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분명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교복 입은 애들이 체험학습 나올 정도로 급이 낮은 사람이 아닐 텐데 얘들이 도대체 왜 여기에…….
“어머 오빠!”
혼란스러운 의현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듯, 처음 보는 여자애가 손에 먹을 걸 잔뜩 들고 다가와 동민을 끌어안았다.
“야, 차도희 너 많이 컸다? 전엔 엄청 작았는데.”
“도대체 언제 적 얘길 하는지 모르겠네. 오빠가 집안 행사에 자주 참여 안 하니까 모르지. 나 키 큰 거 다른 친척들은 이미 다 봤네요.”
“아하하. 그래? 요즘 바빠서 잘 못 왔어. 미안.”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애는 동민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시에, 홍삭에게 가져온 먹을거리를 건네주었다.
“야 푸딩은 없어? 난 푸딩이 먹고 싶은데.”
“주는 대로 먹어. 내가 네 심부름꾼이야?”
“나한테만 엄청 뭐라고 하네. 정재이한테는 안 그러면서.”
홍삭은 투덜거리면서 크레페를 입에 잔뜩 쑤셔 넣었다. 아무도 이 상황에 대해 의현에게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데?”
의현의 물음에 정재이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하.
“아, 의현이 너한테 아직 설명을 안 했구나. 이쪽은 차도희, 오늘 생신이신 큰아버지 외동딸이야. 나한테는 친척 동생.”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의 도희는 한 번에 눈에 들어올 만큼 예뻤다. 의현은 대충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내 말은 여기에 왜 정재이랑 홍삭이 같이 있냐는 거였는데, 교복이 같은 걸 보니까 대충 알겠네…….”
그 많고 많은 경우의 수를 넘어 하필 오늘 이렇게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다니. 이게 무슨 운명도 아니고.
“근데 재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도희가 흥미로운 얼굴로 의현을 바라보았다.
“정재이 이 음침한 자식을 갱생시켜 주시는 분이지! 아주 멋진 행님이셔! 음핫핫!”
“그냥 개인적으로 좀 알고 있습니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의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뒤를 돌며 정재이와 홍삭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따라오라는 무언의 압력에, 홍삭은 금세 기세가 꺾여 의현의 뒤를 졸졸 쫓았다.
“분위기 대박이다. 너무 잘생겼어! 오빠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저런 친구가 있다고 얘기한 적 없잖아!”
그들이 멀어지는 가운데, 도희가 동민의 어깨를 팍팍 내리치며 소리쳤다.
좋은 교육 받고 좋은 애들과 어울리라는 뜻에서 엘리트 학교를 보낸 건 맞았다. 그게 바닥난 정재이의 사회성에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길 바라면서.
“사람들 많은 곳은 시끄러워서 싫다더니, 차동민 형이랑은 잘 다니네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는 거였나 봐요.”
정재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의현으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너야말로 이런 곳에 온다고 미리 말한 적 없잖아. 적어도 이런 크기의 파티라면 교복 입고 쫄래쫄래 따라오진 말았어야지.”
의현은 이마를 짚었다.
“왜요?”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주변을 좀 봐. 너희 말고 교복 입고 온 사람이 어디 있나.”
“행님! 도희가 교복 입고 와도 된다고 했어요! 그냥 집에서 소소하게 파티 하는 거라고요! 먹을 거 많다고 해서 온 건데, 이렇게 클 줄 몰랐죠!”
홍삭은 옆에서 괜히 떽떽거렸다. 의현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정재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삭이 너는 그럴 수 있다고 봐. 먹을 거 많다고 오라고 하면 좋아서 가겠지.”
“…….”
“근데 재이 너는 뭘 알고 왔을 거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네.”
“…….”
“너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애 아니잖아.”
“…….”
“뭐 때문에 왔는지 말해.”
의현은 차가운 말투로 몰아붙였다. 가만히 의현의 이야기를 듣던 재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별거 없는데.”
“별거 없다고?”
“상류층 파티라고 하길래, 그냥 궁금해서 온 거예요.”
“…….”
“근데 형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오히려 뭐가 더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요.”
정재이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얌전하고 말 잘 듣던 건 어릴 때만 그런 건지, 요즘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혹시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아니죠?”
정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접어 웃었다. 워낙 사람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예쁘게 생겨 지나가던 사람들이 걷던 걸 멈추고 정재이를 쳐다보았다. 어머- 하는 작은 환호와 함께.
“내가 뭘 하든 다 너한테 말해야 할 이유는 없어.”
“그건 그렇죠.”
“그리고 상류층 파티가 어떤지 궁금했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그럼 형이 파티라도 열어 줬을까요, 나를 위해?”
물론 권의현이 다시 태어나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 생일도 잊고 사는 사람이 파티를 열고 사람들을 바글바글 초대한다는 것도 어폐가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럴 일은 없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온 거잖아요. 이렇게 말해도 형은 내 말 안 믿겠지만.”
정재이는 자신이 의현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는 듯 굴었다. 홍삭이 다리를 덜덜 떨며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다.
“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전에 얼른 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의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을 뺐다.
“돌아갈 때 차 부를 테니까, 그거 타고 가.”
“네?! 행님! 도희가 자고 가도 된다고 했는데요?! 저는 잠옷까지 다 챙겨 왔어요!”
“절대 안 되니까 그렇게 알고.”
의현은 단단히 엄포를 놓고 뒤돌아섰다. 홍삭이 계속해서 꿍얼거렸지만, 의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의현아 큰아버지 중앙 정원 쪽에 계신대. 네가 준비한 선물 챙겨서 인사드리러 가면 되겠다.”
