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끊기지 않고 계속 울리는 전화에 혼비백산한 동민은 소파에 걸려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쾅! 간이 소파가 뒤집히며 사람과 충돌하는 소리에 의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너 뭐 해?”
“어?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누가 봐도 수상한 자세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지만, 동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저었다. 고통을 참으려는 듯 드러난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잠든 줄도 몰랐네…….”
의현은 피곤한 얼굴로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당연히 전화를 받아 통화할 줄 알았는데, 의현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피곤하다. 나 그만 방에 가서 잘게.”
“전화 안 받아?”
“안 받는 게 나아.”
“왜?”
“받으면 난리 나.”
“누군데?”
“있어.”
전화는 끊어졌다가도 금세 다시 울렸다. 이런 표현이 어떨까 모르겠지만, 정말 집요했다. 의현은 핸드폰 음량을 줄이며 동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일 보자.”
“어? 응! 자, 잘 자!”
어정쩡한 동민의 인사에 의현은 살짝 손을 흔들며 나갔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 후회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동민은 제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 * *
햇살인가? 아니면 풀 내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 어려웠다. 흙냄새 같기도 했는데, 따뜻했고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의현은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온몸으로 느껴지는 포근함을 만끽했다.
“……아.”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눈을 번쩍 떴다. 여기가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의현은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살랑살랑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흰색 실크 커튼이 적당히 흔들리며 시각적으로 굉장한 안정감을 주었다. 베이지색의 벽지, 만개한 화분 속의 보라색 꽃들. 모든 것이 의현의 지리멸렬한 평소의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의현은 이불을 쥔 제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서 아침 샤워와 양치를 끝내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도 특유의 살랑거리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좋은 아침! 벌써 일어났어?”
복도에서부터 우당탕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김없이 동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씻고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악몽 꿨어?”
“아니, 왜?”
“반나절 만에 얼굴이 상한 것 같네.”
“그건, 그……. 내가 어제 야식을 좀 먹어서! 원래 야식 먹으면 얼굴이 붓는다고 하잖아? 나는 근데 좀 반대로 살이 좀 빠져! 수척해지는 느낌 알지?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동민은 괜히 허공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동민의 옆을 지나쳐 의현은 진한 색의 원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침에 보니까 방 예쁘더라.”
“그래? 다행이네. 잠은 잘 잤어?”
“응. 기절했어. 무슨 꿈 꿨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야.”
의현의 말에 동민은 퍽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너 잘 잤다니까 기분 좋다! 의현의 어깨를 툭 치며 웃는 얼굴이 익숙했다.
“아침 먹자. 어머니가 너한테 밥 차려 주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셨어.”
“요리를 직접 하셔?”
“요리하는 거 좋아하시거든. 집 안 사람들 다 바빠서 먹어 줄 사람이 없는 게 아쉬운 거지, 뭐.”
어쩐지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본래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의현이었지만, 호의를 거절하는 건 아니다 싶어 동민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생화는 여기저기서 특유의 생기를 뽐냈다. 집안이 꽃과 책으로 채워진 거대한 동화책 속의 세상 같았다.
“어머, 안녕. 기분 좋은 아침이지. 둘 다 잠은 잘 잤니?”
“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편하게 앉아. 아침 잘 안 먹는다고 해서 거창하게는 안 만들었어.”
앞치마를 두른 여자는 분주하게 주방을 돌아다녔다. 프라이팬 위에 자글자글 익어 가는 프라이와 소시지, 그리고 구운 빵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확실히, 낯설었다. 같은 음식이더라도 풍기는 모든 것들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의현은 어색하게 의자를 빼고 앉았다. 여자는 노란색 그릇에 빵과 샐러드 과일 등을 예쁘게 장식했다. 성인 남자들이 먹기엔 지나치게 아기자기했지만, 여자는 즐거워 보였다.
“힘든 일 하려면 항상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해. 이런 게 다 힘이 되니까.”
거창하게 안 만들었다더니 양이 꽤 많았다. 의현이 수저를 집어 들자 여자가 눈을 빛냈다.
“어머니, 그렇게 쳐다보면 의현이가 부담스러워서 못 먹어요.”
“어머, 내가 그랬니? 나 좀 봐, 반응이 궁금해서 말이야. 딴 데 보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먹어-.”
차려진 음식을 다 비울 자신은 없었지만, 의현은 포슬포슬 익은 프라이를 반으로 갈라 입에 넣었다. 버터와 우유가 들어가 부드럽고 고소한 향이 났다.
“맛있어요. 정말.”
“그래? 다행이다. 우리 집 남자들은 친구를 영 초대하지 않아서, 내가 이렇게 요리를 선보이고 할 일이 없거든. 지금 너무 행복한 거 있지?”
의현의 반응에 마음이 놓인 건지 여자는 다정하게 웃었다.
