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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64화 (64/185)

64화.

물론 권의현이라는 사람의 외모만 두고 봤을 땐, 방탕이라는 단어가 잘 안 어울리긴 했다. 새까만 직모에 깔끔하게 올린 앞머리, 목까지 채운 단추에, 각 잡힌 셔츠, 팔목에 걸린 메탈 시계 따위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고지식한 사람인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잘생겼지만 여자를 한 트럭 몰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은 점, 바로 이 점이 아이러니하게 여자를 환장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자기는 연애를 한 번도 안 해 본 거야?”

“공적인 일에 사적인 부분 안 끌고 들어오셨으면 좋겠는데요.”

“미안한데, 말 안 해도 알겠어. 애인은 없었을 것 같네. 그럼 누굴 진심으로 좋아한 적은 있었어?”

“김해수 정보요, 서 팀장님.”

제 주변 사람들은 왜 자꾸 이런 거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고, 의현은 생각했다. 이상형이든 연애 경험이든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뭐 꼭 경험해야 하는 일도 아니잖아.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자기가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성적으로 동한 적이 있었나에 대해 답을 해 줘. 그럼 나도 김해수에 대해 내가 조사한 걸 말해 줄게.”

“이건 애초에 미행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었어요. 이제 와 말을 바꾸는 게 어디 있습니까?”

“억울하면 계약 파기해. 어차피 날도 다 새운 거. 난 말해 줘도 그만, 안 해 줘도 그만이야. 지금 아쉬운 게 누굴까?”

의현은 심히 불만스러운 듯 보였다. 찌푸려진 미간과 슬쩍 깨문 입술만 봐도 감정 변화가 훤히 읽혔다. 서 팀장은 히죽 웃으며 팔짱을 끼고 섰다. 원체 똑똑한 사람이니, 이런 부분에서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인지에 대한 판단은 빠르게 설 것이다.

“……성적으로 동한 적 없습니다.”

“한 번도?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사람이 무슨 동물이에요? 다 본능에 따라서 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야한 꿈도 한 번 안 꿨어? 현실에선 이성이 억누른다고 해도, 자기의 무의식은 안 그럴 수도 있잖아.”

“무슨 소립니까? 당연히 그런 꿈은…….”

반박하려는 의현의 머릿속에서 일순간 예전에 꿨던 꿈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너무하네. 취향대로 입혀서 꿈에 등장시킨 건 형이면서.’

‘근데 나도 좀 흥분된다.’

‘그럼 입이라도 맞춰 볼까요?’

……아니야. 꺼져. 제발.

“꿈은?”

“그런 꿈 꾼 적 없습니다.”

머리를 통째로 씻어 버리고 싶었다. 현실도 아니고, 꿈에서 본 장면들이 현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표정을 싹 굳히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의현의 얼굴에서 어쩐지 짜증스러움이 느껴졌다.

“완고한 거절은 수락의 의미를 함께 갖는다는 거, 우리 순진한 자기가 알까 몰라-.”

“김해수 정보요.”

“어우, 알겠어! 알겠어! 고지식해서 무슨 말이 안 통해!”

서 팀장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름 김해수, 나이 스물세 살, 행정 1팀 소속이야. 능력은 정신계, 급수는 C. 자기랑 같이 들어온 연수원 동기. 1지구 출신.”

서 팀장은 자기가 조사해 온 정보를 줄줄 읊었다. 개중엔 의현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도, 오늘 처음 듣는 정보도 있었다. 스물세 살이라니, 얼굴만 보면 동생이라도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의현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많았다.

“C등급이 1팀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흔한가요?”

“흔하진 않지.”

“그럼 C등급이 이번 조사에 참여하는 건요? 이게 일반적인가요?”

“일반적이진 않고.”

“그럼 너무 이상한데요.”

“그래, 이상하지.”

어린애들 장난치듯 비슷비슷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김해수와의 일은 지난 연수 때 끝낸 줄 알았건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김해수, 김해수……. 어쩐지 날카롭게 들리는 단어를 입 안으로 굴리며 의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상부에 뒷배가 있는 거 아닐까요?”

“상부에 뒷배 제대로 둔 건 의현 씨 자기인데? 자긴 장관을 등에 업었잖아. 1팀에 꽂아 넣으려면 그 비슷한 급이어야 해. 특히 1팀 배정은 정예라서 인사팀이 무작위로 막 배정하고 그럴 수 없어.”

“1지구 출신이라면서요. 장관급이 하나 없을까요?”

“그 정도면 입사 때 소문 다 났을 텐데, 조용한 게 이상하지.”

서 팀장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확실히 뒷배가 저 정도로 급이 높은 사람이라면 알려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왜 김해수와 관련된 건 다 이상할까요?”

의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파악이 잘…….”

“응.”

“……파악이 잘 안 돼요.”

이상하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에 서 팀장은 마시고 있던 생수병을 구겼다. 빠작! 플라스틱 병이 구겨지며 흉악한 소리를 냈다.

“맙소사! 싸가지 없는 고고한 도련님이 알고 보니 순진한 것도 모자라, 내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한다? 이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완벽한 설정이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좀 괜찮다 싶으면 금세 또 말이 안 통한다. 의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팀장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와줄게, 내가.”

