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담당자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 해수와 동민을 끄집어냈다. 쓰러졌던 해수는 금세 정신을 차렸고 동민은 넋이 나가 보였다. 자리를 무단으로 이탈했으니 벌점을 부과한다는 말에 의현이 팔꿈치로 동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너 괜찮아?
“어? 어, 어…….”
동민이 정확히 그 동굴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의현은 흘끔 해수를 바라보았다.
“…….”
해수는 아무 말도 없이 손톱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동민이 사람 좋기로 유명하다고 해도 갑자기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무언가가 있다. 김해수와 차동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거야.
“야.”
“…….”
“차동민.”
의현의 낮은 목소리에 동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자.”
의현은 고개를 까딱였다. 시무룩한 표정의 동민은 그 상황에서도 순진하게 해수를 챙겼다. 해수 씨, 저희 방으로 돌아가요.
해수는 의현과 동민을 차례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수 첫째 날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김해수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그저 차동민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태어난 지 안 된 새끼가 어미 좇듯이 차동민에게 향하는 눈은 집요할 정도였다.
아침 샤워를 끝내고 나온 의현은 소파에 앉아 머리를 탈탈 털었다. 신경 쓸 일이 많아 이발을 미뤘더니, 머리 기장이 평소보다 자라 있었다.
늦은 잠에서 깬 해수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욕실에 있어요.”
“……네?”
“차동민이요.”
말하면서도 의현은, 남편 뺏은 불륜 상대가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의현의 말을 들은 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와 앉았다. 근육이 없는 가벼운 몸에 소파는 거의 꺼지지도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
“차동민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직구를 날릴 줄 몰랐다는 듯 해수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의현의 입장에선 어차피 잘 보일 이유도 없는 사람인데 굳이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저는 가끔…….”
잠시간의 침묵 뒤 해수가 입을 뗐다. 의현은 뒤에 이어질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아침부터 따뜻한 물로 샤워하니까 기분 진짜 좋다! 의현아 너 바디 워시 써 봤어? 냄새가 무슨 복숭아……. 어?”
눈치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온 동민이 미묘한 분위기에 눈을 굴렸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동민 씨. 잘 주무셨어요?”
“네? 아, 일어나셨네요. 아깐 자고 계셔서.”
“다들 일찍 일어나시네요.”
“집안 교육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돼서요. 하하…….”
“그렇구나. 엄한 집에서 자라셨나 보네요.”
“엄하다기보단 좀…….”
샤워 가운 하나 달랑 걸친 동민의 몸에는 몇 개의 상처 자국들이 보였다.
“도련님이에요. 쟤.”
의현이 말을 붙였다. 동민은 제 집안이 빵빵하다는 걸 제법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얘가 1지구 토박이 출신의 귀한 도련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해수는 살짝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교육을 잘 받은 티가 났거든요. 무례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따뜻하죠. 이런 건 타고나기 힘들어요.”
“…….”
“특히 우리같이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말이죠. 저속해지기 쉽잖아요. 항상 어둡고 이상한 것들만 보니까.”
“…….”
“세상에 이런 사람도 산다는 걸 알아야 나도 좀 살 만하죠.”
할 수 없는 말을 뱉으며 해수는 동민이 샤워를 끝내고 나온 욕실로 들어갔다. 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해수 씨 말이야.”
얼빠진 얼굴로 멀거니 서 있던 동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의현에게 다가왔다.
“네가 문제야. 항상.”
“내가? 야, 나 진짜 억울해!”
동민은 펄쩍 뛰었다. 그 덕에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의 가슴께가 조금 풀렸다.
“친절한 게 죄냐? 누구에게나 친절한 게 나빠? 아무리 세상이 혼란해도 누군가는 따뜻하게 대해 줘야 한다고. 그래야 세상도…….”
의현은 앉은 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붕붕 뛰며 제 의견을 피력하던 동민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왜?
“친절? 좋지.”
“…….”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게 뭐가 나빠.”
“…….”
“근데 너는 조심성이 없어.”
“…….”
“그게 문제야.”
의현은 무심하게 동민의 샤워 가운을 올려 주었다.
“…….”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던 동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화산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의현은 동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실로 향했다.
―연수생 여러분들 모두 편안한 밤 되셨나요? 현재 시각인 8시부터 9시까지 식당에서 아침 식사가 가능합니다. 식사 후 간단한 ‘이벤트’가 있으니, 조식을 드시지 않는 분들도 꼭 참석해 주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시작된 방송은 제 할 말만 쏟아내고 뚝 끊겼다.
“정신 차려 미친놈아…….”
상스러운 욕을 입에 담으며 동민은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렸다. 자신이 순간 의현에게 실수할 뻔했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멀끔한 얼굴의 셋이 함께 다니는 건 생각보다 불편했다. 어딜 가나 시선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강당으로 가는 내내 몇몇이 이쪽을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가십거리가 되는 일은 이제 익숙했으니 사실 뭐 그다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잠깐 뭘 한다고?”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이쪽, 방송으로 말했던 그 ‘이벤트’의 정체였다.
“꼬리잡기를 한다는데?”
“아니, 여기가 애들 놀이터야?”
