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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39화 (39/185)

39화.

주말 저녁이라 차가 좀 막혔다. 뜻하지 않게 불꽃놀이까지 구경하고 나와서인지 귀가 먹먹하기 짝이 없었다. 의현은 목을 꽉 조이던 넥타이를 헐겁게 풀고 차 뒷좌석에 늘어졌다. 차라리 일을 하고 말지, 사람 대하는 건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학교는 좀 어때?”

그래도 한창때의 애들은 관심을 줘야 한다고 했다. 파티도 쭐쭐 따라오고 하는 걸 보니 큰 문제 없이 지내는 것 같았지만, 그냥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공부는 열라 짜증 나지만, 학교는 뭐 그냥저냥 재밌습니다, 행님! 신기한 것들도 많이 보여 주고요!”

“권다……. 아니. 신하연은 좀 어때?”

“잘 지내죠! 걘 공부도 열심히 할걸요? 복도에서 가끔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시비 걸어서 열라 짜증 난다니까요.”

의현에겐 권다원이었지만, 걔 원래 이름은 신하연이었다. 의현은 홍삭과 함께 신하연의 학업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물론 이런 세세한 부분까진 권중섭이 모를 것이다. 그냥 세인트 해피 보육원에 가끔 물품 지원 정도만 하는 줄 알지.

“문제없다니까 다행이네.”

“그러고 보니까 궁금한 건데요, 행님은 왜 신하연을 신경 쓰시는 거예요?”

“너를 왜 신경 쓰는 건지는 안 궁금하고?”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그냥 행님이 저를 특별히 좋아하나 했죠. 마음이 끌리는 거 있잖아요. 혹시 제가 행님의 이상형?”

“미친놈.”

정재이가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행님 방금 들으셨어요? 정재이가 저한테 험한 말한 거? 쟤가 저런 놈이에요!”

홍삭은 정재이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학교에서도 그러고 노니?”

“쟤랑 놀 일 없어요.”

“그렇다기엔 오늘 파티도 같이 왔잖아.”

의현의 예리한 질문에 정재이는 입술을 꾹 물었다. 홍삭은 마치 제가 이겼다는 듯 정재이를 향해 당당한 웃음을 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든든한 뒷배를 등에 업은 얄팍한 정치인 같았다.

“행님 제가 봤을 땐, 차도희가 정재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차별도 엄청나게 하고, 저 자식을 볼 땐 눈에서 막 하트도 나오고 한다니까요?”

“그래. 그런 것 같더라.”

“행님도 눈치채셨어요?”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없지.”

차씨 가문 애들은 제 감정을 숨기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안 그러게 생겨서 감정적으로 솔직하게 직진하는 것이 퍽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데, 제가 사랑의 훼방꾼이 되어 주려고 해요!”

“오작교가 아니고?”

“네! 그거! 오작교!”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줄줄 내뱉던 홍삭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키득댔다. 어째 질 좋은 교육을 받게 해 줘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보였다.

“좋네. 뭐든 경험해 보는 건 나쁘지 않을 테니까.”

“……당사자를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네요.”

“걔 정도면 괜찮지. 집안도 좋고 예쁘잖아.”

솔직히 말하면 땡잡은 수준이었다. 객관적으로 조건만 놓고 따진다면 정재이는 외모 빼고는 봐 줄 만한 게 없었지만, 도희라는 여자애는 외모를 뺀 나머지 조건도 좋았으니까.

“집안 좋고 예쁘면 다예요?”

정재이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홍삭은 푸하하 웃으며 급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야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알아?! 세상 물정을 모르네! 넌 복 받은 거야 이 자식아!”

고속도로를 빠르게 지나던 차는 터널을 통과했다. 얼굴에 그늘이 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홍삭은 그게 신기한지 우와- 하고 소리치더니 창문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그런데 행님은 애인 없으세요? 워낙 바쁘시니까 만날 시간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얘길 한 번도 안 하시네요.”

“없어.”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제가 또 발이 넓거든요! 행님보다 조건 좋은 사람은 못 찾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괜찮은 사람으로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네 또래를 만나면 범죄지. 안 그래?”

이제 막 성인이 된 의현이었지만, 중학생을 어쩌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홍삭은 방방 뛰며 의현에게 달라붙었다.

“아니, 나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행님의 이상형이 뭐냐 이거죠. 궁금하잖아요!”

“그런 거 없어.”

“없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적어도 어떤 종류의 사람이 좋다, 뭐 이런 건 있을 수 있잖아요.”

쉬지 않고 종알거리는 홍삭에게 지친 의현은 슬쩍 바깥을 쳐다보았다. 홍삭의 보육원 근처였다. 오 분 후쯤이면 한 명 내려 보낼 수 있다. 오 분만 참자…….

“착한 사람이 좋아. 됐지?”

“와, 정말 성의 없고 틀에 박힌 답이네요. 착하면 다 좋아요? 못 생기고 어? 돈 한 푼도 없고 막 지병 있고 그래도?”

주제를 바꾸지 않으면 이야기는 더 깊어질 게 뻔했다. 의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홍삭을 향해 물었다.

“그래. 나는 착하면 다 좋아. 너는 어떤 사람이 좋은데?”

“저요? 저느은…….”

표정이 금세 헤벌쭉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동시에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는 약간 수수한 사람이 좋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제가 좀 이렇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사람? 마르고 하얗고 웃는 게 예쁘고 다정하고…….”

“네가 뭘 알려 줄 정도면 머리가 거의 백지 상태여야겠는데.”

“아! 행님!”

홍삭은 분개했지만, 마땅히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해 우물거렸다. 홍삭이 공부에 관심 없다는 건 얘랑 일 분만 대화를 해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치만 저만 이런 건 아닐걸요?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안 그러냐, 정재이?!”

