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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54화 (54/185)

54화.

그러고 보니 연수 이후 해수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 해수가 했던 묘한 말이 아직까지 의현의 뇌리에 콕 박혀 있었다. 조작이 어디서든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상황을 너무 믿지 말라고. 피곤하더라도 항상 의심하길 바란다면서.

“……행정팀이네.”

뭔가 어울리는 부서였다. 그때 봤던 해수의 성격상 어딜 들쑤시고 다닐 위인도 아니었거니와 체력적으로도 외근은 힘들 것 같았다.

의현은 종이를 접어 가방 속에 집어넣으며 잠시 고민했다. 뭔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서 팀장의 말대로 정예 요원으로 꾸려져서 내려가는 거라면, 행정팀의 김해수도 뭔가 활용 가치가 있으니까 선택됐다는 건데…….

의현의 머릿속에서 꼬리잡기하던 날의 해수가 느리게 재생됐다. 수상했던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봐도 S나 A급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신입, 그것도 B급 이하의 신입이 정예 요원으로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지.

다른 팀의 일이라 서 팀장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의현은 차후에 해수를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열 시에 현장 1팀 오전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유 대리가 시계를 쳐다보며 외쳤다. 현장팀과 외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기에 사실 이 정도 규모의 회의는 일상이었다.

의현은 제게 주어진 자료들을 보고 어떤 식으로 팀이 짜였는지 확인했다. 이번 건 꽤 장기 외근이었다. 예상 일수는 5일. 이동 시간까지 하면 6일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각성제 먹고 포탈 안에서 며칠 날밤을 까야 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쉴 시간이 없네, 정말…….”

한가롭게 해수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의현은 책상 위에 올려 둔 달력의 날짜를 확인하며, 이번 달에는 또 며칠이나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을지 가늠했다.

* * *

일도 바빠 죽겠는데 심지어 중간중간 저택에 들르는 걸 잊지 말아야 했다. 요즘 의현은 의식적으로 정재이를 신경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확실히 재이는 다른 애들과 달랐다. 쉽게 잘 자랐지만, 그게 정말 잘 자랐는지 확신할 수 없어 늘 혼란스러웠다.

“어, 오빠! 저녁 드셨어요?”

“응. 대충 먹었어. 재이는 방에 있지?”

“모르겠는데, 오늘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저도 시험 기간이라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방금 막 나온 거예요.”

은영은 웬일로 초췌한 표정이었다. 항상 방긋방긋 웃고 있어 공부가 적성에 맞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인지, 하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났다.

“다른 애들은?”

“혜영이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온다고 아직 안 들어왔고 필규는 게임할 걸요? 윤화는 자요.”

“윤화 벌써 자?”

“말도 마세요. 오늘은 무슨 진흙탕에서 수영을 하다 온 건지 애가 흙을 잔뜩 묻히고 들어왔다니까요. 걔 때문에 저택 바닥에 모래 다 떨어져서 키퍼분들이 그거 청소하느라 난리가, 난리가. 어휴-!”

“힘들었겠네.”

얼마 전 윤화를 데리고 나갔다가 하루 종일 진이 빠진 경험이 있던 의현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은 울상을 짓다가 금세 탄산음료를 따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밉지가 않으니까 신기하죠. 사람이 역시 타고난 뭔가가 있나 봐요. 어쩜 그럴 수 있는지 몰라.”

“……그러게. 신기하지.”

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타인의 눈으로 봐도 윤화가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이 좀 신기했다. 헐렁하게 늘어진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고 의현은 천천히 2층 계단을 올라갔다.

확실히 여럿이 사는 1층보다 2층이 더 삭막했다. 바닥에 깔린 러그가 너무 칙칙해서 그럴까 싶어 2층 러그를 밝은색으로 전부 교체했는데도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여전했다.

러그나 벽지 탓이 아니었어. 도대체 그럼 뭐가 문제지?

의현은 무심결에 어제 잠을 청했던 동민의 집 게스트하우스를 떠올렸다. 혹시 생화가 있으면 분위기가 좀 살지 않을까? 의현은 벽에 손을 대고 걸으며 다음번엔 꽃다발과 화분을 잔뜩 사서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재이야, 형이야.”

똑똑-.

의현은 조그맣게 두 번 노크했다. 딱 한 번 아팠을 때를 제외하면 재이는 항상 열 시 전엔 깨어 있었기에, 의현은 이번에도 재이가 깨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들어가도 돼?”

말도 끝내기 전에 벌컥 열릴 줄 알았던 문은 의외로 줄곧 잠잠했다. 의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9시 15분. 학교는 끝난 게 분명한 시간이었다.

의현은 슬쩍 방문을 열고 안쪽을 훔쳐보았다. 혹시라도 재이가 자고 있으면 확인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

뭐지.

의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재이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방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그냥 정재이라는 애가 오늘 이 방에 들어온 것 같지가 않았다.

설마 가출은 아니겠지?

