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동민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에 지배당한 것 같았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의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이 묘하게 금욕적이라, 흘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
동민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허리를 굽혔다. 창고 앞에서 선생님 눈치 보며 담배 피우는 양아치처럼 계속 여기저길 흘끔거리게 됐다.
“야, 다리 좀 그만 떨어. 의자가 여기까지 흔들려.”
눈 감고 있던 의현이 슬쩍 동민을 쳐다보았다. 헉, 동민은 무슨 벌레라도 본 듯이 창문 쪽으로 들러붙었다.
“누, 누구 초대하는 게 오랜만이라 좀 긴장했어…….”
“잠만 잘 건데?”
“잠만 자게?”
“그럼 뭘 해야 해?”
“어? 하, 하긴 뭐, 뭘 해! 진짜 웃긴다!”
동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을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와인 한잔하면서 영화는 볼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어그러질 줄이야.
“우리 내일도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거 잊지 마.”
의현은 무슨 다섯 살배기 애 달래듯이 말했다.
“알아…….”
이런 상황에서 서운함을 느낄 줄 몰랐다. 동민은 새삼 상황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했다. 역시 상황은 돼 봐야 아는 거였어. 의현이 방 있냐고 물어볼 땐 아무것도 안 해도 심장이 벌렁거렸는데, 막상 집에 도착할 때가 되니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드는 게…….
차창 밖으로 저녁 가로등이 반짝거렸다. 차는 잘 깔린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 고요한 주택가로 빠졌다. 곧이어 금색으로 장식된 대문 앞에서 차가 느리게 멈추어 섰다.
“도착했어?”
“아니, 신원 확인. 집은 차 타고 좀 더 들어가야 해.”
“와. 진짜 어이가 없을 정도로 도련님 같아.”
운전석의 기사가 제 얼굴과 신분증을 카메라를 향해 가져다 댔다. 스피커에서 확인이 완료됐다는 말과 함께 대문이 옆으로 쭉 열렸다. 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그래도 신기하네. 재밌어.”
의현은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 창문을 열고 목을 뺐다. 나무가 빼곡하게 심긴 정원 때문에, 훅 풀 냄새가 났다.
“이런 게 재밌어?”
“우리 집은 안 이래.”
“그러니까 말이야. 아마 1지구 사는 사람들 집 중에서 너희 집이 제일 보안에 신경 안 쓴 집일 거야.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래?”
“몰라. 누가 쳐들어오는 거 기다리나.”
“못 하는 말이 없네. 아무리 능력자라고 해도 혹시 모르는 거야. 불시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네가 장관님께 한번 말씀드려 봐.”
“됐어. 대화하기 싫어.”
권중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의현은 질색 팔색을 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동민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세계였다.
차는 깔끔하게 잘 관리된 정원을 지났다. 가로등 외에도 나무마다 조그마한 조명이 달려 있어 정말 별세상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현은 창문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쳤다.
“……산책하기 좋겠네.”
“산책할래?”
동민은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개처럼 계속 혀를 빼고 의현의 말을 기다렸다. 의현은 그런 그를 흥미롭게 살폈다. 누구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기분은 사실 꽤 오랜만이었다.
“넌 되게 나랑 하고 싶은 게 많은가 봐.”
“어? 어? 응!”
동민은 순순히 인정했다. 본심을 읽혀 축 처진 얼굴이 웃겨 의현이 작게 웃었다. 차는 금세 정문 앞에 도착했다.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저택은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온통 희고 화려했다.
“들어가자. 아마 별건 없을 거야.”
동민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멍! 대형견 한 마리가 동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얜 로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어허, 로키. 형이 친구 데려왔잖아. 근엄한 모습 보여 줘야지? 옳지-.”
로키는 헥헥대며 바닥에 허리를 펴고 앉았다.
“말을 알아듣네?”
“그럼. 개인기도 있어. 볼래?”
동민은 뿌듯한 표정으로 로키의 개인기를 몇 개 선보였다. 바닥을 돌고 점프를 하고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며 로키는 줄곧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교육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만, 이 정도면 윤화나 홍삭보다는 더 말을 잘 듣는 듯했다.
“동민이 왔니?”
집 안쪽에서 실크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쳐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얼굴을 보니 동민과 무척 닮아 있어 의현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머, 친구도 같이 온 거니? 웬일이야.”
“아, 어머니. 이쪽은 의현이에요. 아시죠? 권의현. 오늘 늦어서 자고 가려고요.”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동민의 말을 들으면 상대가 이미 의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의현이구나. 만나서 반갑다. 안 그래도 언제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저를요?”
“그럼. 이쪽으로 들어오렴. 동민이가 네 얘길 얼마나 했는지 몰라. 난 처음에 중성적인 이름의 여자애인가 했다니까? 여자 친구인 줄 알았거든.”
여자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동민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놓았다. 동민은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제발…….”
