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셀 수도 없이 회귀하며 본 것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었다. 지금 시간을 저장하면 뭐, 나중에 어떻게 되는 건데?
“형?”
웃고 있던 표정이 굳자, 정재이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의현을 바라보았다.
“재이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만 대답해 줄래?”
“뭔데요?”
의현은 천장 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 지금 순간을 저장하시겠습니까? Y/N 〉
“너 혹시 저거 보여?”
정재이가 미쳤다고 해도 할 말 없었지만,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떠오른 글씨에 대해서 한 번쯤은 짚고 가야만 했다.
“……먼지요?”
정재이는 의현이 가리킨 쪽을 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원래 이 시간에 창문으로 햇빛 들어와서 잘 보여요.”
“먼지……?”
“혹시 오해할까 봐 얘기하는 건데, 청소 매일 해 주세요.”
그런 걸 물었던 게 아닌데, 정재이는 자기 방 위생을 가지고 열심히 항변했다. 얘 방이 더럽든 깨끗하든 그런 건 의현과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도.
〈 슬롯 1에 저장되었습니다. 〉
“허…….”
의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실소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저장하는 게 좋겠지?’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시스템은 멋대로 저장을 완료했다. 이게 언제 어느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건지 언질도 주지 않고서.
“거짓말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화나게 했다면 죄송해요…….”
“뭐가?”
“편지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에요?”
살짝 주눅 든 얼굴로 정재이가 물었다.
하긴, 정재이 입장에서는 편지가 아니면 아까까지만 해도 웃던 권의현이 갑자기 정색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 정재이에게 아무리 말을 해 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권의현만 미친놈 될 뿐이지.
“……편지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갑자기 몸이 좀 안 좋아서.”
“아파요?”
“그냥 이것저것 요즘 신경 쓸 게 좀 많아.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다.”
의현은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책상에 올려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형!”
뭔가 할 말이 있는 건지 정재이가 의현을 불렀지만, 돌아보고 싶진 않았다. 쿵쾅쿵쾅. 처음 겪는 상황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설마 뭔가 또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의현은 더는 죽고 싶지도,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 * *
“허억! 헉, 허억…….”
주기적으로 악몽을 꾸긴 했으나, 근래 들어선 그 회수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일어난 의현은 제 목을 더듬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무력한 적 없었는데, Z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런 삶은 계속 반복됐으며 권의현은 모든 순간마다 죽었고, 개 같은 세인트 해피 보육원에서 깨어났다.
“아니야.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이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 생에 쌓아 온 모든 걸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세 시간도 자지 못하고 의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적막하게 불 꺼진 방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의현의 귓가에선 자꾸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 제발…….”
제발 이번 생에서 모든 걸 끝낼 수 있게 해 줘. 제발…….
의현은 양쪽 귀를 틀어막고 새벽 내내 몸을 떨었다.
잡생각 없이 잠들기 위해서 의현은 학교 수업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원래 난이도가 극악이라 애들이 혐오하는 ‘시뮬레이션’ 수업에도 의현은 최선을 다했다. 포탈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급 괴물부터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물까지 전부 잡아 죽이며 의현은 땀을 뚝뚝 흘렸다.
동민은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며 의현에게 속삭였다.
“야, 좀 봐주면서 해라. 애들 다 겁먹었잖아.”
“왜?”
“시간표를 봐 봐. 다음이 일대일 대련 수업인데, 도대체 너랑 어떻게 싸우라는 건데.”
“본인 실력을 탓해야지.”
“야……. 진심으로 실력이 문제냐?”
“그럼 뭐가 문젠데.”
“네가! 네가! 이 자식아!”
거의 폭주 상태인 의현을 의식하고 있던 건지, 애들이 이쪽을 쳐다보다가 금세 고개를 돌렸다.
“졸업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열심히 해야지.”
“너는 좀 덜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인생을 어? 좀 공평하게 살자고.”
“그렇게 말하는 네 인생도 불공평 라인에 들어가 있어. 네가 공평을 논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동민은 성격이 좋아 자존심이 센 의현과도 그나마 잘 어울렸다. 반 애들이 선망 섞인 시선으로 의현을 바라볼 때면 동민이 넉살 좋게 웃으며 제 친분을 은근히 드러낼 때도 있었다.
“뭐 스트레스받는 일이라도 있어? 교육 봉사하는 게 생각보다 적성에 안 맞는다거나.”
“그건 항상 적성에 안 맞았어.”
“왜? 애들이 말을 잘 안 들어?”
“말은 잘 듣는데…….”
의현이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자, 동민은 건수라도 잡은 것처럼 얼른 따라 앉으며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왜? 뭔데 그래? 내가 또 아는 동생들이 많아서 그런 거 잘 알아.”
“교육 봉사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슬쩍 서두를 꺼냈다.
“……게임에서 말이야. 저장 기능이 있다는 건 머지않아 위험 요소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거겠지?”
“……갑자기 게임?”
“게임 안 해?”
“아니, 좋아하긴 하는데……. 네 입에서 게임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지.”
특수 능력 고등학교라고 해도 노는 건 보통 애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게임도 하고 놀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권의현은 능력 발현이 된 유년기 시절부터 수업이 끝나면 득달같이 집으로 돌아갔고, 같이 수련회를 가도 시키는 것만 할 뿐 세상 모든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동민에겐 이런 질문이 몹시 의외처럼 느껴졌다.
