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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9화 (9/185)

9화.

의현의 집에서 십 분 거리인 저택은 부자 동네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외관이 휘황찬란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동안 가끔 드나들긴 했지만, 완공된 저택은 처음이었다.

저택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 명의 사람들이 달려와 인사했다. 둘은 가사를 담당하는 유모였고 나머지 둘은 교육 담당 선생님이었다. 아침부터 간단한 테스트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의현은 교복 마이를 벗었다.

“재이는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집중력이 떨어져요. 실제 나이는 열한 살이라는데, 행동하는 거 보면 다섯 살 정도죠.”

“말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요?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의사소통은 되거든요. 책 가져와, 물 먹자,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 다 알아듣긴 해요. 그런데도 말을 안 하는 걸 봐서는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죠. 이건 세인트 해피 보육원 측에 확인을 좀 해 봐야겠어요.”

“심리적 문제요?”

이건 좀 의외였다. 정재이는 의현의 집에 왔을 때부터 말을 못 했으므로 태생적으로 좀 모자란 애라고 생각했을 뿐, 심리적 문제로 인해 일부러 입을 닫았으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뭐 보통은 파양되기 전에 부모로 인해 어떤 충격을 받았거나 했을 가능성이 높죠. 80퍼센트 이상은 그런 이유거든요. 아주 어릴 때 겪을 수 있는 고통은 대개 부모에게서 오곤 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래도 다행인 건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예요. 언어를 제외하곤 사실 거의 영재 수준이죠. 제대로 교육만 받는다면 분명 큰 사람이 될 거예요.”

심리 담당 선생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재이의 결과지를 의현의 앞에 잔뜩 꺼내 놓았다. 삐뚤삐뚤한 선으로 그린 그림들과 색종이로 접은 알 수 없는 물체. 이게 다 오늘 검사에서 얻어 낸 것들이라고 했다.

“지금 좀 봐야겠네요. 2층에 있죠?”

의현은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으며 새로운 정재이의 방으로 향했다. 저택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바닥은 온통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다. 의현은 정재이의 문 앞에서 짧게 심호흡을 했다.

“……들어갈게.”

노크했지만 안에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의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도 꺼진 어두운 방, 침대 위에 웅크려 있던 작은 몸은 문 여는 소리를 듣고 크게 들썩였다.

“재이야. 형이야.”

다정한 목소리를 연기해 내며 의현은 약간 메스꺼움을 느꼈다. 이 짓도 계속하면 익숙해질까?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됐다.

“으아…….”

“다음에 만나면 인사해 달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나 보다.”

의현의 서운한 말투에, 정재이가 슬쩍 이불을 내렸다. 조그만 틈 사이로 의현을 확인하더니, 재빠르게 뛰어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 번도 애를 안아 본 적 없던 의현이 엉거주춤 재이의 몸을 받아 냈다.

“으, 으아! 아! 아!”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았던 건지 정재이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의현의 목에 제 이마를 비볐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있었나? 의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정재이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 잘랐네.”

이 루트는 처음 오는 것이었으니 뭐 하나 예측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의현은 처음 보는 정재이의 맨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눈이 연보라색인 줄은 몰랐어.”

정재이는 제법 다채로웠다. 온통 검은색으로 색칠된 의현과 다르게, 정재이는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에 연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예쁘게 올라간 코, 붉은빛의 도톰한 입술까지. 이렇게 보니 정재이는 꽤 화려한 미인상이었다.

“으으…….”

이불 속에서 울고 있었는지 정재이의 눈 주위가 젖어 있었다. 의현은 눈 주위를 닦아 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왜 우는 건지 네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해.”

“…….”

“안 그러면 네 마음 아무도 몰라.”

인생 1회 차 때 정재이가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가끔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려 본 적 있었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칠 것 같았으니까.

“누군 네가 신이라고 하더라.”

정재이의 동그란 눈동자 안에 의현의 얼굴이 비쳤다. 김태원이 했던 말은 평생의 저주가 되어 의현을 괴롭힐 것이다. 미래를 볼 줄 안다고? 그럼 지금 이 상황도 그는 알고 있었을까?

“어이가 없지. 신의 대척점에 선 자가 나라니.”

“…….”

“재이야, 나 죽이지 마.”

“…….”

“제발…….”

의현은 제 손으로 정재이의 눈을 가렸다.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가 완전히 가려지고, 의현은 그제야 숨을 내뱉었다.

교육의 성과는 착실히 나타났다. 글도 못 읽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정재이는 어느샌가 동화책 정도는 따라 읽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사이 권중섭 후원 저택의 인원은 하나에서 셋으로 늘었다. 나머지 둘은 권중섭이 직접 데리고 온 애들로 IQ 테스트에서 영재 정도의 수치가 나왔다고 했다.

의현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같이 저택으로 달려가 정재이의 교육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애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었다. 겁먹은 표정으로 저택 안에서 잔뜩 주눅 들어 있던 정재이는 종일 의현의 하교 시간만 기다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즈음 권의현은 윤화 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사이비 교주는 윤화가 특수 능력자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의현은 윤화가 그 동네를 다 태운 죄로 수감 시설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 전에 윤화를 구출하고 싶었다.

“형아, 형아……!”

저택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정재이가 달려왔다. 의현은 익숙하게 정재이를 안아 들며, 읽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아버지께서는요?”

