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사람이 어떻게 무너지든, 아침은 오는 법이다.
의현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상부에선 아픈 곳이 없더라도 며칠 쉬면서 경과를 좀 지켜보라고 했다. 뜻밖의 휴가였다. 햇살이 따사로워 의현은 일어나 암막 커튼을 치고 다시 잠들었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계속 잠이 쏟아졌다. 의현이 눈을 뜬 건,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프런트입니다. 체크아웃 시간이 지났는데 퇴실을 안 하셔서요.
“아, 죄송합니다. 잠들어서 시간을 몰랐네요.”
의현은 객실 전화기 옆에 놓인 시계로 흘끔 시간을 확인했다. 3:05 pm.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혹시 기간 연장할 수 있나요? 대충 한 일주일 정도.”
―당일 연장은 좀 어려울 수 있는데,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혹시 이 방이 예약되어 있다면 다른 방으로 주셔도 됩니다.”
―네. 관련 사항 확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는 금방 끊겼다. 의현은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막 커튼이 쳐져 있는 방은 지독하게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창가까지 걸어가 커튼을 걷고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머리 깨질 것 같네…….”
와인 까서 들이붓던 것만 명확히 생각났다. 의현은 제가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알코올의 힘에 취해 무슨 사고라도 쳤으리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목이 칼칼해 생수 뚜껑을 따 벌컥벌컥 마시고 칫솔을 입에 물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양치질을 하는데, 객실 전화기가 울렸다.
―프런트입니다. 확인 결과 예약이 가능해서 말씀드리려고요.
“네.”
―오늘로부터 일주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사용하시는 방으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방으로 변경하시겠어요?
“이 방이요.”
―일단 예약은 잡아 두었습니다. 선결제이니, 준비되시는 대로 내려와서 결제 먼저 해 주시겠어요?
“네. 씻고 바로 내려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전형적인 내용이었다. 의현은 칫솔을 문 채로 웅얼웅얼 답변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욕실로 달려가 거품을 뱉었다.
확실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평소의 권의현이라면 하지 않을.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길게 방을 잡아 외박한 적이 없었기에, 어쩐지 일탈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권중섭은 어떻게 생각할까? 위험한 사상에 물들어 이제 외박까지 한다고 생각할까? 어쩌면 집에 안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예 모를 수도 있어.
의현은 욕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도 결과가 더 안 좋아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더 고민하는 대신,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죽어라 고민한다고 해도 해결되는 건 없었다. 머리 터지게 생각해서 온 결과물이 이거였다. 정재이 가출에 권중섭에게 사상 검증당하기.
그래서 의현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 일주일만큼은.
* * *
이렇게까지 방에 처박혀 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하다못해 호텔 수영장이나 식당도 이용하지 않고 죽은 듯이 방에만 누워 있던 의현은 룸 클리닝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옷을 껴입고 1층 로비로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생기가 가득했다. 하하 호호 웃으며 로비에서 애정을 나누는 사람들을 의현은 버석버석 건조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밖에서 대충 사 입은 셔츠는 헐렁했다. 의현은 창가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았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괜히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저기, 혹시 혼자 오셨어요?”
여자 목소리였다. 빨대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의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어머, 저도 혼자 왔는데. 같이 놀래요?”
“유감이네요. 저는 혼자 있고 싶어서.”
“너무 그러지 말고. 좀 어때요?”
여자는 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의현은 여전히 창밖만 쳐다본 채 대꾸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
“아쉬워라-. 정말 같이 놀고 싶었는데.”
“…….”
“그래도 여자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한 번은 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좀 너무하지 않아요? 성격 진짜 별로야-.”
여자의 목소리 톤이 슬슬 바뀌었다. 이건 분명 의현이 아는 목소리였다.
“한가롭게 고급 호텔에 처박혀서 사색이나 하고 있다니.”
“…….”
“이게 무슨 개 같은 호사야?”
“…….”
“이럼 내가 속상하지 않겠어, 자기?”
의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뒤를 돌았다. 빨간색 선글라스를 벗으며 머리를 산발한 서 팀장이 헤죽 웃었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이 여자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난 뒤에도 눈이 달렸어. 그러니 날 속여 먹을 생각은 마.”
당황한 의현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서 팀장은 빈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당당하게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요.
“체리콕 한 잔, 눈이 돌아갈 정도로 시원하게 부탁해요.”
웨이터는 허리를 숙이고 금세 자리를 떴다.
“설마 헌터부에서 미행 붙였어요? 내가 김철춘 죽였다고?”
“좋은 얘기 안 나오긴 하지. 회사 뒤숭숭한 거 알지?”
“그게 제 탓이에요? 상부에서도 다 허가 떨어진 일이었어요.”
“자긴 똑똑하니까 잘 알 거야. 남 눈에 띄는 게 절대로 좋은 일 아니라는 거. 걸어 다닐 때도 봐. 땅바닥에 뭐 툭 튀어나와 있으면 제일 먼저 발에 치이잖아.”
“그럼 현장팀 직원들 떼죽음 당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여요? 그게 맞는 거예요?”
억울해 죽겠다는 듯 항변하는 의현을 가만히 쳐다보는 서 팀장의 표정이 묘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자기가 틀렸다고 타박하는 것처럼 보여?”
“그럼 아닌가요?”
“어머, 유감-. 난 자기 방식이 틀렸다고 타박하려는 게 아니야. 상황이 안타깝다는 거지.”
“…….”
“내가 왜 모르겠어, 의현 씨 판단력.”
“…….”
