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혜영과 동민이 서로 마음을 고백하다가 물에 빠졌다는 소리를 들은 권중섭은 큰 소리로 웃으며 퍽 만족스러워했다.
‘역시, 내가 애를 잘 선택했지. 잘 봐라. 보육원에서 입양한 애가 1지구 출신 남자를 꼬실 줄 누가 알았겠니. 하하하! 역시 천박한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들이 어디서 물에 빠진 건지, 얼마나 다친 건지는 권중섭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자신의 손으로 선택해 재단 저택까지 데리고 온 애들이었는데도 이렇게나 무심했다.
혜영은 후유증이 있는지 며칠간 검사를 받은 후에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냐고 호들갑을 떠는 은영에게 버럭 짜증을 낸 혜영은, 대뜸 2층으로 올라가 정재이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너! 너 때문에 다 망했어! 소름 끼치는 자식!”
이건 또 무슨 일이야?
혜영을 따라 2층으로 올라온 은영은 정재이의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며 악악 소리치는 혜영을 뜯어말렸다.
“너 애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거 놓고 얘기해!”
“이 자식이 나한테 동민 오빠가 나 좋아한다고 말했단 말이야! 얘가 하는 말만 믿고 나갔는데, 지금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진 줄 알아?!”
혜영의 손아귀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정재이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1층에 상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죄다 뛰어 올라왔다. 혜영의 퇴원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의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유모가 큰 소리를 내며 혜영과 재이를 떼어 놓았다. 뺨도 몇 대 맞은 건지 입술이 터진 정재이가 서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흐느꼈다.
“가증스러운 자식! 네가 왜 울어! 너 때문에 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혜영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의현은 서럽게 울고 있는 정재이를 일으켰다. 얼굴이 시뻘겋게 부은 재이가 의현의 뒤로 숨었다.
“저, 정말이에요. 그 형이 누나 좋아한다고 저한테 직접 얘기했어요! 제가 굳이 거짓말을 왜 해요……!”
“그럼 동민 오빠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혜영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의현이 앞에 있어 차마 정재이를 어쩌지 못했다.
“저는 여기서 누나랑 계속 살아야 하는데, 제가 뭐 하러 거짓말을 했겠어요? 저한테 이득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 혜영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 찬찬히 말을 해 보자.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추측만으로 재이를 몰아세우고 심지어 폭행까지 하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이야.”
유모 역시 정재이를 두둔하고 나섰다. 혜영은 미치겠다는 듯 발을 몇 번 구르다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날 별장에 갔을 때, 쟤가 그랬어요. 동민 오빠가 저한테 고백하고 싶다고 밤 열한 시에 하늘다리 위로 나와 달라고 했다고. 저는 그 말을 믿고 그 자리에 나간 거예요. 그게 아니면 제가 왜 나갔겠어요?!”
혜영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정재이는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저는 들은 그대로를 말한 거예요. 그 형이 누나한테 말하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말 못 하겠다고 저한테 말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누나한테 그대로 전달한 것뿐이에요!”
“차동민이 그렇게 말했다고?”
“네.”
정재이의 표정은 전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 미치겠네-. 혜영이 실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나가 저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것도요. 그래도 저한테는 여기밖에 없어요. 다들 잘 아시잖아요…….”
혜영에게 얻어맞은 뺨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유모는 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정재이를 안아 주었다.
“저 너무 속상해요. 정말로 울고 싶어요…….”
“쟤 말 듣고 보니까 좀 그렇긴 하다, 혜영아. 솔직히 쟤가 뭐 하러 너한테 그런 거짓말을 했겠어. 어차피 이런 식으로 들킬 거 뻔히 아는데. 쟨 아직 뭣도 모르는 초등학생이잖아. 이용했으면 그 오빠가 이용했겠지.”
은영이 혜영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이었다.
“솔직히 그 오빠가 우리를 만날 이유 없잖아. 그 오빤 다 가졌고 우리는 쥐뿔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널 찔러 보고 싶어서 그 다리 위로 불렀다가, 예기치 않게 사고가 나니까 책임지기 싫어서 발뺌하는 게 분명해.”
은영의 말엔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혜영은 자신이 동민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을 믿기 싫은 듯 악 소리치다가 제 방으로 휙 뛰어 들어갔다.
“재이야, 괜찮니? 혜영이가 화가 많이 나서 그런가 보다. 선생님이 이따 단단히 타이를게.”
“……저는 괜찮아요.”
“아니, 그 오빠 진짜 웃긴다! 우리가 고아라고 툭툭 건드려도 되는 줄 아나 봐! 진짜 짜증 나!”
생각하다 보니 더 화가 나는 건지 은영은 의현에게도 으름장을 놓았다.
“오빠도 그런 사람이랑 놀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 저택엔 오지도 말라고 해요! 사람을 뭐로 아는 거야 정말!”
은영은 혜영이 들어간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아마 혜영을 위로하러 가는 듯했다. 유모는 정재이를 안아서 1층으로 내려왔다.
“어휴, 혜영이 저 손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말이야. 얼마나 아플꼬…….”
유모는 찢어진 입술 끄트머리에 약을 발라 주며 한참 동안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부어오른 뺨 안쪽이 쓰린 건지 정재이는 간헐적으로 미간을 구겼지만, 끝내 ‘아프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형 갈 거예요?”
