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민은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의현에게 건네주었다. 의현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1층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양이 너무 많았죠? 역시 두 명은 내려갔어야 했는데…….”
의현을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의현의 손에서 음료를 가지고 갔다. 넋이 나가 반응해야 할 타이밍을 놓친 의현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맛있게 드세요. 저는 잠깐만 쉬겠습니다.”
“잘 마실게! 고마워요-.”
방금 차동민과 했던 대화를 다시 짚어 볼 필요가 좀 있었다. 의현은 제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엎어졌다.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들쑤셔지는 인생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당황스러울 필요는 없었다.
‘의현아, 나 아직 너 좋아해.’
‘그래서 너한테 화 못 냈어. 화낼 수가 없어서.’
의현은 정말 한순간도 동민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친구 하지 마. 나도 안 할게.’
친구 안 하겠다고? 그러면 뭘 어떻게 할 건데?
아까는 너무 갑작스러워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느리게 생각해 보니 열이 뻗쳤다. 지금 의현이 어떤 상황인지 가장 잘 아는 게 동민이었다. 언제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달라고 하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고민거리를 하나 더 얹어 주는 게 어떻게 친구라고.
“개자식…….”
너는 진짜 친구도 아니야.
* * *
1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었다. 17지구 조사에 참여하게 되면 당분간은 그 주변에서 먹고 자는 걸 해결해야 했다. 의현은 백팩에 대충 짐을 싸 방구석에 던져 놓고 일찌감치 저택으로 출발했다. 정재이가 사라진 걸 확인한 이후에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아 내심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주말의 오후, 저택은 따스했다. 의현은 신발을 신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어딜 나간 건지 평소라면 떠들썩해야 할 거실이 온통 조용했다.
“……설마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죠?”
“시험이 끝났다고 하긴 했는데, 오늘 외출 일정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윤 기사는 의현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1층 찾아봐 주세요. 저는 2층 좀 올라가 볼 테니까.”
무슨 집 잃어버린 개처럼 계속 2층을 들락날락하게 되는 게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자존심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았다. 눈앞에 상자가 있다면 의현은 그걸 열고 안을 확인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익숙한 방문 앞에서 의현의 심장은 크게 뛰었다. 요 며칠 동안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 없었는데, 정말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은 전에 봤던 그 모습에서 토씨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
의현은 방 안에 들어가 책상 서랍을 뒤졌다. 아무도 모르게 적은 쪽지 같은 거 없어? 일기도 안 써? 너는 어디에 감정을 표출하거나 그런 것도 없어? 미친 사람처럼 정재이의 방을 뒤졌지만,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얜 심지어 교과서에조차 필기가 하나도 없었다.
의현은 제가 무슨 귀신에 홀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몇 년간 정재이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살았건만, 지금 와서 보니 그 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정재이가 좋아하는 장소, 가장 친한 친구, 하다못해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몰랐다. 권의현은 정말 정재이의 껍데기와 함께 시간만 보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받는다고 자만하고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허망했다. 의현은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 그대로 옆으로 힘없이 툭 쓰러졌다. 바닥에 깔린 보드라운 러그에서는 정재이가 자주 뿌리는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안 되겠어…….”
의현은 자비롭지 못했다. 마음이 넓은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냥 정재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의현은 시초교 조사가 끝나고 올라오는 대로 권중섭에게 정재이의 상황을 말하고, 공권력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죽도록 얻어맞는다거나, 싸잡아서 어딘가에 수감할 수도 있다는 건 다음에 생각하자……. 일단 정재이라는 그 폭탄 덩어리를 수거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도련님! 다들 옥상에 있습니다!”
윤 기사는 요란스럽게 방문을 열다가, 바닥에 멍청하게 누워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의현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침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재이 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시는 거군요…….”
“마음 굳혔으니까 이제 괜찮습니다.”
“마음이요?”
“네, 신고하려고요.”
“좋은 생각이세요! 장관님도 분명 큰 도움을 주실 겁니다!”
권중섭을 믿는 윤 기사의 눈이 신뢰로 반짝였다. 그런 윤 기사의 앞에서 며칠 전 권중섭이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잠깐 사악한 마음이 들었지만, 의현은 애써 감정을 삼켰다.
“그런데 윤 기사님, 아무한테도 말 안 하신 거 맞죠?”
“네! 당연합니다!”
“그럼 됐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건 제 몫이니까, 괜히 앞서서 이 일에 대해 언급 안 하셨으면 해요.”
윤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현은 새하얀 방 천장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다들 옥상에서 뭘 하는데요?”
“시험이 끝나서 기념으로 파티를 한다는군요! 옥상에 있는 풀장에 물도 받아 놨다고 하니, 도련님도 옷 갈아입고 같이 노시죠!”
처음 건물 올릴 때를 제외하면 의현은 옥상에 올라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예쁘게 꾸며져 있긴 했어도 굳이 거기까지 올라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윤화 얼굴만 보고 갈 겁니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2층 중간에 있었다.