이야기를 끝내고 온 의현을 보고 동민은 얼른 말을 붙였다.
“그런데 뒤에 애들은 왜 이렇게 죽상이야? 너 혹시 혼냈어?”
“애도 아니고 뭘 혼내.”
“그런데 재이는 정말 많이 컸다. 키가 갑자기 쑥 컸네. 옛날에는 되게 작았었잖아.”
제 딴에는 삭막한 분위기를 풀고자 꺼낸 말이었지만, 반응이 썩 좋진 않았다. 아주 어릴 때 그랬듯, 차동민 따위는 인간으로도 안 보는 정재이는 대충 고개를 까딱거리며 동민의 말을 무시했다.
“정재이, 대답해야지.”
“할 말이 없는데요.”
“할 말이 왜 없을까? 있어야 할 텐데.”
의현은 무슨 다섯 살배기 아이를 사회화시키듯 재이에게 은근한 압박을 주었다. 무심한 말투였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원하진 않았지만,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동민 형.”
“어? 하하! 되게 안 반가운 말투로 말하니까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뭐 고맙다!”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재이의 말투에 동민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의현이 애들을 몇 명 키운다고 했을 때 ‘설마 그 권의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대로 믿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나름대로 제대로 어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잠깐 볼 일 있어서 갔다 올 테니까, 정재이, 홍삭. 너희 소란 일으키지 말고 있어.”
“네에.”
“문제없습니다, 행님! 다녀오십쇼!”
이 천둥벌거숭이 둘을 파티장에 두고 나오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의현은 제가 지배할 수 없는 상황을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데 정말 신기한 일이다. 도희가 재이랑 같은 반 친구라니. 이렇게 보니까 세상이 참 좁아. 나는 처음에 내가 뭘 잘못 본 줄 알았잖아.”
맡겨 놓은 시가 선물을 챙겨서 나오는 동안 동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껏 올라간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동민이 느낀 놀라운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도희가 이런 데 친구를 데리고 오는 애가 아닌데, 웬일인지 모르겠어.”
“나는 알겠던데.”
“정말? 왜?”
눈치가 없는 동민은 도희의 눈에서 튀어나온 감정을 전혀 읽지 못한 듯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희는 정재이 하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중에 직접 물어봐. 남 얘긴데 내가 하기 좀 그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아, 중앙 정원은 이쪽이야.”
추워 죽겠는데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람이 많아 의현은 기함했다. 멋 부리다가 얼어 죽지. 쯧쯧 혀를 차며 동민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자, 처음 들어왔던 입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화려한 공간이 펼쳐졌다.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의현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혹시 이게 국가적 행사인데 내가 잘못 알고 온 건 아니지?”
“아! 큰아버지가 겨울에 태어나셔서 따뜻한 걸 좀 선망하셔!”
“그놈의 겨울, 겨울. 이게 단순히 선망으로 퉁 칠 문제야?”
헌터는 국가적 인재였다. 그중에서도 자연계 능력자는 희귀했기 때문에 B급만 되더라도 받는 금액이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5년만 일해도 평생 펑펑 쓸 돈을 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퉁 치기에는 좀 그런가? 하하…….”
동민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 정원 한복판에서 불 능력자가 허공에 커다란 불꽃을 만들어 계속 타오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별 모양으로.
“덕분에 따뜻하긴 하잖아. 그렇지?”
“윤화도 나중에 저런 걸 하게 될까 두려워.”
“윤화가 좀 클 때 되면 큰아버지도 이런 걸 그만하시겠지. 뭐 언제까지 하시겠어.”
불꽃놀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능력자 한 명을 개인의 사치를 위해 고용할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상류층의 돈놀이였다. 화려한 꽃으로 수놓아진 길을 걸으며 의현은 진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이가 없었다. 누군가는 지금도 돈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그냥 꽥 죽고 있는데.
하늘에 불꽃을 반사하며 중앙에 놓인 분수가 붉은색으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세팅된 엄청난 개수의 테이블과 요리. 귀족풍의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까지.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진짜’ 허세였다.
“큰아버지!”
흰 레이스가 주렁주렁 늘어진 길목을 지나 동민이 누군가를 향해 뛰어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솔직히 약간 긴장이 됐다. 처음 맞이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면역이 없었다.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었고 알기 위해선 몸으로 부딪쳐 봐야 했다. 의현은 바짝 마르는 입술을 핥으며 대외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누구야. 동민이 아니니. 웬일이야, 네가.”
뒤돌아선 얼굴은 사법부 차관으로 TV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사람이었다. 좀 높은 사람이라고 했지, 차관급이라고 말한 적 없잖아! 의현은 당장이라도 동민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다.
“아, 큰아버지 생신도 축하드리고 개인적으로 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그럼 그렇지. 바라는 게 있어서 온 게로구나. 하하.”
“아, 먼저 소개를 드릴게요. 이쪽은 제 가장 친한 친구 권의현이에요. 헌터부에서도 같이 일하고 있어요.”
“권의현입니다, 차관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 동민이 너한테 이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었단 말이야? 이거 반갑군요. 오늘 재밌게 즐기다 가세요.”
동민의 큰아버지는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차관이라고 해서 겁을 먹었는데 권중섭만큼 표독스러운 관상은 아니었다.
“이건 선물입니다. 협소하지만, 시가를 즐기신다고 해서 준비했습니다.”
“이것 참,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고마워요. 의현 군. 나도 답례로 뭔가 선물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음…….”
남자는 제 턱 언저리를 문지르며 가만히 의현을 바라보았다. 동민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입을 열었다.
“소원! 큰아버지! 제 소원 하나만 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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