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애들은 생각보다 금방 컸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애들 크는 걸 보면 나이 먹는 걸 알겠다는 어른들의 말이 이해가 갔다.
의현은 특수 능력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특수 능력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은 어떻게든 사진 좀 찍어 보려는 기자와 가족들로 발 디딜 곳 없이 붐볐다.
“수석 입학생, 1반 권의현.”
벌써 세 번째 수상이었다. 3월의 겨울은 너무나도 추워서 가만히 있어도 입김이 절로 나왔다. 의현은 단상 위로 올라가 상장을 받고 교장과 함께 억지웃음을 지으며 사진도 한 방 찍었다.
뭐든 10년을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권의현은 같은 교육 과정을 3번 밟고 있었으니, 수석을 놓치는 게 더 우스운 일이었다.
입학 첫날은 일찍 끝난다고 했다. 괴수론, 포탈의 법칙, 호신술 등 몇백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교과서를 사물함에 넣고 교문을 나서자, 익숙한 얼굴이 따라붙었다.
“오늘도 보모 노릇 하러 가는 거야?”
“덜 자랐으니까 어쩔 수 없지.”
“너무 그렇게 착하게 살면 안 피곤하냐?”
“나 안 착하니까 괜찮아.”
차동민은 의현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법대로 유명한 H 대학교 총장이 얘네 아버지였다. 급에 맞게 어울려 다니라는 얘긴 대놓고 안 해도,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면 피곤한 일은 확실히 줄기 마련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재단에 후원하신다고 난리더라. 이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어. 하긴 확실히 이렇게 양극화가 심한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지속적인 후원이 더 도움이 되긴 하지.”
얜 세상의 부조리함을 제법 눈치채고 있었고, 제 돈을 모아 어느 단체에 기부도 하고 있었으니, 사실 의현과는 기본적으로 결이 달랐다.
“그럼 너 저택 애들 공부도 봐줘? 그건 나도 도와줄 수 있는데.”
“성적 보고 뽑아서 애들 다 공부 잘해.”
“오. 대단한데?”
교문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학식이다 보니 극성인 부모님들이 죄 나와서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맘때 되면 좀 설레지 않아? 눈도 오고 날씨는 춥고 사람은 많고. 뭔가 로맨틱-.”
“전혀.”
“어우. 쌀쌀맞아.”
동민은 의현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때리며 제 차가 있는 곳으로 멀어졌다. 동민의 능력은 무력 강화였는데, 주먹이 엄청 매웠다. 맞은 부위를 슬슬 문지르며 의현이 제 차에 올라탔다.
“수석 축하드립니다. 이건 장관님이 보내신 거예요.”
“네.”
운전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화려한 꽃다발을 의현에게 건넸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이건 ‘앞으로도 내 기 잘 세워 줘라’ 이 정도 의미일까. 의현은 실소하며 꽃다발을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이쯤 되면 권중섭과 권의현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 법도 했는데, 윤 기사는 끊임없이 둘을 이어 주려 애썼다.
“무슨 요리를 하는 건지, 냄새가 아주 좋네요.”
이제는 익숙하게 저택 주차장에서 내린 의현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쏟아졌다. 3월에 눈이라니, 최악……. 의현은 머리를 털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시간 딱 맞게 도착하셨네요! 마침 요리가 다 끝난 참인데!”
유모는 친절하게 웃으며 의현을 반겨 주었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우당탕 소리와 함께 무언가 의현에게 달려들었다.
“형!”
정재이였다.
“밖에 눈 온다. 구경하고 싶으면 나가 봐.”
“정말? 눈 와요?”
정재이는 1층 통유리 밖을 내다보며 활짝 웃었다. 정재이가 눈에 정신 팔린 사이, 의현은 주방으로 가 1층 아이들과도 인사를 끝냈다.
따뜻하고 푸짐한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이 저택에는 학생들만 있었으니, 오늘은 모두의 진급을 기념해서 다 같이 식사를 한다고 했다.
“수석 입학했다는 기사 봤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사기캐!”
“맞아! 오빠는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하면 어떡해요!”
자주 봐서 꽤 친해진 탓에, 1층 애들은 의현에게 장난도 꽤 치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어.”
“왜 없어요? 다 그렇게 생각해요!”
익숙하지 않은 칭찬에 의현은 말을 돌렸다.
“윤화는 적응 좀 잘하고 있대요?”
“윤화야 뭐 펄펄 날아다니죠. 오늘도 봐요. 애들이랑 놀다 온다고 안 들어오는 거.”
수감 시설에서도 그랬듯 윤화는 어디서나 적응을 잘했다. 18지구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그렇게 멀쩡할 리가 없는데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극복이 빠르다는 건 좋았지만, 어찌 보면 참 독특한 애였다.
“형!”
정재이는 눈 구경을 다 끝냈는지 코와 귀가 새빨개진 채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식사하고 있던 의현이 슬쩍 쳐다보자 정재이는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걸 내밀었다.
“이거 눈사람!”
“예쁘네. 근데 안 추워?”
무심한 의현에 반응에도 정재이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했다. 이렇게 맹목적인 애정을 받을 땐 적응이 안 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현상이었다.
“전혀! 오늘은 언제 집에 가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밥만 먹고 가는 건 아니죠?”
정재이의 모든 의식은 결국 의현으로 흘렀다. 말이 많이 늘어서 이젠 과거에 정재이가 말도 못 했다는 사실이 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같이 있다가 늦게 가요. 바다도 아직 안 가 줬잖아요! 네?”
“2년째 바다 타령을 하는데, 오빠 그냥 한번 가 줘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재이는 아직도 바다 얘기를 했다. 얘가 이렇게 집요할 줄 알았다면, 그때 죽어도 바다 얘기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들으면 생각해 볼게.”
