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영화는 꽤 본격적이었다. 은영은 공부하느라 바빠 죽겠다는 혜영을 어떻게든 데리고 와 바닥에 앉혔다.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온 정재이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터덜터덜 내려왔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다.
“과자 드실 분? 바삭바삭-.”
필규는 과자 봉지와 음료수를 내보였다. 의현은 음료수 캔 하나를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자자, 모두 기대하셔도 좋다고요! 불 끌게요! 영화 시작합니다!”
은영은 저택의 불을 모조리 끄고 혜영을 따라 바닥에 앉았다.
“……소파 놔두고 왜 다 바닥에 앉는 건데?”
“음, 그러게요? 뭔가 이유는 모르겠는데, 바닥이 편해요.”
“공감 공감.”
은영의 말을 듣고 필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재이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고 의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 말리고 와.”
“귀찮아요. 가만히 있으면 마르는데.”
정재이는 쿠션을 가슴팍에 끼우고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짙은 남색의 잠옷이 주름졌다. 어차피 저택은 온도 관리가 잘 되고 있었으니 어디서 옮은 게 아니라면 감기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집중했다. 영화 제목이 스크린 중간에 떠올라 다들 그곳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클랙슨 소리와 함께 차가 들이닥쳐 영화 제목을 들이받았다.
“으악-!”
안 들린다, 안 들린다……. 겁이 많은 혜영은 처음부터 눈과 귀를 가리고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제목은 빨간 핏빛으로 변했고, 영화는 그렇게 시작했다. 공포 영화치곤 임팩트 있는 시작이었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시골 버려진 오두막에 사는 나이든 여자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 온 일행 중 젊은 남자 한 명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낀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그녀가 그를 갖기 위해 선택한 행동은, 바로 같이 온 일행들을 모조리 처리해 버리고 그 남자를 온전히 혼자가 되게 하는 것.
“꼭 저런 미친 것들이 하나씩 있다니까요? 저런 새끼들은 아주 교도소 보내야 해요!”
은영은 영화 보는 내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고전 영화라 그런 건지 영화는 모든 면에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가지 말라는 곳을 가는 친구, 저녁에 갑자기 야한 짓 하다가 돌아오지 않는 커플, 경찰서에 전화하겠다며 핸드폰 들고 설치다가 언덕에서 구르는 친구까지. 영화는 단조로웠지만 어쨌든 중간중간 묘한 긴장감 때문에 나름대로 집중은 잘 됐다.
영화는 후반부를 향해 달려갔다. 친구들이 다 죽은 후 나이든 여자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남자를 데리고 간다. 함께 살자는 무언의 신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이든 여자는 환하게 웃는다.
하지만 다음 날, 남자는 여자가 잠든 사이 그녀를 죽이고 바깥으로 뛰어나온다. 이동할 차는 망가졌고 친구들은 죄다 죽은 상황.
남자는 맑은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결국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다. 몇 년 후, 처음 보는 여행자들이 오두막의 문을 두드린다. 차에 기름이 떨어져서 그러는데, 혹시 기름 좀 얻을 수 있겠냐면서. 문을 열고 나오며 남자는 수상한 얼굴로 웃는다. 그리고 줌 아웃.
뻔해 죽겠는 영화를 보며 의현은 슬쩍 정재이를 쳐다보았다. 아주 조금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재이 얼굴에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긴 속눈썹과 연한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흐엉, 나 오늘 잠 못 자! 어떡할 거야! 여운이고 뭐고 필요 없어! 결말 졸라 구려!”
“그럼 이제 그 남주가 살인을 시작하는 거야? 피 맛을 못 잊어서?”
“불쾌 불쾌.”
“은영아 오늘 같이 자자, 나 너무 무서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영화를 보다 울었는지 혜영의 얼굴엔 군데군데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시간이 꽤 늦어 통유리 밖이 어두웠다. 스크린 전원을 끄고 애들이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찝찝한 결말 진짜 싫은데…….”
은영은 괜히 이 영화를 빌려왔다며 투덜거렸다.
