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윤화와의 하루는 즐거웠지만, 기가 빨렸다. 아니, 사실 누구랑 있더라도 기는 빨릴 것이다. 권의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권의현 자신밖에 없었다.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가면을 뒤집어써야 했으므로. 피곤을 완벽히 떼어 놓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리라.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리가 오늘 같이 논 건 비밀이야. 알겠지?”
“당연하지! 나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윤화는 땀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믿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의현은 윤화에게 저녁만 사 주고 돌아왔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그대로 행동할 계획이었다.
“윤화, 너 자꾸 늦게 다니면……. 어머, 의현 오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은영이 의현을 발견하곤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뭔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어쩜 오빠는 볼 때마다 그렇게 잘생겨져요?”
윤화는 쪼르르 거실로 달려가 메고 있던 가방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하하……. 의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들어오자마자 정재이와 마주치게 될 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이 2층에 있어요.”
“어?”
“정재이 찾는 거 아니에요?”
“맞아.”
별로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은영이 눈치채고 이야기를 한 것이 조금 머쓱했다. 의현은 슬리퍼로 갈아 신고 2층 계단을 올랐다. 윤화가 슬쩍 의현을 바라보며 수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비밀을 공유하는 게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쉬잇-.”
의현이 검지를 제 입술 앞에 대고 윤화를 향해 속삭였다.
“……뭘 조용히 해야 할까요?”
귀신같은 정재이.
“어?”
의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공부하고 있었던 건지 안경을 쓴 정재이가 계단 위에 삐딱하게 서서 의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든 유리컵에는 얼음만 가득했다.
“별로 조용히 해야 할 건 없지. 마침 너한테 인사하러 올라가는 길이었어.”
“그렇겠죠. 2층에 저밖에 안 사니까.”
“내려가려고?”
“뭐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어, 내려가.”
의현은 옆으로 비켜섰다. 벽에 걸린 그림이 의현의 코앞에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비켜 주지 않아도 옆에 공간은 충분했다. 의현은 그냥 제 얼굴을 좀 숨기고 싶었다. 설마 당황한 건 아니겠지? 정재이는 의현을 들쑤시는 데엔 도가 튼 인간이었으니, 이렇게라도 간격을 좀 둘 필요가 있었다.
“형 올라오려고요?”
“뭐, 그렇겠지?”
“올라오세요. 그럼.”
무슨 대화가 이래……?
의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던 주제에 정재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틀어 제 방으로 들어갔다.
손만 대충 흔들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또 상황이 이렇게 됐다. 의현은 제 입술을 잘근 씹으며 반쯤 열린 정재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편한 차림으로 책상 의자에 앉은 정재이는 손으로 침대를 톡톡 쳤다. 여기 앉으라는 뜻이었다.
“오래 있을 생각 없어.”
“알아요, 형 바쁜 거.”
“…….”
“형은 항상 바쁘잖아요. 쉬지 않고 계속 일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느라.”
“…….”
“그래서 얼굴 보기가 참 힘들고.”
솔직히 말하면 잠깐 대화 나눌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진 않았다. 그걸 정재이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의현은 알겠다는 듯 수긍하며 정재이의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학교는 어때?”
“형은 항상 학교 얘길 묻더라.”
“그게 제일 걱정되니까.”
“왜, 내가 학교생활 못할까 봐요?”
“부정은 못 하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다른 사람들이랑 잘 어울릴지가 걱정이긴 한데.”
정재이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박애주의자가 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람에게 관심은 있어야 상호 작용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이대로 자란다면 사람들이 떼로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게 분명했다.
“어울리는 건 생각보다 쉽던데요. 가만히 있으면 다들 무리에 끼워 줘서.”
“삭이가 들으면 화낼 말을 하네.”
“또 홍삭 얘기.”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있던 정재이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이런 반응이라도 봐야 정재이가 살아 있는 사람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 무슨 얘길 할까? 네가 나누고 싶은 주제가 뭔데?”
짤랑-.
얼음이 녹으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의현이 흘끔 유리컵을 쳐다보자, 정재이는 손으로 슬쩍 컵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스윽- 컵이 옆으로 밀려났다. 바닥엔 진득한 물 자국을 남기고서.
“아침에 일어났는데 형이 없어서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알아요?”
“……아침에?”
뜬금없는 말에 의현이 정재이와의 마지막 기억을 끄집어냈다. 차동민 큰아버지를 만나러 파티에 간 날 저녁, 이 방에서 같이 잤던 걸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아, 그때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났어.”
“와. 반응 봐.”
“왜?”
정말 모르겠다는 의현의 표정에 정재이는 억울하다는 듯 제 머리를 흩트렸다.
“내가 애원 안 하면 나는 형 얼굴 보기도 힘든데, 형은 항상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라…….”
뭐라고 말하려던 의현은 입술을 꽉 물었다. 부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원까진 아니더라도 요즘은 정재이가 붙잡지 않으면 길게 교류할 일이 없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형이 하라고 하는 건 다 해요. 학교생활 잘하라고 해서 잘하고, 홍삭이랑 싸우지 말하고 해서 싸우지도 않고. 심지어 이 짜증 나는 저택 안에서도 쥐 죽은 듯 살고 있는데.”
“…….”
