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진전이 있어야 했다. 의현은 아메리카노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서 팀장이 앉은 곳을 흘끔 쳐다보았다. 흠, 흐음-. 알 수 없는 허밍을 하며 서 팀장은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어디선가 나를 향한 열렬한 시선이 느껴지는걸?”
“…….”
“이건 혹시 의현 씨가 나를 마음에 뒀다는 뜻인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의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보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걸 어쩌지? 감히 당일 반차를 낸 신입의 마음은 괘씸해서 내가 못 받아 주겠는데?”
“지금 일주일째 그 얘기를 하고 계시는데요.”
“일주일째 괘씸하니까!”
서 팀장은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1팀 팀원들은 ‘또 시작이군’이라는 눈으로 얼른 파티션 아래로 얼굴을 숨겼다.
“오전 반차를 내긴 했어도 해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그날 열 시가 넘어서 퇴근했어요.”
의현은 서 팀장에게 항변했다. 일을 안 하고 간 것도 아닌데 일주일째 반차 이야기를 우려먹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오전에 자기 얼굴을 못 봤잖아!”
“…….”
“자기가 오전 반차 냈다는 소식을 알릴 때, 우리 팀이 얼마나 우울한 분위기였는지 자기는 모를 거야! 완전 절망에 빠졌었어!”
미치겠군.
의현은 서 팀장을 무시하고,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 다녀오겠습니다.”
“감히 팀장이 말을 하는데 중간에 끊고 회의를 간다고? 자긴 너무 건방져!”
“예?”
“하지만 그 건방짐을 계속 유지하도록 해! 아주 매력 있으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계 능력자라더니 남의 머릿속을 너무 많이 들여다봐서 정말 뇌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의현은 고개를 저으며 회의실로 향했다.
포탈이 없을 때도 현장팀은 항상 잔업에 시달렸다. 괴물의 성분 따위를 조사하는 과학 분석팀이 현장팀 직원들을 달달 볶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괴물이 나왔다고 대뜸 그걸 살아 있는 채로 생포해 오라고 하지를 않나, 자기들이 괴물을 만들었다며 그걸 좀 상대해 보라고 하질 않나…….
“……역시 이 능력은 재앙이야.”
의현은 수척한 얼굴로 앞머리를 넘겼다. 어느샌가 봄이 찾아와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아났다. 헌터부 본사 앞에 넓게 펼쳐진 공원은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해 대낮부터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다들 좋아 죽지. 나만…….”
의현은 뒷말을 삼켰다. ‘나만’이라는 글자 뒤에 따라붙을 불행한 단어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고를 수가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팜섬 여행권을 써서 정재이와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 필요는 있었다. 확실히 지금은 좀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의현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자신을 향한 정재이의 비정상적인 관심을 모를 수는 없었다.
정재이는 나를 좋아하는 건가.
“미치겠다…….”
의현은 한숨을 내쉬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사랑 비슷한 걸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의현의 예상과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 문제였다. 이렇게 농도 짙은 감정은 계획에 없었다고.
계획대로 되는 게 없는 인생이라고 해도 흘러가는 꼴을 보니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어머, 자기 여기에 있었구나!”
제 구두 끝을 내려다보며 미친 듯이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옥상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
의현은 뒤돈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회의 갔다가 안 돌아오길래 회사 관둔 줄 알았잖아.”
“관둔다고 저를 내버려 둘 회사인가요?”
“그건 그렇지. 게다가 자기는 유력 대선 후보의 아들이니까 나라를 상대로 튀면 그 대가가 어마어마하다고.”
서 팀장은 사악한 표정으로 웃으며 의현에게 다가왔다. 옥상에 있던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
“있지. 내가 좀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래 봬도 자기 상사잖아?”
“……권력 남용을 하려는 건가요? 어째 초장부터 직급 얘기를 꺼내시는데.”
“어머, 나는 진심으로 의현 씨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서 팀장은 손에 쥐고 있던 비타민 음료를 의현에게 건네주었다. 방금 사 온 건지 손에 닿는 유리병이 시원했다.
“해결되지 않는 큰 고민이 있다면,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말을 해 줘.”
“…….”
“그런 표정 짓지 마. 상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인데, 반응이 너무한 거 아니야?”
서 팀장은 억울하다는 의현의 어깨를 쳤다. 슬쩍 옆으로 밀려난 의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서 팀장에게 반문했다.
“서 팀장님도 제 고민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 아시죠?”
“……설마 자기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
“…….”
“어우, 장난. 장난-!”
도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 말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서 팀장은 가벼운 말만 툭툭 뱉었다. 이런 성격의 사람과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의현에겐 참으로 고역인 상대였다.
“있잖아, 요즘 자기가 자꾸 나를 쳐다보고 할 말이 있다는 듯 구는 이유가 뭘까? 나는 정말 궁금하네.”
“아…….”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저 시초교 조사 가고 싶습니다.”
“와. 본론으로 훅 들어오네? 뭔가 자기답다.”
서 팀장은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그래, 그 얘기를 할 줄 알고 내가 일부러 황금 같은 점심시간을 쪼개서 지금 여기에 올라온 거잖아?”
