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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23화 (23/185)

23화.

현대 사회에서 헌터부가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대변하듯, 관계 부서는 아주 촘촘하고 세밀하게 나누어져 관리되고 있었다.

권의현은 언제나 그랬듯 졸업하자마자 헌터부 소속 헌터가 되었다. 자연계의 S급 인재라는 타이틀도 모자라 헌터부 장관 권중섭의 아들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쥔 의현의 입사는, 그야말로 관계 부서를 뒤집어놓았다.

“신입 사원 연수라니, 정말 최악이야.”

특수 능력 고등학교의 아이들은 졸업 직전 지망하는 부서에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았다. 합격하면 그 부서의 직원으로 채용되었고, 합격률은 90%를 웃돌았다.

사실상 외부에서 들어온 10% 이하의 특수 인재를 제외하면 학교에서 내내 보던 애들이 직장 동기가 되는 셈이었다.

“진짜 최악. 소문으로 듣자 하니,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 안 보낸다고 하잖아.”

“엥, 설마 그냥 겁주려고 그러는 거겠지. 그래도 특수직에 고급 인력인데 우릴 골로 보내진 않을 거 아냐.”

익숙한 얼굴들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의현은 시큰둥한 얼굴로 ‘신입 사원 연수 매뉴얼’을 대충 훑었다.

“의현아 너는 긴장 안 돼? 난 미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별거 없어.”

“안 해 봤으면서 꼭 해 본 것처럼 말하네.”

“……아.”

“그래도 하나도 긴장 안 된다는 표정 짓고 있는 너 보니까 나도 긴장이 좀 덜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동민은 제 목에 걸린 ‘헌터부 신입’ 사원증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자, 다들 오셨나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동여맨 여자가 종이 뭉치를 가지고 들어왔다.

“한 장씩 받고 뒤로 넘기세요. 연수 일정표예요.”

동민은 제가 한 장 갖고 의현에게 한 장을 건네주었다. 시큰둥하게 턱을 괴고 있던 의현은 책상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대충 눈으로 훑었다.

‘……똑같네.’

사실 이전까진 내내 혼자 다녔던 터라 기억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큰 줄기들은 언뜻 기억이 났다.

“일주일 후에 이곳 관리청 앞으로 와 주시면, 대관한 차를 타고 연수원 쪽으로 이동할 거예요. 모두 늦지 않게 와 주실 거죠?”

담당자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어색한 분위기에 다들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여러분들의 교육자는 현직 헌터분들이세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반응하시면 안 되는 거겠죠?”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는데, 묘하게 압박이 느껴졌다. 동민은 바들바들 떨다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아주 좋아요. 지금 대답한 연수생 이름이……?”

“차동민입니다!”

“그래요. 동민 연수생에게 10점 드리겠습니다.”

“……네?”

뜻밖의 점수에 동민은 두 눈을 껌뻑거렸다.

“연수 마지막 날에 전체 1위를 한 연수생에게는 큰 상품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모두 열심히 해야겠죠?”

“네!”

선두로 시작한 게 기쁜 건지 동민은 전에 없던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저 점수라는 건 단순히 등급으로만 매겨지는 게 아니었기에, 몇 번이나 연수를 받은 의현도 1등 경험은 없었다.

“선물이 뭘까?”

“별로 기대 안 해. 상품권 같은 거겠지.”

“나는 기대 돼. 그래도 헌터부에서 하는 건데 설마 시시한 거 주겠어? 벌써 떨린다…….”

동민은 표에 동그라미를 치며 연수 일정을 꼼꼼히 확인했다.

담당자는 헌터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그 소릴 빼면 강당은 쥐 죽은 듯 조용했는데…….

지이잉-.

난데없이 맑은 진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죠?”

연수생들이 웅성거리며 분위기를 깬 주범을 수색했다.

“의현아, 너야.”

“어?”

턱을 괴고 가만히 멍 때리고 있던 의현을 동민이 톡톡 건드렸다. 의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허둥지둥 전화를 껐다.

지잉, 지이잉-.

끄자마자 진동이 다시 울렸다. 연락 올 곳이 없어 핸드폰 진동 소리도 정말 몇 주 만에 듣는 거였다.

“급한 용무인가 보네요. 받으세요.”

“죄송합니다, 전원 끄겠습니다.”

“아니에요. 받아 보세요. 위급할 수 있잖아요?”

연수 담당자는 온화한 표정으로 얼른 받아보라는 제스처를 했다. 저장도 되어 있지 않은 번호라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

―행님! 저 행님의 귀염둥이 삭입니다!

“아, 전화 잘못 거신 것 같네요. 끊습니다.”

―행님! 끊지 마세요! 저 이번에 정재이랑 같은 반 됐습니다!

“하…….”

홍삭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편두통이 시작됐다.

―행님한테, 이 새끼의 민낯을 보고하려고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야 너 진짜 전화했어?)

―헉! 행님, 정재이가 저를 죽이려고 해요! 눈이 완전히 돌았습니다! 살려 주세요!

―(너 뒤질래, 진짜?)

대뜸 전화를 걸어 놓고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걸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연수가 도중에 중단된 거라 담당자를 비롯한 모든 연수생이 의현만 쳐다보고 있었다.

“네, 필요 없고요. 안 사요. 끊겠습니다.”

―행님, 절 버리지 마세요! 행님! 아악-!

의현은 생긋 웃으며 전화를 끊고 바로 핸드폰 전원을 껐다.

“광고 전화인가 보죠?”

“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요즘 저도 광고 전화를 자주 받곤 해요.”

담당자는 유하게 넘어갔다. 의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표정을 구겼다.

‘저는 보호자도 없는데,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요.’

‘사고를 일으키질 마.’

