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앓았다.
뼈 마디 마디가 욱신거리고, 온몸이 달달 떨렸다. 분명 이불 안은 따뜻한데, 몸이 추워서 자꾸만 잠에서 깼다.
악몽은 꾸지 않았다. 현실이 악몽이었다.
“…으.”
오한에 몸을 바르르 떨자, 서늘한 무언가가 내 이마를 스치듯 지나간다. 축축한 물수건인 것 같았다. 땀을 닦아 내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감촉에 나는 두 눈을 느리게 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어둠 속에서 커다란 형체가 보인다. 익숙한 실루엣.
직감적으로 강 대표라는 걸 알았다. 아저씨. 부르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누워 있는데 세상이 자꾸만 빙빙 돈다. 정신이 아득한 저 너머로 끌려 내려간다.
“지오야. 아저씨가… 미안해.”
희미하게 잠긴 음성이 들린 것 같기도 하다. 환청인 것 같았다. 늘 단단한 강 대표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간간이 눈을 뜰 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강 대표가 옆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때마다, 강 대표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내 손을 꽉 잡아 주며 수면등을 켜 줬다.
“좀 어때.”
“처음보다, 괜찮아요.”
“아가.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지.”
“조금… 아픈 것 같아요.”
나는 바짝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저 아파요.”
직접적으로 아프다고 한 건 처음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아프다고 말한 건.
사람이 아프면 버릴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 강 대표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아픈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가지는 않을 거다.
나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많이 아파요.”
강 대표와 맞잡은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힘을 줬더니, 강 대표가 표정을 숨기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각도 탓일까, 은은한 조명 아래 드러난 뚜렷한 이목구비 위로 명암이 드리워진다. 그가 내 손을 양손으로 단단하게 잡아 감쌌다.
“아저씨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더 자.”
내가 원하던 말이다. 부드러운 속삭임에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불현듯,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습관처럼 옆을 확인했다.
“…어?”
강 대표가 없다. 나는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홱홱 돌아보았다. 반쯤 채워진 물병, 물수건, 약봉지… 모든 게 그대로 있는데 강 대표만 없다.
…어디 갔지?
나는 최대한 빠르게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무릎이 콕콕 쑤셨다. 개의치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 없다. 거실로 향했다. 역시 강 대표는 없었다.
…2층, 2층에 있나?
계단으로 향하려는데, 현관문 도어록이 삐빅,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심장이 쿵 떨어진다. 나는 허겁지겁 현관문을 향해 달렸다.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히니, 저 멀리 살짝 열린 대문 앞에 서 있는 강 대표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 어디 가요!”
나는 황급히 달려갔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인기척을 느낀 강 대표가 슬쩍 뒤를 돈다. 나는 그사이, 강 대표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아….”
강 대표가 작은 침음을 뱉는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몸도 안 좋은 게 맨발로 뛰어나와.”
“…….”
“발 시리게.”
나는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제야 차가운 잔디의 촉감이 느껴졌다. 강 대표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신발을 신는 걸 깜빡했다.
…약간 미친놈처럼 보였을 것 같다. 뭐라고 둘러대지?
고민하는 도중에 강 대표가 내게 손을 불쑥 내민다.
“이거 받으려고 잠깐 나온 거야.”
그의 손에는 불룩한 편의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안에는 온갖 종류의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너. 좋아하잖아, 단 거.”
나는 멍청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춥다. 들어가자.”
강 대표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그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화장실로 곧장 직행한 그가 욕조 끄트머리에 나를 앉혔다.
“아이고… 강아지, 강아지 했더니 진짜 강아지가 됐네. 발 새까매진 거 봐라.”
나는 부끄러움에 발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마땅히 숨길 곳이 없었다.
“…제가 씻을 수 있어요.”
“가만히 있어.”
강 대표의 큼지막한 손이 부드럽게 내 발을 감싼다. 풍성한 비누 거품이 따뜻한 물에 흘러 내려간다. 바싹 마른 수건으로 내 발을 감싸 물기를 닦아 내던 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아가야. 아저씨 어디 안 간다.”
