사히 올라가면, 너 지낼 곳이랑 일할 자리 봐줄게.”

의현은 가만히 창밖을 쳐다보았다. 온통 까맣게 타들어 간 공허한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희미한 불빛이 일렁거렸다.

“다시 시작하면 돼.”

“…….”

“인간답게 살 수 있어.”

“…….”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 줄게.”

의현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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