“……난 별로.”

시큰둥하게 앉아 있는 정재이까지 당당하게 끌고 들어온 홍삭이었지만, 큰 공감을 이끌어 내진 못했다.

“그럼 너는 어떤 사람이 좋은데? 그래, 말 나온 김에 네 이상형 좀 듣자! 너 같은 애는 도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거냐?”

홍삭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참 이상한 부분에서 열정적인 애였다. 이런 부분은 은근히 윤화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윤화가 이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었지만.

“정해둔 이상형 같은 건 딱히 없어. 어차피 그런 건 사람 따라 바뀌는 거잖아.”

“어이없네. 야!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너는 순정이란 게 없냐?!”

“네 입에서 순정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좀 웃기네.”

“사나이는 원래 순정을 마음에 품고 사는 거야! 사람 따라 이상형이 바뀌는 너 같은 놈은 남자의 수치다!”

하긴 정재이가 누군가를 절절하게 좋아하는 게 상상이 안 되긴 했다. 의현에게 정재이란 항상 Z를 동반했고, 그건 썩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기에 사실 이성 관계라든가 이상형 따위를 깊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아, 네 말 듣고 지금 하나 떠올랐는데.”

정재이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대답했다.

“눈 아래쪽에 점이 있으면 좋겠어. 섹시하니까.”

“뭐어?! 나이도 어린 게 섹시를 논하네! 너는 이미 순정에서 글러 먹었다 이 자식아! 행님! 들으셨죠? 정재이 이 자식 순 발랑 까진 놈이에요!”

놀려 먹을 건수를 잡은 홍삭이 시끄럽게 왁왁댔다. 차는 금세 보육원 앞에 멈추었다. 의현은 친절하게 차 문도 열어 주었다.

“응. 잘 가고.”

“저를 그냥 이렇게 보내실 건가요? 정재이가 저런 변태 같은 말을 했는데?”

“취향이니까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지.”

“이런 때도 행님은 정말 무심하시네요…….”

제 장난이 먹히지 않은 게 그렇게 서글픈 건지 홍삭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똑똑-.

문을 닫고 다시 출발하려던 차에, 홍삭이 창문을 두드렸다. 또 무슨 쓸데없는 얘기를 할까 싶어 의현이 귀찮은 표정으로 창문을 내렸다.

“또, 왜?”

“아, 그런데 행님! 갑자기 생각이 난 건데요!”

홍삭은 엄청 대단한 진리를 깨우쳤다는 듯 의현의 얼굴을, 아니 정확히는 왼쪽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행님 눈 아래쪽에 점이 있어요!”

“…….”

“헐, 대박! 이런 우연이! 정재이 저 새끼 이상형이잖아요!”

“……가라.”

“넵! 항상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쇼!”

의현은 눈썹을 찡그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문을 올렸다. 차 뒤쪽 유리에 손을 붕붕 흔드는 홍삭의 생각 없는 얼굴이 비쳤다.

“피곤해 죽겠다…….”

제일 시끄러운 놈 하나를 떼어 내고 나니, 차 안은 금방 평화를 되찾았다. 다음 도착지는 정재이를 내려 줄 저택이었다. 저택에 들러 정재이를 내려 주고 나면 의현은 집으로 돌아가, 이 귀찮은 정장을 다 벗어 버리고 당장 반신욕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집으로 갈 거예요?”

“일이 많아.”

“형은 항상 바쁘네요. 매일 일해도.”

“그러게.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의현은 뻣뻣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뚝뚝 꺾었다. 반신욕을 끝내고 나와선 김태원 면회 날짜도 정하고 그때 상황에 대해서도 가설을 좀 세워 놔야 했다. 남들은 황금 같은 주말이라는데, 의현에겐 평일이나 주말이나 피차 마찬가지였다.

“자고 가라고 하면 안 되겠죠?”

“일이 많다고 방금 말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

“너는…….”

의현은 잠깐 숨을 골랐다. 도와줄 수도 있겠지,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너니까. 전부 네가 시작한 일이니까. 네가 나를 죽이고 시간을 과거로 돌리지만 않으면 모든 게 끝나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너는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옛날만큼 발작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젠 하도 험한 꼴을 많이 봐서 웬만한 일에는 티 나게 감정 기복을 보이지 않게 됐다. 조심해야 했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정재이의 앞에서는.

“그럼 나중의 저는 도와줄 수 있는 건가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

나는 그랬으면 좋겠지만……. 의현은 혀끝에 굴려지는 말을 삼켰다.

정재이의 손가락은 탁, 탁, 탁 규칙적으로 시트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마치 심장 뛰는 소리 같아서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내가 어릴 땐 형이 나를 좀 더 사랑해 줬던 것 같은데…….”

“…….”

“크니까 내가 좀 별로예요?”

“무슨 그런……!”

의현의 평정을 잃게 하는 사람은 정재이가 유일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보다 더 쉬운 게 있냐는 듯이 아주 손쉽게.

“내가 제일 소중하다고 했잖아요. 그렇죠?”

“…….”

“혼자 자기 싫어요…….”

차는 금세 저택 앞에 도착했다. 시간이 늦어 불이 거의 꺼진 저택은 그 위엄이 엄청났다.

“자고 가요, 형.”

정재이는 슬쩍 웃으며 의현의 손가락 끝을 간질였다.

“…….”

의현은 제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바쁘게 살아도 뭐 하나 깔끔하게 끝나는 일이 없었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야 해.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은데…….

“……오늘만이야.”

의현은 짧게 대답하며 차 문을 열었다.

정말요? 정재이가 환하게 웃으며 의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처음 만났을 때 무릎 언저리에 있던 애가 벌써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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