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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56화 (56/185)

56화.

방 안은 어제와 같았다. 하다 못 해 이불이 접힌 각도까지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그동안 꽉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어딜 간 거야? 무슨 말 못 할 저주라도 걸린 듯이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길 오 분. 가만히 서서 입만 뻐끔대던 의현은 곧 제 발 아래에 걸리는 슬리퍼를 발견했다.

“…….”

정재이가 2층을 올라 다닐 때 신고 다니던 슬리퍼였다. 키퍼들이 말하던 ‘없어진 슬리퍼’가 이걸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현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게 있다는 건, 정재이가 방에 들어온 적이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의현은 설마 이 모든 것이 장난인가 싶은 생각에 빠졌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얼마 전엔 울면서 애원하기도 했으니 자기 딴엔 얼마나 당황시키고 싶겠어. 그럴 수도 있어. 의현은 차분하게 자기 세뇌를 마쳤다. 안 들어온 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의현은 차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혼돈으로 일렁거리던 시야가 바로잡히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예를 들면, 새하얀 책상 위에 곱게 접혀 있는 쪽지 같은 거.

의현은 천천히 다가가 쪽지를 펼쳐 들었다. 흰 종이에 잉크 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는 살짝 번진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재이가-]

“이게 도대체 뭔…….”

의현은 1초면 읽을 수 있는 짧은 편지를 단숨에 구겼다. 얇은 재질의 종이는 사부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그러졌다.

조금만이 도대체 얼마나 조금인지, 갑자기 재밌지도 않은 이런 장난을 왜 치는 건지, 뭐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의현은 정재이의 서재와 옷장을 전부 까뒤집었다.

“전부 다 있잖아. 전부 다!”

모든 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정재이 하나만 빼고.

의현은 실소하며 바닥에 얌전히 놓인 슬리퍼 한 쌍을 걷어찼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설마 이것 때문에 김태원이 실패했다고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재이가 사라졌다. 그것도 아무 말도 없이.

의현은 1층으로 내려가 키퍼들에게 새벽에 정재이를 본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그들은 오히려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방에 없나요?

방에 사람이 있고 없고도 제대로 모르는데 애를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건데? 열이 훅 머리까지 차올랐다.

“그걸 지금……!”

의현은 목소리를 크게 내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이 권중섭의 귀에 들어가면, 오히려 잘됐다는 식으로 나올 게 뻔했다.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후원회라는 이름값 때문에 정재이 찾는 걸 도와줄 수도 있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수많은 선택이 유기적으로 얽혀 지금이 만들어졌음을 의현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도대체 어떤 선택을 차출해야 이런 결과를 방지할 수 있을지, 그걸 확신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솔직히 하나도 모르겠다.

“재이가…….”

의현이 입을 떼자, 키퍼들의 시선이 단숨에 날아왔다.

지금까진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숨이 가빠졌다. 과거에 잘못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지금 하는 선택이 잘못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앞으로 큰 잘못하게 되는 건가? 실패를 전제에 둔 삶은 절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당분간 재이가 방에 없을 겁니다.”

“네?”

“아버지껜 말씀 안 드려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의현은 태연한 척 표정을 만들어 냈다. 주먹 쥔 손이 벌벌 떨렸다. 키퍼들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정한 건가요? 저희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아야…….

말은 확실히 끝맺어지지 못했다. 알면 어쩔 건데? 사람이 들어왔다 나간 것도 몰랐는데, 알면 뭐? 의현이 꼭 그렇게 말하듯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들한테만 대충 말해 주세요. 별로 궁금해하진 않겠지만.”

매몰찬 말을 남겨 놓고 의현은 몸을 돌렸다.

권중섭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의현은 핸드폰을 꺼내 서 팀장에게 오전 반차를 쓰겠다고 말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장은 10초도 안 되어 날아왔다.

[당일 반차를 또 쓰다니, 이거 앙큼한데? - 서 팀장-]

아마 이걸로 또 며칠을 우려먹을 테지만, 우선순위는 확실히 해야 했다. 의현이 골머리를 썩이며 현관에서 구두를 대충 꺾어 신는데, 1층 윤화 방의 문이 열렸다.

“……형?”

영락없는 어린애 목소리였다. 이제 막 자고 일어나 쇳소리가 섞여 있어도 윤화의 목소리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누구 하나 잡아 죽일 얼굴을 하고 있던 의현은 금세 표정을 관리하며 윤화를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난 또 꿈인 줄 알았잖아.”

“잠깐 볼일이 좀 있어서 왔는데, 이게 갈 거야.”

“왜? 회사 가?”

“어, 응. 회사 가야지.”

윤화는 눈을 비비며 의현의 다리에 매달렸다. 방금 막 자다 깬 아이의 몸에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의현은 윤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윤화 너 캠프 갔던 적 있지?”

“응. 캠프 재밌었어! 친구들이 엄청 많고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재이가 지금 캠프에 갔어. 그래서 당분간 못 볼 거야.”

“혼자? 나도 캠프 또 가고 싶은데?”

