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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34화 (34/185)

34화.

김태원을 만나야 했다. 그 정신 나간 얼굴을 마주하고 과거를 기억하고 있냐고 물어봐야만 했다. 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김태원은 이 시점에서 이미 특수 능력 수감 시설에 있었는데, 일반인의 신분으로 거길 드나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권중섭의 후광 좀 써 보려다가 어젠 집이 뒤집힐 뻔했다. 권중섭의 그런 표정은 난생처음 봤다. 차라리 손찌검이라도 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권중섭은 수상한 건덕지를 잡았다는 듯 몇 번이나 의현을 추궁했다.

범죄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왜 만나려고 하는 거냐. 교육 못 받은 애들이랑 어울리더니 부쩍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기타 등등 말하는 대부분이 의현을 탓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선 우기면 마땅히 잘 될 일도 어그러지는 법이다. 의현은 권중섭을 설득하기를 관두고 상황을 대충 얼버무렸다. 애당초 권중섭에게 김태원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그렇게 묻는 동민의 표정이 더 안 좋았다. 의현은 제 앞에 넘겨진 서류를 넘겨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야말로 다리 좀 그만 떨어. 책상이 계속 흔들리잖아.”

“아니, 너무 떨리잖아. 외근 나갈 수도 있다고 하니까.”

“가라면 가는 거지.”

“너는 너무 무던해. 실수하게 될 수도 있잖아.”

“하면 하는 거지. 그때 가서 생각해.”

포탈 청소는 현장팀에게 필수적인 업무였다. 그래도 커다란 대형 포탈에서 실종자를 찾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했으니, 사실 이 정도 일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간다니까 다행이다. 네가 자연계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급이 안 맞아서 일하면서 얼굴 못 보는 줄 알았잖아.”

“신입인데 초반부터 굴리진 않겠지. 양심이 있다면.”

팀은 행정팀에서 짜 줬다. 업무에 따라 인원이나 성질을 분배했는데, 정확한 기준은 밝혀진 게 없었다. 그냥 균형 있게 짠다고 했다. 한 팀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계열은 보통 치료계와 자연계 정도였다.

“그래서 넌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동민이 덜덜 떨던 발을 멈추고 물었다.

“별로 반갑지 않을 얘기야. 너는 말해도 모를 거고…….”

“야 혹시 알아? 내가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

뱀을 몇십 마리는 고아 먹은 것 같은 표독스러운 김태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으으. 의현은 몸서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차동민은 김태원 앞에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 같을 거다. 언제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은.

“개인적으로 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특수한 곳에 있어서 상황이 좀 애매해.”

“특수한 곳이 어딘데? 어디 뭐 무인도라도 박혀 있는 거야?”

“무인도는 아니고…….”

이걸 말을 해야 해, 말아야 해. 의현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특수 능력자 수감 시설인데.”

“뭐?!”

동민은 크게 소리치고 뒤늦게 주변 눈치를 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슬쩍 이쪽을 쳐다보았다.

“야, 너 또 위험한 짓 하려고 하는 거지?!”

사방이 투명 유리로 둘러싸인 회의실은 리모컨 버튼을 한번 누르면 순식간에 유리가 불투명하게 바뀌었다. 동민은 얼른 리모컨을 찾아 버튼을 눌렀다.

“범죄자를 왜 보려고 해?”

이런 반응이 있을까 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의현은 아랫입술을 살짝 씹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좀 그런 사정이 있어.”

“설마 죽이려는 거야? 개인적인 원한?”

“미쳤어?”

“그럼 범죄자를 왜 보려고 하는 건데?”

동민은 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권중섭을 제외하면 사실 이런 쪽으로 의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동민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동민의 질문에 숨기지 않고 대답했던 것도 있었고.

“그 사람이 미래를 볼 줄 아는데…….”

“미래?”

“어. 그냥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서 그래. 큰 의미는 없고…….”

“그 사람이 그렇게 용하대?”

대충 말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동민이 오히려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미래까지 볼 수 있는 건데? 내일? 모레? 십 년도 가능한가? 사람 사이의 관계 뭐 이런 것도 볼 수 있나?”

“모르지. 나도 만나 본 적이 없는데.”

의현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 못한다던 정재이의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지만, 그건 정재이 한정인 듯했다. 동민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의현을 향해 자신만만한 표정을 내보였다.

“내가 말씀드려 볼게!”

“……뭘?”

“큰아버지가 법 관련 부처에서 일하시는데, 직위가 꽤 높으셔. 말씀드리면 면회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어.”

권중섭에게 욕을 있는 대로 처먹고 이번 생에 김태원 만나는 건 포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동민이 이렇게 큰 역할을 해 줄 줄은 몰랐다.

“너…….”

동민의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이 보였다. 매 회차를 살아오면서 의현은 항상 혼자서 위기를 극복해 왔지 누군가의 손을 빌려 본 적이 없었다. 완전한 진실이 아닌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완전한 거짓도 아니니까…….

“고맙다.”

의현은 책상 위에 올려진 동민의 손을 잡았다. 동민은 작게 헉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뒤로 뺐다.

