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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29화 (29/185)

29화.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정재이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칠판에 적힌 글씨를 눈에 박아 넣었다. 사회 담당 선생님은 자신의 염세적인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대놓고 드러낼 때가 있었다. 뭐, 나쁘진 않았다. 재이 역시 세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공평한 것은 오로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뿐이다.」

칠판 위로 글씨가 연기처럼 휘어졌다. 재이는 삐뚜름하게 앉아 발을 달달 떨며 이 지겨운 시간이 언제쯤 끝날지에 대해 고민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은 미동도 없었다.

57초.

58초.

59초.

00. 수업 끝나는 종이 울렸다. 사회 선생은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듯 어물쩍거리다가 맨 앞에 앉은 남자애한테 칠판을 지우라고 시켰다.

“다른 선생한테 걸릴까 봐 바로 지우는 거야. 학생을 가르치면서 저런 비관주의가 말이 되냐고…….”

앞자리 남자애는 혼자서 투덜거리면서 글씨를 남김없이 지워 버렸다.

재이는 책상에 머리를 대고 옆으로 누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뭐 해요?]

어제 오후에 보낸 문자였는데 아직도 답장이 없었다.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다가 멍청이가 될 것 같아서 재이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탁 소리 나게 책상 위에 뒤집었다.

“므, 므아악-!”

뒷자리에서 코 골며 자던 홍삭이 발작하며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쟤가 평생 잠에서 안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게 재이의 바람이었다.

“재이야. 다음 수업 과학인데, 도구 옮기는 거 도와줄 수 있어?”

자유롭게 나다니는 다른 애들을 제쳐 두고, 도희는 굳이 세상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엎어진 재이를 불렀다.

“…….”

정재이는 핸드폰을 다시 뒤집었다. 답장은 여전히 없었고 머릿속에서 거미줄처럼 새끼 친 복잡한 생각들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재이 네가 싫다면 나 혼자서 갈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며 도희는 조금 울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갈게.”

“정말?”

“도와 달라면서.”

재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그마한 책상 아래에 꾸깃꾸깃 접혀 있던 다리는 똑바로 서니 아주 길고 곧았다.

“야 너네 둘이 어디 가냐?”

방금 막 잠에서 깬 홍삭은 입가에 침을 닦으며 추근거렸다.

“네가 알 거 없잖아. 삭아-. 계속 자. 좋은 꿈 꿔-.”

재이를 향해 생글생글 잘 웃던 도희는 홍삭을 보며 표정을 구겼다. 하는 말은 다정했지만, 어쩐지 반협박하는 투였다. 재이는 작게 픽 웃었다. 아, 개웃기네.

“정재이 너 웃었냐, 지금?! 나 보고 비웃었냐?!”

“또 시작이네.”

재이는 홍삭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재이와 다르게 홍삭은 항상 감정에 취해 있었다. 이런 식의 반응이니, 도대체 왜 의현이 홍삭을 재밌다고 생각하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야! 네가 잘났어? 맨날 나 같은 건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얼굴로 쳐다보네? 야! 정재이! 너 일로 와!”

“차도희.”

“……어, 어?!”

“가자.”

“응! 가! 가야지!”

홍삭이 의자를 뒤집든 책상을 뒤집든 재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재이가 뒷문을 열자 도희는 빠른 보폭으로 뒤를 따라왔다.

“홍삭 말이야. 왜 저러는 걸까?”

“그러게.”

“재이 너한테 열등감 있는 애처럼 굴잖아.”

계단을 내려가며 도희는 계속해서 홍삭에 대해 조잘댔다. 남 흉을 볼 때 공감대가 크게 형성된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이.

“열등감?”

“그래. 너 몰랐어? 홍삭은 네가 되고 싶은 거야. 자기가 갖지 못한 것들을 네가 가지고 있으니까. 네가 부러운 거라고.”

과학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중해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선생이 문 열리는 소리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도희랑 재이! 선남선녀네.”

“에이, 아니에요.”

“너희가 학교 홍보하면 되겠다! 연예인들 뺨치잖아. 뭔가 고급스럽고 일반인들이랑 다른 그런 느낌! 응! 뭔지 알지? 개안하는 느낌! 응! 맞아!”

