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단순히 저택에서 잠을 자는 것뿐인데, 정재이는 이러한 행위가 굉장히 의미 있다는 듯 굴었다. 한창때 애정을 못 받고 자라서 그럴까. 하지만, 의현 역시 항상 방치되기 일쑤였는데 이런 식으로 결핍된 애처럼 굴지는 않았다. 얜 도대체 뭐가 문제지?
반신욕 할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갔고, 의현은 왁스로 올린 머리와 향수에 적셔진 몸을 씻고 복도로 나왔다. 같이 씻자고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런데 목은 왜 그런 거예요?”
“목이 왜?”
“빨간 게 있는데요.”
의현은 거울 앞으로 가 목을 비춰 보았다. 목 옆쪽에 길게 쭉 그어진 자국이 있었다. 딱지가 생긴 걸 보니 낫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수 때 생겼나 보네.”
“연수 때 뭘 했는데 목에 상처가 나요?”
꼬리잡기 얘기를 꺼냈다간 정재이의 표적이 될 게 뻔했다. 굳이 대화 주제를 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의현은 어물쩍 말끝을 흐렸다.
“대련 비슷한 거였는데…….”
“오, 대련. 재밌었겠네요.”
“전혀 재미없었어.”
그때 한 개고생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뼈가 시렸다. 추워 죽겠는데 그 큰 산을 오르내리며 불쾌하게 상대방 목이나 확인하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실용성이 떨어지는 최악의 훈련 방법이었다.
“동민 형이랑은 마음이 잘 맞나 봐요. 계속 친한 걸 보면.”
단색 파자마를 입은 정재이가 수면 등을 켜고 방 불을 껐다. 은은한 조명 탓인지 침대 위에 앉은 재이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나쁘지 않지. 거슬리지 않으니까.”
어차피 이 방엔 침대가 하나뿐이라, 의현은 정재이를 재우고 바로 옆 손님방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형한테 거슬리지 않는다는 건 꽤 큰 의미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건 형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잘 모르는 거 아닐까요?”
‘나는 관심 있으니까, 잘 알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에 의현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정말 사실인 것 같아서.
“요즘 이상한 꿈을 자주 꾸는데요. 꿈에서 깨고 나면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정재이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바닥에 깔린 러그 패턴이나 쳐다보고 있던 의현이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꿈 얘길 하자면 사실 할 얘기가 가장 많은 게 의현이었다. 주기적으로 악몽을 꿨으며 거기엔 무조건 Z가 나왔고, 그중 몇 번은 정말 변태 같은 행위를 한 적도 있었다.
“……무슨 상황인, 아니 뭐가 나오는데?”
의현은 태연한 척 물었다. 정재이는 미간을 한 번 찌푸렸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게요. 깨고 나면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되게 짜증 나는 기분인데 말이죠.”
“기억이 안 난다고?”
“네. 그래도 자주 꾸니까, 나중엔 선명해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이래도.”
그게 어떤 종류의 꿈인지 몰라서 차마 기억해 내라고 할 수가 없었다. 혹시 정말 변태 같은 꿈이면 어떻게 해.
“궁금하네. 나중에 기억나면 나한테도 말해 줘.”
“궁금하다고요?”
“어? 응.”
“형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는데.”
정재이는 작게 웃었다. 젖어서 갈래갈래 흩어진 앞머리가 얼굴께를 간질였다. 확실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 빼고 조건이 전부 이상하다고 해도 그 모든 악조건을 이길 만큼 얼굴의 힘이 대단했으니까.
“……아까부터 내가 너한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애초에 재이 너를 여기에 데려온 게 나야.”
이런 한가한 말로 정재이의 결핍을 다 채워 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엇나가는 건 막아야 했다. 의현은 항상 노력하고 있었다. 그 노력이 정재이를 충족시킬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 뿐.
“내가 좀 바빠서 너한테 소홀할 수 있고, 또 열심히 한다고 해도 너를 다 충족시켜 줄 수는 없겠지만.”
“…….”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건, 재이 네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의현의 전 회 차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구질구질한 동시에 가장 진솔한 말이었다. 이 모든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정재이는 항상 의현에게 유일한 존재였으므로.
“…….”
눈앞에 앉은 아이는 평소엔 절대 짓지 않을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돌처럼 굳어 있던 정재이는, 곧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알고 있어요. 형이 나한테 잘하려고 하는 거.”
길고 곧은 손가락이 조막만 한 얼굴을 다 가렸다. 그래도 감정을 알아채기는 쉬웠다. 드러난 귀가 온통 새빨갰기 때문이다.
“근데, 나는…….”
뒷말이 이어져야 하는데, 침묵이 계속됐다. 한번 달아오른 정재이의 귀는 식을 줄을 몰랐다. 방금 했던 말이 그렇게 좋았나? 이 정도 반응이라면 좀 구질구질하고 영악하긴 했어도, 나중에 언젠가 한 번 더 솔직하게 굴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형이 다른 사람이랑 얽히는 게 싫어요.”
“사회생활인데요?”
“사회생활인데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목소리가 웅웅 울렸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아니, 그럼 뭐 아무것도 안 하고 너랑만 있으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요구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네가 어리긴 어리구나.”
“어린 게 왜요?”
