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회귀식 생존법-68화 (68/185)

68화.

단순히 업무가 바쁜 건 몸만 갈리면 됐는데, 사람과의 관계가 바쁜 건 매사 의현을 곤혹스럽게 했다. 사람 대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해 더 그런 것 같았다. 정재이부터 시작해 차동민, 윤화까지. 몸은 하나인데 도대체 어떻게 공평하게 관심을 배분할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거지?

“어우, 나 비행기 탈 때마다 너무 설레잖아-.”

서 팀장은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회사에서 탈출한 게 너무 기뻐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팀장님은 걱정 안 되시나 보네요.”

“뭔 걱정?”

“시초교 싫어하시잖아요. 지금 본거지 쳐들어가는 건데 아무렇지 않으세요?”

“17지구가 무슨 본거지야. 1지구쯤 돼야 내가 진짜 상층부를 터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지.”

“1지구에도 시초교 예배당이 있어요?”

“물론. 자기, 그 종교는 바퀴벌레나 다름없어. 아마 세상 끝나는 날까지 살아 있을걸? 자기도 신도가 되려면 이 정도 지식은 미리 알아 둬야 해. 안 그러면 신도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할 수도 있으니까.”

“잘 아시네요. 신도셨나 봐요?”

“어머, 앙큼해라. 은근히 나를 떠보네?”

의현과 서 팀장은 서로 한 마디도 안 졌다. 어떤 의미로 몹시 닮은 성격이었다. 매사 티격태격하긴 해도, 사실 의현은 서 팀장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숙소랑 이런 건 어떻게 됐어요? 브리핑 좀 해 주세요.”

“브리핑 같은 소리 하네. 정해진 거 없다고 했잖아.”

“잠은 자야 할 거 아니에요.”

“각성제 먹어, 자기야.”

“씻는 건 어디서 씻어요? 차 대관도 안 했는데.”

“거긴 시골이라 물이 맑아. 어디 계곡 앞에 텐트라도 치자.”

“미쳤어. 완전히 미친 사람들…….”

보통 사람이라면 농담이라고 여길 테지만, 의현은 서 팀장의 눈만 봐도 이게 진짠지 아닌지 딱 판단이 섰다. 저 즐거워 보이는 광적인 두 눈, 이건 분명히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었다.

“우리가 거짓을 등에 업고 잠입한다는 사실을 명심해.”

“…….”

“원래 즉흥적인 사기꾼이 무서운 법이야.”

“…….”

“우린 무섭게 가자고.”

서 팀장의 이런 면을 볼 때마다, 의현은 그녀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다. 적으로 두기 딱 싫은 타입이었다. 특히 뭐든 계획적인 의현에게 계획 없이 뇌를 빼고 행동하는 적은 항상 큰 어려움을 줬기 때문이다.

“저는 모르겠으니까, 팀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자기를 나에게 맡긴다니. 영광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 내 텐트로 은밀하게 와 주겠어?”

“진지하게 성희롱으로 신고하겠습니다.”

“얘기하겠다는 거야! 왜 이래! 내가 뭐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고 사는 줄 알아?!”

“완고한 거절은 수락의 의미를 함께 갖는다고 누가 말했던 것 같은데요.”

제대로 정곡을 찔린 서 팀장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시작했다. 커어어-. 요란스럽게 내는 소리가 어이없었다. 이 사람은 이따금씩 정신연령이 윤화보다도 어린 것 같이 보였다. 이런 사람을 믿고 조사를 나가도 되는 거겠지, 이렇게 아무 계획도 없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의현에겐 제법 큰 결심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17지구는 시골구석에 있어 전용 공항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15지구에서 내린 조사단은 목적지가 있는 17지구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이 근방에 딱 하나 있다는 15지구의 공항은 국가에서 공공 개발을 위해 건설했는데, 거의 화물 노선으로만 이용되고 있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정말 우리밖에 없는 것 같네요…….”

해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행정팀 팀장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일에 굳이 여기까지 내려오는 사람은 없겠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렇겠죠…….”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해수를 흘끔 쳐다보며 의현은 언제든 다시 말을 걸 타이밍을 쟀다. 그땐 감정이 앞서 찬찬히 대화해 보려던 계획이 실패했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해수와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17지구 근처에 숙소를 먼저 잡자. 어떻게든 자는 게 중요하니까.”

“숙소를 안 정했다는 말이 진짜였어요?”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캐리어 속에 텐트도 있어. 숙소 못 구하면 우리 진짜 계곡 옆에서 자야 해.”

사람은 많았으나 짐은 단출했다. 낡은 공항 밖 의자에 앉아 조사단은 예약해 둔 택시를 기다렸다. 이런 곳에 멀쩡히 다니는 택시가 있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시초교 예배당이 꽤 크게 있다고 했으니 신도들이 이동하기 위한 수단은 존재할 터였다.

“트럭 부르셨죠?”

“어머, 네! 저희예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트럭 하나가 덜컹거리며 의현의 앞에 섰다. 진흙 튀긴 자국이 여기저기 선명한 트럭은 한눈에 봐도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며칠 전에 돼지를 옮겨서 좀 더러울 수 있는데, 괜찮죠?”

“당연하죠! 저희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서 팀장은 넉살 좋게 웃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어디서 쿰쿰한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돼지를 옮기는 트럭이 원인인 모양이었다.