“…….”
“네가 가라고 해도 안 갈 테니까…….”
그가 드물게 말꼬리를 흐린다.
“미안.”
한쪽 무릎을 굽힌 강 대표가 나를 올려다본다.
“아저씨가 그날… 너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버린 거 아니야. 내가 널 어떻게 버려.”
“…….”
“내가 네 인생 망칠까 봐 겁나서 그랬어.”
나는 울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는 걸 귀엽게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주 울면 결국 질리는 법이다. 마음이 매섭게 요동친다. 강 대표에게 모든 것을 묻고 싶다가도,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 묻어 버리고 넘어가고 싶다. 사실 모른 척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 아빠에 대한 행방을 묻고 싶을 때마다, 나는 강 대표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어 왔다. 못 본 척 외면하고, 그냥 묻고 넘어간 결과가 어땠는가.
강 대표를 의심하고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다가 차일 뻔했다—물론 시작도 안 했으니 차일 일도 없지만—어쨌든 중요한 건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그게 껄끄러운 주제일지라도. 다시는 강 대표를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나는 용기를 내어 말한다.
“저 이제 다 알아요. 아저씨가 나한테 거짓말한 이유, 나한테 화냈던 이유… 다요.”
강 대표가 멈칫했다.
“…왜 말 안 했어요? 아저씨는 손해 같은 거 안 본다면서요.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요.”
“그러게. 평생 안 하던 짓을 했더니 역시 탈이 나네.”
“장난치지 말고요.”
“장난치는 거 아니야.”
그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도 애비라고, 너 버리고 갔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으로 끙끙대는 너한테.”
분노로 들끓는 음성이었다.
“그런 너한테, 사실 버림 받은 게 아니라 팔린 거라고 말하면. 여린 네가 버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나는 여리지 않다. 아빠가 나를 팔아넘긴 거라는 걸 깨닫자마자, 아빠에게 죽은 사람이라고 여길 거라 했다. 죽기 싫으면 도망가라고 협박까지 했다. 정말 여린 사람은 살아 있는 아빠를 죽은 사람 취급하거나, 협박하지 못한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제야 강 대표가 왜 내게 거짓말을 할 때 눈을 쳐다보지 않았는지 이해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속인다는 느낌은 끔찍할 정도로 최악이다.
“아저씨가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저는 아저씨 생각처럼 그렇게 여리지 않아요.”
“…….”
“사실은요. 아빠가 죽게 해 달라고, 사라지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빌었어요. 십 년 넘게 빌었어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근데 진짜 사라져 버리니까… 눈앞에 없으니까….”
매일 밤마다 죄책감에 쌓인 괴물이 되어 스스로를 탓한 것이 억울해서, 헛되이 낭비한 마음이 아까워서 나는 결국 헐떡인다.
“아, 아저씨가 저 많이 좋아해 주는 거 알면서… 더 사랑해 달라고 몰아붙여서 죄송해요. 불안, 불안해서 그랬어요. 아저씨 그런 사람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아니. 그런 새끼 맞아.”
강 대표가 정정했다.
“뺏고, 뜯고, 짓밟고 그렇게 쌓은 돈으로 두 다리 쭉 뻗고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 거야.”
“…….”
“근데… 네가 나타났잖아, 지오야.”
강 대표가 내 손을 잡았다.
“아저씨가 잘못했어. 너한테 거짓말한 거, 너 속인 거, 말 안 하고 넘어간 거.”
나는 강 대표를 똑바로 응시했다. 새까만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온전히 담겨 있다.
“근데 지오야. 나는 다시 돌아가라 해도 또 널 속일 거고, 또 널 데리고 올 거야.”
“…….”
“나는 그딴 방법밖에 몰라. 대신 다음엔 좀 더 치밀하게 굴겠지. 네가 상처 받지 않도록.”
강 대표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아가야. 아저씨 한 번만 봐줘. 응? 아프지 마, 제발.”
나는 대답 대신 맞잡은 강 대표의 손을 끌어당겨 꽉 끌어안았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온 사람들은 행복한 장면에서 왜 눈물을 흘리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나는 이제 그 누구보다 잘 알 것 같다. 사람이 너무 행복하면 눈물이 난다는 걸.
