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흙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했다. 먼지 묻은 폴라 티를 벗어 바닥에 내던진 의현은 시끄러운 유리창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연수원의 마지막 밤이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동기들은 캠프파이어 앞에서 술 파티를 하겠다며 깔깔거렸다. 체력이 남아도네, 난 힘들어 죽겠는데……. 이럴 때 보면 S급 판정은 의현이 아니라 다른 애들이 받아야 했던 것 같다.
“저는 이쪽 샤워실 쓰겠습니다. 욕조에 몸을 좀 담그고 싶어서.”
“……네. 그렇게 하세요.”
대답하는 해수의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딱 봐도 험한 일 해 본 적 없을 것 같긴 했다. 넋이 나간 해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현은 욕조에 물을 틀어 놓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 부재중 전화 9건 ]
[홍삭 5건]
[윤화 3건]
[정재이 1건]
“하…….”
의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핸드폰을 침대 위로 휙 내던졌다. 엄마 잃어 버린 애들도 아니고, 고작 며칠 나가 있었다고 득달같이 전화를 날리는 감정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 문자는 전화보다 더 많이 와 있었다. 이걸 하나하나 읽으면 정신이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앞으로 4년…….”
의현은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앉아 몸을 길게 늘였다. 가슴께에서 찰랑거리는 온수는 그간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
4년이었다. 이번 생에 의현에게 남은 시간은. 이번엔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의현은 욕조 헤더에 머리를 기댄 채 제가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지금은 확정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뭔가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정재이를 감정적으로 붙들어 맬 수 있는 확정적인 한 방.
의현은 저도 알 수 없는 미래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몸이 새빨갛게 익고 나서야 욕조에서 나왔다.
야외에서 시작된 파티는 호텔 내부로 옮겨져 새벽 내내 이어졌다. 의현은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 욕을 짓씹었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아침 알람 소리에 의현은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민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개피곤해.”
동기들이 설마 밤을 새울 줄은 몰랐다. 체력이란 게 한정되어 있을 텐데, 꼬리잡기 끝내자마자 밤새도록 술 파티를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로비에서 커피라도 받아오기 위해 현관을 열었다.
쿵-!
둔탁한 무언가가 문에 부딪혔다. 손에 힘을 주어 밀자, 알 수 없는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의현은 고개를 내밀어 503호 문밖을 쳐다보았다. 술에 취한 동민이 복도에 누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미쳤어, 진짜.”
손에 카드 키를 쥐고 있는 걸 보니, 들어오려다가 실패해서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내 주변엔 진짜 다 이상한 놈들밖에 없는 건가? 의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동민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야, 일어나. 차동민.”
물론 말을 들어 먹을 상태였으면 복도에서 이러고 자진 않았겠지. 의현은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치고 제 능력을 이용해 동민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동민의 몸은 마치 덜 마른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헉, 동민 씨가…….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놔둬요. 미친놈이니까.”
잠에서 깬 해수가 놀란 얼굴로 동민을 바라보았다. 둥둥 떠 있던 동민을 침대 위에 올려놓은 의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주, 죽은 건 아니죠?”
“생각이 거기로 튀는 것도 신기하네요.”
해수는 동민의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도했다. 도대체 얼마나 귀하게 자라야 이런 성격일 수 있지? 걱정스러운 해수의 표정을 주시하다 의현은 몸을 돌렸다.
“어디 가세요?”
“커피 마시러요.”
“아……. 저, 그럼 저도…….”
해수는 말끝을 흐렸다. 같이 가도 되냐는 말 같았다.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매번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같이 있는 걸 싫어할 줄 알았는데?
“네, 뭐.”
“얼른 씻고 나올게요.”
의현이 기다리겠다는 듯 소파에 앉자 해수는 환하게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지겨운 연수의 마지막이었다. 죽기 진전의 얼굴을 하고 대강당에 모인 연수생들을 보며 연수원장은 큰소리로 웃었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피가 끓는 청춘들은 항상 활력이 넘치는군요.”
도대체 어디가?
의현의 옆에 앉은 동민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해산식이 끝나고 나면 바로 화장실로 직행해 어제 먹은 음식을 죄다 뱉어 낼 듯이 보였다.
“여러분들은 항상 짧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연수원장의 말에 죽상으로 앉아 있던 애들이 죄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좀 끝내라, 피곤해 죽겠으니까. 의현은 턱을 괸 채 형형한 눈으로 삐딱하게 연수원장을 올려다보았다.
“저희가 준비한 연수 프로그램은 오늘로 마치겠지만, 여러분들의 헌터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모두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형식적인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의현아, 나 진짜 토할 것 같아…….”
“미치겠네.”
동민이 의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술 못 먹는 애가 떡이 돼서 복도에서 자고 있을 때부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저희 연수 담당자들이 매긴 점수를 총합하여 선정한 연수생 대표를 호명하겠습니다.”
연수원장이 뭐라고 주절거렸지만, 동민이 당장이라도 토를 갈길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동민은 허우적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갈 거면 어물쩍거리지 말고 빨리 가. 제발.”
동민은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해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민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동민 씨, 괜찮을까요? 같이 가야 하는 건 아닐지…….”
“지 업보죠. 그냥 두세요.”
“그런가요……?”
“진짜, 제발 좀 쉬고 싶네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안 그래도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 더욱 나빠졌다. 의현은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주변이 미친 듯이 조용했다.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던 의현이 고개를 쳐들었다.
“…….”
대강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죄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왜?
“하하하! 작은 소동이 있어 발표를 듣지 못한 것 같군요!”
