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서 팀장의 표정은 초 단위로 바뀌었다.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둘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맞잡은 손이 뜨끈했다. 신자가 될 마음은 없었지만, 서 팀장이 말하는 시초교의 교리에 따르자면 의현은 신자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니 이것도 완벽한 거짓은 아닐 테다.
“어때요. 제가 거짓말을 했나요?”
“차라리 거짓이라고 믿고 싶어. 자기야, 그건 사이비잖아! 완전히 미친 종교야! 도대체 왜 그딴 걸……!”
“팀장님 말이 맞아요. 완전히 미친 종교죠.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은 거예요.”
의현은 ‘서 팀장의 손을 놓고’ 슬쩍 웃었다.
“시초 능력자는 재림할까? 구원 그딴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나는 구원받을 수 있나? 신이란 게 정말 있을까?”
거짓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저는 이런 게 궁금하거든요.”
거짓말.
의현은 능숙하게 거짓을 뱉었다. 서 팀장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어때요? 구미가 당기세요?”
“……이 협상에 대해선 구미가 당기는데, 권의현이라는 인간에 관한 흥미는 좀 떨어졌어.”
“효과가 좋았네요.”
의현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자긴 정말…….”
서 팀장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가만히 의현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긴 했다. 의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서 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팀장님, 점심시간 다 끝났는데 어디 계세요?
“……어? 그래? 몰랐, 몰랐어…….”
―의현 씨도 없어서 혹시 팀장님이 납치한 건 아닐까 내기하고 있는데, 어때요? 정말 납치하신 건 아니시죠?
“같이 있긴 한데……. 알겠어. 데리고 내려갈게.”
서 팀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정리가 안 된 듯했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적어도 제가 약간 더 우세한 위치를 선점했다면.
“일단 이건 나중에 더 얘기하기로 하자. 지금은 뒤통수가 얼얼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
“그러세요. 제 상사님이시잖아요. 말 들어야죠.”
“어우, 정말 열불 나네?”
손부채질하며 앞서 나가는 서 팀장의 뒤에서 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지 않았다면 됐다.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 * *
협상할 거리는 몇 개 더 있었다. 의현은 서 팀장이 시초교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곧바로 팜섬 여행권을 쓸 생각이었다. 여행권은 헌터부 높은 분들의 소관이라 팀장이 좌지우지할 권한이 없었다. 언제 쓰든 그건 의현의 자유였다. 다시 말해 회사가 바빠서 못 가고 있는 지금도 언제까지나 의현이 봐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김태원이라는 그 사람 독방 들어갔단 얘긴 들었는데, 이후엔 잘 모르겠다.”
“독방은 벌도 아니야. 그 노인네 혼자 편하게 쓸 수 있다고 예전부터 독방 좋아했어.”
“꼭 진짜 아는 사람처럼 말하네. 김태원 본 적 없다며?”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며 동민이 물었다. 의현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기사에서 봤어. 가기 전에 찾아봤다고 했잖아.”
“네가 그렇게 사람한테 관심 있는 거 처음 봤어. 그렇게 미래가 궁금했던 거야?”
동민이 주문한 와인이 오늘따라 달았다. 오늘은 술이 넘어가는 날인가 보네. 일이 잘 풀려서 그런가. 의현은 입술을 한번 핥으며 생각했다.
“미래야 항상 궁금하지. 불안하잖아.”
“뭐가 불안한데?”
“집요하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어? 아니,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네가 혹시 무슨 고민이 있을까 봐…….”
동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사실, 이 정도는 집요한 축도 못 들었다. 의현의 집에 있는 두 인간 업보들에 비하면.
“……고민? 있지.”
모처럼 정시 퇴근한 날이었다. 오전에 있었던 일로 충격에 빠진 서 팀장은 퇴근하겠다고 나서는 의현을 붙잡지도 않았다. 꼭 실연당해 슬픔에 빠진 표정에, 팀원들은 종일 팀장님 왜 저러냐고 의현에게 물어 댔다.
“고민 없는 사람도 있나?”
요즘엔 부쩍 거짓말만 늘었다. 뭐든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교묘하게 아닌 척 사실을 숨기다 보면 별안간 진실을 잊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원래 생각하고 있던 게 있었는데…….
“뭔지 물어도 나한테 안 가르쳐 주겠지?”
“야. 차동민.”
“어?”
갑작스러운 의현의 부름에 동민은 퍽 놀란 얼굴을 했다. 의현은 동민을 놀라게 한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푸스스 웃었다. 얼굴이 꽤 붉었다.
“쫄긴-.”
“안 쫄았는데?”
“쫀 거 다 봤어.”
“갑자기 불러서 놀란 거야.”
“그거나 그거나.”
동민이 알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다면, 의현이 술에 약하다는 거였다. 50년가량 숙성됐다는 브랜드 와인은 끝에 남는 깊은 맛이 일품이라 동민이 꽤 즐겨 마시곤 했다. 처음엔 씁쓸했지만 다 마시고 나면 결국엔 단맛만 기억에 남았다. 누구랑 닮은 느낌이었다.
“일찍 퇴근하니까 좋네.”
“너희 팀이 유독 바쁘지. 다른 팀에서 뭐만 있으면 1팀 찾으니까.”
“맞아. 회사 구조에 문제가 있어.”
“1팀이 확실히 유능하잖아. 너희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유능하면 갈려도 된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이거 왜 이래? 나도 네가 회사에 종일 잡혀 있는 거 속상해.”
이유가 있어서 만나는 게 아닌 즉흥적인 약속은 꽤 오랜만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처음인가 싶기도 했다. 동민은 눈썹을 축 누그러트리며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팜섬 여행권 말이야…….”
“오-.”
“왜?”
“방금 그거 생각했거든.”
