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홍삭은 머리가 나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두 자릿수 뺄셈도 제대로 못 했으니, 그 심각성을 알 만했다. 자퇴하고 싶다는 애를 굳이 고급 학교에 진학시킨 건 순전히 의현의 욕심이었다. 낮은 지구 출신 애들은 일찌감치 기술을 배우는 쪽으로 노선을 틀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내자니 어째 의현의 자존심이 상했다. 의현은 되도록 홍삭이 고등 교육까지는 받게 하고 싶었다. 그 이후는 뭐 알아서 살겠지.
“행님, 그러니까 행님 말씀은, 굳이 저를 보러 와 주셨다는 말씀이잖습니까? 네? 정재이 저 새끼가 아니고요.”
홍삭은 어깨를 으쓱대며 몇 번이나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정재이를 열받게 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하하핫! 이것 참,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은데 행님마저 저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제가 난감하네요. 이놈의 인기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인상을 제대로 구긴 의현은 도대체 이 새끼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홍삭을 쳐다보았다.
“……홍삭, 너 자기 객관화가 안 되냐고 내가 전에 한 번 묻지 않았나?”
“그 개깐하라는 거 이제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주변에 사람이 자꾸만 몰려들었다. 의현은 멀뚱히 있는 정재이와 홍삭에게 손짓했다.
“일단 차에 타. 사람 없는 곳으로 가게.”
“오우, 약간 심쿵!”
“헛소리하지 말고 넌 핸드폰 내놔.”
울상을 짓는 홍삭에게서 기어코 핸드폰을 빼앗은 의현은 순식간에 전화 기록과 번호를 삭제했다. 얜 심지어 배경 화면이 자기 셀카였다.
“형.”
의현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려니, 정재이가 그 뒤로 성큼 다가왔다. 키가 많이 컸지만, 여전히 의현보다는 작았다. 게다가 요즘은 변성기라 목소리도 낮아지고 있었다.
“너도 타, 뭐 좀 먹으러 가게.”
“갑자기요?”
“연수 있어서 당분간 못 볼 수도 있어. 그거 겸사겸사.”
“연수?”
“헌터부 주최 신입 사원 연수. 못 빠져.”
정재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확실했다. 약간 불편하고 짜증이 남.
“그런 건 미리 말해 주면 좋잖아요.”
“내가 사회 생활하는 거 전부를 일일이 다 너한테 얘기할 수는 없어.”
의현의 말에 정재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밥 먹을 거야, 아니면 뭐 다른 거?”
“저는 아무거나 좋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호텔 뷔페?”
“…….”
“재이, 너는?”
차에 탄 의현은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애들을 확인했다. 입이 댓 발 나온 정재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재이 너는 안 먹을 거지? 그럼 형은 삭이랑 둘이 먹을게.”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싫으면 의견 내. 아무 말도 안 하면 기회 없어.”
의현은 점점 능숙하게 정재이를 다뤘다. 어릴 때부터 계속 보던 탓에 재이가 어떤 부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그럴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았다.
“……그냥 아무 데나 가요. 상관없으니까.”
결국은 홍삭이 고른 호텔 뷔페로 가기로 했다. 윤 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돌렸다.
“호텔은 어디로 모실까요?”
“H 쪽으로 가죠. 거기가 조용하고 좋을 것 같네요.”
“네. 그럼 H 호텔 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훠우! 홍삭은 비싼 음식을 양껏 입에 집어넣을 생각에 설레는 건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의현은 제 뒤통수에 느껴지는 시선을 정재이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요즘은 뭐 문제 같은 거 없지?”
“므즈를 그 므그 이으어, 드 즈르는드!” (문제랄 게 뭐가 있어요, 다 잘하는데!)
“입에 있는 거 씹고 말해.”
홍삭은 음식을 입에 잔뜩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의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제 앞에 놓인 휴지를 홍삭의 앞에 밀어 주었다.
“쟤를 하필 이 학교에 보낸 게 문제예요.”
“왜? 홍삭이 괴롭혀?”
“그건 아니지만…….”
“재이야. 형이 항상 말했잖아. 이유 없이 무시하고 싫어하면-.”
“이유가 있으면요?”
정재이는 웬일로 날이 선 말투로 대답했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의현이 허리를 곧게 폈다.
“이유가 뭔데.”
“…….”
“말해. 들어 줄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지만, 홍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의현과 재이를 번갈아 보며, 홍삭은 음식을 우물우물 씹었다. 이런 비싼 음식은 이런 때가 아니면 먹기 힘들었으니, 최대한 배 속에 많이 욱여넣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무식하게 자리만 꿰차서 짜증 나고요. 뭣도 아닌 주제에 형이랑 친하다고 뻗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요.”
기껏해야 ‘친한 척해서 싫다’ 정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정재이는 꽤 길게 말을 이었다.
“형이 계속 투자해도 저 새낀 발전 가능성이 없어요. 나는 도대체 왜, 형이 쟤를 끌고 가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얘기하기엔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의현은 흘끔 홍삭을 바라보았다. 이건 좀 짜증 내려나?
“이야, 개 웃기네.”
하지만 양고기 스테이크를 입에 집어넣고 있던 홍삭은 정재이의 말을 듣고 짜증 내기는커녕 히죽 웃었다.
“야, 정재이. 너 약간 의처증 같은 거 아니냐.”
“……뭐?”
잘못 들었나 해서 의현이 되물었다. 홍삭은 자기가 제법 어려운 단어를 써서 의현이 놀란 줄 알고 우쭐대며 자기가 했던 말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의! 처! 증!”
얼마나 크게 얘기했는지 호텔에서 조용히 식사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죄다 이쪽을 쳐다보았다.