연수원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뭐가? 지금이 무슨 상황인데? 의현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연수생 대표, 권의현 연수생!”
“……저요?”
“얼른 앞으로 나오세요!”
담당자들이 얼른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엉거주춤 일어난 의현이 단상 앞으로 올라갔다.
“연수생 대표에게는 아름다운 전경과 바다로 유명한 휴양지, 팜섬 여행 상품권을 드립니다! 하하!”
“…….”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안 그래도 수척한 표정이 더없이 구겨졌다. 이게 의미가 있나, 1지구 출신의 장관 아들에게? 바다로 유명한 휴양지? 팜섬?
“권중섭 장관님께서도 의현 군을 보면 자랑스러워할 걸세. 우리 헌터부에서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커. 부디 훌륭한 헌터가 되어 주게나.”
연수원장은 의현에게 꽃과 상장을 건네주었다.
“자, 저쪽 카메라를 보면서 사진 한 방 찍자고.”
웃음은커녕 빡침만 올라왔지만, 의현은 억지로 입매를 끌어당겨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대강당 안이 박수와 카메라 터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웃으세요, 하나, 두울-.”
자랑스러워? 그런 사람이 나를 가장 먼저 버리나?
훌륭한 헌터는 무슨. 엿이나 먹으라지.
의현은 환하게 웃으며 감추어진 상장 뒤로 중지 손가락을 올렸다.
* *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수의 끝이었다. 1지구로 올라오는 동안 버스는 수차례 멈추었다. 전날 술 파티에 참여한 대부분이 멀미와 구토감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도착 예상 시간보다 한참 지연되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억지로 눈을 감아 봐도 동민이 제게 토할까 두려워 잠들지 못했다. 이렇게 힘든 연수는 처음이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저녁 열두 시가 넘어 도착한 1지구의 공기는 텁텁했다. 동민은 후련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내내 앓더니 도착할 때가 되니까 몸이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의현이 너 표정이 왜 그래?”
“……죽을 것 같아.”
“잠을 못 잤어? 버스에서 좀 자지.”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왔다는 게 열 받아.”
“왜? 내가 잠꼬대했어?”
“……됐다.”
동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속 의현의 곁을 맴돌았다. 이것저것 얘기도 좀 하고 방을 같이 쓰면서 즐거운 시간도 보낼 계획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실현된 게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바로 갈 거야?”
동민이 물었다. 의현을 데리러 온 윤 기사가 저만치에서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도련님, 이쪽이에요! 이쪽!
“모르겠다. 솔직히.”
집에 가면 권중섭이 있을 게 뻔했고, 의현은 피곤한 상태로 그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보통은 집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해진다고들 하는데, 의현은 오히려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왜? 어디 들를 데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집에 가기 싫어?”
눈치 없는 동민이 웬일로 친 선방이었다. 의현은 뻐근한 눈가를 문지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럼, 저기,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집에 가기 싫다니까 하는 말인데…….”
동민은 쓸데없이 사족을 붙였다. 버스에서 막 내린 해수가 눈짓하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방 남는데.”
“방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네가?”
“그건 그렇지만…….”
동민이 뭐라고 얘기하려는 듯했지만, 해수가 금세 앞에 섰다. 해수 역시 피곤한지 얼굴 상태가 전과 같지 않았다.
“다들 돌아가시는 거죠?”
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는 아쉬움이 남는 듯 제 손가락 끝을 만지작댔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여기저기 폐만 끼치는 성격인 걸 알고 있어서…….”
“아니에요! 폐라뇨! 저도 재밌었습니다!”
“연수 내내 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웠어요, 동민 씨.”
해수의 자존감 낮은 말에 동민은 팔짝 뛰었다. 의현은 속으로 ‘김해수가 객관화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현 씨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저요?”
의현은 흘끔 해수의 손을 쳐다보았다. 해수가 뜯고 있던 손톱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잠깐 귀 좀…….”
해수는 의현을 향해 손짓했다. 나만 빼고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동민이 억울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대충 흘려 넘기며, 의현은 해수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의현 씨, 조작은 어디서든 가능해요. 그러니 상황을 너무 믿지 마세요. 항상 의심하시길 바라요. 피곤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현이 얼굴을 조금 떼고 해수를 내려다보았다. 해수는 의현을 바라보고 살짝 웃더니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해수 씨가 뭐래?”
“…….”
“응? 해수 씨가 뭐라는데?”
“……너 잠꼬대 시끄러워서 한숨도 못 잤대.”
“정말? 나 그렇게 잠꼬대 심했어? 으악, 미안해서 어떡하냐!”
동민은 제 머리를 부여잡고 자책했다. 해수를 태운 차가 빠르게 멀어졌다.
‘의현 씨, 조작은 어디서든 가능해요. 그러니 상황을 너무 믿지 마세요. 항상 의심하시길 바라요. 피곤하더라도.’
의현은 해수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 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
“……가야 할 곳이 생겨서 좀 들러야겠어.”
“갑자기? 이 시간에?”
“그러게. 갑자기 이 시간에 좀 들를 일이 생겼다.”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지?”
동민은 연수원에서 있던 일련의 일 때문에 의현이 제게 정이 떨어졌을까 봐 걱정했다.
“뭔 헛소릴 해. 집에 가서 잠이나 자.”
“응…….”
의현은 동민에게 대충 손을 흔들고 제 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보는 윤 기사는 의현의 짐을 트렁크에 챙겨 넣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피곤하시죠?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택으로 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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