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결국,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김태원을 보러 가기 전에는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 뭔가 거대한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권의현은 어김없이 회사에 출근해 오전과 오후 시간 내내 회의실에 붙잡혀 있었으며 당장 다음 이번 주에만 외근이 2건이나 잡혀 있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그 커다란 상실감을 기릴 적당한 시간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권의현의 인생엔 그것마저 사치였던 모양이다.
“자기, 요즘 피곤한 건 아니지?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나 이런 거 너무 걱정되잖아.”
서 팀장은 전혀 걱정스럽지 않은 얼굴로 의현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퇴근이나 좀 시켜 주시죠.”
“어머, 그건 안 될 일이야. 지금 이곳저곳에서 자기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도 알지?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모두 굽어살펴야 해요.”
꽤 박애주의자인 척했지만, 어차피 지난번의 일로 서 팀장이 온전히 사람만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똑똑히 알았다.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의현의 물음에 서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팀원들이 야식을 사러 나가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 있었다.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 아니라면 뭐든지.”
“조금 개인적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궁금한데?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서두를 그렇게 뗀 거라면 합격점을 주고 싶어.”
서 팀장은 바퀴 달린 의자를 질질 끌고 순식간에 의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짧게 자른 머리는 탈색한 지 오래되어 조금 푸석했고, 코끝에 걸린 안경에는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형광 연두색의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지만 한 차례 꼰 발끝에 걸린 구두는 짙은 분홍색이었다. 다소 괴상한 차림새.
“지난 부서 통합 회의 때 말이 나왔던 시초교 관련 조사 말입니다. 아쉬우면 다시 오게 돼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
“그건 혹시 다시 올 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가요?”
서 팀장의 태도는 강경했으나 했던 말을 생각하면 어딘가 여지가 보였다. 그건 아예 안 하고 싶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더 긁어 보라는 신호같이 느껴졌지.
“글쎄, 어떤 쪽이 맞을까나…….”
서 팀장은 모호한 표정이었다. 샐쭉 웃는 얼굴에서 ‘어쭈, 이것 봐라?’ 하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의현은 일부러 더 찔러 보기로 했다.
“만약 다른 팀에서 맘에 드는 조건을 가지고 온다면, 조사에 협력하실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으하하! 의현의 말에 서 팀장은 큰 소리로 웃었다. 복도에 지나다니던 사원들이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흘긋 쳐다볼 정도로 크게.
“자기, 너무 웃긴다. 지금 내가 조건 하나 때문에 간을 보고 있는 줄 알았던 거야?”
“그게 아니면 뭔가요?”
얼핏 무안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의현은 침착했다. 이건 서 팀장이 자초한 상황이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게끔 말을 해 놓았으니 원하는 대로 반응해 줄 수밖에.
“물론 조건이 아쉬운 건 사실이야. 자긴 시초교가 그냥 시골 촌구석에 있는 사이비 종교인 줄 알지?”
“그럼 아닌가요?”
“자기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대개가 다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법의 눈 밖에 나기가 쉽지. 종교의 영역은 가뜩이나 엮이면 피곤할 일이 생기는데, 게다가 사이비 종교? 심지어 피해자가 시골 저 구석에 사는 사람들이야? 에라, 모르겠다! 그냥 못 본 척하자!”
서 팀장의 목소리는 점점 활기를 띠었다. 원래 이상한 사람이긴 했지만, 눈에서 광기 비슷한 게 보여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혹시 이 사람도 시초교 사람 아니야? 김태원이 딱 이런 눈을 했던 것 같은데……. 의현이 뒤로 슬슬 물러서자,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서 팀장이 히죽 웃으며 의현의 의자를 발로 탁 붙잡았다.
“작정하고 거길 파려면, 가진 걸 다 내놔야 한다고.”
“…….”
“자기는 지금 자기가 가진 걸 다 내놓을 수 있겠어? 고작 그거 하나를 위해서?”
“…….”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아?”
“…….”
“절대 안 될 일이지! 절대 안 된다고!”
서 팀장의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었다. 꼭 울 것 같았다. 의현은 서 팀장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시초교 얘기를 하면 다들 억울해 죽으려고 하네요. 울 것 같은 얼굴로 눈 똑바로 치켜들고 소리 지르고 사람 협박하고.”
“…….”
“이쯤 되니까 거기에 얽매여 있는 게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
“뭘 겪었고, 뭘 봤고. 얘기는 하나도 안 하면서, 도대체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예요?”
미칠 것 같은 상황만 놓고 본다면 의현은 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억울해 죽겠어? 야, 나도 그래. 그럼 우리 인생 바꿔서 살자. 너는 적어도 죽고 싶을 때 죽을 수라도 있지, 나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이게 사는 거냐? 나도 짜증 나. 나도 열 받아.
“뭐가 어려워서 주저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
“가진 걸 다 버리라고요? 나는 애초에 갖고 싶었던 적도 없었어요.”
“…….”
“누군 여기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렸을지도 모른다고요.”
“…….”
“그러니까 영영 숨길 건지, 밖으로 드러낼 건지 하나만 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하겠지만, 제발 네가 알아주길 바란다는 말투로 사사건건 여지 남기지 말고.”
