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차동민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이건 이미 망한 선택지이고 너는 죽음을 앞뒀으니, 후회하기 싫으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라고 시스템은 의현에게 회귀를 종용했다.
“…….”
솔직히 말하면 불쾌했다. 틀렸을까? 지금의 선택이? 정말로? 확신할 수 있나? 감히 누가? 김태원이 봤던 그 미래가 지금과 같지 않을 수도 있잖아.
“잘 어울린다니까 그냥 정재이로 살아야겠네요.”
정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새 키가 더 컸는지, 이젠 앉아서 보려면 목을 꽤 들어야 했다.
〈 슬롯 2에 저장되었습니다. 〉
봐 봐, 미친 시스템. 또 제멋대로 저장하지.
이 부분엔 인제 해탈했다. 시스템은 ‘지금 내가 이걸 할 거거든?’이라고 대뜸 알려 주기만 할 뿐, 의현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니 여기에 몰두해 감정을 쏟는 게 사실은 얼마나 소모적인 짓인지.
“너 키가 몇이지?”
의현의 말에 삐딱하게 서 있던 정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가 내려 창밖이 온통 흑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재이의 눈동자는 예쁘게 반짝였다.
“……더 자랄 건데요.”
“누가 뭐래?”
“반에서 제일 커요.”
“아니, 그래서 키가 몇인데.”
말을 뱅뱅 돌았다. 정확한 숫자를 말해 주면 될 것을, 정재이는 다른 단어들로 계속 말을 포장했다. 사춘기라 이런 데 예민한 건가? 의현은 잠깐 생각했다.
“아니야. 말 안 해도 돼.”
싫다는데 굳이 긁을 필요는 없었다. 평탄하게 굴자. 어떤 상황에서도 정재이가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싫다는 거 강요할 생각 없어. 그냥 마지막에 봤던 때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아서 물어봤던 거야.”
의현의 말에 재이는 입가를 들썩였다. 키 컸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무슨 선물 상자라도 받은 듯이 기뻐하는 게 좀 어린애 같았다.
“올해 안에 형보다 더 클걸요?”
“그건 힘들 텐데.”
“키가 몇인데요?”
“183.”
“얼마 차이 안 나네요. 그렇게 힘들 것 같진 않은데요.”
정재이는 꽤 도전적인 얼굴을 했다. 의현은 작게 실소했다. 굳이 자기를 넘으려 드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중학생밖에 안 된 꼬맹이가.
“나는 개인적으로 네가 여기서 안 자랐으면 하지만, 뭐 열심히 해 봐.”
“나중에는 형이 나를 올려 봐야 할걸요?”
“키 이긴다고 전부 이기는 건 아니니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둘 다 똑같았다. 의현은 몰랐지만, 밤새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빤히 그를 들여다보던 재이가 의현의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다른 건 이기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이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은 길고 곧았다. 정재이의 손목에는 의현이 생일선물로 준 시계가 걸려 있었다. 끼고 다니라고 사 준 거긴 했지만, 막상 그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의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회성은 어때?”
“문제투성이죠.”
“음. 그러면 안 되는데…….”
‘문제투성이’라고 말한 주제에 표정은 태연했다. 명문 중학교에 입학시켜 교육도 잘 받게 하고 있고, 상담도 주기적으로 받게 하고, 먹는 거 입는 거 뭐 하나 아쉽게 해 준 적이 없는데도 정재이는 항상 어딘가 결핍된 애처럼 굴었다.
“친구 되고 싶은 애 없어?”
“네.”
재이는 조금의 공백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애는? 사귀고 싶다거나.”
“없는데요.”
“음, 네 나이 땐 보통 그런 게 있을 텐데…….”
제법 심각한 의현의 표정에 재이는 작게 픽 웃었다. 이불을 만지작대고 있던 손이 조금 올라와 의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형은 어떤데요?”
“뭐가?”
“마음에 드는 애가 있었어요? 사귀고 싶다거나.”
이런 질문이 나오면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건가? 눈을 접으며 웃는 정재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의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있을 리가 있나. 사회성이라면 사실 정재이보다 권의현이 더 떨어질 텐데.
“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의현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되지도 않는 거짓을 늘어놓았다.
“사귀고 싶은 애가 있었다고요? 형이?”
“반응 뭐야? 있었을 수 있지.”
“말도 안 돼.”
정재이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딱 봐도 안 믿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의현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너 정도 되는 꼬맹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속일 수 있어. 네가 나를 다 알아? 의현은 항상 제가 재이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기를 바랐다.
“네 생각보다 쉬워. 그냥 받아 주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항상 제게 오는 호의를 받아 주지 않아 문제가 생겼었지만, 의현은 능숙하게 과거를 포장했다.
“장난 그만해요. 재미없어.”
“장난 아닌데, 뭐 그렇게 생각하려면 하고.”
의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재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재밌었다.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재이는 항상 의현을 한번 떠보곤 했다.
“……차동민은 아니죠?”
“차동민이 네 친구야? 이게 형한테 말을 막 놓네.”
“그 형은 다른 사람 좋아했잖아요. 혜영 누나랑…….”
“그건 오해였어. 갑자기 차동민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설마 그 형이 고백했어요?”
“또 시작이네.”
정재이의 세상은 너무 좁았다. 사람마다 각자가 추구하는 세상의 크기가 다를 수 있으니, 좁은 건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현이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정재이의 세계가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점, 그리고 의현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 벽이 높고 견고하다는 점이었다.
