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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74화 (74/185)

74화.

방 벽지는 온통 붉었다.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서 팀장은 의현을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발을 올려놓는 건 좀.”

“미안, 미안. 지쳐서 말이야.”

의현은 서 팀장의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소회의실 정도로 보이는 장소는 하층 지구의 인테리어라기엔 고급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다던 말은 뭘까?”

“이번 주 수요일에 세례식을 연다고 해요. 그때 세례자로 지정되면 위층에 있는 기도실에서 묵으며 종일 기도해야 한다는데, 그때 어떻게든 여기를 좀 털어 보려고요.”

“어머, 너무 신기하다-!”

“뭐가요?”

“내가 아까 시내에 나갔다 왔잖아. 거기서 만난 애가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

좋은 생각이라며 요란 떨 줄 알았건만, 서 팀장은 갑자기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예배가 시작된 모양인지 어디선가 찬양이 들리기 시작했다. 딱 둘만 사라진 걸 누군가 알아채기 전에 얼른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야 했다.

“그게 꼭 지금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얘기입니까?”

“응. 자기도 들으면 아마 놀랄 거야.”

서 팀장은 자신 있어 보였다. 이 사람은 원래 자기가 뭘 하기로 마음먹으면 꼭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의현은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얼른 얘기하라고 권했다.

“얼굴도 말이야. 신비로웠다고. 물론 하나도 안 보였지만, 그냥 되게 신비로운 느낌이었어! 응!”

“이상한 말이라면서요. 이상한 얼굴이 아니라.”

“그래, 그 신비로운 느낌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니까?”

극도로 흥분한 서 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오늘 누가 세례 얘길 꺼낼 텐데요. 그거 도와주겠다고 하세요, 라고.”

“……네?”

“말했잖아. 정말 이렇게 말했다니까?”

의현은 자리에 멍청히 굳어 눈만 껌뻑거렸다. 불신이 가득한 얼굴에 서 팀장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 말 못 믿을 줄 알았다니까?”

“아니, 그래서, 그렇게 말한 사람을 그냥 보냈어요?”

“무슨! 내가 어떤 사람이야! 당장 팔을 붙잡고 딱 물었지! 당신 뭡니까? 이렇게!”

“그랬더니요?”

“오늘 저녁 예배에 나오면 알게 될 거라고 했어.”

“오늘 저녁이요? 그럼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응, 이제 할 말 다 했으니까 들어가야지.”

서 팀장은 태연했다. 그런 중요한 얘기가 있었으면 진즉 얘기를 해 줘야 할 거 아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 세례라는 거 그렇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거야. 내가 한 명의 생각을 살짝 조작한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까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대교주랑 독대하는 상황 자체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만들어야 해. 단체 조작 들어가면 상부에서 눈치챌 게 분명해.”

서 팀장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상황을 눈치챈 건지 웬일로 일반인 수준의 의견을 냈다. 의현은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오늘 만난 그 사람이요, 어쩌면 미래를 보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전에도 만나 본 적 있거든요.”

“미래를 본다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를 좀 소개해 줬어야지!”

“감방 들어가 있어요. 보러 들어가세요. 말리진 않을게요.”

“어우, 왕싸가지…….”

의현은 슬쩍 문을 열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은 아직도 눈이 맛이 간 채였다.

“아무튼, 세례 계획은 그렇게 아시고. 시내에서 만났다는 사람 혹시 보게 되면 제가 알아챌 수 있게 행동을 좀 크게 해 주세요. 만나서 얘기를 좀 해 봐야겠으니까.”

“알겠어. 먼저 들어가 봐.”

“타이밍 보다가 빨리 오셔야 해요.”

“당연하지. 그럼 자기를 혼자 두겠어, 내가?”

서 팀장은 느끼하게 눈을 찡긋거렸다. 의현은 지겨워 죽겠단 표정으로 유유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예배 도중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신도 몇 명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의현은 길을 잃을 뻔한 걸 도와줘서 고맙다고 태연하게 연기했다.

“기원합니다.”

예배당 문 앞에서 의현이 실실 웃으며 말하자, 경비는 꿈에서 깬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배 중인데, 혹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예배 중에는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후문을 이용하시죠.”

“제가 새 신자라 잘 몰라서……. 후문이 어디죠?”

경비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 혼란을 곱씹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의현의 멀끔한 인상을 위아래로 훑은 경비는 이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쪽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네, 감사합니다.”

후문은 서 팀장과 함께 갔던 방과 정반대에 있었다. 코너를 한 번 돌아 나온 조그만 문에선 익숙한 설교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예배에 방해 안 되게 허리 숙이고 조용히 들어가 주십시오.”

“물론이죠.”

