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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16화 (16/185)

16화.

그날 이후, 안 그래도 의현만 따르던 정재이는 세상에 권의현 하나만 있다는 듯 굴었다. 회까닥 돈 눈을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오만이 문득문득 치고 나왔지만, 그런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됐다. 안에 든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포장이 그럴듯하면 됐다. 의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여름의 공기는 뜨거웠고, 나무는 푸르렀다. 웬만한 학교들은 방학을 시작해 동네를 지나다 보면 어린애들 웃음소리가 잔뜩 들려왔다.

에어컨이 펑펑 나오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리쬐는 햇빛에 의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택 애들과 함께 여행이라니, 나 너무 설레잖아!”

동민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택을 둘러보았다.

“허튼짓하면 바로 놓고 올 거야.”

“네네. 알겠습니다아-.”

의현의 뒤를 쭐쭐 따라서 동민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 ‘권중섭 후원 재단 저택’에 발을 내디뎠다.

“형!”

저택 안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계단에서 누군가가 뛰어 내려와 의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으악! 동민은 기겁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뭐, 뭐야?!”

“아, 이쪽은 정재이.”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라…….”

피부가 스치는 것도 질색하는 의현이었다. 워낙 까칠해서 넉살 좋은 동민도 십 년이 넘게 비위를 맞춰 겨우 얻어 낸 친구 자리였는데, 이렇게 쉽게 누군가와 살을 맞댈 줄이야.

“안녕! 나는 의현이 학교 친구, 차동민인데! 그……. 네가 바다 가고 싶다고 했다며? 내가 그거 같이 가기로 해서! 그나저나 참 예쁘게 생겼다! 하하하!”

동민은 최대한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애썼다. 저도 모르게 선입견이 있던 모양인지, 입양됐다고 해서 그냥 평범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인형같이 생긴 남자애가 있어 깜짝 놀랐다.

“아…….”

정재이는 무표정으로 대답하며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호, 혹시 예쁘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니? 내가 막 평가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감탄해서 나온 말이야!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 그렇구나…….”

말을 걸면 걸수록 구겨지는 정재이의 표정을 보며, 동민은 괜히 구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원래 애들이랑 친해지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재이가 원래 낯을 좀 가려.”

“아, 그럴 수 있지! 괜찮아!”

동민은 호쾌하게 웃어넘겼다. 초등학생한테 몇 마디 들었다고 토라지는 건 좀 어이가 없었으니까.

“1층 애들도 데리고 나올게. 다들 짐 싸 놨을 거야.”

“그래.”

의현이 복도를 둘러보러 간 사이, 정재이와 둘만 남은 동민은 어색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명목상 따라가는 여행이라도 해도 종일 같이 다녀야 했는데, 서먹하긴 싫었다.

“바다에 처음 가 본다며? 네가 무척 가고 싶어 했다는 얘기는 들었어.”

“네. 그랬죠.”

“그……. 저녁은 고급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먹을 건데, 혹시 해산물 요리 좋아하니?”

“싫어하진 않아요.”

“그, 그렇구나……. 하하…….”

정재이는 모든 대답을 전부 짧게 끊어 냈다. 여지라도 있어야 말을 이어가는데, 여지를 주지 않으니 이건 뭐 의현을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했다.

“별거 안 넣었는데 가방이 이렇게 커졌다니까요? 진짜 웃기죠?”

“하루밖에 안 있을 건데.”

“그래도 옷은 몇 벌이 필요할지 모르는 거라고요. 오빤 패션을 너무 몰라. 이건 수영복, 이건 잠옷, 이건 다음 날 입을 거, 이건 여분 옷! 이것도 양을 한참 줄인 건데!”

1층 애들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의현의 얼굴에선 벌써부터 피곤한 기색이 느껴졌다.

“얼른 가요! 바다 얼른 보고 싶어요!”

소파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정재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의현에게 달려갔다.

“뭐냐, 쟤……?”

그 모습을 쳐다보며 동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 *

평소 같았으면 애들끼리의 여행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권중섭이었지만, 의현은 몇 개의 조건을 내걸고 협상에 나섰다.

