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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22화 (22/185)

22화.

2주 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의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 앞마당에서 튜브를 끼고 수영하고 있던 윤화가 달려왔다. 머리엔 꽃송이가 박힌 수영모를 낀 채였다.

“형아!”

“야, 물 다 묻잖아.”

“헤헤. 좋아서 그렇지!”

윤화는 물이 뚝뚝 떨어진 몸으로 의현을 끌어안았다. 의현이 입고 있던 옷도 덩달아 물에 젖었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은영은 반바지를 입고 수영장 안에서 첨벙거리다가 의현에게 인사했다. 수영장엔 은영과 필규, 윤화가 있었다. 필규는 사람이랑 잘 못 어울리는 듯하다가도 이런 상황에서 빼지 않고 어울리는 게 좀 특이했다.

“혜영이는?”

“혜영이는 공부해요. 더 성공해서 그 오빠한테 복수할 거라나? 요새 완전히 공부에 미쳤다니까요?”

“재이는?”

“재이는…….”

은영은 머쓱한 얼굴로 살짝 웃었다.

“재이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흠, 방에서 자나?”

“같이 안 나왔어?”

“어차피 물어봐도 싫다고 했을걸요? 걘 항상 그래요. 오빠 앞에선 안 그러지만, 우리 앞에선 진짜 열받게 군다니까요.”

은영의 말에 필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 공감. 맞아 맞아.

“형아는 맨날 오면 재이 형부터 찾아. 윤화는 왜 신경 안 써 줘!”

“그런 거 아니야. 혼자 있다니까 신경 쓰여서 그래.”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재이 형이 우리랑 안 노는 건데! 내가 놀자고 말해도 무시하고.”

윤화는 입을 잔뜩 내밀고 툴툴거렸다. 하긴 윤화 성격이라면 남녀노소 안 가리고 금방 친해져야 했는데, 제이와 아직까지 데면데면한 걸 보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관계를 거부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내가 재이한테 한번 말해 볼게.”

“좋아! 재이 형 데리고 오면 여기서 다 같이 놀자.”

윤화는 의현에게 제 수영모를 비비적거리다가 펄쩍 떨어져 나갔다. 꽃이 잔뜩 박힌 저 괴이한 수영복을 도대체 누가 사 준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왔다. 설마 권중섭은 아니겠지? 물론 윤화만 보면 좋아 죽으려는 권중섭의 얼굴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의현은 저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청소 중이던 유모는 의현을 보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셨어요.”

“네, 재이 2층에 있나요?”

“그럼요, 방에 있어요. 도련님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의현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정재이가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현재로서 하나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는.

“재이야, 안에 있어?”

의현은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 정재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 같으면 뛰어나와 의현을 반길 재이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들어갈게.”

의현은 문을 조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로로 긴 통유리창 아래에 정재이가 이불을 꽁꽁 둘러싸고 누워 있었다.

“……정재이?”

꼼짝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게 뭔가 이상했다.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좋은 것 같기도 두려운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의현은 성큼성큼 걸어가 이불을 걷었다. 정재이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건 확실했다.

마당에서 애들이 신나게 웃는 소리가 이 방까지 들렸다.

의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재이의 침대 맡에 앉았다.

“……아파?”

정재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 너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 없이 살았을 땐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됐는데, 같은 삶을 계속 반복하니 그 속에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의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의식 없이 늘어진 정재이의 몸을 안아 들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었다.

살아. 적어도 정해진 참상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 * *

“아씨,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니, 피곤해 뒤지겠네!”

홍삭은 교실 제일 마지막 자리에 앉아 건방지게 제 운동화를 책상 위로 탁 올렸다. 새 학기, 조잘거리며 새로 배정된 반에 들어오던 애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뭘 봐!”

홍삭은 괜히 큰소리를 쳤다. 세상에 불만 많은 나이 열여섯, 인생을 가오로 사는 홍삭은 제 외모와 키가 영 불만이었다. 아, 물론 촌스러워 죽겠는 이름도.

“자퇴하고 싶었는데, 아 진짜 거지 같네.”

아무도 물어본 사람이 없었는데, 홍삭은 계속 자기 얘기를 남발했다.

“공부 졸라 하기 싫어. 열받네. 수학 같은 거 알아서 어디에 쓰냐고, 차라리 기술 배우는 게 낫지. 짜증 나네.”

혼자 열 받고 짜증 내던 홍삭은 곧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앞자리 남자의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야, 야-.”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반 애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말이 무시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던 홍삭은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안 되겠다. 의현 행님한테 전화 걸어야겠네. 지금쯤 뭐 하고 계시려나.”

“죽고 싶어?”

“그러게 왜 사람 말을 씹어. 엉? 같은 반 된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스스한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 비싼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눈과 쭉 뻗은 콧대, 도톰하고 붉은 입술까지. 가히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의 최고의 얼굴이었다.

“개빡치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얼굴로 패배한 홍삭은 분노로 손발을 바들바들 떨었다.

“야 너 키 몇이야?”

“179.”

“씨, 중3이 뭔 키가 존나 크네. 말이 되냐? 이게 세상이냐? 존나 억울해. 공평하진 않아도 이렇게 차별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개소리할 거면, 쳐 자.”

“니 말한 거 그대로 행님한테 전달한다. 딱 기다려.”

홍삭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협박했다. 자주 하는 방식이었지만 이게 안 먹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 자! 수업 첫날부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죠?”

