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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41화 (41/185)

41화.

김태원을 보러 갈 날짜를 확정했다. 평일은 미칠 듯이 밀려드는 업무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주말 오후로 시간을 정해 동민에게 알렸다. 업무에 치이는 건지 한참 답이 없던 동민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의현에게 답장을 보냈다.

“첫 외근 어땠어, 의현 씨?”

“피곤했습니다.”

“그게 끝이야? 뭐 더 실감 나는 소감 같은 건 없어? 괴물이 어땠다든가 사람에 대한 정이 떨어졌다든가. 뭐 그런 신입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평범한 후기 같은 거 말이야.”

오늘은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부서 통합 회의를 해야 해서 단체로 풀떼기나 씹고 있었다. 신입 사원 놀리는 재미로 사는 서 팀장은 샐러드 도시락을 들고 의현의 주변을 서성였다.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너무 재미없이 사는 거 아냐? 우리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윗선에서 시키는 일은 닥치고 다 해야 하는 따까리 같은 인생이라고 해도! 행정팀에서 아무리 우리한테 업무를 떠넘기고! 지원팀에서 우리를 면박 주고! 보안팀에서 지원을 요청해도!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가치가 있다 이 말이야!”

“큼, 큼…….”

행정, 지원, 보안 각 1팀 팀장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대놓고 눈치를 주는 것도 어찌 보면 능력이었다. 의현은 모른 척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의현 씨, 자기의 이 초췌한 얼굴을 봐. 고작 몇 주간 일했다고 이렇게까지 얼굴이 팍 상할 수가 있냐고! 우리 부서의 꿈이자 희망인 이 고급 얼굴이!”

외면하는 의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서 팀장은 1인극에 열중했다.

“우리 현장팀이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늘 회의에서 양심 없게 협력 요청을 하진 않으리라 나는 믿어. 다 같이 돕고 사는 건데, 세상은 아직 살 만하잖아?”

“…….”

“자! 그래서 오늘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서 팀장은 혼신의 1인극을 끝내고 자리에 앉아 다시 풀 쪼가리를 우물우물 씹었다. 정신계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이 사람도 아마 사이비 교주가 되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음, 일단 황금 같은 점심시간을 빼서 흔쾌히 회의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행정팀 팀장은 가볍게 묵례를 했다. 점심시간을 통째로 빼앗긴 현장 1팀 직원들의 표정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이번에 부서 통합 회의를 제안한 이유는, 시초교와 관련된 일이 꽤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시초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단어에 의현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김태원과 시초교 생각만 줄곧 하며 보낸 주말은 공허하기 그지없었고, 심지어 그 생각은 현재도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포탈 발생 신고에서 수상한 점이 발견되었는데요. 아무래도 이 부분을 좀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이죠.”

행정 1팀 팀장은 준비해 온 자료를 회의실 중앙에 띄웠다.

“하층 지구로 내려갈수록 포탈 신고율이 극명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신고율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그래프는 한눈에 알아보기 쉬웠다.

“그 이유를 하나로 집어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문화 차이 영향이 가장 크다고 추측하고 있는데요. 하층 지구에 속하는 10지구 이상을 조사한 이 표를 보시면, 교육 수준이 낮은 뒤쪽 지구로 갈수록 신고율이 더 낮아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긴 18지구가 그렇게까지 아무것도 없는 곳일 줄, 의현도 이번에 윤화를 구하러 가지 않았으면 아예 몰랐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었지만, 1지구 사람들이 굳이 그 아래까지 내려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에 저희는 최근에 포탈 신고가 접수된 하층 지구 중 한 곳을 뽑아 조사에 착수해 보려고 합니다. 본 조사의 목적은 하층 지구의 신고를 막는 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 인데요. 상부에 올릴 명목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실제로는?”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지루해 죽겠는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서 팀장은 뭔가 뒤 구린 건수가 포착되자마자 눈을 빛냈다.

“시초교에 대한 조사를 좀 해 볼까 합니다. 그냥 하층 지구의 작은 종교라고 보기엔 수상한 점들이 매우 많기도 하고, 시초교가 포탈 신고 자체를 막는 것 같은 낌새도 포착돼서요.”

“뭐라고? 종교 단체를 들쑤시자는 거야? 에이, 나는 싫어-.”

뭔가 재밌는 일이 있을 줄로 기대했던 서 팀장은 금세 김이 식은 듯 손을 휘저었다. 이런 반응일 줄 몰랐다는 듯 행정 1팀 팀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왜, 왜 싫다는 겁니까?”

당황하긴 의현도 마찬가지였다. 어울리지 않게 대화에 끼어들며 의현이 서 팀장을 바라보았다.

“어머, 의현 씨 종교에 관심 있어?”

우연이라기엔 자꾸만 의현의 인생에 ‘시초교’라는 수상쩍은 단어가 끼어드는 게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있나? 조금 더 파 봐야 하나? 의현의 초조함을 눈치챈 서 팀장이 예리하게 히죽거렸다.

“관심은 없습니다.”

“그럼 뭐, 새삼스럽게 빈부 격차라는 엄청난 사회 현상에 대해 파헤치고 싶다는 정의로운 마음이라도 생긴 거야?”

의현의 집안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기득권층이라고 비꽈도 할 말이 없었다.

“자기야, 있잖아. 뭔가를 뒤집으려고 할 때 말이야. 누군가는 아주 작은 불씨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거든. 변혁을 위한 작은 불씨라, 그 얼마나 낭만적인 말이야?”