“…….”
“의현 씨가 시초교에 관심이 있다는 건 잘 알겠어.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
“궁금해. 자기는 왜 시초교를 들쑤시려는 거야? 이 일은 어떻게 생각해도 자기한테 손해야. 단 하나도 이득일 게 없어. 그런데 도대체 왜 자기는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의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서 팀장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훅 불어오는 바람에 다 풀어진 서 팀장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날렸다.
“……그걸 말하면, 저한테는 무슨 이득이 있나요?”
서 팀장은 사람 파악이 빨랐다. 그랬기에 권의현이라는 인간이 아무런 이득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뭐?”
“제 개인적인 이유를 설명해서 서 팀장님을 이해시키면, 저한텐 뭐가 남느냐는 거예요.”
하지만 남을 파악하는 부분에선 의현도 뒤지지 않았다.
“구미가 당기면 움직여 주실 건가요?”
“…….”
“저 하나를 위해서?”
의현은 서 팀장이 건네준 음료수 뚜껑을 열어 한 번에 마셨다. 꿀꺽, 꿀꺽-. 음료를 마실 때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얇은 목에 걸린 새까만 넥타이와 손목에 걸린 은색 시계. 모든 것이 권의현이라는 꽉 막힌 사람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우, 너무 섹시하다.”
“뜬금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노리고 한 거 아니었어? 날 꼬시려고 한 거잖아.”
서 팀장은 양손을 허공에 치켜든 채 의현에게 다가왔다. 무슨 변태 아저씨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난 지금 의현 씨한테 완전히 넘어갔어. 뭐랄까, 정말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야. 응! 맞아! 신선해!”
“미치겠네요…….”
“그래, 좋아. 자기한테 반한 기념으로 협상에 응하도록 할게.”
서 팀장은 의현의 양쪽 어깨를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알 사이로 광기에 사로잡힌 동공이 보였다. 의현은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여자, 정말 미친 건 아니겠지?
“대신 정확한 이유를 대야 해. 거짓말은 안 돼. 내가 정신계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네.”
“내 손 잡아. 거짓말인지 아닌지 판별할 테니까.”
“…….”
“못 믿는 얼굴이네? 남자 손 하나 잡겠다고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으로 보여, 내가?”
“네.”
“어머, 유감-.”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 팀장은 의현의 손을 잡아 깍지 꼈다. 여자 손을 잡아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작고 뼈대가 얇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이.
“자, 이제 자기가 시초교 조사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를 말해.”
서 팀장의 표정이 날카로웠다. 여기서 거짓을 말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의현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권중섭 후원 재단 아시죠? 거기에 윤화라는 애가 있어요.”
나는 거짓은 말하지 않아.
“저는 걔를 구하러 18지구까지 내려갔다 왔어요. 거기서 시초교라는 걸 처음 봤죠.”
하지만 오롯이 사실만을 말한다고 하지는 않았어.
“거기 교주는 자기가 시초 능력자라고 선포하고 다녔어요. 문맹인 그 동네 신도들이 죄다 그 말을 믿고 정신이 나가서 교주를 보호하겠다고 달려드는데, 그걸 보는 내내 소름 끼치게 짜증이 났죠.”
“……자기가 18지구에 있었다는 얘기야?”
“네.”
“하지만 내가 알기론 18지구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는데? 그때 후처리 업무에 내가 참여했었거든.”
“맞아요. 제가 다 버려두고 나왔거든요.”
“…….”
“윤화가 아닌 걸 살릴 이유가 없었어요.”
맞잡은 손의 파동은 일정했다. 의현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서 팀장은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윤화라는 애를 구하러 간 이유는 뭔데?”
“착해서요.”
“뭐?”
“제가 착한 사람을 좋아해요.”
서 팀장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자기야. 제발 말이 되는 얘길 해.”
“왜 말이 안 돼요? 제가 착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이상한가요?”
“걔가 착한 건 어떻게 알았는데?”
“예전에 만난 적이 있거든요.”
“1지구 출신인 자기가 18지구 출신의 아이를?”
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서 팀장과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마치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듯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시초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시초교가 믿고 있는 시초 능력자의 부활에 관심이 있어요.”
“시초 능력자?”
“살아 있다고 믿던데요. 그 사람들은.”
“…….”
“설령 죽었다면 곧 재림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세상이 많이 타락했으니 한번 정리하러 내려올 때가 됐다고.”
“…….”
“정확히 말하자면, 그 논리가 꽤 마음에 들어요. 저도 뭔가를 좀 믿고 싶거든요. 정신적으로.”
“자기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
“이런 말 실례겠지만, 자기 역시 시초교 신자가 된 것 같네……?”
“그런가요?”
서 팀장은 조금 놀란 듯했다. 맞잡은 손이 긴장으로 차게 식었다.
“그렇잖아. 시초교의 교리가 뭔데? 시초 능력자의 재림과 타락한 세상에서의 통한 구원.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랑 같잖아.”
“맞아요. 똑똑하시네요.”
근원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던 대화는 의현의 파격 선언으로 인해 요란하게 폭발했다.
“저 시초교 신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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