과학 선생은 계속해서 찬사를 쏟아냈다. 거절하는 도희의 표정이 꽤 밝았다.

“옮겨야 하는 건 이건가요?”

재이가 비품실 안쪽에 빼죽 튀어나온 상자를 손가락으로 콕 집었다. 과학 선생은 호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 미리 뽑아 뒀어. 이거 보고 개수 맞게 책상 중앙에 올려 두면 돼. 조별로 실험 과제를 할 거거든.”

과학 선생은 재이의 손에 준비물을 정리해 놓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비커, 용액, 자, 시계 기타 등등.

“꺼내 놓을 테니까 네가 중앙에 놔줘.”

“응!”

재이는 가볍게 상자를 들고 종이를 확인하며 용품들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무렇게나 올려진 용품들을 중앙으로 정리하며 도희는 재이를 흘끔거렸다.

곧 수업 종이 쳤다. 곧 애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재이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빨리 끝나 아쉬웠다. 도희는 마지막 용품 정리를 마치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재이야.”

“……아까 네가 한 말 생각해 봤는데.”

부쩍 낮아진 재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희는 생각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걘 그런 걸 생각할 만큼 똑똑하지 않아.”

“누구?”

“멍청해서 더 거슬리는 거거든.”

“응?”

“홍삭 말이야. 그러니까 오히려 그건 내가…….”

앞문을 열고 같은 반 애들이 우르르 과학실로 들어왔다. 도희는 더 물으려다가 타이밍을 놓쳐 제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도희야, 무슨 얘기 했어? 좀 전에 말이야. 둘이 같이 있었잖아!”

“어? 어…….”

정재이의 수많은 추종자 중 하나이자 도희의 가장 친한 친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팍팍 내리치는 등허리가 제법 따가워 도희는 어깨를 살짝 뒤로 뺐다.

“재이 진짜 멋있지 않아? 무심한 것 같아도 해 달라고 하면 안 빼고 해 준다니까? 정말 설레 죽겠어! 못 살아, 못 살아! 그래서 방금 무슨 얘기 했어? 응?”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홍삭……?”

“뭐어? 또 걔 얘길 했다고?”

친구는 퍽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다들 왔나요? 오늘은 저번 시간에 말했던 대로 과학 실험을 할 거예요. 앞에 준비된 용품들이 보이죠?”

과학 선생은 익숙하게 단상 앞으로 가 수업을 시작했다. 도희는 흘끔 재이를 바라보았다.

“…….”

약간 곱슬거리는 연갈색의 머리카락. 흰 얼굴에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연보랏빛 눈동자. 턱을 괸 긴 손가락을 타고 내려가면 손목엔 명품 시계가 걸려 있다. 저건 아마 가족에게 선물 받은 거겠지? 재이는 어떤 집안 출신일까? 도희는 정재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건 내가…….’

도희는 그가 하려다 만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열등감, 홍삭, 멍청하다, 오히려 그건 내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거지?

도희는 수업 시간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정재이에 대해 생각했다. 외모는 미친 듯이 화려했지만, 항상 따분해 죽겠는 표정이었다. 마치 여러 가지 색이 섞인 검은 물감처럼.

쟤도 진심으로 웃는 날이 있을까?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도희는 문득 궁금해졌다.

* * *

“미친, 저쪽 이 갈았어. 머리가 권의현이래.”

흰색 목 폴라를 입은 2팀 팀원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권의현과 팀이 갈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부터 의현이 상대 전력으로 나올 걸 예측하긴 했으나, 머리가 될 줄은 몰랐다. 보통은 잘하는 놈을 꼬리로 두지 않아?

“모, 못하겠어…….”

“야! 쫄지 마! 혼자서 하는 게임이 아니잖아! 이건 팀전이라고!”

“아무리 티, 팀전이라고 해도…….”

“권의현이 너 죽여? 목만 확인하는 거잖아! 그리고 애초에 1팀 애들은 우리 쪽 꼬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어! 이런 때일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저쪽도 긴장한다고!”

2팀의 임시 리더가 크게 소리쳤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사기를 잃은 팀원들은 도움이 되긴커녕 오히려 민폐였으니, 최대한 빨리 이 분위기를 깰 필요가 있었다.