의현이 슬리퍼를 끌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자, 웃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첨벙대는 소리, 여러 명의 안정적인 목소리, 그 기저에 깔린 유쾌한 재즈 음악마저도 영화 같았다.
“어머, 오빠!”
파라솔 아래 선 베드에 누워 있던 은영이 가장 먼저 의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웬일이에요? 장관님께서 오빠 당분간 바빠서 못 올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한 달은 못 볼 줄 알았죠?”
“바쁘긴 해. 그냥 윤화 얼굴이나 보려고.”
“어휴, 안 그래도 윤화가 얼마나 서운해했는지 몰라요. 재이 없으니까 저택에 안 온다고, 오빠가 재이만 좋아하는 것 같대요.”
은영은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윤화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가만히 들으면서 의현은 제가 며칠간 정재이고 뭐고 정신 팔려서 윤화에게 좀 무심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윤화는 어딨는데?”
“어딨긴요.”
은영이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뭔가 의현의 등을 확 끌어안았다.
“형-!”
의현은 제 등이 천천히 젖어 감을 느꼈다. 차가운 몸의 온도, 해맑은 목소리. 아주 멀리서 듣더라도 윤화임을 알아챌 자신이 있었다.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안 놀랐지?”
“놀라긴 했어. 조금이지만.”
윤화의 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커다란 물안경이 매달려 있었다. 색은 또 엄청 샛노래서 눈에 확 띄었다. 윤화는 참으로 다채로운 존재였다.
“갑자기 와서 깜짝 놀랐어! 왜 온 거야?”
까무잡잡한 손이 이번엔 의현의 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왜 오긴, 너 보러 온 거야.”
“……정말?”
“형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
물론 이 말도 거짓말이었으나, 윤화는 감동한 얼굴로 의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깐 등이었는데, 이번엔 앞판도 다 젖은 의현은 그냥 해탈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 자고 가는 거야?!”
“얘기가 왜 그렇게 튀지? 자고 간다고 한 적 없는데?”
“형 젖으면 안 되지? 갈아입을 옷 없지?”
“뭐? 당연하지.”
헤헤-. 의현의 대답을 듣자마자 윤화는 수상한 표정으로 의현의 손을 잡은 채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갑자기 마주한 물의 시원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야!”
애들 노는 수영장이라 수심이 깊지 않아도 갑자기 빠진 탓에 입고 있던 옷이 전부 젖었다. 의현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큰소리쳤다.
“형아 갈아입을 옷 없어서 자고 가야겠다.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던 게 아니잖아! 네가 빠트린 거잖아!”
윤화는 물 위에 둥둥 뜬 채로 의현을 향해 헤죽 웃어 보였다. 웃을 때마다 인디언 보조개로 인해 눈이 반으로 휘었다. 한때는 저게 특이하고 귀엽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오늘은 저 볼을 콱 옆으로 잡아 당겨 버리고 싶었다.
“이게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막 나오네?”
“나 귀여워?”
그 말에 귀엽긴 하다고 말할 뻔했다. 의현은 얼른 수영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옷에서 물이 주르륵 흘렀다. 셔츠의 물을 꾹꾹 짜내자, 이 꼴을 웃으며 관람하고 있던 윤 기사가 얼른 샤워 가운을 들고 다가왔다.
“수영복을 준비할까요? 도련님, 같이 노시죠.”
“됐습니다.”
의현은 한사코 이 수영장에서 물장구나 치고 놀 생각이 없었다. 윤화가 노는 걸 구경하면 구경했지.
“형, 화났어……?”
혼자 물장구치던 윤화는 금세 의현이 앉은 벤치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무리 같이 놀려는 의도였어도 사람을 갑자기 물에 빠트린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위험할 수 있지?”
“응…….”
“허락도 안 받고 손부터 잡아끌면 안 되는 거지?”
“응…….”
“윤화 네가 잘못했으면 형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의현은 제법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윤화는 장난기가 많아 이런 식으로 엄하게 훈육하지 않으면 또 어디서든 이런 행동을 할 위험이 있었다.
“미안해…….”
“씁, 어른한테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의현이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윤화의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졌다. 얜 아직 어려서 이게 굉장한 고난과 시련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무너지며 동그란 눈에서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약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의현은 윤화에겐 너무 물렀다.
“속상해? 왜 울어.”
“속상해…….”
“윤화 네가 다른 데서도 그럴까 봐, 형이 혼낸 거야. 이리로 와 봐.”
의현은 양손을 벌렸다. 훌쩍거리고 울던 윤화는 금세 의현의 품에 파고들었다. 까맣고 빨갛고 노란, 착하고 귀여운 생명체.
“오늘 자고 갈게, 뚝 해.”
“정말?”
“형이 여기 잘 못 오는 건, 윤화가 싫거나 재이가 좋거나 그래서가 아니야. 그냥, 형이 바빠서 그래.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응…….”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알겠지?”
의현답지 않게 다정한 말투였다. 윤화는 제 얼굴을 의현의 목덜미에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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