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김해수는 의현과 함께 싸구려 조립식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방충망 바로 앞자리, 벌레한테 살 뜯어 먹히기 딱 좋은 위치였다.
“네가 김해수를 어떻게 알아?”
“가끔 미래 비슷한 게 보여요. 막 선명하진 않고.”
“네가 조작하는 건 아니고?”
의현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조작이 어디서든 가능하니까, 상황을 믿지 말라는 말. 그건 지금을 두고 했던 말이 아닐까?
“형, 나 못 믿어요?”
정재이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함께 지내 온 세월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타박하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태연한 그 표정에, 의현은 큰 혼란을 느꼈다.
“믿고 싶지.”
“…….”
“그런데 네가 그렇게 내버려 두질 않잖아.”
정재이는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 팽개쳐 두었던 빨간색 봉지를 다시 손에 쥐었다. 얼기설기 만들어진 빨간색 봉지에는 군데군데 액체가 튄 자국이 있었다. 의현의 생각이 위험한 쪽으로 튀었다. 이게 무엇일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오늘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정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의현은 그의 어깨를 세게 부여잡고 잡아 돌렸다.
“어딜 또 네 마음대로 사라지려고?”
“…….”
“절대 못 가. 너 건방지게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말해.”
긴 속눈썹 아래에 숨겨진 두 개의 눈은 의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재이의 흰 손목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그래도 형은 내 손을 놔야 할 거예요.”
똑똑똑-.
정재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문에 대고 세 번 노크했다.
“아홉 시니까.”
똑똑똑-.
심장 소리 같았다. 빠르고 규칙적인.
“형제님! 주무십니까? 저 핏방울 형제입니다! 모임 시간이 되어 왔습니다!”
의현은 숨을 몰아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옷만 갈아입고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잠들어서요.”
“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갈아입고 나와 주세요.”
의현은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멀뚱히 서 있던 정재이는 제게로 날아오는 의현의 옷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검은색의 사제복 비슷하게 생긴 옷은 중앙에 핏방울 무늬가 박혀 있었다. 이놈의 핏방울을 아주 별의별 곳에 다 박아 놨구나. 의현은 작게 중얼거리며 바지 지퍼를 내렸다. 정재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속옷 차림인 게 그다지 부끄럽진 않았다. 같은 성별이기도 했고, 애초에 정재이와는 볼 장 다 본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현이 사제복을 껴입는 동안, 정재이는 고개를 바닥에 쿡 처박았다. 얼굴도 못 들고 꼬물꼬물 의현이 벗어 놓은 옷을 개는 그 꼴을 보니, 웃음이 터졌다. 하하…….
헙! 의현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웃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
웃음소리를 듣고 정재이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
의현은 한 번도 정재이가 알기 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보통 사람 같지 않았다. 얜 항상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남이 봤을 땐 비틀거리지만 자신은 똑바르게 걷고 있다고 착각하는 취객처럼, 정재이는 계속해서 엇나가는데 의현만 얘가 갱생되고 있다고 믿는 걸까 봐 두려웠다. 그랬는데…….
“……너 표정 진짜 웃긴다.”
의현은 정재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제복 단추가 아슬아슬하게 풀려 있었다. 의현의 옷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얼굴이 벌게진 정재이가 분주하게 눈을 굴렸다. 내뱉는 숨이 눅눅했다.
아.
의현은 확실히 알았다. 정재이가 나에게 욕정하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그 무거운 감정을 깨닫는 순간.
의현은 자신을 옥죄고 있던 오래된 불안에서 탈피했다.
“안에선 편히 쉬셨나요?”
“편히 쉬기엔, 너무 덥던데요.”
“아……. 좀 덥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마음속에 묻어 뒀던 상념들을 지워 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의현은 핏방울 형제를 따라 모임 장소로 이동했다. 넓고 으리으리한 장소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임 장소치고는 크기가 꽤 작았다.
“안녕하세요, 형제님.”
누군가 의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먼저 와 앉아 있던 성도였다. 의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이 사람도 세례식에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의현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상대방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치는 건 낯선 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내일이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니, 너무 설레요-!”
맑은 눈의 광인……. 의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작은 책상 앞에 방석이 세 개 놓여 있었다. 두 명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남은 방석은 하나뿐이었다. 의현은 빈 방석 위에 주저앉았다.
핏방울 형제는 무릎을 꿇고 가만히 뒤에 앉았다. 곧 앞문을 열고 부교주가 얼굴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안경을 쓴 채였다. 부교주가 얼굴을 드러내자마자 의현의 옆에 앉은 신도들이 손뼉 치며 환호했다.
“자자,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형제자매님들.”
부교주는 흐뭇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의현과 눈이 마주쳤다. 의현은 분위기를 흐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먼저 전하고 오늘 세례자 모임을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원래 세례자 모임은 대교주님의 축사로 시작되지만, 오늘은 대주교님께서 몸이 편찮으신 관계로 제가 대신 축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부교주의 정중한 말에 신도들은 괜찮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괜찮은 건 의현 하나인 듯했다. 부교주 얼굴 좀 덜 보나 했더니, 어김없이 붙어 있게 생겨 기분이 팍 상했다.