* * *
그렇게 나는 일주일을 더 앓았다.
보통은 삼 일 정도만 앓고 나면 금방 괜찮아지는데… 이번에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평소보다 더 오래 간 것 같았다.
그사이, 예전에 방문했던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다시 진찰을 하러 왔다가, 침대 옆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강 대표에게 <환자에게 꼭 지켜야 할 10가지 수칙>을 전달하고 갔다.
‘이번엔 꼭 지키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강 대표는 지나가는 사람을 다섯 갈래로 찢어 죽일 것 같은 험악한 표정으로 10가지 수칙을 받아 적었고, 그대로 이행했다.
그의 극진한 간호 아래, 나는 천천히 컨디션을 회복했다.
“자. 먹자.”
처음에 밍밍하고 묽은 죽으로 시작한 환자 식단은 저염식으로 진화되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직접 죽을 떠먹여 주던 것이 그사이 완전히 습관으로 자리 잡힌 건지, 강 대표는 나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밥을 떠먹였다. 고슬고슬한 밥알이 가득한 숟가락이 입가 주변에 올 때마다, 나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저도… 숟가락 정도는 들 수 있는데요.”
“못 들게 해 줘?”
“아니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장난스러운 말투지만…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른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밍밍한 죽보다는 훨씬 맛있는 쌀밥을 꿀꺽 삼키며, 숟가락을 바삐 움직여 밥 위에 반찬을 얹어 주는 강 대표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저씨도 먹어요.”
“너 다 먹고.”
나는 강 대표의 단단한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숟가락을 내려놓은 강 대표가 이번에는 내 앞머리를 슬쩍 쓸어올리며 이마에 손을 얹는다.
“저 이제 열 안 나요.”
“이제 안 아파?”
안 아프다고 하면, 이제… 무릎 위에 못 앉나? 직접 떠먹여 주는 건 좀 그렇지만, 무릎 위에 앉는 건 좋은 것 같은데.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강 대표는 내 침묵을 부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길쭉한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훑으며 느리게 내려온다. 멍이 든 뺨을 매만지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강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쯧, 작게 혀를 찼다.
“금이야 옥이야 아껴 줘도 모자랄 판에….”
강 대표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슬쩍 강 대표의 눈치를 보았다. 결국 강 대표의 짙은 눈썹이 구겨진다.
“나쁜 버릇 다 고쳐놨더니 죄다 돌아왔네.”
“제가 뭘요.”
나는 발뺌하며 강 대표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었다. 강 대표가 못마땅한 기색과 상반되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뒤통수를 거듭 쓸어내린다. 열은 떨어졌지만 아침에 먹은 약 기운 때문인지, 방금 배를 채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강 대표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나른하다.
“아저씨… 저 졸려요.”
뺨이 짓눌리는 바람에, 발음이 새어 나가 바보처럼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강 대표가 픽 웃었다.
“웃지 마요.”
역시 발음이 샜다. 강 대표의 몸이 다시 한번 잘게 떨린다. 덩달아 내 얼굴이, 내 마음이 떨렸다.
한참 동안 웃던 강 대표가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럼 같이 잘까?”
나는 황급히 얼굴을 떼어 냈다. 목덜미가 홧홧해지는 기분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저런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가 있지? 막상 나한테는 ‘그런’ 식으로 손도 안 대면서.
나는 경고했다.
“진짜로 잘 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럼 가짜로 자?”
우리… 진짜 자나? 왜? 아니. 나야 좋지만 이렇게 갑자기?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아직 안 됐는데.
강 대표가 시원하게 눈매를 접어 환하게 웃었다.
“우리 아가가 이제 별로 안 아프긴 한가 보네. 머리에 딴생각만 가득 차 있고.”
나는 황급히 발뺌했다.
“저는… 저는 그런 생각 안 했는데요. 전 환자인데요.”
“그래.”
강 대표가 전혀 믿지 않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환자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빨리 낫지.”