식사 시간은 길지 않았다. 출근이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민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면서 몇 차례 웃고, 커피를 마신 후에 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1지구는 대개 주택가들이 밀집되어 있어, 회사가 있는 3지구까지 도로 정체가 심각했다. 의현은 깔끔하게 세탁된 채 문 앞에 걸려 있는 제 옷을 챙겨 입고 넥타이를 맸다.
“야, 의현아. 반차 쓰고 더 놀면 안 돼? 모처럼 온 거잖아…….”
동민이 의현의 방문 앞을 가로막으며 투정 부렸다. 얘가 왜 이러냐는 얼굴로 의현은 동민을 밀어냈다.
“당일 반차는 절대로 안 돼.”
“왜?”
“전에 당일 반차 한 번 쓴 거로 팀장님이 아직도 우려먹는데, 그 짓을 또 하라고? 절대 싫어.”
의현은 서 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표정을 구겼다.
쓰라고 만들어 놓은 반차임에도 불구하고 서 팀장은 의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반차의 불합리성’에 대해 연설했다. 솔직히 개소리였다. 본인도 이상한 소릴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서 팀장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자그마치 일주일 동안이나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팀장님이랑 진지하게 얘기를 한번 해 봐. 너무 비정상적이잖아. 반차도 마음대로 못 쓰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
“애초에 진지한 게 불가능한 사람이야. 뭘 바라면 안 돼. 정상이 아니니까.”
의현이 서 팀장에 대한 불호 감정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건 동민의 입장에서 꽤 신기한 일이었다. 의현은 항상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아쉽다…….”
“지각하고 싶지 않으면 얼른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의현은 먼저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동민은 시무룩한 얼굴로 의현의 뒤를 따랐다. 면허가 있어 가끔 차를 몰기도 했지만, 출근 시간엔 전문 기사에게 차를 맡기고 뒷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이득이었다.
“벌써 가는 거니?”
“예. 덕분에 정말 편안하게 보냈어요. 감사합니다.”
“너무 아쉽다.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땐 정말 제대로 준비해 놓을 테니까.”
여자는 친절히 의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현관 밖까지 따라 나와 동민과 의현을 배웅해 주는 여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차는 느리게 출발했다.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한 정원이 옆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신기한 기분이네.”
“뭐가?”
“그냥. 어머니가 있다는 거.”
작게 중얼거린 말에 동민은 순식간에 울먹거리는 얼굴로 의현의 손을 움켜쥐었다.
“네가 만약 외롭다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아도 돼!”
“절대 싫어.”
매몰차게 거절해도 동민은 상처 하나 안 받았다. 손끝으로 사람의 미적지근한 온도가 느껴졌다. 의현은 슬쩍 손을 빼냈다. 원래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랑 살이 닿는 행위에서 만족을 느끼다니. 보통은 좀 멋쩍고 찝찝하지 않나?
뚱한 표정의 의현을 흘끔거리다가 동민은 슬쩍 말을 돌렸다.
“의현이 너희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하다. 유공자라는 것만 알아서.”
“나도 그것밖에 몰라.”
“다른 기억은 없어? 너 어릴 때 추억이라든가.”
차는 금세 고속 도로로 빠졌다. 1지구에서 튀어나온 고급 차들이 도로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의현은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떼고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다른 기억이 없어.”
의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방금까지 색채가 가득한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로.
“신기할 정도로 아무 생각도 안 나.”
“……그럴 수가 있나?”
“큰 사고가 있었다니까, 그때 충격으로 내 머리가 어떻게 됐거나. 아니면 크게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의현의 말에 동민은 실수했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서로의 가정사에 관해 깊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어서, 의현이 어릴 때 사고가 났다거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거나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미안, 몰랐어……. 그래도 후자는 아닐 거야.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지. 너무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마.”
“사실이 뭐든지 상관없어.”
“왜?”
“지금은 아무렇지 않으니까.”
퍽 슬픈 이야기임에도 의현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무료하고 피곤해 보이는 표정에, 동민이 안절부절못하며 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 너 외롭거나 할 때 우리 집에 와도 돼. 진심이야. 나는 진짜…….”
동민은 감수성이 풍부했다. 의현이 그냥 내뱉은 말에도 의미를 찾아 괜히 뭔가를 해 주려고 했다. 사랑받고 컸으니 이런 성격이겠거니 했다. 원래 보통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사랑받고 자란 애들은 그 사랑을 나눠주기 바쁘고, 결핍이 있는 애들은 자기 손에 쥐기도 바빠서 남 신경 써줄 여유가 없다.
“말은 고마워.”
그런 의미에서 의현은 동민과 자신이 절대로 섞일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외롭다는 것은 태초의 감정일까?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는 외로울 일이 없어.”
외롭지 않은 적이 있어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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