“재이야, 영화 어땠어?”
“재밌네요.”
“무섭진 않았나 봐?”
“다 연기한 건데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그래도 나는 좀 불쾌했어. 자기 욕심 때문에 누구한테 피해 주는 짓 하는 게 이해 안 되기도 하고.”
의현은 은근히 정재이를 한번 떠보았다.
“그건 그렇죠.”
정재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사람들이 왜 명작이라고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
“형도 불쾌하다고 하면서 자꾸 생각하잖아요.”
“…….”
“아무 감정 안 남기는 것보다 뭐든 하나 남기는 게 낫지 않겠어요?”
다소 소름 끼치는 대답이었지만, 정재이는 얼른 웃으며 말을 돌렸다.
“연수받는 동안 다치지 말고요.”
“어? 어…….”
“연락하면 답장 꼭 해 주세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쁘장했다. 의현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오늘 같이 시간 보내 줘서 고마워요, 형.”
정재이는 의현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의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 차에 올라탔다.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이지 못한 순간부터, 너는 너무…….
* * *
권중섭은 바빴다. 대선은 3년이 넘게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 당선되지 않으면 세상이 끝날 듯 굴었다. 당연했다. 권중섭은 의현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권력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15지구 밑의 사람들이 밥을 못 먹어 배만 톡 튀어나오든 말든 그런 건 권중섭의 안중에도 없었다.
의현은 미리 싸 놓은 짐을 들고 관리청으로 이동했다. 연수생들은 여기서 대관한 버스를 타고 연수원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의현아!”
목도리를 둘둘 감고 있던 동민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출발 시각까지 꽤 여유가 있었는데, 연수라고 하니 신경 쓰이는 건지 일찍부터 도착해 있는 사람이 많았다.
“나 한숨도 못 잤어. 너무 떨려서.”
“왜 떨리는데?”
“그냥. 실수할 수도 있잖아. 처음이니까.”
원래 뭐든 잘하려고 하면 실수하고 긴장하는 법이었다. 잠을 못 자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동민은 의현에게 물었다.
“안 추워? 옷을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
“옷 껴입으면 답답해.”
“하긴 넌 옷 두껍게 입는 거 안 좋아하지.”
동민은 제가 두르고 있던 목소리를 풀어 의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수작 부리는 거 아니고 불쌍해 보여서 주는 거야. 동정심에.”
“됐어. 안 춥다니까?”
“나도 안 추워. 필요 없으면 버려.”
“……어이가 없네.”
옛날 같았으면 진즉 내던질 의현이었지만, 남들의 호의를 굳이 무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에는 웬만하면 받아 주곤 했다.
“귀찮으니까, 버스 타면 가져가.”
의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제 목에 대충 목도리를 감았다. 엉성한 손길에 동민이 밝게 웃으며 목도리를 꼼꼼히 묶어 주었다.
“너 진짜 도련님같이 구네.”
“지는.”
어차피 똑같은 1지구 출신 주제에 도련님이고 아니고를 따지는 것도 우스웠다. 목도리에 따끈한 온기를 느끼며, 의현은 멀리서 버스가 오는 걸 쳐다보았다.
* * *
연수원은 산골짜기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하루 반나절을 이동하는 동안 버스는 세 번이나 멈추었다. 멀미에 시달린 연수생들 덕분이었다. 멋진 자연 경관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연수생들은 얼굴이 허옇게 질려 버스에서 내렸다.
“자, 힘들죠? 여기서 카드 키 받아서 좀 쉬세요.”
방은 3인 1실부터 4인 1실까지 다양했다. 지원자가 있는 경우 되도록 한방에 지정해 준다는 말에, 동민은 의현의 이름을 적어 냈다. 모르는 사람과 방을 쓰느니, 차라리 의현과 쓰는 편이 나았다.
의현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카드 키를 챙겼다. 차동민이 자꾸 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탓에 미치도록 어깨가 아팠다.
“503호래.”
“숫자 왜 이렇게 불길해.”