“자기는 분명 똑똑한 선택을 했겠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멍청하고 아둔한 상사들이 쪼아 대니까 얼마나 빡쳐. 이해해. 지들은 현장도 안 뛰고 책상머리에 앉아 펜이나 잡아 대면서, 허가한 일에 이제 와서 왜 딴지를 거냔 말이야. 그런 새끼들은 저 케사디안 광장에 묶어 놓고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아야 해. 나라에 도움이 안 되잖아. 그러면 죽어야지 뭐-.”
서 팀장은 태연한 얼굴로 마치 노래 부르듯 흥얼거렸다. 하지만 완성된 문장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주문받은 체리콕을 들고 이쪽으로 오던 웨이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팀장을 바라보았다.
“전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는데요.”
“아니, 여기서 갑자기 선을 긋네?”
“오늘 왜 오셨어요. 시답지 않은 말장난이나 치러 오신 거 아니잖아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웨이터는 의현이 말을 건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체리콕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사라졌다. 저 웨이터, 아마 다음 주문부터는 절대 이 테이블에 오지 않을 것이다.
“시초교 조사 보고서 올린 거 이번 주 내에 승인 떨어질 것 같아.”
“벌써요? 올해 말이나 가능하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자기가 사고 치기 전이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
“도대체 뭐가요?”
김철춘 없앤 게 도대체 뭐라고 일상이 온통 뒤집힌 의현은 반발했다. 서 팀장은 여유롭게 체리콕을 원샷했다. 꿀꺽꿀꺽, 탄산이 들어가 목이 따가울 법도 한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순식간에 한 잔을 다 비워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는 어수선한 일 때문에 분위기 흐려지는 게 싫은 거야.”
장식용으로 올려져 있던 생체리와 민트 잎을 우물우물 씹던 서 팀장이 퉤 씨를 뱉어 냈다. 의현은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조용해질 때까지 자길 눈앞에서 치울 기회잖아, 시초교 조사는.”
“언젠 인력이 필요하다면서요.”
“인력 좋지. 그래서 자길 매일 굴리는 거잖아.”
“그런데, 날 치워 버리겠다고요?”
“영영 그러겠다는 게 아니야. 머리도 좋은 사람이 왜 이런 부분에서는 항상 순진할까-?”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툰 의현이 인간관계의 가장 추악한 부분을 빠르게 캐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평생 이슈 메이커로 살 수는 없어. 자기가 권중섭 장관 아들이고, S급이고, 최근 외근에서 좀 지저분한 일이 있었더라도 그런 것들 사람들 입에 한 번 오르내리고 나면 잊히는 거 금방이야. 회사는 그걸 노리는 거지. 잊히는 거.”
조금 전에 말했던 ‘눈앞에서 치워 버린다’의 뜻을 이해하게 된 의현은 한숨 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금방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 내일은 또 내일의 이슈가 있기 마련이거든.”
“답이 없네요.”
“그래도 찾아야지, 뭐.”
“이 얘기 하려고 오신 거예요?”
“맞아. 여기서 한 일주일 쉬다가 바로 조사 나가면 재밌을 거야. 몸 굳지 않게 관리 열심히 하라고 말해 주려고.”
“그런 건 전화로 알려 주셔도 됐을 텐데요.”
“나 차단해 놨잖아. 서른 번을 넘게 했는데, 한 번도 안 받던데?”
의현은 제가 외근 내려가던 날 밤, 서 팀장의 번호를 차단해 놨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는데요?”
“그게 그렇게 궁금해?”
“네.”
“좋아! 나 차단한 거랑 퉁치자. 난 자기 미행했거든.”
“뭐라고요?”
헌터부에서 미행 붙였냐는 말은 반쯤 허구를 섞은 거였는데, 그게 진짜였다니……. 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이쪽을 유심히 쳐다보던 웨이터는 경찰에 전화라도 걸듯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회사에서 미행 붙인 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범죄지, 뭐.”
“범죄의 뜻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범죄는 저지르면서부터 이미 사회성을 띤다고요. 대체 뭐가 개인적이라는 거예요?”
“어우, 똑똑한 거 봐. 피곤해 죽겠어. 그냥 좀 넘어가 주라. 내가 자기한테 좋은 소식 들고 온 거잖아.”
“시초교 조사 나가는 게 저한테만 좋은 일입니까?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뭐, 그럼 어떻게 하라고. 헌터부 앞에 가서 피켓 들고 ‘불쌍한 우리 팀 신입 사원 좀 용서해 주세요! 이 개 같은 간부 놈들아!’라고 1인 시위라도 해?”
서 팀장은 논리로 파고들수록 더 뻔뻔하게 나왔다. 애초에 정상이 아닌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사회적 약속을 들먹인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저를 왜 미행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이거 그냥 못 넘어가겠거든요.”
“선의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해도?”
“당연하죠.”
의현은 딱딱하게 대답하며 서 팀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향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질 정도로 둘 사이가 가까웠다. 서 팀장은 히죽 웃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저 사람 하나만 좀 알아봐 주세요.”
“뭐야, 키스하는 줄 알았는데?”
“헛소리 마시고요.”
“그럼 왜 그윽하게 다가온 거야?”
“작게 말하려고 붙은 겁니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의현은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올라가려는 듯했다. 서 팀장은 얼른 의현의 뒤로 따라붙으며 재밌다는 듯 눈을 빛냈다.
“누군데?”
“행정팀 김해수라고 저랑 동기예요.”
“김해수 씨한테 관심 있어?”
“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도 관심이 생겨.”
서 팀장은 의현의 손을 잡으며 생긋 눈웃음쳤다.
“내일 또 올게. 자리 비워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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