“갑자기 무슨…….”

“하지만 생각을 해 봐. 정말 불씨 하나로 가능할까?”

서 팀장은 의현을 보며 씩 웃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얼굴에는 피곤이 만연했지만, 확실히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사람답게 살기가 등등했다.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기에도 피곤하잖아. 잠도 못 자고 일하는 현장팀 사람들의 불쌍한 인생도 생각해 줘야지. 무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다른 팀 사람들이 키보드나 띡띡 두드릴 때, 우리들은 그 불쾌한 포탈 안에 기어들어 가서 괴물을 상대해야 하잖아?”

“저기요, 서 팀장님. 이건……!”

“알아요. 어떤 의미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왜 하필 현장 1팀을 이 자리에 앉혀 놨는지도요.”

서 팀장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항상 실실 웃고 다녀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 몰랐는데,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쭙잖은 이유로 종교 시설 들쑤시고 싶은 마음, 나는 추호도 없어요. 어차피 맨 앞에 서야 하는 건 우리 현장팀 아닌가요? 종교인들에다가 국회 의원들, 게다가 인권 단체들까지 전부 피켓 들고 밖으로 나오면 참 볼만하겠네요.”

서 팀장의 말을 끝으로 회의는 잠정 중단됐다. 분위기상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는 게 더 맞을 수도 있었다. 다른 팀 팀장들은 언짢은 얼굴로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나중에 마음 바뀌면 알려 달라’고 말했다.

“점심시간 좀 남았는데, 밥 먹으러 갈 사람?”

“……저, 팀장님 그래도 저분들 지위가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회의를 끝내도 될까요?”

유 대리가 복도 쪽을 슬쩍 눈치 보며 물었다. 반절도 먹지 않은 샐러드 팩 뚜껑을 닫으며 서 팀장이 예의 그 나사 빠진 얼굴로 웃었다.

“신경 쓰지 마. 아쉬우면 다시 오게 되어 있거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세상 흘러가는 거 보면 뭔가 바뀌려나 싶다가도 또 그건 어렵나 싶고…….”

헌터부라는 큰 부서가 있었지만, 각각의 팀들은 독립적으로 업무를 맡아 수행했다. 그러니 각 부서가 본질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신경 써서 교류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가 없었다.

“바뀌는 거야, 뭐 언젠가 바뀌지 않겠어? 사람들이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구정물이 되면, 자의든 타의든 뒤집히기 마련이니까.”

“팀장님은 역시 어려운 말을 하시네요.”

“어렵나? 생각보다 쉬워. 자기들, 너무 멀리 보지 마. 어차피 현장 뛰는 우리는 그 전에 죽을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그냥 가까운 것만 보고 살자고. 응? 그런 의미에서, 자! 오늘 점심 내가 쏜다! 대신 얼른 먹고 들어와야 해!”

서 팀장은 제 카드를 꺼내 흔들었다. 현장 1팀 직원들은 샐러드 도시락을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서 팀장을 따라 일어났다.

“의현 씨는 안 가?”

“저는 좀 쉬려고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허약 체질이라니까. 그럼 잠깐이라도 푹 쉬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간 후에야 정적이 찾아왔다. 의현은 테이블 위로 얼굴을 묻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과거에도 이런 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나? 그때는 그냥 되는대로 살아서 뭔가를 했던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층 지구고 뭐고 그런 건 제대로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모르겠다…….”

조금씩 바뀐 선택의 결과였다.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 * *

스무 살 이후의 평일은 항상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았다. 외근 외에도 자잘하게 넘어오는 서류 처리 외에 조사가 끝난 괴물을 처리하는 일에도 현장팀의 직원들은 항상 차출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도 퇴근하면 항상 어두운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가끔 있는 권중섭에게 인사를 하고, 형식적으로 요즘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하면 권중섭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오히려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게 더 편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방으로 돌아오면 옷을 벗고 바로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그고 나오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와 밀린 잔업을 좀 하면 금세 잘 시간이 되어 있다.

[오늘 큰아버지께 연락받았는데, 토요일 오후 2시 괜찮다고 하시네. 미리 말해 놓는다고 하셨어! -차동민-]

퇴근할 때 온 문자에 답장을 보내며 의현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미래를 본다고 했는데, 김태원은 내가 자기를 찾아오는 두 번째 미래도 봤을까?

[그래, 고맙다. 뭐 부탁할 일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뭐 바라고 한 거 아니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지금 퇴근한 거야? -차동민-]

[아니, 퇴근은 두 시간 전에. 지금 자려고.]

[그래, 피곤하겠다. 얼른 자. 내일 회사에서 보자! -차동민-]

[너도 잘 자.]

영양가 없는 말이었지만, 받은 게 있으니 핸드폰을 꾹꾹 눌러 열심히 답장을 해 주었다.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 봐도 명확하게 그려지는 그림이 없어, 상상은 항상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었다. 의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너한테 잘 자라는 소리 들어서, 진짜 잘 잘 것 같아! -차동민-]

답장이 끊긴 줄 알았는데, 문자가 하나 더 날아왔다. 의현은 핸드폰 화면을 빤히 쳐다보다가 픽 웃었다. 요즘 머리가 터질 정도로 신경 쓰이는 것들이 많았는데, 동민은 여전히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토요일 두 시…….”

그리고 바로 그 친절을 빌미로 잡아 혹시 폐를 끼치게 될까, 아주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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