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윤화는 의현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듯 계속해서 운동장을 뱅뱅 돌았다. 두 바퀴 정도 참고 따라가던 의현은 윤화가 이 장난을 절대 멈추지 않으리라 직감했다. 얜 애였다. 애란 무엇인가? 장난을 밥 먹듯이 하는 무의식적 존재.
“으악-!”
“밥 먹고 놀아. 키즈 카페에 시간 넣어 줄 테니까.”
“형아 비겁해! 나는 능력 안 썼는데!”
“너는 네 능력을 죽을 때까지 나한테 쓸 수 없을걸?”
“그건 그렇지만……!”
윤화는 억울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불 능력은 아주 다양한 곳에서 활용됐지만, 인간에게 직접 불을 붙일 일은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어디든 사용 가능한 의현의 능력이 더 쓸모 있는 것 같긴 했다.
“그럼 나 형아가 해 주는 밥 먹을래!”
“난 밥 못해.”
의현이 매몰차게 윤화의 말을 거절하자, 윤화는 허공에서 더 격렬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해 줄게! 나는 밥 엄청나게 잘해!”
“어린애가 무슨 요리를 하겠다고. 사 먹자니까?”
“사 먹기 싫어! 형이 요리를 해 줘! 아니면 내가 요리를 하게 해 줘!”
“……괜히 왔다.”
김태원 때문에 과거 윤화가 떠올라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윤화는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크게 난리를 피웠다. 정재이는 조용해서 어딜 가나 문제가 없었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이봐요! 거기!”
남색 모자에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학교 경비 직원이 의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다가왔다.
“아이를 괴롭히면 안 되지요! 대낮에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아니, 이건…….”
“맞아요! 형은 얼른 저를 내려놓고 요리를 해 주러 가야 합니다!”
윤화는 뻔뻔스럽게 직원의 말에 동의했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긴 했다. 의현이 한숨을 쉬며 윤화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윤화는 의현의 허벅지를 끌어안으며 히- 웃었다. 인디언 보조개가 패어 가뜩이나 어린 얼굴이 더 어려 보였다.
“아이야, 혹시 이 사람이 정말로 너를 괴롭히는 거니?”
직원은 다리를 굽히고 앉아 윤화와 눈을 맞추었다.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능력자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해도 윤화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까.
“아니요! 형은 나 구해 줬는데요?”
“구해 줬다고?”
“네! 저는 어릴 땐 작은 집에 살았는데, 거기 사람들이 매일 저 괴롭혔거든요. 근데 형이 갑자기 와서 저 데리고 나왔어요! 거기서 엄청나게 큰 괴물들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막 이빨을 으르렁대면서, 막, 막-!”
“그만.”
의현은 윤화의 입 앞으로 가볍게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얘기를 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둘이 원래 아는 사이고 괴롭히지 않는다는 거지?”
“그럼요! 저는 형을 좋아하는데요! 그리고 아마 형도 저를 좋아할걸요?”
의현이 저를 좋아할지 아닐지 확신이 없는데도 당당하게 말하는 게 좀 웃겼다. 의현은 실소하며 윤화의 팔을 잡았다.
“빨리 와. 여기서 이러다가 날 새겠다.”
“형이 요리 해 주는 거 맞지?”
“……너나 정재이나 진짜 이상할 정도로 집요해.”
애들을 잘못 키운 건가? 육아 책을 섭렵하며 그래도 제대로 좀 키워 보려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저도 모르게 아까워졌다.
밥을 해 먹이기 위해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마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들어와서 구경한 건 처음이었다. 가장 쉬운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오므라이스였다. 윤화는 계속해서 우와! 우와! 하고 소리쳤다. 마트 처음 와 본 애처럼.
“뭔가 이상한데…….”
의현은 계란 한 판을 들고 멀거니 섰다. 다들 뭘 밀고 다니는데, 의현만 맨손으로 짐을 들고 있었다.
“저기, 학생. 그렇게 들고 다니면 짐을 얼마 못 들지!”
“네?”
“카트 없어요? 카트 안에 넣으면 편할 것을…….”
의현 혼자 다닐 때는 잘 모르는 타인이 말을 걸 일이 많이 없었는데, 윤화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어디서든 사람들이 쉽게 말을 붙여왔다.
“……그건 어디서 가져오는 건데요?”
“들어올 때 못 봤어? 바로 앞에 있는데.”
“그것도 파는 건 줄 알았어요.”
“마트에 처음 와 봐? 에휴, 학생이 이렇게 어수룩하면 나쁜 사람이 꼬이기 딱 좋다니까! 밥은 먹었어? 이리 좀 와 봐요! 이것 좀 맛보게!”
윤화는 벌써 달려가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있었다. 저기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의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동생이랑 장 보러 나온 거예요? 얼굴은 영 딴판으로 생겼는데.”
“네, 뭐…….”
“동생이 성격이 밝고 아주 예쁘네. 이건 비매품으로 나온 건데, 이거 하나 사면 공짜로 내가 넣어 줄게요.”
“그게 뭐죠?”
“건강 주스 몰라요? 이거 마시면 내일 아침에 힘이 펄펄 난다니까? 학생 얼굴이 영 피곤하게 보여서 내가 특별히 넣어 주는 거예요!”