갑자기 눈알이 빠질 듯이 아파 왔다. 외근 나가기 전에 며칠 못 본다고 얘기 좀 하려고 들렀는데, 갑자기 애가 없다고? 의현은 오른손으로 양쪽 눈을 꾹 누르며 벽에 기대어 섰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지만, 재이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의현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러 정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긴 통화 연결음 끝에 익숙한 전자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재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된다기보단 혹시 재이가 무슨 일이라도 일으킬까 봐 걱정됐다. 얘가 잡혀가면 옆에 딱 붙어서 감시할 수도 없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도 절대 불가능했다. 그러니 무조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재이를 자신 옆에 붙여 둬야만 했다.

의현은 핸드폰 스크롤을 내려 저장되어 있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 번 채 돌기도 전에 상대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행님! 무슨 일이세요? 저한테 직접 전화를 다 주시고!

“너 오늘 학교 갔지?”

―그럼요! 제가 공부는 안 해도 꼬박꼬박 출석은 하거든요!

왁왁거리는 목소리는 조금만 들어도 금세 피곤을 유발했다. 의현은 불안으로 입술을 잘근 깨물며 홍삭에게 물었다.

“오늘 재이도 학교 갔지?”

―정재이요? 당연하죠. 걘 이중적이라서 학교 빠지고 이런 거 못 한다니까요? 행님이 싫어하시잖아요.

“끝나고 같이 나왔어?”

―아뇨, 저희 그렇게 찐하게 붙어 다니는 사이는 아닌데요? 수업 끝나면 각자 갈 길 가요. 애초에 저의 이 사교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받아 줄 만큼 정재이 그 자식의 마음이 넓지도 않고요.

홍삭은 여전히 객관화가 안 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종알거리는 말은 거의 자기 자랑이었다. 누구한테 고백을 받았다는 둥, 걔랑 사귈까 고민 중이라는 둥, 딱 그 또래가 할 법한 얘기들이었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사담을 들어 줄 때가 아니었다.

“흥미로운 얘기하는 중에 미안한데, 지금 내가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있거든. 그래서 너랑 오래 전화를 못 해.”

―신경 쓰이는 일이 뭔데요? 저도 궁금한데!

“일단 해결을 좀 하고 말해 줄게.”

―해결하고도 말 안 해 주실 거잖아요! 뭔데요? 정재이랑 관련된 것 같은데, 걔가 뭐 사고 쳤어요?

“삭아, 끊어.”

의현의 단호한 말에 홍삭은 무슨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어디 가면 다 컸다는 얘기 듣는 애들이 왜 의현의 앞에서는 이렇게 약한 척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학교에서 도희랑 계속 붙어 있던데, 둘이 데이트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행님 전화를 무시하고 이제-!

“……도희?”

―왜, 그 있잖아요. 엄청나게 호화로운 파티에서 만났던 행님 친구분 사촌인가 친척인가 그거요! 헐, 생각해 보니까 진짜 데이트일 수도 있어요! 이 자식! 나보다 먼저 선수를 치다니!

“알겠어. 일단 끊어, 삭아.”

―아, 행님! 행님!

정재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청소년기에는 이것저것 관심을 두기가 쉬우니까. 정재이가 도희와 의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간을 보고 있다고 한들 오히려 좋았다. 그래, 재이야. 그런 식으로라도 사람한테 관심을 좀 가져 봐.

“왜, 또?”

―다음에 또 맛있는 거 사 주십쇼!

“끊는다.”

의현은 홍삭의 말도 다 듣지 않고 일단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억울한 목소리로 또 뭐라고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홍삭의 수다는 들어 주면 들어 줄수록 끝이 없었다.

의현은 다시 한번 재이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전화는 받지 않았고, 그사이 문자가 온 것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얘가 이럴 리가 없는데…….”

의현은 재이의 방 벽에 가만히 기대어 있다가 금세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왔다. 초면인 주제에 도희에게 대뜸 전화를 걸어 둘이 같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러면 아무리 봐도 극성 학부모 같았으니까.

“오빠, 가시게요?”

아까보다 과자 양이 더 늘었다. 스트레스로 폭식을 하는 건지 은영은 입에 초콜릿을 잔뜩 묻힌 채 의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응. 방에 재이가 없어.”

“그래요? 오늘 뭐 놀고 오나?”

“원래 어디서 잘 놀고 와? 내가 왔을 땐 항상 집에만 있었던 것 같은데.”

“자주 놀진 않죠. 생각해 보니까 거의 놀러 안 나갔던 것 같긴 해요.”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한 걸 안 건지 은영이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다른 애들과 재이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시험 잘 봐. 공부 열심히 하고.”

“오빠도 좀 쉬면서 하세요. 잘생긴 얼굴이 완전 반쪽 됐어요.”

“쉴 시간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어른 되면 다 오빠처럼 바쁘게 될까 봐, 진짜 무섭다니까요.”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표정을 보면 진심이라는 게 여실히 티가 났다. 의현은 손을 흔들고 다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정재이가 이 저택에 없다. 연락 한 통 없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편하지 않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기분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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