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3/14)

주인집 할머니는 종종 말버릇처럼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고 했다. 좋은 날이 오기 전까지 인생은 참고 살아 볼 만하다고. 할머니 말씀이 옳았다.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강 대표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보호자가 아닌 애인으로서.

살아 있길 잘했다.

* * *

봄이 왔다. 봄이 와도 나는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이제는 낡은 패딩을 덮고 자지 않아도 되었고, 겨울 동안 얼어붙었던 수도가 녹아 수도세가 많이 나오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그 일이 전생의 일처럼 아주 흐릿하고 가물가물하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주위를 둘러봤다. 캠퍼스는 시끌벅적했다. 대형 강의 하나가 끝나서 그런지 경영관 앞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학 생활은 고등학교 생활과는 사뭇 다른 결이었다. 모두들 서로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같은 과 사람들과 전부 알고 지낼 수는 없었다. 반 애들과 한 교실에 부대끼며 8시간 내내 강제적으로 묶여 있던 때와는 달랐다. 그래도 본질은 똑같았다. 마음 맞는 몇몇 동기들과 같이 다니거나 아니면 두루두루 사람들의 입에 올라가는 사람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

“이후에 강의 있으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랑 밥 먹으러 가실래요?”

코끝에 시원한 향수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강 대표가 자주 쓰는 향이다. 물론 강 대표의 향은 좀 더 시원하고 짙지만.

얼추 비슷한 향을 쫓아 고개를 돌리니, 언뜻 스쳐 지나가면서 본 얼굴들이 서 있었다. 동기인 것 같았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동기는 아닌 것 같았다. 스무 살 동기라기에는 신입생 특유의 붕 뜬 느낌이 없었다.

“어쩌지. 약속이 있어서.”

가운데 서 있는 남자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아.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다 강 대표의 향 때문이다. 밤낮으로 그의 향을 맡아댄 바람에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기분이다. 나는 안 쳐다본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 그래요?”

아쉬워하는 목소리들이 곧 이어졌다.

“다음에 너희 동기들이랑 다 같이 가자.”

“진짜요? 와. 꼭이요.”

“그래. 다음에 보자.”

나는 머쓱한 기분에 손목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언제 오는 거야. 허공을 응시하는데, 저 멀리서 기다리던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 백지오!”

“지오. 지오.”

같은 과 동기이자 수업 대부분이 겹치는 이민주와 오인범이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어젯밤에도 제대로 달린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내 뒤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했다.

“어? 안녕하세요. 선배.”

“안녕하세요.”

“응. 안녕.”

두 사람은 이름 모를 선배와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도 덩달아 꾸벅 인사를 했다. 찰나의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친구는 처음 보네. 이름이?”

“얘는 백지오예요, 선배.”

이민주가 나를 끌어당겨 소개했다.

“아. 지오구나. 나는 정이결이야.”

“네. 안녕하세요.”

역시 동기가 아니었다. 정이결… 2학년 과대. OT 공지 문자를 보내 준 사람이다.

“OT 안 왔었지?”

“네.”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이더라. 봤으면 분명 기억했을 텐데.”

정이결 선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향이 짙어진다. 아, 향수… 저 사람이었구나. 큰 키에 부담스럽지 않게 생긴 얼굴. 정면으로 마주치니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닐 것 같은 상이기는 했다. 그뿐이었다. 대학교에는 생각보다 ‘엄청 잘생긴 사람’이 드물었다. 어쩌면 매일 밤 강 대표의 얼굴을 보면서 독보적인 잘생김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언제 한번 밥 같이 먹자, 지오야.”

“네. 안녕히 가세요.”

인사치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결 선배는 뒤를 돌아 걸어갔다. 가는 길 내내 알아보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걸어가다 멈추고, 걸어가다 멈추고 인사를 하느라 바빠 보였다. 인간관계가 좁다 못해 한정되어 있는 나로서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오인범이 물었다.

“정이결 선배 한 번도 본 적 없어?”

“응.”

“와. 정이결을 본 적 없단 말이야? 저 선배 유명하잖아. 소생 그룹 둘째 아들이라고. 거기에 과대에 학생회에. 집안 좋지, 스펙 좋지,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백지오가 누구한테 관심 있는 거 봤냐. 지 세상에 사는 애한테.”

오인범이 깜짝 놀란 얼굴로 정이결 선배에 대해 줄줄이 나열하자, 이민주가 얄밉게 거들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이민주가 “뭐. 사실이잖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나는 저렇게 완벽한 사람은 별로야.”

“왜?”

“내가 오점이 될 수도 있잖아.”

이민주가 키득거렸다. 오인범이 적극 수긍하다가 이민주에게 한 대 맞았다. 하지만 나는 이민주의 생각에 깊게 공감했다.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강 대표 곁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곤 한다.

강 대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학교를 다니는 것도 있지만, 내가 열심히 살지 않으면 강 대표가 언제 또다시 내 곁을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의 다정함이 나를 살렸다. 숨을 쉬고 싶지 않을 때, 그냥 사라지고 싶을 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버리고 싶은 순간순간마다 잔혹한 다정함이 나를 살렸다. 한번 맛본 다정함을 나는 평생 죽을 때까지 끊지 못할 것이다. 중독된 것처럼. 만약 그 다정함이 한순간에 끊겨 버린다면….

끔찍한 상상에 미간을 좁히는데, 나를 힐끔 쳐다본 이민주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그래서 뭐 마시지?”

“어제 못 마신 막걸리 콜? 백지오, 너는?”

“밥 먹는다며.”

“에이. 밥이랑 술이랑 같이 가는 거지.”

오인범이 어깨동무를 해 왔다.

“빠지면 안 돼. 어제도 빠졌잖아.”

“맞아. 백지오가 와야지. 백지오 없으면 무슨 재미로 마시나.”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 운을 뗐다.

“왜. 어제 감당 안 됐어?”

“어헝. 죽을 뻔. 너 없으니까 둘 다 고삐 풀렸어.”

오인범이 내 어깨에 기대어 울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럴 줄 알았다. 다 같이 먹고 마시고 떠드는 건 좋지만 주량의 차이 때문에 항상 그들을 데려다주는 건 내 몫이었다. 물론 둘 다 학교 앞에서 자취하니까 퍽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강 대표는 탐탁지 않아 했다. 정확히는 ‘술독에 빠진 애새끼들’이라고 했다.

이민주가 키득거리며 오인범을 가리켰다.

“야. 오인범 어제 지하 주차장이 지 방인줄 알고 신발 벗고 잤대잖아. 일어나니까 자동차 타이어가 눈앞에 보이더래. 네가 하루라도 빠지면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없어. 쟤 보여? 입 돌아간 거.”

멀쩡했다. 어이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자, 이민주가 말을 이었다.

“입 돌아간 거에는 뭐다? 술이 약이다.”

“술이 약이다.”

‘술이이이이’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오인범은 마치 노래를 부르듯 음을 넣어 똑같은 박자로 뱉었다. 강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사람은 술통에 담가 놔도 입만 둥둥 떠다닐 것 같았다. 그래도 두 사람 덕분에 학교 생활은 재밌다. 훨씬. 밥을 혼자 먹는 일도 없었고, 수업도 같이 듣고, 전공 수업이 다 끝난 후에는 카페도 가고, 술집도 가기도 했다. 주로 카페는 술집으로 가기 전 스쳐 지나가는 코스긴 했지만.

“가자. 가자.”

“아. 고고.”

“그래. 가.”

오인범이 환호성을 질렀다.

늦게 들어가요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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