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소원이라는 말로 간단히 퉁칠 수 있는 문제인가 싶긴 했다. 특수 능력 수감 시설에 있는 수감자와 면회하게 해 달라는 중대한 문제를 이런 식으로 장난스럽게 말해도 되는 건가? 의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동민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 무슨 소원인데 그렇게 요란을 떠는 거야?”
“별 건 아니고요. 수감자 한 명을 좀 면회해야 하는데요.”
의현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싱겁게 말하는 태도도 이해가 안 됐는데, 동민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제 요구사항을 내보이고 있었다.
“수감자? 누구?”
“특수 능력 수감 시설에 있는 김태원이라고 아세요?”
“김태원이라…….”
사법부 차관은 제 턱을 쓸었다. 시초교와 얽혀 있는 것도 그렇고 여간 뒤가 구린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만 이런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이름 정도는…….
“모르겠는데? 혹시 왜 보려는 거니. 특수 능력 수감 시설이라고 하면 중범죄자라 나도 선뜻 허가를 내주기가 좀 그런데.”
이유를 모른다는 말에 반은 황당했고 반은 안도했다. 동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 웃으며 얼른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죠. 그 사람이 미래를……!”
“……네! 미래! 사실은 저희가 그 사람이 미래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 조사 중이거든요! 저희 헌터부 신입 사원 과제예요! 특수 능력 범죄자 하나 골라서 재범 방지를 위해 조사하고 앞으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거요!”
의현은 동민의 말을 자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애초에 이러려고 온 자리였다. 바로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음, 그런 과제가 있단 말이지?”
동민은 황당한 얼굴로 의현을 쳐다보았지만, 의현은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동민의 발을 꾹 지르밟았다. 야, 웃어-.
“하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확실히 아는 게 중요하지. 좋아, 날짜와 시간이 정해지면 내게 알려 주렴. 면회 허가증을 만들어 둘 테니까.”
“……정말요?”
“그럼. 원래 멋진 신사는 거짓을 말하는 법이 없지. 하하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 멋진 신사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권의현은 남자를 따라 웃으며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생신 정말 축하드립니다. 차관님. 그리고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호쾌하게 들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동민이가 이런 곳에 친구를 데려오는 애가 아닌데, 자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오래 친구로 지내서 그런가 봐요.”
“그러고 보니 권의현 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남자는 의현을 꼼꼼히 뜯어보다가 이내 모르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권중섭의 아들이라는 걸 들켜 봐야 피곤할 일만 생겼다. 의현은 사람들과 하하호호 떠들며 멀어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야 너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
“……아직 가까이에 계셔. 조용히 말해.”
동민이 눈치 없이 종알거리는 걸 의현이 툭 잘라 냈다. 이제 중요한 건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일뿐이었다.
“솔직히 그냥 도와 달라고 말했어도 큰아버지는 들어 주셨을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고.”
“너도 봤잖아. 남자다운 분이셔. 구차하게 꼬투리 잡고 말 번복하거나 그럴 일 없다니까? 네가 왜 나를 못 믿는지 모르겠어.”
의현은 오늘 파티에 온 목적을 이미 끝낸 사람이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황금 같은 주말을 여기서 종일 보낼 생각 따위 없었다. 성큼성큼 중앙 정원을 빠져나가며 의현은 동민을 향해 살짝 웃었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나는 상황을 못 믿는 거야.”
“상황?”
“수십 수만 가지의 선택이 있는데, 네가 그중 하나를 골랐을 때 줄줄이 따라오는 결과를 전부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게 갑자기 왜…….”
동민은 앞서 걷는 의현의 팔을 잡아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몰라도 되는 거니까.”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거야?”
“야, 차동민.”
의현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안 그래도 동민은 이 파티의 일원이라 주목이 불가피했다. 걷는 걸음걸음마다 타인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고맙긴 한데, 네가 도와주겠다고 먼저 말한 거야.”
“…….”
“내가 애걸복걸한 적도 없잖아.”
말은 짧았지만, 요지는 분명했다. 귀찮게 그만 좀 간섭해라.
이쯤 되면 보통은 하던 말을 끝내기 일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민은 의현과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할 말 없으면 나 그만…….”
“저녁 먹고 가.”
“뭐?”
동민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강요하고 싶진 않았지만, 의현을 이대로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밥 안 먹었잖아. 저녁 먹고 가.”
“…….”
“……밥만 먹고 가.”
동민이 이렇게 굴 이유가 없었다. 의현은 제 손을 꽉 붙잡은 동민의 다섯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파티장 중앙에서 남자 둘이 손 부여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게 누가 보면 좀 웃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으니까, 표정 풀어.”
동민은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아쉬운 건 난데, 왜 항상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다.”
“…….”
“알았어, 밥 먹고 갈게.”
“…….”
“살다 살다 밥 먹고 가라고 우는 애는 처음 봤다.”