시초교 문양이 새겨진 작은 문을 열자마자 의현은 몸을 굽히고 눈을 치켜떴다. 김태원 말고 미래를 볼 줄 아는 새끼가 또 있어? 형형한 의현의 눈빛에, 때마침 흘끔 뒤를 돌아보던 수찬이 놀라 움찔했다. 의현은 비어 있는 수찬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수찬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왜……. 화가 왜 나신 거, 거예요?”

“화 안 났어.”

“그, 그런데 표정이 아, 안 좋은데요?”

서 팀장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의현은 수찬이 손에 쥐고 있던 주보를 가져와 다리를 덜덜 떨며 읽었다. 작은 글씨들은 영양가 없는 얘기를 줄줄 나열하고 있었지만, 딱 하나.

[새 신자 등록 : 1명]

아침까진 없던 문구였다.

의현은 앞을 바라보고 있던 수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왜요?”

“새 신자 등록은 뭐야?”

“마, 말 그대로 새, 새 신자로 등록하는 거죠. 근데 드, 등록하려면 꽤 오래 다녀야 해요. 저, 적어도 석 달은 꼬박…….”

“이거 봐. 누가 새 신자 등록을 했어.”

“자, 자주 해요. 새 신자 등록하면 수, 수요일에 세례 바, 받을 수 있어요.”

수찬은 의현이 모르는 걸 알려 주는 행위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 이따 예배 끝날 때쯤에 새 신자한테 이, 인사시켜요.”

“그래?”

“그때 보, 보실 수 있어요.”

수찬은 설교하는 부교주의 눈을 피해 작게 속삭였다. 자리를 뒷자리 근처로 잡아서 그런지 딴청을 부려도 눈에 잘 띄지 않아 좋았다.

예배는 지루했다. 했던 얘길 또 하고, 또 했다. 서 팀장은 어느샌가 들어와 의현의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현은 주보에 적힌 말씀을 읽고 눈을 감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송했다. 종교 활동이라는 게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사이비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자,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죠?”

부교주는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신도들이 앉은 좌석을 한번 훑어보았다.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의현은 괜히 찔려 슬쩍 몸을 숙였다.

“우리 17지구 시초교 교단에 새 신자로 등록한 분이 계십니다. 모두 애정 어린 박수로 환대해 주시죠.”

이백 명쯤 모인 사람들이 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손뼉을 쳤다. 이 정신 나간 사이비에 새 신자 등록을 한 정신 나간 놈 얼굴, 나도 좀 보자. 의현은 사람들 머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중간에서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일어났다. 좌석 간 거리도 있고 모자에 얼굴 절반이 가려있어 생김새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앞으로 많은 활동을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재정 씨, 그럼 신도분들께 인사 말씀 좀 하실까요?”

부교주의 얼굴이 밝았다. 저렇게 잘 웃는 사람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의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재정’이라는 사람을 탐색했다. 키는 의현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정도? 골격을 보니 남자다. 그것 말고는…….

“……어머! 너무 환영해요! 이렇게 멋진 종교에 신자로 등록하다니, 젊으신 분이 선구안이 있네! 앞으로 잘 지내봐요! 어쩌면 오다가다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뭐 시내 같은 곳이라든지! 호호!”

서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조용한 가운데 퍼지는 요란한 소리에 이목이 집중됐다. 진땀을 뻘뻘 흘리는 서 팀장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의현은 ‘재정’이라는 저 남자가, 서 팀장이 시내에서 만났던 그 신비로운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안녕하세요, 다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재정이 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가 서 있던 근처부터 마치 파도처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나-!

“와! 정말 신비롭다! 정말로 신비로워!”

서 팀장은 경비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의현이 혹시 못 알아챘을까 봐 계속 신호를 주었다.

“사, 사람들이 왜, 왜 이렇게 시, 시끄럽죠?”

“…….”

“의, 의현 학생님?”

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 읽는 것에 느린 수찬이 입을 우물거리며 의현의 눈치를 보았다. 원래도 까칠해 보이는 의현이었지만, 지금은 특히 더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저주를 퍼부을 것만 같았다. 수찬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도, 도대체 왜 화가 나신 거예요.”

“……수찬아.”

“네?”

의현은 실소했다. 쥐고 있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수찬은 그가 일을 치기 전에 말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찼다. 때리시면 안 돼요, 사람 죽이시면 안 돼요…….

“새 신자로 등록하게 된, 이재정입니다. 앞으로 진심을 다해 이 교단에 헌신하겠습니다.”

부드러운 저음은 공기를 타고 의현의 귓가를 간질였다. 멍청히 앉아 있던 의현은 쾅!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시선이 와 박혔다. 물 빠진 갈색 머리카락, 반짝이는 아름다운 연보라색의 눈동자. 그 쪽지 이후로 하루도 제대로 잠든 적 없었다. 네 소식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너는 몰라. 모르니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들이밀 수 있는 거야. 너는 도대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할 거야. 언제까지…….

“여러분들 모두 기원하시기를, 저 역시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의현을 바라보며 웃었다. 마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의현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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