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석양 좀 봐. 이게 진짜 영화지. 안 그래?”
“뭐, 나쁘진 않아.”
“이왕이면 최고라고 해 줄래?”
피부가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바다에서 놀다 들어왔건만, 애들은 힘들지도 않은지 팔팔 날아다녔다. 저택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는데, 여긴 완전히 자연 속이라 그런지 다들 신이 난 듯했다.
“파파라치 사진 찍는대! 다들 모여!”
“으엑, 진짜 찍어요? 얼굴 다 탔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장관님께서 보고 싶으시다니까.”
수영복 위에 남방만 대충 챙겨 입고서 모두 별장 앞으로 나왔다. 해가 저무는 바닷가의 하늘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갈래갈래 찢어진 구름과 진한 분홍색으로 빛나는 하늘이라니.
사진 몇 방 찍고, 바로 마당에 미리 준비된 해산물 뷔페를 즐겼다. 갑각류들이 가득 쌓여 있는 걸 보고 혜영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동민의 팔을 붙잡았다.
“오빠, 우리 같이 먹어요!”
뭐지 저 알 수 없는 분위기?
의현이 턱을 괸 채 그쪽을 쳐다보고 있자, 윤화가 방실방실 웃으며 의현의 귀에 속삭였다.
“혜영 누나가 그러는데, 동민 형이 좋대요.”
“뭐?”
이런 걸 윤화가 알고 있다는 것도 웃겼는데, 심지어 쟤넨 오늘 처음 본 사이였다.
“부잔데 싹싹하고 착해서 사귀면 좋을 것 같대요.”
“애한테 별 얘길 다 하네.”
“저한테 한 건 아니고, 은영 누나한테 하는 얘기 들은 건데.”
“그런 거 주워듣지 말고, 밥 먹어. 윤화 너 얼굴에 물안경 자국 난 건 알아, 몰라?”
“몰라요! 헤헤!”
눈 주위 동그란 부분만 빼고 온몸이 새까맣게 탄 윤화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도망쳤다.
“쟤 때문에 못 살겠다…….”
수감 시설에서 만났을 땐 그래도 애가 좀 커서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은 어려서 그런지 무슨 목줄 풀린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헥헥대고 다녔다.
“네 껌딱지 1은 어디 갔어?”
“울다가 지쳐서 자.”
“아깐 도대체 왜 운 거야?”
“그냥…….”
의현은 말끝을 흐렸다. 예쁜 게 좋다고 한마디 했다가 졸지에 물고기가 죽었다는 얘기를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너 혜영이랑 밥 같이 먹는다더니.”
의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제를 돌렸다. 동민은 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쉿- 하고 눈치를 주었다.
“나도 밥 정도는 좀 마음 편히 먹고 싶다고.”
“혜영이 지금 이쪽으로 오는데?”
“차라리 셋이 먹자 그럼.”
혜영은 동민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곧 파파라치에게 붙잡혔다. 어색한 얼굴로 포즈를 잡아 주는 동안, 동민은 연거푸 음료수를 들이켰다. 둘 다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혜영 혼자만의 짝사랑이라는 게 좀 의외였다.
“……야. 의현아 근데 있잖아.”
할 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동민은 꽤 뜸을 들였다.
“혹시 저녁 열한 시쯤 저기 하늘다리로 나와 줄 수 있어?”
“하늘다리?”
“아니, 거기가 저녁에 전경이 진짜 멋있거든. 관광 명소 중에 하나야. 너랑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밤에 문 안 닫아?”
“할아버지 건데, 일반인들한테도 사용할 수 있게 해 놓은 거라서…….”
“아. 근데 왜 굳이, 나랑 봐? 나는 관광 명소 별론데. 관심 없어.”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손바닥에 자꾸 땀이 차는지 동민은 제 손바닥을 계속 문질렀다. 진지한 표정을 보니 가볍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의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재단 관련해서 할 말이 있나 싶었다.
“동민 오빠! 저랑 밥 같이 먹어요!”
“어? 어! 그래!”
때마침 사진 촬영을 마친 혜영이 그릇을 들고 동민의 옆으로 와 앉았다.
“형아…….”
“재이 일어났어?”
얼굴이 다 불어터진 정재이가 비척비척 걸어 나와 의현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얼굴이 아파요…….”
“아까 너무 울어서 다 텄네. 아프겠다.”
정재이는 제 얼굴을 내보였다. 눈 주위가 빨갛게 달아오른 게 누가 봐도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의현은 제법 걱정스러운 척하며 손으로 슬슬 재이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혜영 누나가 동민 형 좋아하나 봐요.”
“아, 그렇다더라. 나 빼고 다 아네.”
“……누가 또 얘기했어요?”
“응, 윤화가.”
“아.”
“너 목소리도 갈라졌는데, 목은 안 아파?”
“괜찮아요.”
누군가 음악을 틀었는지 잔잔하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의현은 그릇에 음식을 덜어 재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밥 먹고 들어가서 더 자.”
“내일 바다에서 더 놀 수 있겠죠?”
“더 놀고 싶어?”
“네. 아쉬워요…….”
정재이는 의현의 손바닥 위로 제 뺨을 가만히 대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조그마한 얼굴은 언제 일그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더 놀아.”
정재이에겐 이게 마지막 바다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권의현에게도.