의현은 동민의 어깨를 무심하게 툭툭 쳐 주었다. 이게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 동민은 어쩐지 커다란 상실감을 맛봤다. 의현이 저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너 나랑 밥 먹고 차도 마실 거야. 그리고 월요일에 회사 가서 또 볼 거고, 점심도 같이 먹을 거야. 그리고 또…….”
“그래, 그래. 알겠어.”
권의현은 아주 썼다. 검고 깊고 쓴 인물이었다. 혀가 아릴 정도였지만, 감히 뱉을 수가 없었다.
* * *
“재이야, 이것도 먹어 봐. 맛있어.”
“뭔데? 차도희 나도 좀 줘 봐.”
“야! 홍삭! 누가 너 먹으라고 갖고 온 줄 알아? 넌 네가 갖다 먹어.”
식사 자리가 시끌시끌했다. 동그란 원형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만 다섯 명이었다. 의현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이제 이런 일들은 너무 익숙해서 빨릴 기도 없었다.
“친구끼리 싸우고 그러면 안 되지. 도희 너도 너무 한 명만 챙기지 말고 좀 공평하게…….”
“아니 오빠! 싸운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내가 쟤 음식을 갖다줘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너무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말하지 말고 도희야. 어쨌든 네가 초대해서 온 친구들이잖아.”
동민은 제법 어른스럽게 도희를 타일렀다. 애초에 식사 예절을 배운 적이 없으니, 홍삭이 순서에 맞게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걸 좀 가르쳤어야 했나? 의현은 줄줄 흘리고 먹는 홍삭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행님의 오랜 친구이셔서 그런지 누구와는 다르게 마음이 바다 같이 넓으시네요!”
“홍삭? 홍삭 학생은 오늘 처음 보는데, 의현이랑 많이 친한가 봐요.”
“그럼요! 의현 행님이 저를 많이 좋아해서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죠!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쇼, 행님!”
“그래도 될까?”
“그럼요! 의현 행님 친구분이시면 저한테도 행님 아니겠습니까?”
홍삭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며 동민을 향해 특유의 친화력을 뽐냈다. 이런 사교적인 태도가 싫지 않은 듯 동민은 홍삭과 제법 잘 어울렸다.
“재이야, 그런데 오늘 정말 돌아가야 해? 다른 친구들은 다 자고 간다고 했는데…….”
“아, 그거.”
조용히 음식을 씹고 있던 정재이가 고개를 들어 흘끔 의현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마 안 될걸.”
“왜? 그냥 친구들끼리 노는 건데 부모님이 허락 안 해 주셔?”
통유리로 둘러싸인 식당 바깥으로 별똥별 같은 조명들이 빛났다. 해는 저문 지 오래였다. 바깥은 깜깜했고, 간헐적으로 이벤트라도 하듯 불꽃들이 터졌다. 의현은 생수로 입을 헹구고 손수건으로 입매를 닦았다.
“정 그러면, 내가 직접 전화로 말씀드려 볼까? 아버지 성함 말씀드리면 좋게 봐 주실 수도 있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아버지 좀 유명하시잖아. 아마 아무래도 유하게 넘어가 주시지 않을까 싶은데…….”
도희는 어떻게 해서라도 정재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듯했다.
“글쎄, 어떨까…….”
정재이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어린 목소리에는 미묘하게 흥미가 서려 있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곤 갑자기 제 앞에 놓인 음식만 조용히 먹고 있던 의현을 대화 속에 끌어들였다.
“뭘?”
“도희가 전화하면 제가 외박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실까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생글생글 웃으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저택 창문 앞에 붙어 앉아 매일같이 의현이 오는 날만 기다리던 꼬맹이는 어디 가고, 턱을 괴고 앉아 건방지게 의견을 묻는 애가 있는 건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
“한번 전화해 보는 건 어때?”
의현은 재이를 바라보며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정말로 네가 원한다면 허락해 주시겠지. 안 그래?”
재이야, 네가 건방 떠는 건 아직 일러.
의현이 웃음 속에 감춰 두었던 말을 재이가 읽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좋은 말이네요. 기억해 둘게요.”
정재이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표정으로 의현을 바라보았다. 도희가 신나서 얼른 말을 붙였다. 그럼 지금 바로 전화 드릴까? 애들이랑 다 같이 밤새 게임하고 놀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
“미안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낮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테이블 위에 장식된 수십 송이의 만개한 꽃보다, 정재이의 얼굴이 더 화려하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내가 원래 엇나가는 걸 잘 못 해.”
정재이의 대답에 도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울상이 됐다.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말 잘 들어야지. 누구한테 미움받기 싫으면.”
“그래도 너무 아쉽다…….”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마워.”
대화는 마무리됐다. 식사가 끝날 때쯤에 중앙 정원에서 커다랗게 폭죽이 터졌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라가 펑펑 큰 소리를 내며 터졌다.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색도 시시각각 변했다. 의현은 웨이터가 건네준 샴페인을 마시며 오늘이 어쩐지 참 이상한 날이라고.
“…….”
그래.
정말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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