“지금, 저걸……?”

의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트럭을 손가락질했다. 분명히 택시 부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얼른 타! 이러다가 늦겠어!”

“…….”

“의현 학생! 자꾸 그렇게 뭉그적거리면 놓고 갈 거야!”

상황극이 시작됐다. 서 팀장은 의현을 놀리는 게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으며 먼저 트럭 뒤 칸에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나기는커녕 고분고분한 얼굴로 트럭 뒤로 올라갔다. 지금, 이 상황에 열이 받는 건 오로지 의현 혼자인 듯했다.

“미친…….”

인상이 찌푸려졌다. 트럭의 화물칸은 양옆이 온통 뚫려 있었다. 사람이 여기 타는 건 법적으로 걸리게 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이걸 신경 안 썼다.

“서 팀장님.”

“서 교수님이라고 불러야지, 의현 학생?”

“진짜 왜 이러세요.”

“시작부터 말아먹고 싶으면 의현 학생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무래도 대학원 진학은 어렵겠지?”

단어 하나하나가 달랐지만, 서 팀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뭐라도 얻고 싶으면 당장 올라타라. 의현은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사장님! 저희 다 탔어요! 번화가 쪽으로 출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떨어지면 콱 죽을 수도 있으니까, 꽉 잡으세요-.”

트럭은 엄청난 매연을 뿜으며 앞으로 나갔다. 뒤 칸 구석구석 돼지가 남긴 오물 같은 것들이 묻어 있어 절대 엉덩이를 대고 앉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운전을 도대체 어떻게 배워 먹은 건지, 트럭은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렸다.

“멀미, 멀미해요…….”

“지압 점 눌러 줄까? 세 시간은 가야 하는데?”

“이러고 세 시간을 가야 한다고요?”

“뭐 어쩔 수 없지. 돼지 냄새가 강하게 밸수록 그쪽 사람들은 더 안심할 테니까, 겸사겸사.”

예민하게 정신을 붙잡고 있다가는 줄줄 토하면서 갈 것 같았다. 그건 죽을 만큼 싫었다.

의현은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이라도 자야 했다. 코가 떨어져 나갈 듯이 냄새가 고약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슈퍼 하나만 달랑 있던 18지구에 비하면 17지구의 번화가는 꽤 컸다. 물론 여기서 크다는 건 상대성으로 그렇다는 거지, 정말 눈에 띌 정도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친절히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저희가 학교에서 연구비 지원을 많이 못 받아서요.”

서 팀장을 비롯한 팀장 몇 명이 빌빌거리며 트럭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숙소 관련해서 소개를 받은 듯했다.

물론 그때쯤 의현은 트럭 바닥에 거의 쓰러져 있었다. 누가 코를 도려낸 것처럼 이젠 돼지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냥 온몸에 힘이 없었다. 감히 뱃멀미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아 돌이 툭툭 튀어나온 바닥을, 트럭은 시속 100㎞의 속도로 쌩쌩 달렸다. 짐은 허공에 떴다가 바닥에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쨍한 소음을 냈다. 냄새는 최악, 시끄러운 데다가 멀미까지…….

“……괜찮으세요?”

바닥에 눌어붙은 의현의 곁으로 김해수가 다가왔다. 의현은 가까스로 눈을 치켜떴다.

“아니요…….”

“멀미에 약하신가 봐요.”

“멀미뿐인가요, 지금이?”

연수 땐 해수가 벌벌 떨었는데, 오늘은 의현이 축 늘어져 있는 상황이 좀 모순적이었다.

“손 이리로 줘 보세요.”

“왜요?”

의현의 반항적인 말투에 해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전의 일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상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정신계 능력자예요. 조금 편하게 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왜요?”

해수의 말을 듣고 보니 더 이해가 안 됐다. 의현은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사람 잘못 봤다면서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도 똑같다면서요?”

“…….”

“김해수 씨 나 싫어하잖아요. 내가 그거 하나 모를까요?”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딱딱하게 말하는 게 무슨 어린애 같았다. 해수는 힘주어 의현의 손을 잡아챘다.

“그래요! 싫어요! 짜증 나요!”

원래 감정이라는 건 상대가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쭈그러들기 마련이었다. 해수가 낸 큰 목소리에 의현은 도리어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아파서 빌빌거리는데 모른 척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면서?”

“…….”

“저도 의현 씨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신경 끄세요!”

차동민한테는 한 번도 이렇게 씩씩거린 적 없었으면서 의현이 한마디 했다고 왁왁대는 게 어이없었다. 아니, 내가 뭐 얼마나 뭐라고 했는데……?

넋 놓은 의현의 손을 꽉 쥐고 해수는 두 눈을 감았다. 정신계 능력자 중 서 팀장처럼 높은 급의 사람은 기억을 삭제하거나 없는 기억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했으나, 그 정도 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급이 낮아서 효과가 좋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죠.”

온몸에 혈관이 다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는데, 어디선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정확히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시원한 민트향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기분이었다.

“학생들! 얼른 내려와! 감사하게도 오늘 잘 곳을 구했으니까-.”

서 팀장의 목소리에 해수는 손을 떼고 먼저 트럭 아래로 뛰어내렸다. 돼지 트럭에 혼자 남은 의현은 작게 감탄하며 제 손을 만지작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