“글쎄……. 확실히 저장 기능이 있는 게임이 보통 아기자기한 게임보다 위험할 수는 있겠지? 그래도 뭐 당장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게임 잘하는 사람들 보면 저장 한 번도 안 하고 엔딩 보고 그러잖아.”
동민은 제 나름의 생각을 얘기했지만, 그럴수록 의현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나 게임 못해.”
그래서 벌써 세 번이나 죽었어.
“무슨 게임인데? 도와줘? 나 게임 잘해.”
해맑은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동민에게 차마 ‘사람 하나 죽여 줄 수 있어?’라고 물을 수가 없었다. 의현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서포터 필요하면 나한테 꼭 말해. 나 진짜 게임 잘해.”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도와준다는 사람이 하나는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죽던 때 비하면, 아주 조금은 나아졌을 수도…….
* * *
윤화와 관련된 일은 전부 재단에서 처리했다. 담뱃불 정도만 붙일 수 있던 윤화는 특수 능력자 학교에 입학해 온갖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권중섭은 입이 귀에 걸려, 틈만 나면 윤화를 보러 저택으로 갔다. 그 저택은 조그마한 권중섭의 박물관 같았다. 권중섭이 좋아하는 애들로만 전부 채워진.
“장관님, 재이는 어떻게…….”
전문의는 저택에 있는 아이들의 상담을 모두 도맡아 하고 있었다. 오후 상담이 끝나면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되어 있어, 의현 역시 수업을 끝내고 바로 저택으로 온 참이었다.
“맛있는 식사를 앞에 두고 좋은 말만 해야지요, 한 선생님.”
“네?”
“공부 많이 했다는 분이 눈치가 없어서 쓰나.”
계단 위쪽에서 무언가 달싹이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고 있던 의현이 고개를 쳐들었다.
“…….”
거기엔 정재이가 있었다. 오도 가도 못 하고 그저 덩그러니 선 채로.
그 순간, 의현은 선택해야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재이를 무시하고 주방으로 가 식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상처받은 정재이를 달래주며 정서적 안정감을 줄 것인가.
“어, 의현이 왔구나. 어서 앉아라.”
권중섭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현에게 손짓했다. 정재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의현은 태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윤화 너 오랜만에 본다.”
“형아!”
권중섭의 애정을 독차지하던 윤화가 달려와 의현의 발아래에 매달렸다. 의현은 윤화를 품에 안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재이 표정이 어떨지 아주 상상이 잘됐다.
“맨날 어딜 그렇게 놀러 다녀. 얼굴 보기가 힘들잖아.”
“아니! 놀러 다니는 게 아니구우! 친구들이 자꾸 놀자고 하니까!”
“공부 안 할래? 너, 네 이름 쓸 줄 알아?”
“쓸 줄 알아! 볼래?”
존댓말을 가르쳐도 윤화는 줄곧 반말을 해댔다. 윤화는 제 가방에서 노트를 하나 꺼내 꾹꾹 글씨를 눌러 썼다.
“……글씨가 왜 이렇게 지렁이 같지?”
“글씨 원래 잘 쓰는데. 이상하다. 헤헤-.”
윤화는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지렁이 굴러가듯 흐물거리는 윤화의 글씨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의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앉아서 같이 밥 먹자.”
“아, 먼저 드세요. 저 마지막에 대련 수업이 있어서 땀 냄새가 좀 날 거예요. 씻고 나중에 먹겠습니다.”
윤화를 의자에 앉혀 놓으며 의현이 말했다.
사실 대련 수업 같은 건 없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이미 자리가 마련된 식사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대련이라…….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건 보기 좋구나.”
권중섭은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윤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네 몫의 식사를 따로 준비해 놓을 테니 씻고 나와서 먹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의현은 입매를 당겨 억지로 웃어 보였다.
“미친 새끼…….”
주방을 빠져나오며 의현은 작게 욕을 짓씹었다. 윤화가 특수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분명 키우는 개 취급도 안 했을 게 뻔했다. 어떻게 사람이 변하는 게 없이 이렇게나 일관될 수 있을까? 조금도 변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나 저열하고 더럽고…….
의현은 입고 있던 교복 마이를 벗으며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주방에서는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만개했지만, 2층은 어두웠고 너무 조용해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꽉 닫힌 문 앞에서 의현은 심호흡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답답하게 목을 조이는 것이 없어지니 조금 숨통이 트였다.
똑똑-.
“재이야, 형이야.”
의현은 다정해 죽겠는 목소리로 정재이의 이름을 불렀다.
“들어갈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방에 웅크려 있던 정재이가 고개를 들고 의현을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왜 울어.”
“형, 형이…….”
정재이는 너무 서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딸꾹질인지 뭔지 말이 중간중간 끊겨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형이 너를 슬프게 했어?”
“혀, 형이, 유, 윤화랑! 1층 사람들, 다 싫은데, 형이, 윤화랑, 거기…….”
“그러니까 1층에 있는 사람들 다 싫은데, 형이 거기로 가서 슬펐구나.”
이해가 잘 안 됐지만, 대충 말을 이어붙이니 정재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결국엔 재이 보러 왔잖아. 그렇지?”
의현이 양팔을 벌리자, 정재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현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왔다. 작은 몸은 지금도 한창 성장 중이었다. Z가 되기 위해서.
“형한테는 재이가 제일 소중해.”
의현의 속삭임을 들은 재이의 몸이 작게 떨렸다.
“한 번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그래.”
의현은 재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세뇌라도 하듯이 달콤한 말을 퍼부어 주었다.
“재이가 제일 소중해.”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