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또 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던 서 팀장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의현은 방에 처박혀 호텔 TV로 종일 영화나 봤다. 무료하고 알찬 시간의 연속이었다. 오래 누워 있으면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돼 그건 좀 신선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시간은 훌훌 잘 갔다. 물론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의현은 명품 선물을 사 들고 재이의 학교에 방문해 담임과 한 시간 동안이나 면담을 했다.
면담은 사실 정재이보단 권의현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차라리 그렇게 노선이 꺾인 게 다행스러웠다. 쉰이 넘은 정재이의 담임은 의현에게 자기가 아는 여자들 얘기를 꺼내며 시간 있으면 만나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시간이 없던 의현은 도저히 뺄 시간이 없다고 호소했다. 한 시간 내내 그 패턴을 반복했다. 담임은 의현에게 여자 소개 얘기나 권중섭의 대선 출마 얘기를 해 댔고, 의현은 영혼 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렇게 시달리고 교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울컥 빡침이 올라왔다. 누구 비위 맞춰 가며 산 적이 없었는데, 정재이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살게 된 게 열받았다. 의현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정재이한테 욕이 가득한 문자를 썼다가 금세 이성을 되찾고 지웠다.
나빴다가 착했다가, 감정이 짧은 시간 동안 널뛰기를 해 의현 본인도 혼란스러운 요즘이었다.
[결석 60일 넘으면 유급이래. 오늘 너네 담임 선생님 만나고 왔어. 네 얼굴 도심에 전광판으로 걸리는 꼴 보기 싫으면 얼른 연락해.]
의현은 차분히 협박성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호텔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 놓고 진심으로 전광판 광고 시세를 알아봤다. 정재이가 어디서 얼굴 들고 못 다니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렇게 실현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정재이 가출 사실을 권중섭이 알았을 때의 파장이었다.
김철춘 일로 안 그래도 의현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 권중섭은 사활을 걸었는데, 후원회 소속 정재이가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절대 안 돼, 눈 돌아갈 게 분명해.”
이 소식이 매스컴을 타기 전에 정재이를 찾아서 어딘가에 처넣으려고 할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정신 병원 같은 곳. 의현은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집중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이런 날이 언제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의현은 침대 위에서 바르작거리다가 룸서비스를 시켜 먹고 다시 잤다. 좋은 꿈을 꾸고 싶었는데,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또 개 같은 꿈을 꿨다. 의현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는 꿈이었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복수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죽인 사람이 바로 권의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의현은 악 소리치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반쯤 열어 놓은 커튼 사이로 불 꺼진 채 잠든 도시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너 때문에 악몽 꿨어. 나한테 이래 놓고 너 혼자 잘 자고 있으면 진짜 억울해.]
의현은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다시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는 일방적인 문자를 무슨 일기처럼 적고 있었다. 몇 개 더 보내면서 너도 악몽 꾸라고 악담을 퍼부으려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끔찍한 적막이었다. 의현은 다시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차라리 평소처럼 바쁘게 일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휴일이었다.
* * *
재출근 날의 아침이 밝았다. 의현은 호텔에서 방을 뺐다. 정든 건 TV 하나밖에 없었다. 요즘 틈틈이 챙겨 보던 아침 드라마와도 작별이었다. 의현의 출근 시간에 방송되는 아침 드라마는 한 편에 기승전결이 다 나오고도 또 다음 편에서 기승전결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대단한 구성이 아닐 수 없었다.
사원증을 찍고 회사에 들어감과 동시에 모든 직원의 이목이 쏠렸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들렸다. 의현은 엘리베이터 층을 누르고 팔짱을 낀 채 앞만 응시했다. 같은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은 의현을 의식한 듯 이번엔 비정상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아마 의현이 내리고 나면 금세 떠들기 시작하겠지.
“……좋은 아침이에요……. 의현 씨…….”
“네. 유 대리님도요. 일찍 출근하셨네요.”
“퇴근을 못 한 거긴 한데……. 뭐 의현 씨 말도 맞네요.”
“퇴근을 못 하셨다고요?”
“일이 많아서요. 하하…….”
설마 내가 일주일 빠져서 다른 사람들이 대신 일한 건가?
찝찝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찝찝한 건, 이게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정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서였다.
“의현 씨, 오늘 출근했네……. 안녕…….”
“의현 씨, 드디어…….”
출근을 위해 줄줄 들어오는 직원들은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이 상황이 웃겼다. 회사의 다른 팀 사람들은 의현의 뒷얘길 하면서 욕하기 바빴는데, 정작 같이 일하는 현장 1팀 직원들은 의현의 출근을 몹시 반기고 있다니. 제법 모순적이었다.
“이런 게 고위 공무원이라니 도대체…….”
정말 말이 안 됐다. 괴물과 싸워 용감하게 이기고 시민들을 구해 주는 영웅적인 헌터를 그린 미디어를 싹 지우고 헌터의 현실을 다시 조명해야 했다.
의현은 자리에 앉아 제 컴퓨터를 켰다. 또 일이 얼마나 많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 의현 씨. 팀장실로 좀 가 봐야겠는데.”
“왜요?”
“서 팀장님께서 의현 씨 출근하면 바로 팀장실로 오라고 하시더라고.”