“그런가? 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동민은 캐리어를 끌고 연수원 숙소로 올라갔다. 산속에 있었지만, 숙소 자체는 고급 호텔처럼 깔끔했다. 1층 로비에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유명 화가가 그린 듯한 그림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올라가자마자 누워서 좀 쉬어야겠어.”
“우리 3인 1실이야.”
동민은 카드 키와 함께 있던 이름을 확인했다.
김해수.
특수 능력 고등학교에 다닐 땐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3인 1실이나 연수보다 중요한 것은 의현과 함께 방을 쓴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개피곤해…….”
카드 키를 찍고 503호에 들어오자마자 의현은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는 지나치게 커다랬다.
“약 받아 올까? 밑에 약 있다는데.”
“멀미 아니야. 그냥 졸려서 그래.”
“버스에서 좀 자지.”
“내가 누구 때문에 못 잤는데?”
“나 때문이야?”
동민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눈으로 의현을 쳐다보았다. 의현은 대충 손을 휘적거렸다. 이런 걸 얘기해 봐야 입만 아팠다.
“좀 잘게.”
“두 시간 뒤에 식사 시간이래. 그때 깨워 줄게.”
의현의 까만 머리카락이 침대 매트리스에 보드랍게 흩어졌다. 동민은 중간 테이블에 앉아 괜히 눈치만 보았다. 학교 다닐 때 애들이랑 다 같이 수련회 같은 걸 간 적은 있어도, 이렇게 둘이서 방에 남아 있던 적은 없었다.
“……시끄러워.”
얼마 지나지 않아 의현은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복도에서 무슨 소동이라도 났는지 큰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러게. 밖에 무슨 일 났나 보다.”
“열받게 하네.”
정말 피곤해 죽겠는지, 의현의 눈에 형형한 살기가 감돌았다.
“자고 있어. 내가 보고 올게.”
괜히 의현이 나갔다가 연수 첫날부터 분위기 개판 나는 것보단 동민이 상황을 파악하고 오는 게 훨씬 나았다.
의현은 베개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만 머리가 살짝살짝 움직이는 걸 보니 괜히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미쳤어? 정신 차려! 동민은 고개를 흔들며 얼른 카드 키를 집어 들고 복도로 나왔다.
“음침한 새끼네, 이거? 야. 사과하라고. 어? 사과해!”
“…….”
“입만 꾹 다물고 있지 말고 얘기를 하라고!”
애들이 한군데에 몰려 있었다. 그것도 503호 바로 앞에서.
동민은 얼른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눈치가 없는 편이긴 했지만, 대충 봐도 덩치 큰 애들이 작고 마른 남자애 하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야?”
동민이 넉살 좋게 웃으며 물었다. 교우 관계도 좋고 집안도 좋은 동민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 동민아. 아니, 내 말 들어 봐. 우리끼리 그냥 지나가고 있었는데, 이 새끼가 우릴 툭 치고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사과하라고 했더니 음침하게 중얼거리면서 사과도 안 하고 지금 이러고 시비 털고 있다니까?”
학교 동기였던 친구가 언성을 높였다.
“충분히 네가 기분 나쁠 상황이네. 그래도 다 같이 모여서 이렇게 윽박지르면 좀 그렇지 않을까?”
“야, 내가 처음부터 윽박질렀겠냐? 너도 알잖아.”
동기는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동민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중재에 나섰다. 한창 과열되던 분위기는 생각보다 금방 식었다. 연수원 담당자가 신고를 받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다들 그만하고 방으로 돌아가세요. 다시 한번 시끄럽다는 신고 들어오면 벌점 부과합니다.”
담당자의 자비 없는 말투에 싸움 구경을 위해 모였던 애들이 투덜거렸다. 도대체 어떤 눈치 없는 새끼가 신고를 한 거야?
“방으로 데려다줄게요. 방이 어디세요?”
동민은 어깨를 축 누그러트리고 벌벌 떠는 남자에게 상냥히 물었다. 남자는 제 손에 꽉 쥐고 있던 카드 키를 동민에게 보여 주었다.
Room.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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