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회귀식 생존법-20화 (20/185)

20화.

이성 관계에 숙맥인 권의현이라고 해도 이 상황을 대충 넘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동민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로 의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차라리 평소처럼 장난이라도 쳤으면 덜 어색했을 텐데, 쓸데없이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일단…….”

의현은 차분하게 정돈된 제 머리를 헝클며 서두를 뗐다.

“나는 너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고.”

“…….”

“그럴 여유도 없고.”

순수한 고백의 대가치고는 꽤 잔인한 대답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뱉지 않는 의현의 앞에서 동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우리가 친구로는 지낼 수 있겠지?”

“네가 다신 고백 안 한다면.”

평소 같았으면 성격 진짜 별로라면서 장난쳤을 동민이지만 지금은 그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안 할게.”

“그래.”

“그럼, 나 가 볼게. 방학 끝나면 학교에서 보자.”

기운이 축 빠진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아무리 의현이라도 신경이 쓰였다. 땀 뻘뻘 흘리며 무식하게 집 앞에서 기다릴 때부터 이런 뭣 같은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야. 차동민.”

“어?”

“이건 그냥 하는 말인데,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스물넷 되기 전에 해라.”

의현의 갑작스러운 말에 동민은 작게 웃었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그냥 한 말인 줄 안 모양이었다.

“하난 오늘 했네.”

“…….”

“나, 간다.”

동민은 손을 흔들며 의현의 집을 빠져나갔다. 의현은 방에 혼자 남아 꽤 오랜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재이를 보지 않은 지 2주가 흘렀다. 근래 들어 이렇게 마음 편한 날이 있었나 싶은 나날을 보내며 의현은 제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갔다.

“제가 쌈박질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자꾸 선빵 친다니까요! 내 잘생긴 얼굴을 이렇게 곤죽으로 만들었어요!”

“삭아. 거울 좀 봐.”

“거울 왜요?! 지금 제가 못생겼다고 말하는 거예요?!”

홍삭은 빽빽거리며 의현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맨날 같이 붙어 다니던 여자애는 어딨어?”

“방에요. 왜요?”

“선물 사 왔어.”

착하게 살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착하다는 게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의현은 적어도 제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다.

“참 나, 무슨 선물을 또……. 행님! 제 거는요?”

“내가 왜 네 행님이야?”

“선물 챙겨 주면 행님이죠, 뭐!”

누구한테 쥐어 터졌는지 얼굴이 얼룩덜룩한 홍삭이 헤벌쭉 풀어진 표정으로 으쓱댔다.

세인트 해피 보육원도 오랜만이었다. 원랜 지긋지긋해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권다원 생일이 대충 이즈음이었던 것 같았다.

“근데 귀머거리 정재이는 왜 데리고 갔어요?”

“갱생시키려고.”

“갱생이 뭔데요?”

“있어. 사람 만드는 거.”

“사람 만들어서 뭐 하는데요?”

홍삭과 권다원에게만 선물을 주기가 뭐해서, 차 안 가득 싣고 온 선물들이 착실히 보육원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보육원 원장은 입이 귀에 걸려 역시 장관님 아드님은 다르다느니 어쨌다느니 헛소리를 해댔다.

“그건 네가 몰라도 돼.”

“걔 잘 지내요? 아마 내가 보고 싶어서 매일매일 울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확실히 제가 남자한테든 여자한테든 인기가 좋은 편이거든요!”

“삭아, 혹시 자기 객관화가 잘 안 돼?”

“개깐하가 뭔데요?”

“하…….”

확실히 공부와 담을 쌓은 듯한 녀석이었지만, 대화하면 할수록 점점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선물 줬으니까 간다.”

“벌써요? 좀 놀다 가시지…….”

홍삭은 눈에 띄게 서운해했다. 서로 얼굴 본 횟수도 몇 번 되지 않았는데 애들은 정을 참 쉽게 줬다.

“내가 너랑 뭘 하고 놀아.”

“글쎄요. 숨바꼭질이라도 하실래요? 저 그거 되게 잘하는데!”