“새로 온 아이들과 식사하고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기자들도 왔겠죠?”

“예. 다섯 정도요.”

의현이 재이를 끔찍이 신경 쓴다고 생각하고 있는 선생은 권중섭과 있었던 일을 꽤나 잘 전해 주곤 했다.

“형아! 나 좀 봐 봐요. 재이!”

의현이 제게 관심을 주지 않자, 정재이는 몸을 들썩였다. 영양 부족으로 빼빼 말랐던 몸도 이젠 거의 정상 범주였다. 의현이 특수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한 손으로 안아 올리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재이도 같이 식사를 했나요?”

“아뇨. 장관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재이는 아직 밥 못 먹었어요. 안 그래도 지금 저녁 먹이려던 참이에요.”

선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의현은 그 말에 안도했다.

정재이는 차라리 권중섭의 눈에 안 드는 편이 나았다. 괜히 옛날 같은 꼴 보기 전에.

“도련님도 저녁 같이 드시겠어요?”

“아, 저는 시간이 좀…….”

“형! 형아! 같이 있자. 응? 같이!”

제게 관심을 주지 않아 죽상이던 정재이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윤화 관련 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팠는데, 며칠 안 남은 학교 시험에다가 정재이까지……. 그야말로 몸이 두 개여도 감당 불가능한 일정에 의현의 몸은 간절히 휴식을 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정재이가 원하는 대로 해야만 했으니까.

“그럴게요.”

“우와!”

어차피 당분간은 저택에 못 올 예정이었으니, 오늘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듯했다.

주방에 늘 상주하고 있는 유모는 바로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의현이 로비 소파에 가 앉자, 1층 애들이 나와 인사했다. 나이대가 비슷했기에 공통된 관심사를 끌어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형아 이거, 이거 봐요!”

“이게 뭐야?”

“이거는 형아고 이거는 재이! 여기는 바다고 이거는 아이스크림!”

정재이는 그새 2층에 뛰어 올라가 제가 그린 그림을 의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참 신기하다니까요, 의현 오빠만 오면 이렇게 난리인 게. 무슨 목줄 풀린 강아지 새끼처럼 굴잖아요. 우리끼리 있을 땐 한마디도 안 하는데.”

“그래?”

“말 걸어도 무시한다니까요? 자꾸 그러니까 우리도 잘 말을 안 걸게 되고. 아마 사람을 지독하게 가리는 모양이에요.”

1층 애들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의현은 재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바다에 가 본 적 없잖아. 어떻게 알고 그렸어?”

“책에 있어! 파랗고 크고 물고기도 있어! 반짝반짝 예쁘다고 선생님이…….”

정재이는 의현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조잘조잘 떠들었다. 바다는커녕 몇 개월째 이 집에서 못 나가고 있었지만, 정재이 본인은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의현은 재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저녁을 먹었다.

의현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재이는 미친 듯이 울었다.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부르트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선생이 재이의 몸을 안고 달래려고 애를 써도 불가항력이었다.

“며칠 못 올 거예요. 일이 겹쳐서.”

“재이를 어떡하죠? 지금도 이렇게 우는데…….”

이런 상황에 난감해진 건 의현이었다. 여기서 자고 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숨넘어가기 직전인 정재이를 두고 매몰차게 뒤도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재이야, 형 금방 올 거야.”

“아니야! 안니! 형아 안 와, 안 올 거야……!”

말이 안 통했다.

이제 막 말을 뗀 애랑 차분히 대화를 한다고 해서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의현은 한숨을 내쉬며 재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재이야, 형이 재이한테 거짓말한 적 없잖아. 그렇지?”

“으응…….”

“자꾸 울고 보채면 형 집에 못 가. 재이도 알지?”

잔뜩 열이 오른 얼굴을 의현의 손바닥에 비비며 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안녕, 하면서 인사해 줘야지.”

“안니, 아니야…….”

“하…….”

시간은 계속 갔고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의현은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재이에게 속삭였다.

“다음에 오면 같이 바다 가자. 약속!”

“바다?”

“그래. 재이가 책에서 바다 봤다고 했잖아. 가서 진짜로 보면 깜짝 놀랄걸?”

정재이는 고민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표정에 다 드러났다. 이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 것이라고 의현은 확신했다.

“……네.”

“그래. 우리 재이 말도 잘 듣고 예쁘다.”

의현은 재이의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고 빠르게 현관을 벗어났다.

선생님 품에 안겨 있던 정재이는 후다닥 뛰어 2층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세단에 올라타는 무표정한 의현이 보였다.

“선생님, 형아는 뭘 좋아해요?”

“글쎄. 그건 선생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예쁜 걸 좋아하겠지?”

“예쁜 거……?”

재이가 작게 중얼거리자, 선생님은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형아는 재이도 좋아할 거야. 재이는 예쁘니까.”

“맞아! 형아가 재이 예쁘다고 했어!”

선생님의 말에 힘을 얻은 듯 정재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다! 바다에 간다고 했어요! 의현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신이 난 재이를 보며 선생님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애착 형성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아무래도 보육원 환경 탓이겠지? 뭐, 아직까진 가시적인 문제가 없으니까…….’

“재이야, 계단에서 뛰면 넘어져!”

다음 번 의현에게 올릴 ‘정재이 행동 보고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재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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