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꿈이 아니고서야 정재이가 이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의현의 앞에 있을 리가 없었다.
“……왜, 왜 나온 거야?”
정재이 때문에 멀쩡히 잠을 자다가 깬 게 수차례였다. 악몽과 불면증의 근원이 이런 식으로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걸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네가 이런 얼굴로 내 꿈에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
“…….”
“또 뭔가 한 거지?”
확신하는 듯한 말투에 정재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슈트. 외관만 보면 여느 부잣집 자제 못지않았다.
“하긴 뭘 해요, 내가.”
정재이는 순진한 척 눈을 깜빡이며 제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그냥 형 취향인 거지.”
“개소리하지 마. 난 그딴 취향 없어.”
“너무하네. 취향대로 입혀서 꿈에 등장시킨 건 형이면서.”
눈앞에 있는 건 정재이와 Z의 혼종이었다. 연보랏빛 눈동자를 보면 의현이 알고 있는 정재이가 맞았으나, 얜 조금 전 아무렇지도 않게 권중섭의 머리를 터트린 주범이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으니까 나를 만든 거 아니겠어요?”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죽는 것밖에 없어.”
“소원이라면-.”
정재이는 샐쭉 웃으며 제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댔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던 손에 갑자기 쥐어진 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발사됐다. 탕!
조그마한 머리통이 날아가며 피가 흩뿌려졌다. 정재이는 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의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로 다가갔다.
의현이 그렇게나 바라고 바라던 정재이의 자살이었다.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시스템도 리셋하지 않겠지. 불확실한 가정이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핏물에 젖어 끈적였다. 의현은 공허한 눈으로 정재이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 개 같은 기분이었다.
수차례 꿨던 악몽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불쾌한 꿈이다. 의현은 눈을 감고 계속 중얼거렸다. 꿈에서 깨, 꿈에서 깨, 꿈에서 깨…….
“원래 두려움이랑 쾌감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더라고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바닥에 널브러졌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거기엔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의 정재이가 서 있었다.
“생각만큼 그렇게 좋진 않죠?”
“야.”
의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정재이의 멱살을 쥐었다. 한 번도 얠 올려다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의현의 눈높이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이딴 걸로 장난치면 재밌어?”
“억울하네.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 형 꿈이잖아요.”
“씨발, 그만 좀 해!”
의현은 답답한 속을 감당하지 못해 소리쳤다.
정재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의현을 내려다보았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른 의현은 손에 쥔 재이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말해 봐! 이렇게 몇 번이나 뒤질 만큼 내가 너한테 그렇게 잘못한 거야?!”
“형 흥분했네.”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의현의 몸을 재이는 단단히 받쳐 주었다. 근육이 탄탄하게 박힌 허리와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정재이는 금세 입을 뗐다.
“……근데 나도 좀 흥분된다.”
뭔가 의미가 좀 다른 듯한 문장에 의현이 고개를 쳐들었다. 정재이가 제 아래쪽을 의현의 하반신에 가까이 붙이며 예쁘게 웃었다.
“미친 새끼야, 제발 죽어.”
“아까 나 죽었을 때 우는 거 다 봤는데.”
“너 진짜 혐오스럽다.”
“응. 칭찬 고마워요.”
얘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의현이 무슨 말을 하든 정재이는 실실 웃으면서 받아쳤다.
죽지도 않고 죽일 수도 없는 건 현실이나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리를 쥐고 있던 재이의 손이 어느샌가 엉덩이 쪽으로 내려왔다. 의현은 씩씩거리며 정재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어딜 만져, 변태 새끼가?”
“아야…….”
“이 미친 꿈! 도대체 언제 깰 수 있는 거야?!”
의현이 분노해도 꿈은 그대로였다. 얼굴이 옆으로 슬쩍 돌아갔던 정재이는 열받은 기색도 없이 다시 의현을 바라보았다.
“형 욕망이 빚어낸 꿈이니까, 빨리 해결을 봐야 깨지 않겠어요?”
“욕망 그딴 거 없어.”
“이상하네. 있을 텐데.”
“없다고.”
“내 목이라도 졸라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재이는 제 목을 까딱였다. 의현은 질겁하며 정재이의 발을 냅다 걷어찼다.
“전에 날 못 죽인 게 미련이 남은 줄 알았죠.”
“하…….”
그냥 얠 실제 정재이랑 다르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의현이 신경 써서 키우고 있는 저택 안의 정재이는 말도 잘 듣고 변태 같은 짓도 안 했다. 지금 이 미친 자식과는 달리.
“그럼 입이라도 맞춰 볼까요?”
“수작 부리지 마.”
“나한테 사랑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무의식 속 정재이는 의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 두려워하는 것, 최종 목표까지도.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 들으려면 분발해야 할 텐데요.”
“…….”
“너무 차갑게 굴진 마요. 어차피 꿈인데.”