“공부나 봐 줄게. 모르는 거 가져와.”

“와, 지금 장난치는 거죠? 어떻게 공부랑 담 쌓은 저한테 그런 말을!”

“자꾸 이런 말 하면 꼰대 같을 거 아는데, 공부 좀 해라.”

“그렇게 안 생겨서 되게 아저씨 같다니까요.”

보육원에 선물도 다 들여놨겠다, 이젠 정말 할 게 없던 의현은 철없이 콧물이나 묻히고 돌아다니는 홍삭의 공부를 봐줬다. 정말 도저히 생각을 해 봐도 모르겠다며 가져온 ‘58-29’의 답을 설명해 주며, 의현은 보육원이 생각보다 애들 공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도 모르겠어요!”

“오빠, 이것도요!”

“야! 너네들은 왜 다 아는 거 가져와! 나는 진짜 모르는 거 물어보는데! 나는 진짜 하나도 모른다고!”

조그마한 방에 애들이 가득 찼다. 80퍼센트는 여자애들이었다. 홍삭은, 볼을 발그레 붉히며 의현을 향해 문제집을 흔드는 애들에게 역정을 내며 제 무식함을 뽐냈다.

“자랑이냐.”

“흥!”

그렇게 안 생겨선 되게 앙큼했다.

계획에도 없던 교육 봉사는 오후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끝났다. 원장은 의현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개쓰레기 음식…….’

초등학생 무리에 몰려 손바닥만 한 식판에 억지로 음식을 받은 의현은 똥 씹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걸 정재이가 알면 진짜 울고불고 생난리를 칠 게 뻔했다. 가뜩이나 걘 홍삭도 싫어했는데.

“오빠, 맛있죠? 이것도 드세요. 오늘 공부 가르쳐 줘서 감사해요.”

“됐어. 안 줘도 돼.”

“형님! 사양할 것 없습니다! 오늘 선물도 주셨는데 이것도 드시죠!”

애들은 브로콜리가 반 이상인 소시지볶음에서 몇 개 없는 소시지를 의현의 식판에 올려 주었다.

“하…….”

가뜩이나 식탐이 없었는데, 언제 이걸 다 먹나 싶어 눈앞이 캄캄했다.

애들은 의현이 밥 한 숟갈 뜨는 것도 눈을 빛내며 쳐다봤다. 싸구려 밥알은 까끌거렸고 소시지에서는 오래된 고기 비린내가 났다. 하지만, 식판에 토를 할 순 없으니 의현은 씹지도 않고 그냥 음식을 삼켰다.

“다음에 또 놀러 와요, 오빠!”

“형님! 또 선물 사서 오세요!”

차를 타고 보육원을 떠나는데, 애들이 우르르 나와 손을 흔들었다.

“도련님 정말 좋은 일 하시네요.”

“토할 것 같으니까 갓길에 차 대세요.”

우욱-.

보육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현은 억지로 먹었던 싸구려 음식들을 죄다 게워 냈다. 윤 기사는 그런 의현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차에 비치된 약을 건네주었다.

“괜찮으세요? 아무래도 음식이 도련님 입맛에는 안 맞으셨겠죠. 그래도 애들한테는 아주 좋은 추억이 됐을 겁니다.”

“……선물 한 번에 좋은 추억이라.”

의현은 바닥에 축 늘어졌다. 몸에 맞지 않은 짓을 했더니 골병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추억 쌓기 쉽네요.”

이게 잘하고 있는 짓일까?

이젠 의현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세인트 해피 보육원은 5지구에 있었다. 중상위권 지역의 보육원이라고 해서 시설이 더 좋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보육원도 못 들어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애들이 한 트럭이었기에, 어디든 소속된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남은 방이 이런 곳밖에 없다고 해서…….”

얼굴이 허옇게 질린 의현은 윤 기사의 손에서 카드 키를 받아 들었다. 호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건 분명히 모텔이었다.

“됐어요. 어차피 잠만 잘 거니까.”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도련님.”

윤 기사는 걱정돼 죽겠다는 얼굴로 의현의 방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몸에 기운이 다 빠져 얘기할 힘도 없던 의현은 쾅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건데.”