“그 얘길 왜…….”
왜 유 대리님께 했냐고 물으려던 의현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웃는 유 대리의 표정에서 스스로 답을 찾았다.
“지금 다녀올게요.”
“응, 화이팅…….”
유 대리는 허공으로 손을 들어 반짝반짝 흔들었다. 생기가 전혀 없는 눈동자를 보니 저절로 동정심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호텔에서 일주일이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니……. 역시 행복은 지나고 나서야 아는 법이었다.
팀장실은 반쯤 문이 열려 있었다. 불이 꺼져 음산한 기운이 맴돌았지만, 의현은 예의를 차리면 두 번 노크했다.
“권의현입니다. 저 부르셨다고 들어서요.”
“으으…….”
안에선 낯선 신음이 들렸다. 의현은 표정을 싹 굳히고 자리에 가만히 섰다. 이걸 들어가도 되는 건지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았다.
“들어와…….”
서 팀장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의현은 찜찜한 기분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 위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고 있던 서 팀장이 누운 채로 손만 휘적거렸다.
“앉아, 자기…….”
“팀장님도 퇴근 못 하셨어요?”
“뭐, 그렇지…….”
웬일로 기운이 없는 목소리였다. 의현은 하도 많이 자 다크서클이 싹 없어진 제 눈 밑을 슬쩍 문지르곤 소파에 앉아 서 팀장을 쳐다보았다.
“나 며칠 못 잤냐고 물어봐 줘…….”
“며칠 못 주무셨는데요.”
“나 그날 자기 호텔 갔다 온 이후부터 한숨도 못 잤어……. 퇴근을 못 했거든.”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이 닷새나 못 자고 일해야 할 상황이라 하면 오직 각성제를 먹고 외근 나갔을 때뿐이었다.
“그렇게까지 일이 많은 이유가 뭔데요, 뭐 어디서 떼거리로 포탈이라도 열렸어요?”
“그래, 자기 말이 맞아…….”
“네?”
“떼거리로 포탈 열려서 비상이었어…….”
할 말이 없었다. 포탈이 그렇게 한꺼번에 열렸던 적은 과거 포탈이라는 게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와 1월 13일 정재이가 세상을 망하게 한 날밖에는 없었다.
“혹시, 무슨…….”
의현은 초조하게 제 손바닥을 문질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주어가 없으니 그게 누굴 얘기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서 팀장은 눈치껏 알아들었다.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 그래도 큰 포탈은 없어서 현장팀 직원들 죄다 파견시켰더니 어떻게든 마무리됐어. 다들 며칠 못 자긴 했지만.”
“이런 상황인데도 저한테는 아무 연락도 안 왔어요.”
“남은 인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으니까 연락 안 했을 거야. 내가 말했잖아. 자긴 지금 잊혀야 하는 입장이라니까? 상부도 자존심이 있는데 고작 이깟 일로 나와 달라고 사정을 하겠어?”
그놈의 자존심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사람들 눈치 보고 자존심 챙기느라 S급 인력에게 아무 연락도 안 했다는 사실이 어이없었다.
“그럼 포탈 문제는 다 해결이 된 건가요?”
“칠십 퍼센트쯤은. 나머지는 이제 처리팀이랑 과학 수사팀이랑 협업해서 어찌어찌 흘러가겠지.”
갑자기 사라진 정재이와 비정상적으로 증식한 포탈의 상관관계에 대해 의현은 제법 골몰했다. 이게 연관이 없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재이는 능력을 쓸 줄 몰랐는데…….
“오, 표정 섹시한데?”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진심이었는데……. 뭐 알겠어.”
의현의 까칠한 반응에 서 팀장은 입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요를 대충 구석에 처박아 놓은 서 팀장이 제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돌아왔다.
“전에 말했던 김해수.”
“…….”
“얘 맞지?”
톡톡, 서 팀장은 가볍게 손가락으로 종이를 두드렸다. 거기엔 무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찍은 김해수의 증명사진이 인쇄돼 있었다.
“예쁘장하게 생겼던데, 혹시 남자가 취향이었던 거야? 아니면 성별 상관없이 양쪽 다 가능한 건가? 자길 애정하는 입장에서 이왕이면 난 후자에 가능성을 더 두고 싶은데.”
대답 없이 종이만 빤히 쳐다보던 의현은 서 팀장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고작 사진 한 장이 전부는 아니겠죠?”
“자기가 정확히 뭘 알아봐 달라고 했는지 몰라서, 많이는 준비 못 했어.”
“다른 건 뭔데요?”
“부탁하는 처지에 너무 오만한 태도 아니야? 난 닷새 밤을 새우면서까지 이 자료를 준비했다고. 양심이 있으면 좀 고분고분 예쁘게 굴어야 하는 거 아닐까?”
서 팀장은 소파 손잡이 부근에 걸터앉아 느끼한 표정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의현은 표정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사 내 성희롱으로 신고하겠습니다.”
“뭐?!”
“진심으로 저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습관처럼 추파 던지지 마세요. 유쾌하지 않으니까.”
“정신계 능력자도 아니면서 자기가 내 진심을 어떻게 아는데?”
서 팀장이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의현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한테 누가 그래요?”
그 순진한 대답에, 서 팀장은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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