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달갑지 않은 아침이었다.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가만히 얼굴을 묻고 있는데,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의현이 더듬거리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동민이 왁 소리쳤다.
―여보세요! 왜 답장을 안 해? 오늘 오는 거 맞지?
“……지금 일어났어.”
―그래? 아니 같은 차 타고 가겠냐고 묻는 걸 까먹어서 연락했는데, 네가 계속 안 받아서.
“잠든 지 얼마 안 됐어.”
―뭐 하느라 그렇게 늦게 잔 거야?
동민의 큰아버지께서 시가를 좋아한다고 했다. 퇴근하자마자 유명 시가 매장으로 향한 의현은 제 코앞에 내밀어지는 시가 냄새를 맡으며 어울리지도 않게 선물을 골랐다.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더니, 종국엔 속이 다 뒤집어져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을 참으며 겨우 잠든 건 새벽 다섯 시, 그리고 지금은 오후 한 시였다.
“몇 시에 출발할 건데?”
―두 시에는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점심은 같이 안 먹더라도 날이 밝을 때 인사드리는 편이…….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하고 너희 큰아버지 댁으로 갈게. 주소 좀 알려 줘.”
―어차피 같은 길로 가야 하는 거면 한 번에 움직이는 게 편하지 않겠어? 준비하고 집에 있어. 너희 집 앞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응. 알겠어.”
의현은 짧게 대답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베개와 이불이 잔뜩 구겨진 채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 내내 몸부림친 흔적이었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좋은 아침이죠?”
“아버지 안 계시죠?”
“네. 어제 안 들어오셨네요. 요즘 바쁘시니까요.”
꼭 바빠서 안 들어오는 것 같지만은 않았지만, 수긍하는 척했다.
“오늘 파티 참여하신다고 하셔서 어울릴 만한 옷 몇 개 따로 준비해 뒀어요.”
의현은 피곤에 전 얼굴로 이부터 닦았다. 아직도 목구멍에 시가 냄새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향수도 싫었는데, 담배라니. 최악이다.
“그나저나 도련님께서 파티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꿈만 같아요.”
“……꿈이요?”
의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키퍼들을 쳐다보았다. 기억하는 과거 키퍼들의 얼굴은 항상 겁에 질려 있었는데, 근래에는 권중섭이나 자신이 집에 잘 안 붙어 있어서 그런지 표정들이 꽤 밝았다.
“그럼요. 보통 사교계 나가실 때 다 어떻게든 꾸밈을 받으시는데, 도련님은 일절 관심이 없으셔서 저희는 또 저희 실력을 못 믿으시는 줄 알았어요. 도련님은 외모도 출중하신데, 너무 손해잖아요.”
방금 세수하고 나와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의현은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며 옷걸이에 걸린 양복 세트를 확인했다.
“사교계 나가는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질색이고요.”
“어머나…….”
“오늘은 누굴 좀 만나러 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동민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특수 능력 수감 시설에 갇혀 있는 무기징역 수감자를 왜 만나려고 하냐, 만약 큰아버지가 그렇게 묻는다면 차동민은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네! 그 사람이 아주 용하대요!
……그러니까 당연히 혼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고.
“그래도 저희가 밀리지 않게 힘쓸게요!”
유모는 처음 보는 얼굴로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첫 회차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의현은 수많은 선택을 달리했으니 지금과 그때가 완전히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이런 변화들이 정말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 * *
간단한 파티라고 했지만, 규모는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동민은 익숙한 표정으로 그 집 관리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베이지색 양복에 진한 갈색 구두를 신은 어른스러운 차동민을 보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연수원 때 얼굴이 사색이 된 채로 토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던 어이없는 모습이 떠올랐다.
“겨울인데 웬 꽃이 이렇게 많아?”
“아, 큰아버지가 꽃을 좋아하셔. 생일이 겨울인 거에 약간 한이 맺히셨다나. 생일 때마다 꽃을 잔뜩 공수해 오신다니까.”
돈 많은 사람들은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한이 맺히는구나 싶었다.
봄이라도 된 줄 알았다. 초록색 인조 잔디가 깔린 바닥 위로 열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의 꽃들이 주변에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아니, 이건 단순히 ‘장식’의 차원을 넘은 것처럼 보였다. 통째로 그냥 들어서 옮긴 것만 같았으니까.
“너 좋아하는 꽃 있어?”
자신의 공간에 의현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동민은 연신 입이 귀에 걸린 채였다.
“난 꽃 별로 안 좋아해.”
“너랑 꽃이랑 잘 어울리는데 뭔가 아쉽다.”
의현은 매사 시큰둥한 자신과 꽃과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동민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는 어디에 계셔?”
“글쎄, 이제부터 찾아봐야 하는데…….”
동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개의 조명과 잘 관리된 나무 외에도 수백 명의 사람이 있었다. 괜히 이들의 호기심에 걸려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의현은 얼른 동민의 소매를 잡고 안쪽으로 끌었다.