이 말도 벌써 몇 번이나 우려먹었지만, 정재이는 어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 방법으로 정재이를 공부시키는 게 가장 효율적이기도 했다.
요란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의현은 잔뜩 보채는 정재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키가 너무 작고 말라서 도대체 어떻게 사나 했는데, 요즘 성장통을 겪더니 키가 쑥쑥 자라고 있었다.
“몸은 괜찮지? 평소랑 크게 다른 건 없는 거지?”
현재 권의현의 최대 관심사였다. 정재이의 능력 발현 시기.
“팔다리가 조금 아픈데.”
“그건 키 크려고 그러는 거야. 그거 말고는?”
“그거 말고는 똑같아요.”
회색 러그가 깔린 방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쓰기엔 너무 칙칙했으나, 정재이는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윤화가 안 오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하지만…….”
“착하게 말해야지.”
윤화를 18지구에서 빼 오느라고 의현이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면 정재이도 이런 말은 안 할 텐데, 애석하게도 얜 아무것도 몰랐다.
“학교 애들이랑은 잘 지내지?”
“뭐…….”
정재이는 말끝을 흐렸다. 정기적으로 저택을 방문하는 전문의 말로는 정재이가 보육원에서 따돌림을 많이 당해 사회성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대인 관계를 맺는 걸 어려워하고, 애초에 맺을 필요도 못 느끼고 있다고.
“너 좋다는 애 없어?”
벽에 기대어 앉아 정재이의 수업 교과서를 펄럭펄럭 넘겨 보았다. 수업 시간에도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지 필기라곤 하나도 없어 교과서가 마치 새것 같았다.
“……그런 거 없어요.”
“왜? 재이 예쁘게 생겼잖아.”
정재이는 꼭 무슨 원석 같았다. 만약 세인트 해피 보육원에서도 지금 같은 모습이었다면 데려간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거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정재이가 계속 꾀죄죄했던 탓에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했으니까.
“형 마음에 들게 생겼어요?”
내내 무표정하던 정재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채도가 낮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붕붕 나풀거려 무슨 강아지 귀 같았다.
“예쁜 거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형도요?”
“나는…….”
워낙 건조하게 산 탓에, 외모적으로 딱히 이상형이 있진 않았다.
“좀 웃기게 생긴 사람이 좋긴 해.”
“네?”
“보고 있으면 웃기잖아. 왜, 홍삭같이.”
홍삭 얘기에 정재이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다.
“형이 홍삭을 챙기는 게 이해가 안 돼요.”
“그냥 별 이유 없어.”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더 이해가 안 되고요.”
얘가 말을 이렇게 잘했나?
의현의 눈에 정재이는 단 두 가지 모습뿐이었다. 첫 번째, 머리를 산발한 입양 동생. 두 번째, 머리를 산발한 Z. 공통적으로는 둘 다 말을 못 했다.
“너 나한테 못되게 굴면 안 돼. 알지?”
의현은 재이의 구겨진 미간을 손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못되게 안 해요. 그걸 어떻게…….”
“너 아무리 화가 나도 나 죽이면 안 돼.”
“형!”
정재이가 큰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작은 몸은 위협은커녕 귀여울 정도였지만, 의현은 벌써 몇 번이나 제 마지막을 본 사람이었다.
“그냥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
“그런 일은 없어요.”
의현은 묻고 싶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나는 네가 세상을 다 끝내는 걸 보고 돌아온 사람인데,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래. 알겠어. 너무 화내지 마. 재이야.”
의현이 손짓하자, 정재이는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내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형이 왜 자꾸 그런 얘길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원래 걱정이 많아.”
“다른 사람한텐 안 그러잖아요.”
“너한테만 그러면 좋은 거잖아. 아니야?”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정재이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곧 제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
속내를 감추고 있어서 그런 건지, 둘의 대화는 가끔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갈 때가 있었다.
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재이의 교과서 페이지를 넘겼다. 여전히 아무것도 안 적힌 글씨들 사이에, 분홍색의 작고 예쁜 편지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이게 뭐야?”
“아!”
정재이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달려들었다.
“3반 정재이에게, 1반 이은하가?”
능력 발현 전인 정재이는 날고 기어 봤자 의현을 이길 수가 없었다. 가볍게 재이의 손을 피한 의현은 제 손에 들린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안녕, 재이야. 나는 은하라고 해. 나는 네가 너무 좋아. 왜냐면 너는 바보 같은 남자애들이랑 다르게 잘생겼고, 예쁘고, 똑똑하고, 조용하고, 차가우니까. 나는 너의 그런 모습에 반했어.”
요즘 애들 정말 직설적이네.
“형! 읽지 마세요!”
“재이 너를 생각하면 심장이 뛰고 밤에 잠도 잘 못 자. 그래도 네가 꿈에 나와 주면 좋겠어. 재이야 나는 네가 좋아. 혹시 너도 내가 마음에 든다면, 오늘 입학식이 끝나고 정문에서 나를 기다려 주겠니?”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로 고백 편지를 읽고 있자니 조금 웃겼다. 하긴 의현의 눈에도 썩 괜찮아 보이는 정재이가 또래 애들한테 안 괜찮게 보일 리가 없었다.
“뭐야. 너-.”
의현이 편지를 뒤로 감추며 작게 웃었다.
“있었잖아, 너 좋다는 애?”
진심으로 웃는 의현의 얼굴이 처음이어서 그런 건지 정재이는 무슨 고장 난 로봇처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자리에 가만히 섰다. 귀 끝과 얼굴이 정말 미친 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 지금 순간을 저장하시겠습니까? Y/N 〉
허공에 처음 보는 문장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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