감정 과잉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상사를 상대로 이런 식의 말이라니……. 이건 확실히 의현의 실수였다. 김태원의 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상태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서 팀장을 마주했더니 내내 참고 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자기는 성격이 정말 별로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서 팀장의 얼굴이 마치 김빠진 탄산처럼 푸시시 식었다.
“그런 얘긴 너무 많이 들었어요.”
“많이 들었으면 고칠 법도 한데……. 어떻게, 성격을 좀 바꿀 마음은 없는 거야?”
“이제 와서 바꾸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을까요.”
“뭐, 그럴 수도 있어. 그리고 자기 성격은 내가 보니까 타고난 것 같아. 약간 쓰레기 같은? 응, 맞아.”
심한 말을 해 놓고 서 팀장은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복도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식 사러 나간 팀원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자기 같은 성격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아.”
“병 주고 약 주시네요.”
“신선하잖아. 착한 척하는 게 귀엽고.”
서 팀장은 뒤를 흘끗했다. 팀원들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본성이 나쁘더라도 착한 척하고 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원래 착한 사람이랑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으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모든 문제는, 본성이 나쁜데 나쁘게 사는 사람 때문에 벌어진다고.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런 새끼를 악당이라고 부르는 거지.”
서 팀장의 뒤로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팀장님! 또 의현 씨 괴롭히고 계셨어요? 못살아 정말.”
“의현 씨, 밥 먹고 해요. 배고프죠?”
서 팀장은 못 이기는 척 뒤로 물러나 의현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이 벌어졌다가 금세 오므라들었다.
‘자기는, 악당이 아니야.’
우습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 * *
며칠을 야근 때문에 회사에 처박혀 지내다가 겨우 시간을 내 윤화의 학교에 방문했다. 일전에 김태원을 보러 수감 시설에 방문했던 날 이후로 윤화가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이다.
“형아-!”
윤화는 제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저만치서부터 뛰어왔다. 바람결에 빨간 머리카락이 꽃잎처럼 펄럭였다.
“형이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잖아!”
“용케 한 번에 찾았네.”
“당연하지! 멀리서도 형만 반짝반짝 빛나는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윤화는 씩 웃으며 의현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애답게 힘이 엄청나서 의현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오늘 왜 왔냐면, 윤화 너 선물이랑 밥 좀 사 주려고.”
“정말?”
“뭐 필요한 거 있어?”
“필요한 건 없는데…….”
하긴, 권중섭의 사랑을 독차지한 윤화는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필요한 게 생기기 전에 이미 손에 쥐어지는 삶이니, 원하는 것도 없을 테지만…….
“형이랑 하는 건 뭐든지 다 좋아! 밖에 춥지? 내가 형 손 호- 해 줄게.”
윤화는 의현의 양손을 붙잡아 입김을 호호 불어 주었다. 간지러운 숨결이 손에 닿는 순간, 오래전 기억이 떠올라 의현이 화들짝 손을 뗐다.
“왜, 형 싫어……?”
윤화는 턱에 호두를 만들며 울먹거리는 얼굴로 의현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의현은 다시 제 손을 윤화의 앞에 고이 내밀었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그래서 놀랐어.”
“형아 놀랐어?”
“형은 이런 게 안 익숙해. 그러니까…….”
지금의 윤화는 작고 예전을 기억하지 못했다. 시간이 더 지나서 윤화의 키가 많이 커져도, 의현의 지난 삶에 큰 전환점을 줬던 그 윤화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아쉽나? 좀 그런 것 같기도.
“그래도 괜찮아, 형아!”
“응?”
“형이 익숙해질 수 있게 내가 자주 해 줄게.”
윤화는 의현이 차가운 손을 붙잡아 계속해서 호- 여린 숨을 불어 주었다. 의현은 쪼그려 앉아 통통한 윤화의 볼을 훔쳐보며 작게 웃었다.
“……너 같은 사람도 세상에 사니까. 망하라는 법이 없나 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애들은 모르는 복잡한 게 있어.”
“나 애 아니야! 나 이제 중학교도 들어가는데?”
“그래, 이제 겨우 중학교 들어가겠지.”
능숙하게 투정을 받아 낸 의현은 윤화의 가방을 손에 옮겨 들었다. 무거울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것처럼 가방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너 책을 안 들고 다니는 거야?”
“요즘엔 다 사물함에 놓고 다니지, 누가 책을 무겁게 가방에 가지고 다녀? 으하하!”
윤화는 의현을 놀리듯이 가방을 다시 빼앗아 들고 운동장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날이 추우니, 얼른 실내에 들어가서 밥도 좀 먹이고 인형 같은 것도 좀 사 주려던 의현의 잔잔한 계획은 순식간에 개박살이 났다.
“형아! 나 잡아 봐라!”
“너 잡히면 진짜 가만 안 둬.”
“으아악-!”
웃고 있었지만, 의현의 눈에 살기가 등등했다. 윤화는 악 소리치며 운동장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춥긴커녕, 종일 뛰어다닐 생각에 땀부터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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