“그럼, 내일 세례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도록 하죠.”
어디선가 노래 반주 같은 게 튀어나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핏방울 형제가 손에 리모컨을 손에 들고 삑삑 눌러 대고 있었다. 신도들은 반주가 나오자마자 익숙하게 찬양했다. 가사도 없었는데 말이다. 평소 예배 때 입만 벙긋거리던 의현에겐 꽤 난감한 순간이었다.
“모두 눈을 감으세요! 시초님께서 여러분들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부교주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의현은 비웃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시초님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건 맞지. 방금까지 방에서 나랑 같이 있었으니까.
종교에 눈이 먼 이 사람들이 무지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누구나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신념을 굳게 세운다지만, 그게 사이비여서는 안 됐다.
사람들은 소리치며 입 밖으로 소원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부디 저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 지옥 같은 삶에서 저를 해방시켜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온 세상의 검은 단어들이 죄 기어 나왔다. 의현은 두 눈을 감은 채로 자신에게 기도했다. 후회할 선택 하지 말자.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나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 무너지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몇 번이나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부교주는 의현의 어깨를 진득하게 짚고 지나갔다. 무언가 암시를 주는 것 같았다. 의현이 슬쩍 눈을 떠 위를 올려다보니, 부교주가 입을 벙긋거렸다. 모임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렴. 의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시초님 부디 저희가 세상에 타락하지 않게 붙잡아 주시고, 항상 올바른 주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기원합니다-!”
부교주는 마이크를 붙잡고 외쳤다. 신도들은 하늘에 번쩍 손을 들고 기원한다고 부르짖었다. 웃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의현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로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틀어진 음악과 부교주의 개소리 덕분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 * *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부교주는 모임이 끝나기 한 시간 전, 목이 쉰 채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기도하던 신도들은 죄다 혼절해 바닥에 드러누웠다. 난리도 이런 개난리가 없었다. 핏방울 형제는 사람들을 방으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멀쩡한 의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발로 일어섰다. 핏방울 형제가 신도 한 명을 등에 업었다.
“대교주님은 어디가 편찮으신 걸까요? 몸이 괜찮으셔야 할 텐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저도 걱정돼서 오늘 한숨도 못 잘 것 같습니다. 형제님…….”
의현이 은근히 떠본 걸 핏방울 형제가 받아쳤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얼굴은 핼쑥했다. 핏방울 형제는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내일 중요한 행사가 있으니, 오늘은 편하게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의현이 먼저 복도로 나왔다. 핏방울 형제는 신도를 등에 업은 채 의현의 뒤를 따랐다. 의현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의현은 넉살 좋게 인사하며 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자마자 의현은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핏방울 형제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움직이지 않았다. 의현은 핏방울 형제가 자신을 의심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
몇 분 뒤, 아주 작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의현은 숨을 내쉬고 제 방을 둘러보았다. 언제 정재이가 왔었냐는 듯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의현은 타이밍을 쟀다. 부교주는 자신의 방에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의현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오늘은 대교주의 방을 털 생각이었다. 몸이 안 좋다고 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의현은 방문 앞에 다시금 귀를 댔다. 핏방울 형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숨죽이고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를 기다렸다. 핏방울 형제 특유의 축축 늘어지는 발걸음이 의현의 현관 앞을 지나칠 즈음.
“형제님!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의현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깜짝 놀랐네요.”
“제가 성서를 잘 몰라서요. 도움을 좀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의현은 손에 들린 성서를 내보이며 순진한 척 웃었다. 혼절한 사람들을 전부 방에 넣어 주고 돌아오느라 핏방울 형제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죠? 저도 배우는 입장이라 성서 관련 지식은 좀 부족합니다. 부교주님이나 대교주님께 여쭙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시간이 늦었는데, 방문하는 건 폐가 되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대교주님께선 건강도 안 좋으신데 말이죠.”
“그건 그렇죠.”
“부교주님은 아까 목이 다 쉬셨던데요? 큰 거 물어보려는 거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거예요.”
의현이 애걸했다. 핏방울 형제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의현의 방으로 발을 들였다.
현관문이 닫히고 핏방울 형제가 성서를 향해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의현은 그의 급소를 내리쳐 단숨에 기절시켰다. 핏방울 형제는 억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의현은 핏방울 형제의 옷을 벗겼다. 그런 다음 제가 입고 있던 평상복을 핏방울 형제에게 입혔다.
이불을 덮고 모로 누운 핏방울 형제는 흡사 권의현같이 보였다.
“미안합니다. 좋은 꿈 꾸세요.”
의현은 핏방울 형제의 옷을 껴입고 앞머리를 흩트렸다. 이발할 시간이 없어 꽤 길어진 앞머리는 눈썹과 눈을 가릴 정도였다.
대교주의 방은 가장 위층에 있었다. 의현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치고 빠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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