뺨에 아이스 팩을 댄 정재이가 쪼르르 의현을 따라왔다. 슬쩍 눈치를 보는 게 의현의 반응을 살피려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집에서 아버지랑 저녁 먹기로 해서. 가야 할 것 같아.”
“아…….”
정재이는 작게 앓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혜영이한테는 나도 잘 말해 볼게. 오늘 다친 거 덧나지 않게 제때 약 잘 발라 주고.”
“……형, 저 못 믿는 거 아니죠? 동민이 형 때문에 저 버리는 거 아니죠?”
“…….”
“형도 알잖아요. 내가 혜영 누나랑 동민 형 이간질해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거. 나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요. 형도 알잖아요. 나…….”
저택에 있는 모두가 얘 편을 들어 줬음에도 불구하고, 정재이는 불안한 표정을 했다. 의현은 제 팔을 붙잡은 작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의현의 말에 정재이는 떨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형은 너 믿어, 재이야.”
“…….”
“그러니까 앞으로 거짓말은 하지 마.”
정재이의 표정이 굳었다. 믿으니까 지금처럼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믿어 줄 테니 오늘 같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던 탓이다.
“공부 열심히 하고. 알지?”
“형, 나는……!”
의현은 싱긋 웃으며 재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뒤로 돌아 나왔다.
쾅!
저택 문이 닫히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의현은 실소했다. 어디서 감히 뻔뻔하게 거짓말을?
“차동민이 박혜영을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가볍게 찔러 봤다고? 하, 최근 들어서 제일 웃긴 말이네.”
걘 불쌍한 애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안달을 내는 놈이었다. 그러니 혜영의 마음을 갖고 노는 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못 믿지.”
너 같으면 믿을 수 있겠니, 매번 나를 죽이고 다시 살리는 너를?
* * *
며칠 후. 의현은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린 듯한 동민과 마주쳤다. 정재이를 만나기가 왠지 껄끄러워 저택에 가지 않은 지 꽤 된 시점이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집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 모양인지, 동민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올래? 아버지 안 계셔.”
“그래도 돼?”
“안 될 이유 없지.”
어떻게 보면 동민도 일종의 피해자였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그를 나름대로 가엾게 여기며, 의현은 동민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집 내부는 시원했다. 하우스키퍼는 얼음물을 준비해 의현의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의현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으며 동민에게 손짓했다.
“앉아.”
“아, 응.”
“할 말이 뭔데?”
“그날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 네가 본 것들 말이야. 그건…….”
동민의 표정은 꽤 심란했다.
“나도 혜영이가 왜 거기에 나온 건지 모르겠어. 몇 번 찾아가서 대화하려고 해 봤는데 말이 안 통해. 혜영이 말론 내가 자길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데, 나는 맹세코 그런 적이 없거든.”
“그래, 알고 있어.”
정재이가 그 사이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당연히 둘이 대화가 안 되겠지. 다리가 끊긴 건 걔 소행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이라고 치더라도.
“알아주다니, 다행이다…….”
동민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말을 해도 의현이 믿지 않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네가 그날 하려던 말이 뭔데?”
에어컨 바람에 의현의 머리카락이 조금 흩날렸다. 여름도 끝물인데 기온이 내려가진 않고 계속 뜨거워져 영 불만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의현은 목이 타 얼음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사실, 나, 너 좋아해.”
풉!
콜록, 콜록-.
의현은 몹시 경망스럽게도 입에 담고 있던 물을 뿜어내며 크게 기침했다.
“많이 놀랐어?”
“잠깐, 잠깐만. 너 사람 착각한 거 아니야? 잘 봐, 나 박혜영 아니야. 나 권의현이야.”
“알아, 너 권의현인 거.”
“너 바다에 빠져서 정신 나갔어? 감정이 분별이 잘 안 돼?”
“아니, 나 분별 잘 돼. 너 좋아하는 거 맞아.”
“미친 거 아니야? 야, 차동민 정신 차려.”
여러 번의 삶을 살아온 의현이지만, 한 번도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 없었다. 타인에게 무심한 탓일까. 성적인 부분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경험이 없는 의현이 동민의 직설적인 고백에 당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싫다면 강요할 마음은 없어.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고 말하는 거니까.”
“……설마 그때 바다에서도 이 얘기 하려고 부른 거였어?”
“응. 계획은 잔뜩 해 놨는데, 다 망해 버렸지만. 하하…….”
동민은 머쓱하게 웃었다.
의현은 돌처럼 멈춘 채로 눈만 깜빡였다. 차동민이 나를 좋아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언제부터지? 설마 1회 차 때도 나를 좋아했었나?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언제부터야?”
의현은 동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동민은 옆으로 눈을 피하며 말을 늘였다.
“음……. 딱 집어서 얘기하는 건 좀 어려운데……. 그냥 나는 계속 너 좋아했던 것 같아. 말할 기회가 없었던 거지.”
“기회?”
“응. 너는 항상 날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왜 말하는 건데?”
동민은 적당한 답을 찾기 위해 한참을 뜸 들였다. 유리잔 속에 들어 있던 얼음이 녹아 짤랑- 하고 작은 소음이 났다.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서.”
“…….”
“후회하기 싫어.”
시선을 피하던 동민이 의현과 눈을 맞추었다. 의현은 차동민 정도 되는 놈이 자신에게 목줄 잡혀서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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