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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12화 (12/185)

12화.

의현의 말에 윤화는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전에 만났을 땐 그래도 애가 고등학생 즈음은 됐는데, 지금은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나이라 한숨만 나왔다. ‘그’ 권의현이 어린애들 모아다가 교화나 시키고 있다니.

“일단 몇 가지만 물어볼게. 예배가 하루에 몇 번 있어?”

윤화는 작은 손가락으로 숫자 4를 만들었다.

“아침, 점심, 저녁, 새벽 맞아?”

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 작은 문 말고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어?”

“잘 몰라요…….”

하긴 윤화도 처음 갇혀 보는 곳일 텐데, 이 좁은 공간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말이 안 됐다.

“계속 여기에 있는 건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뚱보 남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교주가 알게 되면 언제 위치가 발각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 가만히 이 작은 방에 숨죽이고 있기보다 빨리 피할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벽을 부수고 나가는 것도 가능했지만, 소음 때문에 제약이 있었다. 의현은 최대한 아무도 모르게 윤화만 데리고 이 정신 나간 18지구를 탈출할 계획이었다.

“일단 옥상으로 피해 있자. 내가 봤을 땐 거기가 제일 안전해.”

의현은 이 상황에도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화의 몸을 덜렁 들어 올렸다. 당황한 윤화가 허공에서 바르작거리며 저항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과 맨살 닿는 거라면 딱 질색이었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윤화를 달래서 데리고 이동하느니 차라리 등에 업는 게 나았다.

“꽉 붙잡아. 떨어져도 안 잡아 줄 거니까.”

무슨 짐짝 옮기듯이 윤화를 제 등에 턱 얹은 의현은 다시금 좁은 통로를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옮겨 놓았던 피아노의 위치는 여전했다. 아직까진 누구도 침입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

의현은 주변을 살피며 작은 문에서 뛰어내린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피아노를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수찬이는 어떻게 해요?”

“그게 뭔데?”

“아까 누워 있던 그 형…….”

“수찬이는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해.”

무덤덤한 의현의 반응이 슬픈 건지 윤화는 제법 울상을 지어 보였다.

“수찬이 불쌍한데…….”

지금 누가 더 불쌍한 상황인지 논하자면, 서른도 훌쩍 넘어 보이는 수찬이보다 일곱 살 먹은 네가 더 불쌍하지 않아?

옥상으로 올라오자, 순간 밝은 빛이 확 내리쬐었다. 좁은 방 안에 갇혀 있었던 윤화는 상당히 오랜만에 마주하는 햇빛이었다.

의현은 제 등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있던 윤화를 내려놓고, 이제 어떻게 하면 여기를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엄마 아빠한테 인사 안 해도 돼?”

“…….”

“물론 인사 못 하게 할 거지만.”

엄마 아빠 얘기가 나오자 윤화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어린애들은 울기 전에 항상 저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정재이도 자주 그랬다. 걔한테는 잘 보여야 했으니 품에 안고 달랬겠지만, 윤화는 수감 시설에 갇히기 전에 데리고 가는 게 목적이었으니 애써 상냥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그럼 왜 물어보세요.”

“그냥. 마음의 준비 하라는 거지.”

의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점심때도 예배를 드린다고 했으니, 그 전에 옥상에서 탈출해야 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내가 없는 걸 더 좋아할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매일 울었거든요. 저같이 귀신 들린 애는 차라리 없는 게 좋았을 거래요.”

“그놈의 귀신, 귀신.”

포탈이 열릴 때마다 그 안에서 괴물을 찢어 죽이던 의현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귀신보다는 차라리 살아 있는 정재이가 더 무서웠다. 하다못해 걘 죽일 수도 없었으니까.

“죄송해요…….”

“라이터 없이 불붙이는 정도로 귀신이면, 세상 사람 절반은 귀신이게?”

“제가 라이터 없이 불붙이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윤화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의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지역답게 다들 일을 하러 나갔는지 주택가는 한산했다. 의현은 윤화의 몸을 덥석 품에 안았다.

“뛰어내릴 거야.”

“네? 으악-!”

2층 반 높이에서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의현은 주변을 훑고 아주 빠른 속도로 뛰었다.

윤화는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달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주변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땅을 접어서 달리는 듯했다. 처음 겪는 스릴에 윤화는 두려워하기보단 신나서 날뛰었다. 와! 소리 내려는 걸 의현이 틀어막았다.

그렇게 애 하나를 데리고 동네에서 탈출하는 것까진 쉬웠다.

“미친…….”

문제는 슈퍼마켓에 택시를 대 놓은 기사님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는데…….

연결음은 계속되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의현은 버둥거리는 윤화를 택시 뒷좌석에 넣어 놓은 채 욕을 짓씹었다.

“너,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이 안에서 나오지 마.”

“왜요?”

“내가 지금 너 몰래 데리고 나온 상황이거든.”

“아하.”

“들키면 너나 나나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 갇히는 수가 있어.”

“수찬이 만나기 싫어요!”

“그래. 수찬이가 주는 크림빵 먹기 싫으면 여기 얌전히 있어.”

윤화는 얌전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의현은 연결음만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슈퍼마켓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계세요?”

이름만 슈퍼마켓이지, 크기는 그냥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과자 몇 개가 전시된 가게 안에선 TV 드라마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연탄난로 앞에 앉아 손발을 녹이고 있던 할머니가 의현을 쳐다보았다.