“홍삭 너 목소리 줄여.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당연히 알죠! 약간 떼쓰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잖아요. 사람 옭아매고 귀찮게 하고 아기처럼 징징거리는 애들.”
“삭아, 제발 공부를 하든지 어려운 단어를 쓰지 말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
“비슷한 말 아녜요? 맞잖아요! 정재이 이 의처증 새끼!”
“하…….”
여기서 뜻을 알려 주자니 상황이 좀 애매했다. 의현은 대충 분위기를 무마하며 대화 주제를 넘기려고 했다.
“맞아, 나 의처증.”
하지만 정재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재이 너도 헛소리하지 말고, 밥 먹어. 삭이가 몰라서 하는 말이잖아.”
“저는 알아서 하는 말인데요.”
“오늘 왜 이렇게 엇나가지?”
얘도 청소년이라고 사춘기를 겪는 건가? 의현은 진심으로 의아했다. 가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긴 했어도 근본적으로 의현의 말에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은 적은 없었는데, 요즘은 대화도 잘 안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
정재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놓았다.
“인기남은 괴롭다니까, 정말. 나 때문에 싸우지들 말아요.”
홍삭은 씹던 음식을 탄산음료와 함께 꿀꺽 삼켰다.
“자! 다 먹었으니까 됐죠?”
한 시간 동안 뷔페에 차려진 음식을 싹 긁어먹은 홍삭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쭈? 안 봐?’
의현이 계속 정재이를 쳐다봤지만,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 * *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윤 기사도 눈치챌 정도로 차 안이 삭막했다. 아무도 대답 안 해 줘도 혼자 실컷 떠들던 홍삭이 내리고 나니 그야말로 적막이 찾아온 것이다.
“노, 노래를 좀 틀까요?”
“그냥 두세요.”
“네…….”
분위기를 좀 환기할 요량이었지만, 그마저도 막혀 윤 기사는 그저 눈만 도르륵 굴렸다. 의현은 팔짱 낀 채로 창밖만 쳐다보았고, 정재이는 눈을 감은 채 헤더에 머리를 기댔다.
“도련님, 그럼 집으로 먼저 모실까요?”
정재이를 달래 줘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의현은 앞으로 며칠 동안 연수원으로 합숙도 가야 했으니, 그사이에 관계 틀어지는 꼴 보기 싫으면 정서적으로 안정을 줘야 했다.
“……아니요. 저택으로 가 주세요.”
‘저택으로 가 달라’는 말은 꼭 무슨 주문처럼 정재이를 들었다 놨다. 의현은 백미러에 비친 정재이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기숙 프로그램 참여 탓에 윤화가 자리를 비워 저택이 꽤 조용했다. 저녁을 먹고 있던 필규와 혜영, 은영이 나란히 의현에게 인사했다. 정재이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오빠 오늘 놀다 가시게요? 저희 영화 볼 건데, 오빠도 같이 봐요!”
“영화, 영화! 두근두근.”
“아니, 나는 영화는 좀.”
1층 거실에 커다란 스크린이 내려와 있는 게 퍽 수상하다 했더니 영화를 보려고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에이, 오빠 빼지 말고요. 내일 주말이잖아요! 오빠가 본다고 하면 재이도 볼 거예요. 다 같이 보면 즐거움이 두 배 아니겠어요?”
분위기가 서먹한 걸 눈치 못 챘는지 은영이 넉살 좋게 말을 이었다.
“시시한 로맨스 이런 게 아니라, 이건 특급 공포 영화라구요! 이걸 보고 소리를 안 지른 사람이 없대요! 기절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사람도 있는걸요?”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구했는데?”
“제가 학교 도서관 담당인 거 아시죠? 창고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몰래 빼 왔어요!”
은영은 제 재주가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일단 알겠어.”
“식사는 안 하세요?”
“밖에서 먹고 왔어. 재이도 같이.”
“그럼 이따 영화 시작할 때 알려 드릴게요!”
어차피 정재이랑 단둘이 있다고 해도 할 말도, 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저택의 요란한 분위기에 맞춰 주면서 영화나 보는 것도 썩 나쁘진 않았다. 장르가 좀 문제긴 했지만.
“재이야.”
2층은 여전히 정재이 혼자 썼다. 후원회가 잘 돼 2차 저택, 3차 저택이 생겼지만, 이곳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의현의 목소리를 듣고 앞서 가던 정재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노란빛이 섞인 조명은 따뜻한 느낌을 주었지만, 복도 자체는 영 스산했다.
“화 풀어.”
“형은…….”
정재이가 고개를 돌려 의현을 바라보았다. 따분하고 무심한 재이에게 이렇게나 강하게 색채를 띠게 하는 상대는 오직 의현뿐이었다.
“형은 항상 자기 생각만 해요.”
“…….”
“나는 누굴 싫어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하는데.”
정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의현은 축 처진 재이의 뺨에 손을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여전히 예쁜 얼굴.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너는 싫어하는 게 너무 많아, 재이야.”
“…….”
“그럼 힘들어서 못 살아.”
“…….”
“나는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재이가 모두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현은 적어도 재이가 사회성을 기르고 인류애를 채우길 원했다. 그럼 결전의 날이 왔을 때, 행동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홍삭한테 관심 주지 마세요.”
“별로 관심 없는데?”
“외모적으로 이상형이라면서요.”
“내가?”
의현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뭐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웃겨서 좋다고 했잖아요.”
“웃긴 것도 괜찮지. 그런데 나는 예쁜 게 더 좋아.”
의현은 시원한 손길로 정재이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게 지났다.
“약았어…….”
귀 끝까지 새빨개진 정재이는 얼른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의현은 작게 실소하며 여유롭게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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