“형아! 우리 이거 사자! 건강 주스!”
어디서 말하는 법을 배운 건지, 아주머니는 이 비슷한 수법으로 건강 주스 외에도 요거트와 치즈까지 의현에게 팔아 재꼈다.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장을 볼 줄은 몰랐다. 윤화가 갖고 싶다는 장난감까지 몇 개 집어넣다 보니 어느새 카트가 꽉 찼다.
“이래서는 완전 범죄가 불가능하다고…….”
“안전 범죄? 왜 안전해야 하는데?”
“안전이 아니라, 완전. 완전 범죄. 재이가 알면 화낼 게 분명하니까.”
물건이 너무 많아,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윤 기사까지 불러야만 했다. 의현은 예약해 두었던 장소까지 이 물건들을 들고 가 요리를 끝낼 자신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그냥 저택 안에서 만날걸…….
“재이 형한테는 말 안 할게! 우리 둘이 비밀로 하자. 쉿-!”
윤화는 검지를 제 입에 가져다 댔다. 사실 비밀로 한다고 해도 정재이가 어떻게든 알아낼까 봐 두려운 거였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으니 되돌릴 순 없었다.
“그래. 꼭 비밀로 해야 해. 알겠지?”
의현은 윤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일이 알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여한 주방은 깔끔하고 따뜻한 분위기라 특별히 뭔갈 하지 않아도 괜히 기분을 들떴다. 저택은 깔끔함을 강조하기 위해 대부분 흰색이었으니, 이렇게 샛노란 타일이나 밝은 커튼들은 좀 낯선 것이었다.
“그런데 형, 헌터 할 때 칼은 안 쓰는 거야?”
“칼은 안 써.”
“칼이 흔들리는데?”
“그래도 할 수 있어.”
의현의 손은 방금 막 걷기 시작한 기린처럼 바들거리다가 이내 제 손가락을 싹 긁어 버렸다.
“형아! 피-!”
“아, 이게 왜 안 되지? 다들 쉽게 하던데…….”
이게 뭐 어려운 거라고, 채소 하나를 못 썰어서 피를 보는 게 자존심 상했다. 윤화는 울상을 지으며 서랍 속에서 밴드를 가져와 의현의 앞에 앉았다.
“내가 미안해. 형이 요리를 못 하는지 몰랐어…….”
“안 해 봐서 그래. 하면 잘해. 형이 못 하는 게 어딨어.”
의현은 요리 따위 못한다며 빼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자존심을 세웠다. 울상 짓는 건 윤화였다.
“아니야. 형아 사 먹자. 응? 내가 미안해.”
“아니야. 요리? 형이 해 줄게.”
“아니! 아니야! 형!”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윤화도, 하다못해 의현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의현은 흐르는 물에 대충 피를 닦은 뒤 밴드를 손에 둘둘 감았다.
“형이 오므라이스 하는 거 잘 봐. 진짜 맛있게 해 줄 테니까.”
“형 제발 사 먹자! 나 오므라이스 싫어! 제일 싫어!”
“아깐 좋다며? 봐봐, 감자랑 당근을 썰 때는 이렇게…….”
의현은 바들거리며 다시금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 윤화는 고문당하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머지않아 의현이 다시 다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와씨, 열받네?”
네모반듯하게 잘려야 할 감자는 자꾸만 이상한 모양으로 잘렸고, 당근은 딱딱해서 힘을 줘도 엇나갔다. 적당히 힘을 주는 게 좀 어려웠다.
빠각-.
요리하는 공간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윤화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채소 써는 건 안 될 것 같아.”
두꺼운 나무 도마가 반으로 잘려 있었다. 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두 개가 된 도마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새 손가락에 새로운 상처가 나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형!”
윤화는 다시금 밴드를 들고 의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형한테 요리해 달라고 안 했을 거야. 나는 형이 다 잘하는 줄 알아서……. 윤화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이런 말을 하면 의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형이 다치면 너무 속상해…….”
윤화는 의현의 손을 붙잡고 살살 밴드를 붙여 주었다. 툭 건들면 울 듯한 얼굴에 의현은 금세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내가 못할 줄 몰랐어.”
“원래 처음에 하는 건 다 못해, 형아. 처음부터 잘하는 게 이상한 거야.”
“나는 다 처음부터 잘했어.”
“그럼 형은 이상한 사람이네.”
“뭐?”
“맞아. 형은 좀 이상한 사람이야.”
윤화는 저 혼자 말하며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도마 하나 박살 냈다고 지금 이러는 건가? 의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윤화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형이 못하는 게 있어서, 나는 되게 좋다? 웃기지?”
“…….”
“이런 말 하면, 형이 싫어할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윤화는 밴드가 붙여진 의현의 손가락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형이 못하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
“내가 요리 열심히 배울게! 그래서 형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
“…….”
“그럼 되겠지?”
윤화는 의현이 다친 손을 작게 호- 불어 주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자기는, 악당이 아니야.’
왜 갑자기 서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서 팀장은 말했다. 본성이 나쁘더라도 착한 척 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원래 착한데 착하게 사는 사람이랑 결과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맞아. 어쩌면 그럴 수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계속 선의를 갖고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 의현에게 덕지덕지 들러붙은 징그러운 업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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