⑴ 차동민과 함께 간다.

―권중섭은 사교에 꽤 민감하게 굴었으므로 비슷한 엘리트 집안 차동민과 어울려 다니는 걸 꽤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음.

⑵ 권중섭이 붙여 놓은 경호원을 대동한다.

―저택 애들이 다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혹시 애들한테 문제 생기면 정치적으로 곤란한 일 생길까 봐 붙인 것임.

⑶ 파파라치한테 행복하게 웃으며 노는 모습 사진을 찍혀 줄 것.

―일부러 피사체가 된 순간부터 파파라치라는 단어에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냥 알겠다고 했음.

이런 뭣 같은 조건을 내걸면서 의현은 바다에 못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호원이 쫓아다니는 상황에서 파파라치한테 찍혀 가면서 굳이 바다를 선택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와 저기 바다 좀 봐요!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이잖아요! 맨날 공부만 하는 거 지겨웠는데! 너무 좋아!”

“바닷물 색 좀 봐! 꼭 무슨 에메랄드 같잖아!”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택 아이들은 짜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당연하게 긍정을 표했다. 이미 권중섭 재단 출신이라고 기사도 다 난 상황에서, 얼굴 좀 팔리고 사람 좀 따라붙는 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냐는 거였다.

“진짜 신기해…….”

한 번도 누군가와 어울려 산 적 없던 의현은 이런 게 참 신기했다. 같이 어울려 놀고 소통하고 정서적으로 교류를 나누는 것을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니.

“얘들은 왜 이렇게 너만 좋아하는 거야? 내가 약간 어린애들한테 인기가 없나 봐.”

1층 애들이랑 잔뜩 수다 떨고 돌아온 동민이 의현을 보며 웃었다. 오른쪽 어깨엔 정재이가, 왼쪽 어깨에는 윤화가 기대어 잠들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퍽 안 어울려서 웃음이 터졌다.

“얘들이 왜 이러는지 제일 궁금한 사람이 나야.”

“나이가 어려서 그럴 수도 있어. 왜 그런 얘기가 있잖아. 오리는 알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본 사람을 엄마라고 생각한다고.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이유가 뭐든 피곤한 건 마찬가지잖아.”

“하하. 뭐 그건 그렇지만.”

동민은 창문 밖으로 펼쳐진 시원한 바다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의현과 함께 바다에 올 수 있다는 거 자체가 행운이었으니.

“바닷가에 별장이라니, 역시 부자는 스케일이 달라요.”

“내가 직접 벌어서 산 것도 아닌데 뭐.”

“그래도요. 이런 거 보면 사람들이 왜 돈 보고 사랑에 빠지는지 알겠다니까요?”

“오버다…….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지, 돈 보고 하면 안 돼.”

“그렇게 순진하면 이용당하기 쉽다고요. 이 오빠는 아직도 세상을 모르네.”

대형 버스는 새하얀 별장 앞에서 멈췄다. 관리가 잘된 별장은 대대로 학자 집안 출신인 동민의 외조부 때부터 사용해 오던 곳이라고 했다. 별장 바로 앞이 바다였고 주변에 동굴도 있어, 여행하기엔 최고의 장소였다.

“와아-!”

오후의 해변은 햇빛을 반사해 예쁘게 반짝였다. 짐을 내려놓은 사람들은 챙겨 온 수영복을 꺼내 입고 모두 바닷가로 뛰쳐나갔다.

“……개덥네.”

더운 건 딱 질색인 의현은 흰색 셔츠를 껴입고 커다란 파라솔 아래 자리 잡았다.

“형은 물에 안 들어가요?”

“젖는 거 싫어해.”

“그래도 모처럼 왔는데…….”

이미 한 차례 바다에서 뒹굴다 나온 정재이의 머리카락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기 부탁을 거절 못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재이는 괜히 의현의 앞에서 눈썹을 축 누그러트렸다.

“……그럼 발만 담글게.”

“정말요?”