배경은 순식간에 세상이 전멸하던 그날로 바뀌었다. 하늘에 거대한 포탈이 열려 그 사이로 괴물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절규하며 도망쳤고, 바닥에는 이미 시체가 가득했다.
“보고 싶던 장면 보여 줄 테니까, 끝나면 사랑해 줘요.”
정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과거 시초 능력자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을 통째로 접어 포탈을 없애 버렸다.
똑딱.
똑딱.
똑.
딱.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지상엔 괴물들이 즐비해 있었지만, 이제 그런 건 의현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4차 포탈의 등장 이후에도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계속 살아 있었으니까.
“어때요?”
정재이는 의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순진한 얼굴에는 칭찬받고 싶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잘……모르겠어…….”
“모르면 안 될 텐데.”
정재이는 성큼 다가와 의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의현의 코앞에 있었다.
“야, 이건 너무 가까워. 제발 말 좀 하고…….”
“사랑해 준다고 그랬잖아요.”
“나 말고! 네가 날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아. 그렇구나.”
정재이는 가증스럽게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의현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둘의 몸이 빈틈없이 가깝게 붙었다. 의현이 버둥거리며 정재이의 머리카락을 잡아 쥐었다. 놓으라고, 놔! 미친 새끼야!
“꿈에서 깨고 싶죠?”
“당연한 소리 하지 말고 떨어져!”
“사랑한다고 한번 해 봐요. 이게 꿈에서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이게 어디서 또 약을 팔려고.”
“깨기 싫으면 나랑 여기 계속 있고.”
힘이 얼마나 센 건지 정재이는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도 꿈쩍 안 했다. 의현은 부들부들 떨며 죽일 듯이 정재이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이면 진짜 죽는다, 너?”
정재이는 의현을 안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섶이 완전히 딱 붙어 기분이 이상했다.
“사…….”
“사?”
“사랑해.”
의현은 이를 꽉 깨물고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하하, 진짜 할 줄은 몰랐는데.”
정재이는 얼굴에 보조개를 만들어 가며 세상 예쁘게 웃었다.
“너 설마 거짓말한 건 아니지?”
쪽팔림에 얼굴이 새빨개진 의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웃고 있던 정재이는 의현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틀어 곧바로 키스했다.
“그럼요. 나도 사랑해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정재이는 부드럽게 의현의 입술을 빨았다. 읍, 읍! 의현이 발버둥 치며 제 입 안으로 들어온 정재이의 혀를 깨물었다.
“아야…….”
“이거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꿈 깨기 전에 아쉬워서요.”
“꿈이 깨긴 뭐가……!”
정재이는 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요, 형.”
“…….”
“이건 처음부터 형이 이긴 게임이에요.”
“…….”
“그러니까 빨리 끝내 주세요.”
* * *
의현은 번쩍 눈을 떴다.
“허억, 헉…….”
거지 같은 벽지와 쿰쿰한 냄새.
싸구려 모텔이었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아니요.”
“잠자리가 불편하셨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좋은 곳으로 모셨어야 했는데…….”
아침부터 찾아온 윤 기사는 의현의 앞에 따끈따끈한 죽을 건네주었다. 빈속에 차에 타면 멀미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입맛이 싹 달아날 정도로 최악의 꿈을 꿔 뭔갈 먹고 싶진 않았지만, 배는 고팠다.
“죽 다 드시면 약도 챙겨 드세요. 어제 토하셔서 위가 쓰릴 거예요.”
“유능하시네요.”
“네? 저요?”
의현이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걸 똑똑히 챙기는 사람은 처음 봤다. 지나가듯이 흘린 의현의 말에 윤 기사는 헤벌쭉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감히 누굴 모시고 있는데요! 장관님께서 더 만족하실 수 있게 저는 언제든 발로 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별로 믿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요.”
“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윤 기사는 의현의 말에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그냥, 뭐든 타인을 너무 우상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 그런 좋은 말이라면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도련님! 그런 철학적인 말씀을 해 주시다니. 오늘도 한 수 배웠습니다!”
권중섭 믿었다가 배신당하고 질질 짜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의현은 힘들게 쌓아 올린 이번 생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는 제멋대로 감동하며 의현에게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했다.
“식사 다 하시면 집으로 모실까요?”
“음…….”
의현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청소 상태가 좋지 않은 싸구려 모텔의 뿌연 창문 사이로 작열하는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 들으려면 분발해야 할 텐데요.’
꿈에서 본 허상의 정재이 얼굴이 아른거렸다. 개 같다고 욕했지만, 사실 걔가 한 말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의현은 정재이의 사랑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이토록 애매한 관계이더라도.
“저택으로 가죠.”
“오랜만이네요! 저택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겠어요!”
“네, 뭐…….”
의현은 성의 없이 대꾸하며 위장약을 입에 톡 털어 넣었다.
부디 오늘이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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