“귀엽잖아. 그런 말을 다 하고.”
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이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이야기를 끝내고 그만 자러 갈 요량이었다.
“잘 자. 재이야.”
“어디 가요.”
정재이의 턱을 간질이고 몸을 뒤로 돌리자마자, 금방 손이 붙잡혔다.
그제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온통 시뻘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형형한 눈. 뭔가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나도 자야지. 피곤해.”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었어요?”
“우리가 어떻게 같이 자.”
“왜요?”
“네 나이가 몇인데.”
“내가 어리긴 어리다면서요.”
“그건 그 뜻에서 한 말이 아니었는데.”
계속해서 말려들었다. 정재이 앞에선 솔직하기보단 얘 감정에 맞춰 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항상 다정한 척을 해야 했기에 매몰차게 요구하는 것들을 툭 끊어 내기가 어려웠다.
“나는 어린데,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방금 했던 말 취소야. 너 그렇게 어리지 않아.”
“그런 게 어딨어요. 형 입으로 말해 놓고.”
이상한 부분에서 지지 않으려 드는 정재이를 보며, 의현은 애초에 저택에 오기로 한 순간부터 모든 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역시 매몰차게 끊고 그냥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
“너 밖에서도 이러니?”
“봐요. 여기 베개도 딱 두 개가 있잖아요. 이건 형이 여기서 자라는 뜻이에요.”
“남자 둘이서 한 침대에서 자기엔 좁다니까? 바로 옆방에 침대가 하나 더 있는데, 굳이 여기서 둘 다 불편하게 자야 할 이유가 없잖아.”
“좁아요? 그럼 형이 벽 쪽에서 자요. 내가 바깥에 누울 테니까.”
“정재이 너 내 말 듣고 있어?”
졸려 죽겠는 얼굴로 의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꽉 잡힌 팔은 피가 안 통할 정도였다.
“귀찮게 안 할게요. 그냥 잠만 자는 거예요.”
“…….”
“나 또 그 꿈 꿀 수도 있잖아요.”
불쌍한 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꿈이란 것도 불쾌하다고 했지 무섭다고 한 적 없었으면서 단어도 은근히 바뀌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짚고 넘어간다고 해도 어차피 정재이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정말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의현을 이 침대에 눕혀 놓으리라.
“하……. 그럼 불 끄면 바로 자는 거야.”
“당연하죠.”
“말 걸거나 귀찮게 하면 나 바로 나갈 거야.”
“네.”
“너 때문에 미치겠다, 정말…….”
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정재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푹신한 침대는 닿기만 해도 금세 잠들 것 같은 안락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따뜻하고 푹신한 이불, 그리고 적당한 조도.
“이렇게 형이랑 같이 자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베개를 베고 눕자마자 정재이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비누 냄새와 함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정말 곧 기절할 것처럼 잠이 쏟아졌다.
“……너 귀찮게 안 하기로 했지?”
“졸려요? 목소리가 갈라졌는데?”
“졸려. 피곤하다고 했잖아.”
“바로 잘 거예요? 나랑 안 놀고?”
“침대에서 도대체 뭘 하고 노는데…….”
의현의 목소리가 점점 늘어졌다. 원래 예민하긴 했어도 잠은 꼭 자야 하는 사람이었다. 재이는 작게 웃으며 수면 등 불을 껐다.
탁-.
이윽고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온통 컴컴한 가운데에서도 의현의 까만 머리카락은 아주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형, 자요?”
“응……. 그러니까 너 말 좀 그만해…….”
“잘 자요. 좋은 꿈 꾸고.”
재이는 의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보다 조금 큰 몸이었다. 피부는 희고 보드라웠고 약간 마른 편이었지만 근육으로 채워져 몸은 탄탄했다.
“…….”
벌써 잠이 든 건지 의현이 덮은 이불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숨소리가 아주 작았다. 금세 꺼지기라도 할 듯이. 재이는 제 이마를 의현의 목덜미에 가까이 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 좀 좋아해 줘요…….”
* * *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개운하게 일어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의현은 제 코앞에 있는 벽을 보고 흠칫했지만, 곧 여기가 정재이의 침대 위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핸드폰을 찾기 위해 몸을 뒤척이자마자 정재이가 작게 신음하며 앓았다. 허리에 뭔가 무거운 게 올려져 있다 싶었더니, 정재이의 손이었다. 온몸을 밀착하듯 꽉 붙인 정재이는 꾸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
의현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암막 커튼이 쳐 있어 눈으로 밖의 밝기를 살필 수가 없었다.
6시 28분. 시간으로만 따지면 얼마 자지 못했지만, 수면의 질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 더 잘까, 아니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까. 짧은 고민 끝에 의현은 몸을 일으켰다.
“으음, 형…….”
“너는 더 자.”
정재이가 깨면 또 뒤를 졸졸 따라올 게 뻔했다. 의현은 재이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숨소리가 다시금 고요해지기를 기다렸다.
의현의 허리를 꽉 붙잡고 있던 정재이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의현은 슬쩍 눈치를 보곤 침대 밑으로 천천히 발을 내렸다. 매트리스의 높낮이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
발꿈치를 들고, 어제 입은 옷까지 손에 가득 챙겨 문밖으로 나오며 의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정말 정재이 때문에 별짓을 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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