“손님이요?”

“혹시 밖에 택시 기사님 어디 가셨는지 아세요?”

“기사 양반이랑 아는 사이요? 거 심심하다고 계속 시끄럽게 떠들더니, 슬그머니 동네 안으루 들어가는 거 봤는데-.”

타이밍이 이렇게 어긋날 수가 있나. 의현은 싸한 기분을 느끼며 곧장 슈퍼마켓 문을 열고 나왔다.

땡! 땡! 땡!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근데, 형아. 점심 예배 시간도 아닌데, 왜 종을 치는 거예요?”

택시 뒷좌석에 있던 윤화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며 의현에게 물었다.

“와! 저기 봐요! 보라색 뭉게뭉게!”

크고 작은 포탈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 말인즉슨, 의현이 알지 못하는 수십 개의 포탈이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데 왜 중형 크기의 포탈이 갑자기 18지구에 나타난 건지, 의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석하게도 권의현은 운전을 할 줄 몰랐다. 택시 기사만 있었어도 이딴 곳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는데. 윤화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괴물이 언제 어느 순간에 여기까지 찾아올지 몰랐으니까.

“할머니 여기 안대 같은 거 팔아요?”

“안대? 그런 건 없지.”

“수건 있으면 좀 주실래요? 제가 살게요.”

“있는데, 그걸 뭣 하려고…….”

의현은 수건을 하나 구입해 세로로 쭉 찢었다. 윤화가 차 문을 열고 폴짝 뛰어나와 의현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너, 이거 풀면 안 돼.”

“어두워! 무서워요!”

“너 이거 풀면 수찬이랑 평생 살게 할 거야. 알겠어?”

“형 너무 나빠요! 어떻게 그런 말을!”

“진짜야. 수찬이랑 뽀뽀하게 시킬 거야.”

“으아앙-!”

윤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버둥거렸다. 의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윤화의 눈에 수건을 감아 뒤에서 꽉 묶었다.

“그럼 숫자 몇 셀 때까지 하고 있어요?”

“너 몇까지 셀 수 있는데?”

“백까지는 셀 수 있는데.”

“그럼 백 일까지 세.”

윤화가 뭐라고 칭얼거리는 것 같긴 했지만, 이젠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의현은 윤화를 든 채로 다시 동네 안으로 돌아갔다.

여긴 피 냄새가 진동했다.

포탈을 빠져나온 괴물이 사람들을 아드득 짓씹으며 의현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툭툭 튀어나온 돌기에 달린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기분이 더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 씨발…….”

정재이가 포탈을 열기 전에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걜 저택 안에 집어넣었는데.

괴물 몇이 의현에게 달려들었지만, 의현이 능력을 조금 개방하자마자 온몸이 분리되어 죽었다. 의현은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만 만나면, 곧장 여기를 뜰 생각이었다.

땡! 땡! 땡!

누군가 계속해서 종을 치고 있었다. 의현은 고개를 들고 언덕 위에 있는 예배당을 쳐다보았다.

“잠깐, 시초 능력자……?”

일순간 애들이 부르짖던 ‘시초님’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정말 시초 능력자라면 이 정도 포탈은 문제도 안 됐다. 오히려 제 능력을 이용해 포탈을 접어 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의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재이가 아닌 새로운 시초 능력자의 존재. 그 얼마나 희망적인가.

의현은 곧장 예배당으로 향했다. 이미 상당수의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동네를 헤집고 있었다. 하지만 권의현은 청소부가 아니었다. 업무하러 온 것도 아닌데, 포탈을 싹 청소해 줘야 할 이유 따위 없었다.

“시초님! 제발 능력을 사용해 주세요!”

“저희를 구원해 주세요! 오로지 이날을 위해 저희는 살아왔잖아요!”

옥상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의현은 단숨에 옥상으로 올라가 안착했다.

“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너희들이 나를 살려야 할 것 아니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의현은 단번에 그가 교주임을 알았다.

“나는 이 나라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시초 능력의 후계자다! 만약 내가 죽거나 다치면 도대체 이 나라를 누가 책임진단 말이냐! 그러니 당연히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너희들이 몸으로 막아야지!”

“……야.”

갑자기 튀어 올라온 의현을 보고 스무 명쯤 되는 성도들이 놀라 손가락질을 했다.

“너 시초 아니지?”

높게 쳐 봐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시초교 4대 교주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악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졌다. 의현이 갑자기 나타난 탓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없었다. 분명히 없었는데…….

“무엄하다! 감히 시초님께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맞아. 시초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전지전능한 분이시다! 그래서 대의를 생각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거야!”

“어머나, 저 뒤에 있는 애는 윤화 아니야? 저 귀신 들린 애를 업고 지금…….”

의현은 교주에게 말했으나, 어쩐지 성도들이 앞으로 나와 교주를 감쌌다.

“다들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의현은 제대로 빡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능력이라고 누가 그래?”

“그럼, 신이 또 있다는 거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누군가 큰 소리를 내는 동시에 5미터 크기의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옥상으로 직행했다. 꺄아악! 겁에 질린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진짜 신은 내가 데리고 있어.”

“뒤에!! 뒤에!!!”

의현은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괴물의 입을 잡고 위아래로 찢어 버렸다.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니까.”

핏물과 잔해가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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