“걔는 나랑 아무 사이 아니고, 설령 무슨 사이라고 해도 그건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의현은 단칼에 의심의 싹을 잘랐다. 아니, 사실 자른다고 잘린 싹도 아니었다. 정재이는 언제나 집요했으므로.
“아무나 쉽게 받아 주고 그러지 마요.”
“…….”
“형 같은 사람은 그러면 안 돼요. 이상한 애들 꼬인다고요.”
솨아아-.
비는 쉬지 않고 계속 떨어졌다. 반나절을 꼬박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비는 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 씻고 잤는데 땀을 많이 흘려 몸이 끈적였다. 의현은 제 잠옷을 펄럭이며 침대 아래로 발 한쪽을 내렸다.
“안 받아 줘도 이상한 애들이 자꾸 꼬여.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
“이젠 그냥 팔자려니 한다.”
“…….”
“씻고 나올래. 찝찝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굳이 이런 문제가 아니어도, 권의현의 인생엔 피곤한 문제들이 한 트럭은 더 있었다.
“그거 알아요? 형 거짓말 못하는 거.”
방을 나서던 의현이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래도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
얼굴을 쳐다보지 않아도 정재이가 짓고 있을 표정이 그려졌다. 의현은 잠옷 단추를 풀며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 * *
의현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윤화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갈 거면 자길 밟고 가라는 강력한 항의에 의현은 어쩔 수 없이 저택에서 저녁까지 먹게 됐다.
“역시 헌터라는 게 능력 있다고 그냥 막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빨 보면 진짜 치열하게 살잖아요.”
식탁 위로 음식이 한 상 차려졌다. 의현은 제 앞에 놓인 닭고기 수프를 뒤적거리며, 열변을 토하는 은영을 쳐다보았다.
“다른 애들이 자기도 능력 발현되면 헌터 까짓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길래, 제가 가서 엄청 뭐라고 했어요! 걔넨 오빠가 이렇게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로 살 줄은 모를 거예요! 능력만 발현되면 다인가요? 발전하고 유지하는 건 개인의 노력이지!”
……내가 피죽도 못 얻어먹게 생겼나, 지금? 의현은 제 턱과 볼을 괜히 한번 만져 보았다.
“윤화를 봐요! 얜 그 대단하다는 불 능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공부랑 담쌓아서 맨날 놀러만 다니잖아요!”
“누나! 갑자기 나를?!”
“이런 애한테 세상을 맡길 수가 있겠어요?!”
난데없는 은영의 손가락질에 입 안에 가득 든 음식을 씹고 있던 윤화가 발끈했다.
“공부랑 능력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건 공부를 일단 잘하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이야, 아가야.”
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봐봐. 나 이은영 전국 평가 상위 0.1퍼센트의 영재. 혜영이랑 필규도 물론 그렇지. 의현 오빠? 어우 말해 뭐 해. 특수 능력 고등학교 수석 졸업에 등급 평가에서 S급이 나온 초대박 엘리트 헌터잖아. 심지어 정재이도 시험만 봤다 하면 1등을 해 오는데, 윤화 너는 반 애들이 10명인데 9등이잖아.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할 거야.”
“으으…….”
논리 정연한 은영의 말에 윤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정재이는 윤화를 보고 픽 소리 내 웃었다.
“내가 윤화한테 자꾸 공부하라고 하는 이유는 폭넓게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서 한 말이고, 그걸로 약점 잡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큼큼, 은영이 목을 가다듬으며 물을 마셨다.
“윤화처럼 잘 놀면 좋지. 놀라고 해도 못 노는 사람도 있는데.”
물론 이런 말을 들어도 윤화는 별로 기분 상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헤헤 웃고 넘길 테지만, 의현은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제가 윤화에게 하는 말의 뜻을.
“그치? 형 나 진짜 잘 놀아! 나는 밖에서 열 시간도 더 있을 수 있어! 아니! 스무 시간도 놀 수 있고!”
“열 시간은 너무했어. 그리고 너 반에서 9등이야? 전엔 공부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아니, 내가 열심히 한 부분은 시험에 안 나와서……. 헤헤.”
“다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중간은 해야 해. 그래야 나중에 피곤한 일 안 생겨.”
피곤한 일이란 거의 권중섭과 연결되어 있었다. 윤화는 권중섭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 그 그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중간은 차지해야 했다.
“나는 문제없지! 형이 있잖아!”
윤화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소리쳤다. 윤화의 맞은편에 앉은 정재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문제가 너무 많은 거겠지.
“자주 못 올 수도 있는데, 그동안 싸우지 말고 지내. 어차피 여기서 오래 볼 거잖아.”
“우리 안 싸워요.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요. 그치 필규야?”
“공감공감. 끄덕끄덕.”
“그럼 됐어.”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는데, 저택 애들은 너무 어린 것 같고, 의현은 너무 어른 같았다.
“형 오늘도 자고 갈 거지? 나랑 같이 자자! 내 방 침대가 진짜 크고 푹신푹신해서 잠이 잘 와!”
“야. 그건 절대 안 돼. 누구 맘대로?”
윤화의 말에 정재이가 질색했다. 가뜩이나 입맛도 없는데 식탁이 시끄러워서 의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집에 갈 거야.”
의현은 짧은 문장으로 분쟁을 정리했다. 여기서 치이면서 자느니 집에 가서 조용히 자는 게 훨씬 나았다.
“그래요, 오빠. 현명한 선택이에요.”
시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밥만 먹던 혜영이 의현을 향해 엄지를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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