* * *
밤이 어둑했다. 모처럼 자유를 얻은 아이들은 잠도 자지 않고 실컷 놀기 바빴다. 게임이라도 하는 건지 애들 웃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의현은 일찌감치 씻고 침대에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잠에서 깬 건 열 시 반. 일부러 알람을 맞춰 놓길 잘했지, 그러지 않았으면 아침까지 계속 잘 뻔했다.
“피곤해 죽겠다…….”
아직 잠에서 다 깨지 않은 채였다. 의현은 몸을 길게 늘여 기지개를 켜고 머리를 헝클인 다음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별장 내부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종일 수영하고 게임하고 놀더니 다들 자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현관에 벗어 놓았던 슬리퍼를 대충 챙겨 신고 바깥으로 나오자, 저 멀리 동민이 말했던 그 하늘다리가 보였다.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는 안전을 꽤 신경 쓴 모양인지 바람이 불어도 꿈쩍도 안 했다.
“관광 명소라더니, 빛 되게 잘 드네.”
의현이 하품을 하며 대충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란 달빛이 다리 쪽을 아련히 비추는 게 딱 봐도 커플이 오면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별생각 없었다. 재단 얘기라고 해 봤자, 자신 역시 재단 지분을 갖고 싶다고 말할 게 뻔했고 그게 아니라면 불공정한 사회에 대해 열변을 토할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차동민이 순진해 빠진 기득권 집단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늘다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등대같이 생긴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멈춰 있었다. 의현은 동민이 먼저 도착해 있음을 눈치챘다.
투명한 엘리베이터는 아주 천천히 위를 향해 올라갔다. 의현은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심이 깊은 곳을 표시해 놓은 부표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친절한 안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서 멈추었다. 의현은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동민을 찾았다. 얼른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저 오빠 마음에 들어요.”
뭐지?
다리 중간에 두 개의 인영이 보였다. 의현은 미간을 찡그리며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오빠도 저 좋아한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 얘기 하려고 부르셨죠?”
의현과 마주 보는 쪽에 혜영이 있었다. 상대편은 뒤돌아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동민인 건 알 수 있었다.
“혜영아. 나는…….”
“긴장되는 거 알고 있어요. 이런 관계가 어쩌면 눈치가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당당하게 맞설 거예요. 혹시 오빠가 의현 오빠 친구라서 말하기가 눈치 보인다면 제가 대신-!”
혜영은 동민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당황한 동민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부른 거야?
굳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알람까지 맞추고 나왔건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웬 커플 탄생의 순간이었다. 의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꺄악-!”
갑자기 혜영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의현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사람은 없고 절반으로 끊어진 하늘다리만이 존재했다.
……뭐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나오라고 해서 나왔건만, 갑자기 고백하는 장면을 보여 주질 않나. 재난 상황이 펼쳐지질 않나.
끊어진 하늘다리는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부표에서 한참 뒤에 있는 다리였다. 수영 잘한다는 사람들도 혀를 내두른다는 저녁 바다에서, 갑작스럽게 물에 빠진 사람이 살 확률은 아주 낮았다.
“곤란하다고. 차동민은 여기서 죽으면!”
의현은 욕을 짓씹으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낭떠러지 같은 높이에서 떨어지는 의현의 앞에 아주 오랜만에 보는 개 같은 선택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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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돌았나? 꺼져.”
하루하루 사는 것도 뭣 같았는데, 시간을 돌리란다. 미친 새끼.
“다시 안 돌아가. 지금 살리면 돼. 지금 살릴 거야.”
의현의 대답을 듣고 선택지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의현의 몸은 곧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여름이라고 해도 물 온도는 몹시 낮았다. 의현은 숨을 참고 바닷속으로 잠수하며, 제 능력을 사용했다. 공기 뭉치를 만들거나, 살아 있는 물체를 공기에 넣어 옮기는 것 모두 가능했다.
“차동민! 박혜영!”
이렇게 개 같은 여행이 될 줄 알았으면, 바다에 오지 않았을 텐데.
* * *
“쿨럭……!”
동민은 입에서 물을 뱉어 내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구급차 안이었고 옆엔 혜영도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어떻게 된 거죠?”
“다리가 끊어져서 물에 빠지셨어요!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덩치가 커다란 경호원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다리가 끊어질 리가 없는데, 도대체 왜…….”
“저희 없이 나갔다는 걸 윗분들이 아시면 저희는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죄송스럽지만, 그냥 피치 못한 사고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혜영의 맥박도 정상이었다. 구급차에 타고 있던 의사는 ‘물에서 빨리 건져 내 큰 문제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살았다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특수 능력자 출신인 동민 역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일반인인 경호원이 그 깊은 바다까지 수영해 들어와 자신들을 살렸을 리 없었다.
“의현이가 왔었죠?”
“…….”
“권의현이죠?”
“제발 더는 묻지 말아 주세요…….”
의현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듯 경호원은 안절부절못했다. 이들은 어차피 권중섭의 고용인들이었으니, 자신이 따져 묻는다고 해도 어차피 원하는 답은 얻기 힘들 것이다.
“그럼 하나만 물을게요. 이건 사고랑 상관없는 거예요.”
“……말씀하세요.”
“의현이는 괜찮죠?”
경호원은 눈치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별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럼 됐어요.”
동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원래는 뭐든지 마음대로 되는 인생이었다. 자애로운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엘리트. 약자에게 관심을 줄 수 있던 이유도 집안이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올라가서 검진받고 바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
“편히 쉬세요.”
그런데, 요즘 들어선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이지 여유가 없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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