둘이서 치고받고 하는 사이, 3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분위기를 중재했다.

“홍삭 학생은 수업 끝나면 선생님 좀 따라오세요.”

“아니, 왜 저만!”

시비도 먼저 걸었건만, 한사코 자신만 주목받는 게 억울한 홍삭은 목소리를 높였다. 30년을 학생 교육에 몸담은 담임 교사는 가볍게 홍삭의 항변을 무시하며 조회를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혼란한 시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도 되는 행위가 있고 하면 안 되는 행위가 있죠? 일탈이라는 껍데기로 포장해서 해선 안 될 행동을 하면, 선생님은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처음부터 세게 나오는 담임을 보며 홍삭은 금세 반항할 마음을 접었다. 상황 파악을 기가 막히게 잘한다는 것이 어쩌면 홍삭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럼 오늘 수업 잘 듣도록 하고. 첫날이라고 너무 막무가내로 퍼져 있지 말고. 미래에 대해서 잘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 열심히 보내세요. 조회 끝.”

“네에-.”

“그리고, 홍삭 학생은 따라 나오고.”

“엑?!”

담임은 간략하게 말을 끝내고 출석부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홍삭은 남자를 보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지만,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넌, 갔다 오면 끝이다.”

“너 같은 앨 이 학교 보낸 형이 대단하다.”

“뭐? 이 새끼가?”

“홍삭 학생! 또 싸우고 있는 건가요? 얼른 나오세요!”

홍삭은 씩씩거리며 앞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고작 한 명이 나갔을 뿐인데 교실은 순식간에 평화를 되찾았다.

홍삭이 나가는 걸 보고 슬쩍 비웃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재이야…….”

한 군데에 뭉쳐 있던 여자애들 무리가 남자, 정재이에게 다가갔다.

“네 이름 많이 들었거든.”

“…….”

“너랑 같은 반 돼서 기뻐.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정재이는 비딱하게 서서 가만히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마른 체구에 얼굴도 예뻤지만, 별로 감흥은 없었다.

“……그래.”

하지만 이런 속내를 드러내면 안 된다고 의현은 말했다.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들더라도, 그 마음을 매번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돼.’

‘왜요?’

‘그런 말을 들으면 상대방 기분이 어떻겠어.’

‘그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말을 안 해야 했던 거 아닐까요?’

‘그건 네 생각이지.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잖아.’

본인도 썩 친절한 성미가 아니면서 보호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친절함을 강조하는 게 의현다웠다.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첫 번째가 뭐라고 했지?’

‘이유 없이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이유 없이 남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래. 잊어버리지 마. 응? 재이야.’

‘네에.’

자신이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자랄까 봐 의현은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조건’도 그랬다. 사실 이해는 안 됐지만, 그냥 의현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적당히 그렇게 살 요량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혹시 재이 너 홍삭이랑 친해?”

“아니.”

“그렇구나. 쟨 그 전 학교에서도 소문 안 좋았어. 소문 듣자 하니 보육원 출신이라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학교에 입학했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러게. 쟨 여기 안 왔어야 했는데. 속상하네.”

“재이 너도 그렇게 생각해? 저기 여자애들 보이지? 쟤네 다 내 친구들인데 다들 그 얘기 하고 있었어! 쟨 우리랑 어울릴 급도 아닌데, 반 분위기나 흐리고 말이야. 진짜 짜증 나.”

하하. 진심으로 홍삭이 다른 데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재이는 여자애 말에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었다. 저런 말 의현의 앞에서 했다면 바로 한 소리 들었을 텐데.

“어머, 얼굴 대박…….”

재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여자애는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 네가 안 잘생겼다는 건 더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던 말은! 친하게 지내자는 거였어!”

“그래.”

“내 이름은 도희야. 차도희.”

제 이름을 소개한 후 도희는 부끄럽다는 듯 파드득 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곧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정재이는 교과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무심한 얼굴로 하품했다.

“짜증 나! 정재이 이 개자식아!!”

복도 끝에서부터 홍삭이 쿵쿵대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열등감에 미친 새끼.”

재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쾅!

홍삭은 앞문을 열고 들어와 재이의 앞에 당당히 섰다.

“나 오늘 저택으로 바로 갈 거야. 가서 의현 행님 만나기로 했다. 으하하핫! 네 낯짝을 행님께 낱낱이 까발리겠다! 으하하핫!”

“뒤지고 싶으면 계속해 봐.”

“아이고, 얘 인성이 이렇게 글러 먹었는데 수석이라고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 주네! 아이고 억울해라! 아이고 억울해-!”

홍삭은 남의 눈치 따위 안 봤다. 하도 시끄럽게 왁왁대서 재이는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조건’에서 홍삭을 그냥 제외해 버리기로 했다.

“삭아, 너 또 말썽이니? 사고 안 치고 조용히 하기로 좀 전에 선생님이랑 약속했잖아!”

“엑?!”

1교시 수업이 담임인 걸 몰랐는지 홍삭은 당황한 얼굴로 제자리에 가 앉았다.

그렇게 수학 수업이 시작되고 조금 있었을까 뒤에서 쪽지 하나가 툭 날아왔다.

[오늘 나 행님 진짜 만나서 니 헹실을 낫낫치 고할것임. 너는 아주 단단히 각오하는게 좋을꺼임 ^^]

재이는 쪽지를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

무식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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