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게 뭐야.”
의현은 제 손에 들린 상자를 뒤집었다. 상자 안에는 팔랑거리는 종이 한 장과 플라스틱 카드가 들어 있었다. 이걸 가지고 과거에 뭔가 했던 것 같긴 했는데, 20년도 더 전이라 기억은 희미했다.
“나는 2팀이라는데, 의현아 너는 몇 팀이야?”
“1팀.”
“안 돼! 갈라졌다!”
검은색 플라스틱 카드 앞면에 선명하게 적힌 숫자는 1이었다. 동민은 숫자 2가 적힌 제 흰색 카드를 내던지며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해수는 조용히 제 카드를 앞으로 밀었다. 검은색 배경에 흰색으로 적힌 숫자는 1. 의현과 같았다.
“안 돼! 나만 빼고 둘 다 1팀이야?!”
절망의 늪에서 헤엄치던 동민은 해수의 카드를 보고 주먹으로 바닥을 꽝꽝 내리쳤다.
“야, 그만해. 아래층에서 올라온다.”
“그렇게 무심하게 굴 일이 아니라고! 너네 다 같은 팀인데 나만 똑 떨어졌다니까?”
슬픈 건 동민뿐만이 아닌 듯했다. 해수 역시 눈썹을 축 누그러트린 채 동민과 눈을 마주쳤다. 으휴, 저 지겨운 커플 한 쌍…….
“꼬리잡기 규칙이 있어.”
의현은 팔랑거리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꼬리잡기 게임 규칙〉
1. 게임 시작에 앞서 2개의 팀으로 나뉩니다. (1팀/2팀)
2. 각 팀은 상호 합의하에 ‘머리’와 ‘꼬리’를 정해야 합니다.
3. 각 팀의 ‘머리’는 ‘꼬리’를 잡아 그 증표인 목걸이를 뜯어내야 합니다.
4. ‘꼬리’는 자신의 목걸이를 지켜야 합니다.
5. 팀원들은 ‘꼬리’가 목걸이를 뺏기지 않게 도와야 합니다.
6. 지정된 시간이 끝났을 때, 상대 팀의 목걸이를 소유한 팀이 이기게 됩니다.
“도대체 이딴 게임을 왜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일석삼조라잖아. 위에서 시키면 해야지 뭐…….”
우울해 죽겠단 얼굴로 동민은 중얼거리고 다시금 고개를 처박았다.
“대가리 되면 개귀찮겠다. 절대 싫어.”
“의현아 대가리가 아니라 머리.”
“그거나, 그거나.”
의현의 말이 재밌는지 해수는 작게 웃었다. 의현은 흐물거리는 종이를 구기며 무슨 일이 있어도 대가리만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리의 앞에 서야 한다?
그야말로 최악.
최악이었다.
“당연히 우리 쪽 머리는 의현이가 해야지!”
“맞아! 당연해! 일단 이건 확정으로 하고, 꼬리를 누구로 할지 정하자고.”
“이야, 이거 너무 쉬운데? 의현이 네가 1팀이라니까 든든하다! 2팀 놈들 아주 불쌍하게 됐는데? 으하하!”
소강당에 모인 1팀 팀원들은 왁자지껄했다. 분위기는 화목했고 심지어 몇 명은 벌써부터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뭐?”
의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도대체 이야기의 흐름이 왜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뭐긴 뭐야. 너 아니면 누가 머릴 해.”
“아니, 그래도 이건 합의를 해야 하는 거잖아.”
봐봐, 종이에도-.
의현은 아까 꾸깃꾸깃 구겼던 종이를 팀원들 앞에 쫙 펼쳤다. 구겨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합의라는 말이 있긴 했다.
“자, 그럼 모두에게 공평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자고. 권의현이 머리 하는 거 반대하는 사람 손들어!”
의현은 손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봤지? 어차피 머리는 네가 해야 해.”
“말이 돼?”
“왜? 말이 왜 안 되는데?”
의현은 머리를 굴려 이성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오는 건 너무 뻔해. 2팀도 다 알 거야. 전략을 까놓고 시작하면 안 되는 거잖아.”
“음, 일리 있어. 하지만 기각이야.”
의현의 동기이자 학생회장 출신 희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략은 우리가 상대보다 딸릴 때나 짜는 거잖아.”
“…….”
“생각해 봐. 의현아.”
“…….”
“네가 2팀 목걸이를 뺏으면 아무도 널 못 막아.”
“……우리 목걸이가 뺏기면?”
“그쪽 목걸이도 이미 뺏긴 후일걸?”
“그럼 동점이잖아.”
“동점이어도 어떻게든 결론은 내겠지. 거기에 어떤 조건이 있든 의현이 네가 우리의 최고 전력인 건 변하지 않아.”
희민의 말에 1팀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날만을 위해 연설을 준비한 사람처럼 희민은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었다.
“의현아, 네가 해야 해. 너밖에 없어. 나는 너 믿어.”
어이없게도 팀원들의 신뢰 가득한 표정을 보는 순간, 의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팀의 계획은 형편없었다. 자기들 마음대로 의현을 머리에 앉힌 주제에 꼬리를 누구로 해야 하는지는 제법 머리를 굴렸다.
지정된 회의 시간이 끝나고 담당자는 커다란 보관함을 질질 끌고 소강당으로 들어왔다.
“이게 뭐예요?”
“팀의 사기를 증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거죠.”
여자 담당자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으며 보관함 뚜껑을 열었다.
“짜잔! 팀복!”
“…….”
“반응이 별로네……? 이거 벌점을 좀 줘야겠는걸요?”
“와, 와아아-!”