“그건 재이가 돌아오면 다시 얘기해 보자.”

도대체 잠을 어떻게 잤는지, 윤화의 머리는 벼락 맞은 것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손으로 눌러도 퐁퐁 튀어나오는 머리카락에, 의현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이제 학교 갈 준비해야지.”

“형 지금 가야 해? 좀 놀다가 가면 안 돼?”

윤화는 퍽 애처로운 표정으로 의현을 바라보았다. 얜 참 사람을 무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 전에 놀았던 거 재밌었지?”

“응!”

“다음에 또 그렇게 놀자. 오늘은 형이 진짜 해야 할 일이 있어.”

“응. 그래, 알겠어.”

보채지도 않고 윤화는 히히 웃으며 떨어져 나왔다. 의현은 대견하다는 듯 윤화의 어깨를 쳐 주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1층 애들이 죄 일어나 번거로워지기 전에 저택을 떠날 생각이었다.

“수업 잘 듣고 졸기만 하면 안 된다?”

“나 수업 때 안 자!”

“이상하다, 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의현은 살짝 웃으며 아까 신다가 구겨진 구두에 대충 발을 꿰었다. 윤화는 현관까지 쪼르르 따라와 의현을 배웅했다.

“형 오늘도 힘내! 내가 얼른 커서 돈 많이 벌게!”

“너 크길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돈 많이 버는 게 더 빠르겠어.”

“아니야, 나 진짜 금방 커-!”

윤화는 제 억울함을 끊임없이 어필했다. 의현은 손을 휘적거리며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긴장된 표정으로 차 안에서 손톱이나 뚝뚝 깨물고 있던 윤 기사가 의현을 발견하고 얼른 창문 밖으로 얼굴을 빼냈다.

“재이 군 안에 있나요?”

의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기사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자동차 핸들을 쥐었다.

“당장 장관님께 이 일을 알려야 합니다! 이건 분명 대선을 앞둔 장관님을 음해할 목적으로 누군가가 후원회 소속인 정재이 군을 납치한 게 틀림없어요!”

열정적인 윤 기사는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끊임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상대 쪽에서 예민하게 나오니 오히려 약간 머리가 식었다. 의현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말했다.

“일단 외부 개입은 아닌 것 같고요. 쪽지 쓰고 나간 걸 봐서는 자발적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그럼, 가출이라는 말씀이세요?”

“……일단 출발을 좀 하죠. 학교는 가나 확인을 좀 해 봐야겠어요.”

사실 갈 리가 없었다. 정재이 성격에 이렇게 사라졌는데 학교에 가서 애들을 만나고 누군가와 교류한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됐다. 알고는 있었지만, 자꾸만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출근은 어떻게 하시고요?”

“반차 냈습니다.”

의현을 깔끔하게 대꾸하며 핸드폰을 흘끔 쳐다보았다. 서 팀장은 뭐 건수라도 잡았다는 듯 1분에 한 번씩 의현에게 문자를 날려 왔다. 이 사람은 뭐든 진심인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차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재이가 다니는 학교로 꺾어졌다. 의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넵! 행님! 무슨 일이십니까?!

“너 오늘 학교 가지?”

―요즘 제 학교생활에 관해 자주 물으시네요? 당연히 가죠!

“학교 몇 시에 가? 잠깐 보자.”

―오늘요?

“어. 학교 도착하면 전화해.”

―지각할 수도 있는데, 헤헤…….

“그럼,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이십 분 후에 나와.”

―네?!

홍삭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의현은 뚝 전화를 끊고 재이의 학교로 운전하고 있던 기사를 향해 방향을 바꿔 달라고 말했다. 꽤 오랜만에 방문하는 세인트 해피 보육원이었다.

익숙한 의현의 차 번호를 보고 보육원 측은 이제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의현은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홍삭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부터 연결음만 줄곧 듣고 있어, 이제 전화를 걸기 전에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홍삭은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곧 출입구 쪽에서 빵을 입에 물고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넥타이는 어디에 뒀는지 목을 훤히 드러낸 홍삭이 헐레벌떡 주차장이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아! 행님! 여유를 좀 가지세요! 이렇게 시간 딱 맞춰 오시면 저 진짜 곤란합니다!”

자기가 무슨 영화 속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으쓱한 표정을 지어도 익숙하다는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를 이렇게 애타게 찾으시는 분은 행님이 처음입니다!”

“헛소리 말고 양말이나 신어.”

“아, 양말 놓고 나왔다! 잠시만요!”

뭘 했는지 잔뜩 지저분해진 운동화에 맨발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홍삭은 당황하며 다시 보육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에 물고 있던 빵가루가 의현의 옷에 잔뜩 튀었다.

“도련님, 저는 잘 모르겠는데 홍삭 군을 만나는 게 혹시 이번 일이랑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기사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의현은 툭툭 셔츠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냈다.

“일 잘 풀어 가려고 온 건 아니고요.”

“그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의현은 차에 반쯤 기댄 채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확실한 건, 재이가 홍삭을 좀 많이 싫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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