“내가 뭐 틀린 말 했니?”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타고난 인자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여자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의현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었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네. 학교 다닐 때 정말 인기 많았겠어.”
“그렇진 않았어요.”
“어머, 왜? 혹시 너무 잘나서 건드리질 못했나? 그맘때 애들은 좀 겁이 많거든. 원래 용기 있는 자가 미남을 쟁취하는 건데 말이야-.”
공기가 따뜻했다. 깨끗하게 정돈된 집의 한쪽 벽은 온통 두꺼운 책으로 가득했다. 꼭 무슨 관리 잘된 도서관에 온 것 같았다. 동민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께서는요?”
“학회 면담 때문에 오늘 못 들어오신단다. 그이도 참, 일에 빠지면 밤낮이 없다니까.”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버지 계셨으면 의현이를 들들 볶았을 거예요.”
그랬던 경험이 있는지 동민이 질겁했다. 여자는 공감한다는 듯 작게 웃으며 의현을 1층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이쪽이야. 별건 없지만, 편하게 지내다 가렴. 필요한 거 있으면 동민이 잔뜩 부려 먹어도 되니까.”
“어머니, 제발…….”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여자는 상냥한 얼굴로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의현을 배려해 일찍이 자리를 비켜 준 것 같았다. 그제야 의현은 주변을 좀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사람을 워낙 좋아하셔.”
“화목해 보이네.”
“그런가? 나는 얼른 자취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손님방은 베이지색 벽지라 안정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했더니 화병에 보라색 라벤더 꽃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바닥에 깔린 노란색 러그와 색감이 대조되어 꽤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귀엽고 아기자기한 방이었다.
“이런 방에서 자는 건 처음이야.”
“아! 깔끔한 방 있는데 거기로 바꿔 줄게. 여긴 어머니 취향이라…….”
의현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방 분위기에 동민은 제법 멋쩍은 듯 보였다. 하지만 사실 의현은 정말 꽤 만족스러웠다. 따뜻한 공기, 친절한 어머니, 화목한 가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방. 이건 오늘이 아니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야, 이 방 마음에 들어. 좋아.”
“그래? 다행이다.”
동민은 제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의현은 넥타이를 풀어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셔츠 단추가 몇 개 풀릴 때마다 동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서, 설마 씻으려는 건 아니지?”
“안 씻고 자라고?”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씻기 전에 미리 경고를 해 줬으면 좋겠어!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해!”
“네가 씻냐? 무슨…….”
의현의 기막혀 죽겠다는 표정에 동민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네가 씻는 거지. 그렇긴 한데…….
하고 싶은 말이 분명 정해져 있었지만, 동민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힘겹게 참아 냈다.
‘……그래도 우리가 친구로는 지낼 수 있겠지?’
‘네가 다신 고백 안 한다면.’
이건 말하면 안 되는 저주였다. 순탄한 동민의 인생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장벽.
“……갈아입을 옷 가져다줄게. 씻어.”
“응.”
동민은 의현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누가 코와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실수 안 하면 돼. 또 고백하고 얼굴도 못 보느니 평생 친구로 남아서 옆에 있는 게 나아. 그래, 그게 훨씬 낫지.
“손님용 잠옷을 준비해 드릴까요?”
동민이 세뇌라도 하듯 중얼거리는데 익숙한 얼굴의 키퍼가 불쑥 말을 붙여 왔다.
“……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데, 시원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게 지독히도 모순적이었다.
“아뇨. 잠옷은 제가 준비할게요.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동민은 친절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방으로 올라가 제 잠옷 한 벌을 가지고 나왔다.
‘손님용이 있는데 굳이 왜?’
이 상황을 알면 의현은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동민도 받아칠 말이 있었다.
‘친구랑 잠옷 나눠 입는 거 한 번쯤 해 보고 싶었어.’
동민은 복도를 지나 의현이 있는 방에서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와도 돼. 의현은 작게 대답했다. 피곤한 건지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
“이거 잠옷.”
“아, 고마워. 욕실 어디야?”
“복도 나가서 바로 옆에 있어. 지금 씻게?”
“응.”
“영화 보자. 같이. 응? 영화 재밌는 거 있어.”
동민은 잠옷을 챙겨 바로 방을 나가려는 의현을 붙잡았다. 실내용 슬리퍼에 대충 발을 꿰어 신은 의현이 나가려다가 멈추었다.
“……보다가 잘 수도 있는데.”
“보다가 자도 돼!”
같이 영화만 봐 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을 듯한 표정에, 의현은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으니까, 손 좀 놔줘.”
“어? 미안…….”
“너도 얼른 씻고 나와.”
말투는 무심했지만, 동민은 입이 귀에 걸렸다. 귀찮아서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건 예상외였다.
“알겠어! 나 씻고 나올게, 이따 꼭 같이 봐야 해!”
동민은 황급히 복도로 뛰어나갔다. 무슨 발에 바퀴라도 달린 듯 재빠르게 사라진 동민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나 저기나, 애들이 다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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