“이건 기회야.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나은 일일 수 있어.”

임시 리더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금세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 게임은 목걸이를 따내는 쪽의 승리야. 누가 누구 모가지를 더 확인했나를 보는 게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권의현이 꼬리였다면 우리가 목걸이를 뺏는 게 불가능했겠지만, 봐 봐. 걘 머리야. 그 말인즉슨 우리가 상대편 꼬리를 먼저 찾으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이지.”

게임이긴 했지만, 이건 명백히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상황이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능력 사용이 불가능했으니 무력으로 싸운다면 비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때가 아니면 도대체 언제 걔를 이겨 보겠어. 도대체 언제.

“우리는 무조건 상대의 목을 확인하자! 최대한 빨리 1팀의 목걸이를 빼내야 해! 안 그러면 진다!”

임시 리더의 말에 초상집이었던 2팀 분위기에 약간의 파동이 생겼다. 그래, 맞아. 목걸이만 뺏으면 돼.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거야.

“누가 꼬리를 맡았을까…….”

모두의 관심이 ‘1팀 꼬리’에 쏠렸다. 동민은 찬 공기를 뱉으며 의현의 무심한 얼굴을 떠올렸다.

“너도 아니구나.”

의현은 바닥에 깔려 바르작거리는 커다란 몸뚱이 위에 앉았다. 거친 몸싸움으로 인해 흰 폴라가 온통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옷을 내려 목 안쪽을 확인하며 의현은 이번에도 공쳤다고 생각했다.

“좀 봐주면서 해! 이게 공평하냐?!”

“공평을 따지자면, 네 덩치가 제일 불공평하지. 안 그래?”

“야!”

덩치는 열받았는지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생수통 두께의 어마어마한 팔은 제대로 한번 맞으면 뇌진탕도 가능했다.

“일곱 제꼈는데, 아직도 안 나왔다는 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니다.”

“혹시 숨겨 놓은 건 아니지?”

“아니라고.”

의현에게 깔린 게 억울한 듯, 덩치는 계속해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들썩였다.

“야! 확인했으면 좀 비켜! 남사스럽게!”

“남자 위에 올라타 있는 건 나도 썩 유쾌하지 않아.”

“이게……!”

의현이 제 허리 위에서 내려오자마자 덩치는 짜증 섞인 얼굴로 빠르게 멀어졌다. 흰 폴라의 흙먼지도 제대로 털지 않은 채로.

“의현아! 방금 둘 확인했는데, 추가현이랑 이현호는 아니래.”

어두운 풀숲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놈이 튀어나왔다. 의현과 같은 팀 사람이었다.

“강만식도 아니야. 같이 있던 현민호도 아니고. 서아랑도 아니었어.”

“……생각보다 되게 오래 걸리네. 추워 죽겠는데.”

“머리 썼을 수도 있어.”

“머리?”

“만약 그쪽에서 꼬리를 숨겨뒀다면, 계속해서 수색하는 우리만 체력 소모가 엄청나겠지. 제한 시간이 끝날 때를 노릴 수도 있고.”

“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어.”

가만히 서서 팀원과 의견을 나누는 의현의 뒤로 누군가가 급작스럽게 달려들었다. 나무 위에서 잠복하고 있었던 건가? 의현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권의현! 네 목을 보여라!”

“뭔 개소릴 해.”

가끔 있었다. 어쭙잖은 영웅 심리로 이렇게 막 나오는 애들.

“우리 팀은 전부 네가 머리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어! 네가 머리가 아닌 꼬리라는 사실을! 음하핫!”

사회 부적응자처럼 생긴 비쩍 마른 남자애는 학교를 오가며 몇 번 본 것도 같았는데 잘 기억이 안 났다. 존재감이 그리도 없었나?

“너를 잡고 내가 영웅이 되겠다! 음핫!”

“그래. 좋은 생각이야.”

“뭐, 뭐?!”

“기대되는데?”

뚝, 뚝.

의현은 가볍게 목을 꺾었다.

“의현아, 죽이는 건 안 돼……. 알고 있지……?”

팀원이 달달 떨며 속삭였다. 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어디 한번 확인해 봐. 내 모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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