정재이는 방긋방긋 웃으며 의현의 손을 잡고 바다로 끌었다.

“실제로 보니까 어때? 책에서 본 거랑 비슷해?”

“책보다 예뻐요. 책에선 이렇게 반짝거린다고 안 그랬거든요.”

“다행이네. 물이 맑아서 물고기도 다 보인다. 예쁘지?”

“물고기 좋아해요?”

“뭐, 보는 건 나쁘지 않지.”

시원한 바닷물이 의현의 발목을 간질였다. 파도가 칠 때마다 모래 속으로 발이 자꾸만 파고들어 갔다. 의현은 제 발을 내려다보며 괜히 발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여 보았다.

“……사실 나도 바다는 몇 번 안 와 봤어.”

의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모래를 한 움큼씩 집어 의현의 발 위로 쌓던 정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잘 모르겠어. 그냥…….”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마땅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현의 삶은 건조했으며 어둡고 치밀했다.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아왔다. 단 한 번의 여유도 없이.

“그럼 오늘이 계속 기억나겠네요?”

“…….”

“역시 바다에 오길 잘했어!”

정재이는 제 선택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잔잔한 파도가 의현의 발 위에 쌓인 모래를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사람들이랑 놀다 와. 형 파라솔에 있을게.”

“같이 더 놀면 좋을 텐데.”

“차를 오래 탔더니 조금 피곤해서.”

“네에…….”

의현이 재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얕은 물 속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정재이는 뒤돌아 나가는 의현을 붙잡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피곤하다…….”

그늘에 들어와서야 조금 기운을 차린 의현은 시원한 물을 꺼내 마셨다. 차동민은 처음 보는 애들과도 잘 어울리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의현은 턱을 괴고 앉아 윤화가 튜브를 끼고 물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란색 오리 튜브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윤화 쟨 불 능력잔데 물을 왜 이렇게 좋아해.”

하여튼 진짜 이상한 애야.

여러 차례 회귀하며 인간 본연의 추악함을 많이 봐 왔던 의현이지만, 윤화는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했기에, 가만히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형! 형아!”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고 정재이가 의현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다른 애들과 영 어울리지 않아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차였다.

“왜 혼자 놀고 있어. 다들 저쪽에서 노는데.”

“아니, 이거 봐요. 선물!”

정재이는 의현의 손바닥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동그랗게 쥔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물?”

“네!”

의현은 제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빨간색 꼬리를 가진 물고기 한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형은 예쁜 거 좋아하지요? 이거 예쁜 거!”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는 아가미를 벌름거리다가 곧 축 늘어졌다. 의현이 얼른 바다로 뛰어가 물고기를 놓아주었지만, 이미 죽은 물고기는 배를 까뒤집고 수면 위로 둥둥 떠올랐다.

정재이는 영문도 모른 채 의현의 뒤를 줄줄 따라왔다.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잔뜩 일그러진 의현의 표정이 비쳤다.

“…….”

화내지 말고, 차분히 알려 주자. 몰랐을 수도 있잖아.

의현은 표정을 고치고 뒤돌아 정재이를 마주 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건지 주눅 든 정재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의현을 쳐다보았다.

“재이야, 물고기는 물속에서만 살 수 있어. 예쁘다고 마음대로 꺼내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가지고 싶었는데요?”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질 수는 없어. 그럼 안 되는 거야.”

이런 걸 설명해 줘야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선물이라니. 물고기를 주면 좋아할 줄 알았던 건가? 도대체 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죽으면 다신 못 봐.”

정재이는 선 채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의현은 바다 위에 둥둥 뜬 물고기를 건져 내 물 밖으로 나왔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안 돼. 알겠지?”

“네…….”

“물고기야 미안해, 하면서 묻어 주자. 이리 와.”

“물고기야 미안해…….”

“뚝, 울지 말고.”

의현은 모래를 파 그 안에 물고기를 묻어 주었다. 제가 죽인 주제에 정재이는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저 멀리서 놀고 있던 동민이 놀라서 달려올 만큼이나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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