“뭘요?”

“김해수, 뒤 캐려는 거잖아.”

“그걸 서 팀장님이 왜요?”

의현은 매사 이유를 따져 물었다. 가끔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도 선을 행한다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서 팀장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왜냐니, 이상하잖아. 말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 지금!”

“…….”

“난 이상한 거 좋아해!”

“네. 그래 보이네요.”

“뭐?”

“그럼 앞으로 저 도와주세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자마자, 의현은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도움을 수락했다.

“……뭐야? 약간 열받는데?”

“수고하세요.”

팀장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의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잘 먹고 잘 놀았는지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반들반들했다.

“어이없어. 내가 왜 자꾸 이러지……?”

서 팀장은 작게 중얼거리며, 오늘의 업무를 시작했다.

* * *

호텔 방도 뺐겠다, 이젠 정말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일부러 야근을 자처한 의현은 자정이 넘어서 겨우 퇴근했다. 이 미친 회사가 정도라는 걸 몰랐다. 야근하겠다고 말한 게 날짜가 바뀔 때까지 사람을 굴리라는 말은 아닐 텐데.

“…….”

현관 앞에서 의현은 뭘 잘못해 쫓겨난 어린애처럼 한참을 고민했다. 권중섭이 집에 와 있다는 얘길 들은 후였다. 이 기분을 뭐라고 형용할 수 있을까. 의현은 한참 고민했다.

지저분한 벌레를 상자에 넣어 두고,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면서도 손을 넣어야 하는 기분? 대충 그 비슷했다.

의현은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곧 현관문을 열었다. 키퍼들이 모두 퇴근한 집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차분히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불이 켜진 복도를 걸어 넓게 펼쳐진 거실로 나오자.

“늦었구나.”

소파에 앉아 있던 권중섭이 고개를 돌렸다.

“…….”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안 나온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의현은 아무 말도 뱉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그 와중에 다행스러웠던 건 원래 놀라도 표정에 큰 변화가 없다는 거였다.

“바쁜 일은 해결된 줄로 아는데, 여전히 할 일이 많은가 보구나.”

“……네. 며칠 쉬는 동안 잔업이 좀 밀려서요.”

아직 안 주무셨냐는 상투적인 얘기를 해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잔업……. 그래, 뭐든 열심히 살면 안 좋을 게 없지. 어떻게든 양분이 되기 마련이란다.”

언젠 죽일 듯이 위압감으로 짓누르다가 갑자기 자상한 아버지인 척하다니. 도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주무세요.”

“의현아.”

돌아서는 의현을 권중섭이 한 번 더 불러 세웠다. 짧은 이름 세 글자에 의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저택에 방문했는데, 정재이라는 애가 사라졌다더라. 그 얘기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틀림없이…….

“사람은 때때로 호기심에 눈이 멀곤 한다.”

“…….”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걸,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한다지?”

“…….”

“나는 네가 운명대로 살길 바란다.”

명확한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다. 아니, 그냥 문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가 빠져 있었다. 흔해 빠진 비유가 덕지덕지 묻은 권중섭의 말은 의현의 감정을 일렁이게 하기에 딱 좋았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제 운명은 뭔가요?”

되물을 줄 몰랐다는 듯 권중섭은 눈썹을 크게 들썩였다.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전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거든요.”

요즘 의현의 삶을 압축한 하나의 문장이었다.

“으하하-!”

소파에 앉아 거만하게 양주를 마시던 권중섭은 의현의 말이 재밌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조용하기만 하던 집 안이 마치 크게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의현은 입을 꾹 다물고 권중섭을 쳐다보았다. 그래, 정말 궁금하다. 알면 말 좀 해 줄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요즘 네가 정말 크게 변했다고 느낀다.”

“제가요?”

“그래. 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변화시키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지.”

“…….”

“네 운명이 궁금하다고 했지?”

“…….”

“그게 그렇게 알고 싶으냐?”

“네.”

권중섭은 마시고 있던 양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독한 술 냄새가 의현이 있는 곳까지 진하게 퍼졌다.

“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쫓다가, 단명할 거다.”

“…….”

“그리고 나는 죽은 네 무덤 앞에 서서,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겠지.”

“…….”

“의현아, 위험한 사상에 물들지 마라.”

“…….”

“이게 내가 너한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란다.”

전신에서 힘이 탁 풀렸다. 권의현이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상실감.

이게 과연 권중섭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인가 싶었다. 수감 시설 들어갔을 때 다 끝난 감정 아니었나? 더 실망할 게 남았어?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평생 기억할게요.”

의현은 곧바로 몸을 틀어 제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닫고 어둠 속에 제 모습을 숨기자마자 답답하게 참고 있던 숨이 터졌다. 헉, 허억, 허억……. 문에 기대어 있던 등이 바닥으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한 것이 없어도, 사람은 실망이란 걸 하는구나. 실망을…….

귀에서 이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살고자, 혹은 죽고자 흙바닥을 맨손으로 긁으며 부단히 노력했건만,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 실패다! 이번에도 실패야! 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가엾게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김태원.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정재이.

‘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쫓다가, 단명할 거다.’

권중섭.

“…….”

계속 그따위로 굴어 봐.

그래도,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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