‘아니, 제가 일으키겠다는 게 아니고요! 누가 가만히 있는 저를 칠 수도 있잖아요.’

‘삭아, 네 인상을 봐. 아무도 너 안 쳐.’

‘그래도 행님은 부자니까, 제가 아주 큰 어려움이 처했을 때 도움이라도 주실 수 있잖아요.’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되자, 홍삭은 의현이 ‘처음’ 봤을 때 모습과 가까워졌다. 그래서 더 약해진 것도 있었지만, 과거의 업보가 뭐라고……. 홍삭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주질 말았어야 했다. 설마 진짜 전화할 줄은 몰랐지.

“방금 전화, 광고 아니지?”

“왜?”

“너 지금 사람 하나 묻으러 갈 것 같은 표정이라…….”

눈치가 없는 동민도 알아차릴 만큼 의현의 표정이 흉악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아닌데, 곧 묻게 될 수도 있어.”

“뭐?”

의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무슨 일이 있어도 홍삭의 핸드폰을 뺏어 번호를 지워 버리리라 다짐했다.

연수 설명회는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 중간에 사례 설명을 위해 초빙된 강사가 갑작스러운 현장 투입으로 못 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아침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무전이 뜨면 현장에 투입된다는 사실을 몸소 느낀 연수생들은 한층 깊은 절망에 빠졌다.

저택으로 가면 틀림없이 기가 빨릴 것 같아서 일부러 집으로 왔건만,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에 의현은 권중섭이 있음을 눈치챘다.

“연수원 들어간다는 얘기 들었다.”

담배를 뻑뻑 피우던 권중섭은 부쩍 피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시끄럽게 소란 일으키면 안 된다는 사실 알고 있지? 정치권에선 자잘한 소문 하나로도 사람 하나 쉽게 묻히는 법이다.”

“……네.”

“내가 잘되는 길이 결국 네가 잘되는 길이야. 차후에 내가 대통령이 되면 너 역시 아쉬운 것 없이 누리며 살게 될 테니까.”

권중섭은 합리화하듯 의현을 옭아맸다. 아무것도 모를 땐 이렇게 말하면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안 먹혔다. 어차피 권중섭은 제 자식도 기념품처럼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지가 잘 되면 나도 잘돼? 뭔 개 같은 소릴.

“……그럼 저는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권의현.”

스쳐 지나가는 의현을 권중섭이 불러 세웠다.

“갱생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야.”

“…….”

“우린 날 때부터 이렇게 잘난 거다. 굳이 우매한 자들을 동정할 필요가 없어. 손아귀에 쥐고 흔들다가 필요 없어지면 그냥 손을 놓으면 되는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네가 개인적으로 하는 후원 말이다.”

“…….”

“언론에 공개할 게 아니면, 조용히 끊도록 해.”

권중섭은 의현에게 가까이 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발끝부터 미친 듯이 소름이 돋았다.

“그런 애들은 한번 돈맛을 보면 달려들기 마련이다.”

“……아버지.”

의현은 건조한 목소리로 권중섭을 불렀다. 인자한 척 웃고 있던 권중섭이 표정을 싹 굳히고 의현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제가…….”

“…….”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의현의 인생 첫 말대답이었다.

“…….”

엄청나게 분개할 줄 알았던 권중섭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그래. 너도 알아서 할 나이가 됐지. 알겠다.”

“감사합니다.”

“올라가 봐.”

의현은 제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고 곧바로 숨을 몰아쉬었다. 신경 안 쓴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나도 미쳤나?”

보육원 후원을 선택하고 권중섭을 저버리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한 적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럴 의욕도 그럴 이유도 없잖아. 그냥 태어난 대로 살아. 그게 운명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불사의 삶은 계속 반복되었다. 의현이 했던 선택은 폭풍이 되어 평범한 인생을 덮쳤고,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

“아…….”

그제야 의현은 수감 시설에서 윤화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

편하게 잠을 자 보고 싶다는.

* * *

연수원에 들어가기 전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 의현은 일시적 직업 유예 백수 상태였다. 과거엔 이 기간을 그냥 방에 처박혀서 보내곤 했으나,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일반 학교 방문은 처음이었다. 오후 3시, 하교 종이 울리고 애들이 떼를 지어 정문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제가 홍삭 학생을 발견하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절 믿어 주세요!”

윤 기사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지나가는 애들 얼굴을 확인했다. 하도 우르르 나오는 탓에 일일이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게 뭐든 윤 기사는 열심히 했다.

“앗! 도련님! 저기 재이 군이!”

“알아요. 너무 잘 보여서.”

고만고만한 애들 사이로 머리 하나가 우뚝 솟은 정재이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심드렁하게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조그마한 놈은…….

“찾았다, 홍삭 저 새끼.”

의현은 안경을 쓴 채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보육원도 안 들어와, 번호 지우라고 해도 안 지워, 그래서 나를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어? 가뜩이나 권중섭 때문에 열받아 죽겠는데 홍삭은 대놓고 의현의 신경을 긁었다.

“어머, 아이돌……?”

“무슨 촬영하나 봐!”

“정재이 드디어 데뷔하는 거야?”

하교하고 있던 애들이 갑자기 한군데로 몰렸다. 평소 같지 않은 소란에 홍삭이 붕붕 뛰며 재이에게 깝죽댔다.

“야, 저기 봐! 뭐 촬영하나 봐!”

“관심 없어.”

“재밌어 보이잖아. 우리도 함 구경 가자고!”

“말 걸지 말라고, 짜증 나니까.”

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홍삭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때였다.

“삭아. 뒤지기 싫으면 폰 내놔.”

여자애들 사이에서 별안간 권의현이 툭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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