“어두운 곳에서 한다잖아. 담력도 키우고 나쁘지 않지.”
의미 없는 건 잊다 보니 연수원에서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의현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도 이딴 걸 했었나, 진지하게 생각했다.
연수 담당자는 마이크를 쥔 손을 바꿔 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애들도 아니고 뭐 이런 걸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동료애가 싹트고 담력이 쌓이고 실전 경험도 늘릴 수 있으니 우리에겐 일석삼조가 아니겠어요? 호호.”
허울 좋은 말에 동민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다!
“어제완 다르게 오늘은 방 번호가 아니라 새로 팀을 만들 거예요. 다들 나가면서 출구에 있는 상자를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세요. 그게 오늘의 새로운 팀이 될 테니까.”
“개싫다. 최악…….”
차동민 김해수와 같은 팀이었던 어제도 문제가 생겼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같은 팀이 되면 또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 생길까. 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방 번호로 팀 나누는 게 좋은데……. 설마 어제 내가 사고 쳐서 갑자기 이렇게 된 건 아니겠지?”
“일리 있어.”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너무해…….”
동민의 풀죽은 얼굴에 해수는 모른 척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공지가 끝나고, 강당에 모였던 연수생들은 출구에서 검은색 상자를 하나씩 손에 쥐고 밖으로 나왔다.
“소리가 나네요…….”
상자에 귀를 대고 흔들며 해수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야! 차동민, 너 애인 생겼다며?”
“애, 애, 애, 애인?!”
“순진하기는, 인마. 권의현 너는 어쩌냐. 단짝 친구마저 커플이 되어 버렸으니.”
오전에 의현이 샤워가운을 올려 준 일 때문일까. 오늘 무슨 말만 들어도 발작하는 동민은 누구에게나 아주 재미있는 놀잇감이 되어 주었다.
“그러게 말이야.”
웬일로 의현마저 동기들의 장난에 어울렸다. 그제야 사태 파악을 끝낸 동민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저었다.
“진짜! 전혀! 아니거든!”
“그런 과감한 부정은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친구.”
“아닌 걸 그럼 아니라고 하지! 뭐라고 해!”
“그래, 그래. 알겠어. 연수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연애부터 시작하는 네 마음 형이 절실히 이해한다. 형도 솔로인 거 알지? 항상 급하다고.”
동민의 반응이 재밌는 건지 동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해수는 마치 잘 다듬어진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뿐 어떤 부정도 하지 않았다.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냐고, 가자! 의현아!”
동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정색하고 아니라고 하면 해수가 무안할까 봐 방방 뛰며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넘기려던 동민은 동기와 의현의 손 사이를 뚝 잘라 냈다.
“……아니야.”
동민은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웃으며 의현을 슬쩍 잡아끌었다.
“우리 방은 이쪽이거든.”
내내 당황할 줄 알았는데 동민은 의외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분위기를 끊어 냈다. 야, 알겠다. 알겠어. 우리도 간다! 동기들은 왁자지껄 웃으며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너 뭔 소릴 하는 거야. 우리 방도 저쪽인데.”
붙잡힌 팔을 톡 떼어 내며 의현이 말했다.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산책 안 해?”
“갑자기 뭔 산책이야.”
“그냥 좀 걷자.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추워 죽겠는데 뭔…….
겨울이었다. 의현은 공적 목적이 아니라면 추운 곳에서 몸 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꼬리잡기 한다는 거 못 들었어?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해.
“좋네요, 산책. 나도 하고 싶었는데.”
해수는 동민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의현 씨는 피곤하면 들어가 쉬세요. 나랑 동민 씨 둘이 한 바퀴 돌고 들어올 테니까.”
또 이러네.
이거 의도적으로 자극하려는 건가?
아니면 무의식?
특별한 뜻이 있나?
없나?
의현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해수는 알 수 없는 존재였으며, 동민은 언제든 쉽게 위험에 빠지는 타입이었다. 의현이 생각할 때, 둘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갈게.”
“어?”
“가자고 산책. 어디로 갈 건데?”
이런 대답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딱히 생각해 둔 곳 없이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던 동민은 허공에 손짓하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여, 연수원 옆에 산책로가 있잖아! 거기 전망이 진짜 좋대!”
“그놈의 전망…….”
일전에도 전망 타령하다가 바닷물에 빠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지 잊었는지. 동민은 열변을 토했다.
“좋네요. 같은 방 쓰는 사람들끼리 산책하는 거. 낭만적이고.”
해수가 의현을 살살 긁듯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역시 뭘 알고 이러는 거겠지? 의현의 조그마한 머리통은 온통 알 수 없는 위험 신호로 가득 찼다.
김해수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축축하고 불쾌한 것이 자꾸만 누군가가 떠올랐다.
“낭만 다 죽었네요.”
의현은 해수와 마주쳤던 눈을 거두었다.
그저 이 순간이 만족스러운 동민이 웃으며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군데군데 쌓인 눈이 녹지 않고 얼어붙어 있었다. 의현은 차가운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낮게 숨을 뱉었다.
……정재이.
전혀 닮은 얼굴이 아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김해수를 보며 자꾸만 정재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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