의현의 목소리가 좀 늘어졌다. 원래 날 선 분위기에 비하면 이건 확실히 유했다. 동민은 긴장돼서 땀이 찬 손바닥을 주먹 쥐어 숨겼다. 원래 오늘 하려던 얘기가 아니긴 했지만, 먼저 해도 나쁠 건 없었다.
“그거 같이 갈 사람 있어?”
“뭐, 대충은.”
“뭐?! 있다고?!”
동민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동민을 쳐다보았다.
“뭐 하냐?”
“아니, 좀. 놀랐어. 많이…….”
동민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정말 큰 용기를 낸 거였는데, 예상 밖의 대답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너 설마 사귀는 사람 생긴 건 아니지?”
“누굴 만날 시간은 있냐?”
“시간 있어서 사람 만나는 거면 1팀 사람들은 다 비혼이게? 절반은 결혼했어.”
“그건 몰랐던 사실이네.”
같은 1팀인 의현조차 몰랐던 걸 다른 팀 동민이 알고 있는 게 웃겼다. 의현이 작게 웃으며 남아 있던 와인을 모조리 마셨다.
“누구랑 갈 건데?”
“내가 말해야 해?”
“당연히 말해야지! 이거 말 안 하고 넘어가면 우린 친구도 아니야!”
동민은 욱해서 말해 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친구 관계를 누가 더 간절히 유지하고 싶은가를 놓고 봤을 때, 동민은 백 퍼센트였고 의현은 십 퍼센트 이하 정도일 게 뻔했으니 이 협박은 순전히 동민에게 손해였다.
“물론 아예 친구를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좀, 속이 상할 수 있다는 그런 건데…….”
동민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의현은 와인을 한 잔 더 받았다. 평소보다 오버해서 마시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동민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누구랑 가는데?”
“아직 안 정했어. 아마, 음……. 재이?”
“재이? 정재이? 얼마 전에 큰아버지 생신 파티 때 봤던?”
“어, 맞아 걔.”
“걔랑 왜?”
동민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후원 재단에 있는 아이들의 사정이 딱하긴 했지만, 굳이 포상으로 나온 여행까지 그 애와 함께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계를 찐하게 만드는 데엔 여행만 한 게 없대.”
“사이가 많이 안 좋아? 얼마 전에 봤을 땐 괜찮아 보였는데.”
“좀 아슬아슬한 편이긴 하지.”
의현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과거에 저택 아이들과 바다에 갔을 때 이상한 일에 휘말려 한 차례 체면을 구긴 동민에게, 사실 저택의 사람들은 그다지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날 파티에서 너희 돌아가고 도희가 계속 재이 얘기하더라. 둘이 같은 반이래.”
재이와 의현 사이를 의심한 건 아니었지만, 투정이나 좀 부려 보고 싶었다. 어쨌든 그날 모종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모양 빠지는 고백을 하진 않았을 테니.
“도희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재이를 좋아하는 모양이더라고. 분위기 잘 타면 둘이 사귈 수도 있겠다. 그치?”
하지만 그런 동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와인 잔만 뱅글뱅글 돌려댔다.
“제발 좀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어?”
“걔가 누굴 좀 만났으면 좋겠다고.”
“좀 서운하진 않아? 어쨌든 네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는데…….”
타인과의 연애를 쌍수 들고 환영한다는 의현의 태도에 동민은 당황해서 오히려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아니, 그래도 생각을 해 봐. 나중에 네가 서운할 수도 있다니까?
“서운은 무슨, 살고 봐야지.”
“죽고 사는 문제까지 이어질 일이야?”
“나한텐 그래.”
의현은 가끔 동민과 다른 걸 보고 있다는 듯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물어도 가르쳐 주진 않겠지. 알고 싶지 않아도 크게 느껴지는 간극에 동민은 문득문득 상처 입곤 했다.
“저녁 먹고 집에 들어갈 거지?”
“아, 그거 말인데…….”
“응.”
“너네 집에 혹시 방 남아?”
“뭐?!”
동민은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에서 고고하게 식사 중이던 사람들이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동민을 흘긋거렸다. 하지만 고작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게 무, 무, 무슨 소리야?”
“집에 아버지 있대. 술 마시고 마주치기 싫어서.”
“저, 저, 저택에는 안 가고?”
“……시달려. 정신도 없고. 거기 이상한 애들 많아.”
“호, 호텔은?”
“아, 호텔이 있었구나. 생각 못 했어.”
“아니야! 아니야! 호텔을 왜 가!”
동민은 제가 말해 놓고 몹시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누가 혼자 쉬는데 아무 이유 없이 호텔을 가? 그런 건 사치지! 세상에 안타까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호텔 갈 돈 있으면 차라리 기부해!”
제가 말했지만 정말 어이없는 변명이었다. 동민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슬슬 의현의 눈치를 봤다. 역시 티 났나……?
“하긴 호텔 갔다가 괜히 책잡히면 곤란해.”
“그렇지! 당연해! 너는 얼굴도 좀 알려진 편이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맞아! 우리 집에서 차 타고 같이 출근하면 편하지! 가스 사용으로 인한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고!”
순식간에 기부 천사에 환경 지킴이가 된 동민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의현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조용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집에 가는 게 낫겠다.”
“맙소사!”
동민은 테이블 아래로 핸드폰을 숨기고 어느 때보다 빠르게 하우스 키퍼에게 연락을 돌렸다. 집안 정리 잘돼 있는 거 맞죠? 관리 잘되어 있어야 해요. 문제 하나라도 있으면 안 돼요. 진심이에요.
“오늘 신세 좀 지자.”
의현은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말했다. 술기운 때문에 붉어진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동민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세는 무슨! 우리 사이에! 그런 거 없어! 우리 집에서 그냥 평생 살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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