“일단 들어가서 일하시는 분한테 물어보자.”
“왜? 너 불편해?”
“편하겠냐.”
“하하. 물론 불편하겠지. 알겠어.”
동민에게 아는 척 말을 걸기 위해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의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얼른 동민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이걸 집이라고 해야 하는지 저택이라고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성이라고 봐야 할 수도 있다. 권중섭은 성공욕과 인정욕이 컸을 뿐 과시욕은 작았는데, 동민의 큰아버지는 과시욕이 어마어마한지 정말 온갖 곳이 다 화려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사냥을 취미로 하셔서, 맘에 드는 동물 있으면 바로바로 박제해 놓으셔. 나도 어릴 때 처음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복도 한쪽에 쭉 걸려 있는 동물 머리통이 의현과 동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을 잃지 않은 반짝이는 선명한 눈동자와 관리가 잘 된 털까지. 모든 것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죽었다는 게 이질적이었다.
“잠깐만 여기 있어 봐. 큰아버지 어디 계신지 물어보고 올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 있는 듯했다. 동민은 의현을 신경 쓴 건지 빈 응접실에 의현을 가만히 앉혀 놓고 걸음을 옮겼다.
“취향하고는…….”
응접실 벽엔 고서적들과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책은 한 번도 펴 본 적 없는 것처럼 깨끗했다. 화려한 테이블보와 철에 맞지 않은 싱그러운 꽃들로 응접실 분위기 역시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칙칙한 남색 양복을 입고 건방지게 다리를 꼬고 앉은 의현은 가만히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오후 즈음의 해는 다양한 색의 물감을 짜 놓은 것처럼 다채로웠다. 다홍색 하늘 위로 흰색 구름이 갈래갈래 흩어졌다.
잠시 후 우당탕거리는 소음과 함께 동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밖을 쳐다보고 있던 의현이 고개를 돌려 엉거주춤 선 동민을 바라보았다.
“뭐 하냐?”
“아니, 대박 사건이 있어!”
“뭔데?”
동민이 말하는 ‘대박 사건’이 솔직히 그렇게 기대되진 않았다. 동민은 조그만 일에도 크게 놀라곤 했기에, 기본적으로 무심한 성격의 의현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진 못했다.
“네가 보면 정말 깜짝 놀랄 일이라니까.”
동민은 의현의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큰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묻고 온다던 놈이 갑자기 이렇게 구니까 조금 의아하긴 했다.
“왜? 오늘 큰아버지 안 나오셨대? 사고라도 나신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도대체 뭔데 이러냐고.”
동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히죽 웃었다. 뭔가 재미있는 걸 꾸미고 있는 얼굴이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성처럼 빨간색 양탄자가 깔린 복도는 끝도 없이 길었다. 전등 대신 세워진 촛대 위에서는 우아하게 양초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까 우리가 내린 곳이 후문이고, 사실은 이쪽이 정문인데 말이야.”
어쩐지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없다 했다. 정문 쪽으로 나오니 파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음악가들이 분수를 한복판에 두고 분위기 있는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런 날씨에 콘트라베이스를 뜯고 있다가는 그거보다 손가락이 먼저 뜯길 게 분명했다.
“이쪽에 있다는 거야?”
“이쪽에 있긴 한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동민은 계속 말을 아꼈다.
여기만 정말 봄 같았다. 딱히 좋아하는 계절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실제 날씨는 겨울인데 주변에 보이는 것들은 죄 봄이니 기분이 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해서 꽤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화사한 꽃들 사이로 교복 입은 애들이 눈에 들어왔다. 웬 교복? 의현이 눈을 흘겨 뜨자, 동민은 뿌듯한 표정으로 뒷짐을 졌다.
“얘들아-!”
동민이 부르니, 교복 입은 애들 네다섯 명이 한꺼번에 뒤를 돌아 이쪽을 바라보았다.
“짠! 대단한 우연이지 않아? 나도 좀 전에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
“그때 봤던 걔 맞지? 이름이 뭐였더라…….”
동민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있는 힘껏 표정을 구겼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라 그런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재이! 맞아, 정재이!”
동민은 칭찬받을 짓 했다는 듯 의현을 보고 웃었다.
“…….”
하지만 의현은 왜인지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물음표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얘가 왜 여기에 있지? 어떻게 온 거지? 뭘 하려는 거지? 정재이와 관련된 것은 그게 뭐든 의현의 평화를 부수고 깨트렸다.
“오랜만이네요, 형.”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정재이는 마치 의현이 여기에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익숙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좀.”
의현은 대외적인 얼굴로 웃으며 재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해야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악력이 얼마나 센지 재이의 손이 허옇게 질렸다. 의현과 재이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뿌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동민의 뒤로 또 하나 익숙한 얼굴이 끼어들었다.
“행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여기는 왜 계신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홍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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