“그래도 형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
“뭘 해야 형이 좀 좋아할까요? 내가 진짜 모르겠어서 그래요.”
“…….”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형이 나한테 관심을 좀 가져 줄까요?”
“…….”
“하라는 걸 하지 말아 볼까요?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나?”
정재이의 애정은 항상 빗나가 있었다. 의현이 받고자 한 사랑은 엄밀히 따지면 가족애와 비슷했지, 이런 식의 음울하고 집착적인 것은 아니었다.
뭐지, 이상한데? 등허리가 싸해지고 절로 땀이 흘렀다.
어디선가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소리치던 김태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실패라고? 하지만…….
……아니야. 잘 생각해 봐.
좋게 생각하면 완전히 망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도 사랑의 한 종류였으니까.
어쨌든 정재이가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될 일이다. 이 사랑이고 저 사랑이고 관계없다. 그냥 지겨워 죽겠는 13일에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착하게 살아. 재이야.”
“…….”
“어긋나지 마. 나 그런 거 싫어.”
의현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감정에 잡아먹히지 마. 그럼 보일 것도 안 보이게 되니까.
“너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가만히 있어.”
“…….”
“네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 될수록 난 좋아.”
여태까지 진창을 구른 삶을 대변하는 하나의 문장이었다.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무능력한 정재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의현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정재이와 눈을 마주했다. 온 우주가 담긴 정재이의 반짝이는 눈에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형은…….”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정재이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서럽게 울었다.
“……형은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어.”
“…….”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좋아요? 도대체 왜? 왜요?”
“…….”
“나는 형 때문에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마음먹는데, 형은 그럴수록 내가 싫어져요?”
“…….”
“내가 형한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
“……도대체 왜 나를 데리고 온 거예요?”
얼굴이 새빨갰다. 이러다가 과호흡이라도 올 것만 같았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의현은 그저 천천히 다가가, 절망하는 정재이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울지 마, 재이야.”
피부가 맞닿은 정재이의 몸이 작게 떨렸다.
내가 지금 얘 인생을 손에 쥐고 장난치고 있는 건가? 의현의 머릿속에 짧은 의문이 스쳤다.
미약한 죄책감이 정신을 좀먹을 때마다 의현은 이젠 잘 기억나지도 않는 자신의 첫 죽음을 떠올렸다. 언제까지고 이런 삶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 언제까지고…….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의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는 모르겠지. 너 하나 때문에 세상이 몇 번이나 리셋됐다는 거. 멀쩡히 살던 사람들이 너 하나 때문에 죄다 죽었다가 살아나길 얼마나 반복했는지.
어떤 날은 네가 무섭고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네 목을 조를 수는 없었지. 다시 시작할까 봐 무서웠으니까. 그래,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한 수많은 날을 후회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야.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그런데 재이야, 나는 아마 이번에도 태연하게 너를 죽일 수는 없을 거 같아.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난 너를 교화시킬 거니까.
“재이야. 네가 제일 소중해.”
“…….”
“형은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부탁이야.
무감하게 모든 걸 저버리지 마.
제발 사람을 사랑해.
* * *
“으으…….”
의현은 제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번쩍 눈을 떴다. 따뜻한 피부와 귓가에 닿는 숨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손을 올려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네 시, 알람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깼다.
오늘은 월요일, 출근을 해야 했다. 자율 출근제였지만 주어진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하루 종일 일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으로 침대를 짚은 의현의 머릿속에 순간 짧은 문장이 지나갔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형이 없어서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알아요?’
어제 서러워 죽겠다는 듯 우는 정재이를 달래 주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또 이 침대 위였다. 이번엔 정말 자고 갈 생각이 없었는데, 상황은 항상 이상하게 흘렀다.
“…….”
의현은 다시 침대 위로 누웠다. 오늘 또 쌩하게 가 버렸다간 나중에 정재이에게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혀엉.”
“응.”
“어디 가면 안 돼…….”
침대가 한번 작게 일렁거렸다. 잠에 취한 정재이가 의현의 몸을 꽉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흩어진 앞머리와 퉁퉁 부은 눈을 쳐다보며 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갈 테니까, 더 자.”
“……진짜지?”
“어.”
“알겠어…….”
정재이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타인의 성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는 건 의현에게 몹시 낯선 일이었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서 팀장의 번호를 찾았다. 오늘 오전에 반차를 내겠다고 연락했다. 새벽 네 시였는데도 답장은 1초 만에 날아왔다.
[자기! 나를 버리는 거야? 너무해! T-T –서팀장]
이후에도 몇 개 더 연락이 왔지만, 의현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은 채로 멀뚱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나를 왜 선택했어? 네가 그날 나를 선택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왜 하필 나를 골랐어!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나를 데리고 온 거예요?’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거는 다시금 의현의 발목을 붙들었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얼른 자요. 딴생각 말고.”
불쑥 나타난 정재이의 손이 의현의 눈앞을 가렸다. 새벽녘의 미약한 빛이 차단되고 비로소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나 안 졸려.”
“눈 감으면 잘 수 있어요.”
“…….”
“눈 감고 다시 잠들어요.”
아무 생각 안 하고 잠들 수 있을 테니까.
정재이는 작게 의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뱀 같은 자식.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의현은 눈을 감은 채 정재이 욕을 실컷 했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정말 그러다가 곧 다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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