“벼, 별거 아니야. 도와줄 수 있어서 내가 더 조, 좋은데……?!”

“나중에 사람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해.”

“응?”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나도 도울게.”

신세만 지고 끝나는 건 어쩐지 불편했다. 의현의 말에 동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기뻐 보였다.

“나중에 혹시 있으면 말해 줄게!”

“그래.”

의현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는 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김태원에 대해 조사를 좀 해 봐야겠다.

* * *

○지금 가장 생각나는 사람 : 권의현 형아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써 봅시다 : 형아!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해 줄게. 물론 형은 지금 돈 많지만, 나는 그거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매일 재밌는 얘기도 해 줄게. 나 보러 많이 와 줘! 사랑해!

“…….”

의현은 제 가방 속에서 튀어나온 알록달록한 색의 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윤화가 캠프에서 썼다며 건네준 그 편지였다. 그날 정신이 없어서 못 읽고 가방에 넣어 뒀는데.

“어머, 의현 씨. 자기 동생 있어요?”

지나가던 서 팀장이 의현의 뒤로 가만히 다가왔다.

“아닙니다.”

의현은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얼른 가방에 다시 쑤셔 넣었다. 삐뚤빼뚤 쓴 글씨는 누가 봐도 어린애가 쓴 티가 나서 오해받기 딱 좋았다.

“그 나이에 아들은 아닐 테고…….”

“아들이요?”

“장난이지. 장난! 어유, 의현 씨 결혼했다고 하면 우리 부서 사람들 다 눈물 흘려.”

의현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보자, 파티션 위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야. 항상 피곤에 절어 있거든. 의현 씨도 알지? 월급 많이 받는다고 다가 아니잖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헌터부는 자율적으로 부서 선택이 가능했지만, A급 이상은 암묵적으로 현장팀에 들어가야 했다. 일종의 관례인 셈이다. 현장팀은 거의 포탈을 직면해야 했으니 능력 없는 사람들은 들어와 봤자 송장 치우기 일쑤였다.

현장팀에서 몇 달만 일해도 돈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벌었다. 그러니까 능력도 있고 돈도 많은 현장팀의 평생소원은 ‘장기 휴가’ 오로지 그거 하나뿐이었다.

“의현 씨가 들어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어서 발악했는데, 그래도 요즘은 기대가 된다니까? 현장 1팀의 빛과 희망! 권의현!”

“…….”

“그러니까 자기는 제발 퇴사하지 말고 죽지도 말고 우리와 함께 오래오래 일해 줘요!”

어딘가에서 ‘옳소!’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하고 싶어도 4년 후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의현은 혀끝에서 간지럽게 굴려지는 말을 꾹 삼켰다.

“서 팀장님, 회의 가실 시간 아닌가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서 팀장은 다급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항상 있는 오후 팀장 회의 시간이 지난 지 오래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서 팀장은 허둥지둥하며 회의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의현은 가방에 아무렇게나 넣어 두었던 편지를 꺼내 빳빳하게 펴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팜섬 여행권은 회의가 끝난 서 팀장을 통해 내려왔다. 번쩍거리는 민트색의 여행권 두 장이 의현의 앞으로 밀어 넣어지는 순간, 팀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근데, 의현 씨 이거 당장 쓸 건 아니지?”

서 팀장의 눈은 간절함으로 반짝였다. 연수생 대표 상품인 팜섬 여행권은 2주짜리 유급 휴가와 세트였다. 그 말인즉슨,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재가 부족한 이 판국에 권의현이 언제든 팜섬으로 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일을 조금 익힌 다음에 연말쯤 가는 거 어떨까? 추울 때 말이야! 그래! 팜섬은 아주 덥다구! 날 추워질 때 가면 얼마나 좋아! 따뜻하고 말이야!”

“연말이라고 안 바쁜 건 아니죠.”

“그건 그렇지만……!”

신입 사원이라기에 권의현은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현장팀은 포탈에 따라 좌우됐으므로 설령 권의현이 여행권을 써서 팜섬으로 떠난다고 해도 운이 나빠 1급 포탈이 열리는 날에는 바로 업무에 복귀해야만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당장은 못 써요.”

김태원 면회 건을 처리하기 전까진 어디 움직일 생각 없었다.

“어머, 그럼 나야 너무 고맙지. 역시 자기밖에 없어!”

서 팀장은 의현의 손을 꽉 붙잡으며 웃었다. 가볍게 보이는 듯했지만, 희귀한 정신계 능력자로 A급 인재였다. 일부러 유들유들하게 보이려 해도 소용없었다. 의현은 서 팀장의 실체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런데 여행은 누구랑 갈 거야? 정해 둔 사람이라도 있어?”

“없습니다.”

“2인권이잖아. 그냥 날려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구. 경비까지 다 지원해 주는 건데 말이야. 자기야, 곰곰이 잘 생각해 봐. 관계를 찐하게 만드는 데에는 여행만 한 게 없으니까.”

서 팀장은 의현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자리로 돌아갔다.

“관계를 찐하게…….”

의현은 제 손에 들린 여행권을 가만히 쳐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관계를 찐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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