권다원 생일을 한 번 떠올렸다가 이 구질구질한 모텔까지 오게 된 의현의 기분은 나락까지 떨어졌다.

끈적끈적한 하층민의 느낌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의현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온몸을 적셨다. 모락모락 퍼져 나가는 수증기를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의현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침대로 기어가 쓰러졌다.

“개촌스러운 벽지, 진짜 최악…….”

진한 초록색에 금색 징이 박힌 벽지는 의현을 금세 불쾌한 꿈으로 이끌었다.

* * *

눈을 뜨니 식탁 앞이었다. 익숙한 식탁 위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아, 집이네.’

너무 익숙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모는 마지막 요리를 가져다 놓으며 꾸벅 인사하고 뒤로 빠졌다.

“필요한 것 있으면 불러 주세요.”

‘밥을 먹어야 하는 거겠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음식이 차려진 걸 보니 약간 허기진 것 같기도 했다. 의현은 가지런히 놓인 제 수저를 집었다.

“버릇없이, 아비가 앉지도 않았는데 수저를 드는구나.”

항상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챙겨 입는 제복을 입고서 권중섭이 주방에 등장했다. 수저를 들고 있던 의현의 몸이 그대로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됐다.”

권중섭은 식탁에 앉아, 제 옆에 놓인 신문을 펼쳤다. 의현은 권중섭이 수저를 뜰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뭐? 보여 주기식? 빌어먹을 신문사 놈들! 감히 기사를 이따위로 써?!”

권중섭은 읽던 신문을 바닥에 내던졌다.

의현은 신문을 줍기 위해 식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린애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더벅머리라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더라……?’

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린애는 의현에게 신문을 주워 건네주었다.

“……고마워.”

마치 정해진 것처럼 의현은 그에게 감사를 표했고, 어린애는 다시금 식탁 아래 어두운 곳으로 숨었다.

“애초에 지들이 낳은 새끼를 버리는 짓만 안 했어도 내가 이런 거지 같은 새낄 데려오는 일 없었잖아!”

권중섭은 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식탁을 뒤엎었다. 쾅! 쨍그랑! 호화롭게 차려진 식탁 위 음식은 각자가 무슨 음식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무참히 뒤섞였다.

“…….”

권중섭은 분노 조절 장애라도 있는 것처럼 흉포하게 굴다가 곧 남자애의 머리카락을 잡고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 아, 아…….”

남자애는 말을 더듬으며 의현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두면 안 되는 건가? 뭔가 좀…….’

권중섭의 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남자애를 바라보며 의현은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좀, 이상한데…….’

권중섭의 서재 문이 열렸다. 남자애는 이상한 신음을 내뱉으며 가느다란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식탁에 가만히 앉아 있던 의현은 처음으로…….

‘잠깐, 처음으로? 예전이 있었나?’

식탁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권중섭에게로 뛰어들었다.

“미친 새끼!”

정의되지 않은 분노가 권중섭을 향했다.

쾅-!

그리고 그 순간, 권중섭의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으깨졌다.

‘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의현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아까까진 어린애였는데, 머리가 깨진 채 바닥에 쓰러진 권중섭의 옆에 성인 남자가 서 있었다. 그것도 재밌어 죽겠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나, 감동했잖아요.”

“네가 누군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남자는 권중섭의 잔해를 밟으며 의현에게 다가왔다.

‘어디서 봤던가?’

익숙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의현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식탁이 있었는데, 등에 닿은 것은 왜인지 새하얀 침대 매트리스였다.

“……이상해.”

“이상해요? 뭐가?”

배경이 어그러졌다. 집이었던 공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주변은 온통 검게 변했다. 의현이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상하잖아!”

“그러니까 뭐가 이상한데.”

남자는 의현을 가볍게 침대 위로 밀었다. 의현의 검은 머리카락이 흰 시트 위에 흩어졌다.

“이름 불러 줘야죠. 재이야, 하고.”

남자는 의현의 발에 입 맞추며 마치 뱀처럼 속삭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