눈치만 보고 있던 1팀 팀원들은 큰소리로 환호했다. 담당자는 그제야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있는 꼬리잡기는 말이죠. 유구한 전통에 빛나는 이 연수원의 핵심이자 꽃이라고요.”
뿌듯한 표정을 보니 저 담당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꽤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목걸이를 뺏으라는 말이 추상적이라고 생각했죠? 물론 그렇겠죠! 목을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는데 목걸이를 뜯으라니!”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담당자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목 폴라! 여러분들은 1팀이니까 검은색이라고요.”
담당자는 무슨 판매상처럼 검은색 목 폴라를 책상 위에 마구잡이로 올려놓았다.
“목걸이를 차고 있는 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여러분들은 목 폴라를 내려 상대의 목 안쪽을 확인해야만 할 거예요.”
생각보다 야만적인 룰에 팀원들은 놀란 듯했다. 숨고 숨기는 게 끝일 줄 알았는데 상대를 하나하나 잡아 확인해야만 목걸이의 존재를 알 수가 있다니.
“저 질문 있는데 하나만 해도 됩니까!”
“네, 말씀하세요.”
“밤에 야외에서 하는 꼬리잡기인데, 저희가 검은색 목 폴라를 입는다면 상대 쪽에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저희만 보호색이잖습니까.”
“오 좋은 질문.”
담당자는 희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1팀은 바지가 하얀색이에요. 공평하죠?”
“……네?”
담당자가 짝짝 손뼉을 치자, 소강당 문을 열고 몇 개의 보관함이 더 들어왔다.
“하하…….”
그게 더 싫어.
희민의 표정은 꼭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럼 옷 갈아입고 삼십 분 후에 강당으로 모이세요. 인원 체크하고 한 번에 이동할 테니까요.”
담당자는 생긋 웃으며 소강당을 빠져나갔다. 목 폴라에는 이미 이름표가 붙어 있어 제 것을 찾아 입기 좋았다.
“쉽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본격적일 수도…….”
희민은 작게 중얼거렸다.
팀원들은 이름표를 확인해 각자 자신의 옷을 집어 들었다.
“의현아 이거 네 거.”
누군가 의현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몸에 적당히 붙는 목 폴라는 영 답답해 활동성 측면에서는 꽝이었다.
여자애들과 몇몇 남자애들이 간이 탈의실로 나갔다. 희민은 훌러덩 제 윗옷을 벗고 팔뚝을 드러냈다.
“형님 멋지지?”
“너 지금 닭살 돋았어.”
“개추워!”
이희민이라는 이름표가 박힌 목 폴라를 재빨리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희민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해맑아 보이는 표정에 의현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걱정된다, 정말.”
이건 그냥 작은 이벤트 중 하나였으니 여기에 목숨 걸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적어도 민폐 끼치고 싶진 않았다.
“이름표 좀 봐 봐.”
의현이 옷을 갈아입자, 희민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톡톡 손짓했다. 의현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왼쪽 가슴에 박힌 네모난 이름표를 보았다.
“네 얼굴 모르는 애들도 네 이름은 다 알아.”
“…….”
“걱정 안 해도 돼.”
“…….”
“네가 권의현으로 있다면 아무도 네 목을 들여다보지 못할 테니까.”
희민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멋진 척하네.”
의현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하, 멋있었어? 맑은 목소리로 웃는 희민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겨울의 저녁은 추웠다. 연수원 소유의 산은 넓고 나무가 빼곡해 무슨 군사 훈련 장소로도 보일 정도였다. 의현이 낮게 숨을 뱉었다. 하얀 입김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이렇게 추운 날 검은색 목 폴라 하나 입고 야산으로 쫓겨난 연수생들은 투덜거리며 이벤트의 시작을 기다렸다.
“두 시간이라고 했지?”
“응.”
“우리 작전 잊지 마. 세 명씩 붙어 다니면서 목걸이 찬 사람 찾는 거 말이야.”
희민은 추위 때문에 귀가 새빨개진 채 주변을 진두지휘했다. 오랜 시간 쌓아온 리더십이 이렇게도 쓰이는구나 싶었다.
“목걸이 한 사람 찾으면 두 명은 무조건 뒤를 쫓고 한 명은 떨어져 나와 바로 의현이한테 보고해.”
희민의 계획은 나름 철저했다. 모든 걸 의현에게 맡겨 놓은 것 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퍽 만족스러웠다.
“저, 저는 이런 거 한 번도 해 본 적이…….”
해수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겁먹어서 그런 건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다.
빠르면 초등학교, 늦으면 고등학교 때라도 특수 능력이 발현된 사람들은 죄다 특수 능력 교육을 받았다. 그 덕에 모두 동기였으니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 김해수를 제외하면.
“무서워요.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저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만약 정말 실수라도 해서 팀이 져 버린다면…….”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사실 해수의 투정이 잘 들리지 않았다.
“우와-!”
엄청난 소리와 함께 산 정상에서 새빨간 조명탄이 튀어 올라왔다. 펑! 펑!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듯이 허공에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불꽃에 연수생들이 경쟁의 존재를 망각하고 환호성을 내뱉었다.
“그냥 해요.”
“…….”
“지게 안 할 테니까.”
의현의 말에 해수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산 깊은 곳에서 2팀의 환호성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희민은 팀원들을 불러 모아 손을 한군데로 모았다.
“그냥 하는 거지만, 이기면 기분 좋잖아? 우리 꼭 이기자!”
이기자!
이기자!
이기자!
추워서 단체로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건 아닐까?
모두 악에 받친 듯 소리치며 어둡고 축축한 산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로소 꼬리잡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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