이상한 생각 하면 기운 다 빠진다, 너. 강 대표가 덧붙였다. 얄미울 정도로 능글맞은 말투에 나는 강 대표의 가슴팍을 손으로 쭉 밀어냈다. 빠른 속도로 내 손을 낚아챈 강 대표가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뗀다.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낫는 데만 집중해. 학교는 걱정하지 말고.”
아… 학교.
나는 웃음을 잃었다.
학교에 안 간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그뿐인가. 지난 일주일간, 나는 의식적으로 학교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교무실, 복도, 운동장… 어디를 떠올려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담임은 박 변호사 얼굴도 보고, 대화도 했는데. 내가 담임한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실종되면 책임질 거냐고도 물어봤는데… 괜찮겠지? 지금까지 나한테 연락이 오지 않은 걸 보니, 강 대표가 알아서 잘 마무리했을 테지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박 변호사는 어떻게 됐어요?”
“해고했지.”
혹시… 세상으로부터 해고했다는 뜻일까? 나는 범상치 않은 강 대표의 표정을 살피며 가능성을 고려했다. 해고했으니, 더 이상 ‘대표님’이 아니라 ‘깡패 새끼’로서 묻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학교까지 찾아가게 만들어서.”
강 대표가 말했다.
“다 아저씨 잘못이야.”
“왜 아저씨 잘못이에요. 박 변호사 잘못이죠.”
“갈 수 있는 곳은 모조리 쥐약을 쳐 뒀는데, 그 씹새끼가 거품 물고 교무실 안까지 들어갈 줄은 예상 못 했으니까. 그것도…….”
백철웅을 데리고. 뒷말은 듣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나도 박 변호사가 죽은 줄 알았던 아빠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학교로.
나는 애써 아빠 생각을 하지 않으려 질문을 뱉는다.
“근데 박 변호사 아저씨는… 아저씨 부하 아니었어요? 막, 부하가 배신하고 그래도 돼요…?”
“원래 사회에서 만난 관계는 믿음이 아니라 이익으로 따지는 거야. 게다가 이 바닥에서 방심하면 뒤통수 얻어맞는 건 당연한 거고. 애초에 그런 새끼들만 모인 곳이니까. 돈을 믿지, 사람을 믿진 않거든.”
“…….”
“너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노닥거리는 사이에 된통 당한 거지, 뭐.”
강 대표가 다시 한번 내 멍든 뺨을 살살 매만진다. 곧 깨질 도자기를 매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근데 그 대가를, 네가 감당하게 만들었다는 게, 화가 나고… 죄스러워.”
강 대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신 그럴 일 없어. 아저씨가 약속할게.”
“…….”
“그러니까 너도… 네 인생 쉽게 버리지 마. 남의 인생 대신 살아 주지 말고. 너답게만 살아. 알았어?”
강 대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알겠어요.” 하며 강 대표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꼭 걸고 흔들었다. 강 대표가 손가락을 빼내려고 할 때, 나는 새끼손가락에 더 힘을 주어 잡았다. 강 대표가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왜.” 했다.
나는 망설이다 말했다.
“아저씨도… 가출하지 마세요.”
“뭐?”
“어른이 그러면 보기 흉해요.”
강 대표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약속해요. 저도 화난다고 바로 안 몰아붙이고, 아저씨 화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가출하면 안 돼요.”
“그래. 우리 아가 무서워서 어디 나가겠나.”
“예뻐가지고. 강 대표가 내 뺨에 짧게 뽀뽀했다. 나는 ‘예쁘다’라는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강 대표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한테 제대로 얻어터져서 얼굴도, 몸도 다 멍으로 얼룩덜룩한데… 예쁠 리가 없는데. 굳이 나 듣기 좋으라고 거짓말 안 해 줘도 되는데. 그런 말은 다 낫고 나서… 나중에 많이 해 주면 안 되나?
“왜.”
“…네?”
“무슨 생각 해.”
나는 ‘예쁘다’라는 말은 나중에 아주 많이 듣고 싶다고, 강 대표에게 사실대로 말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
“아무 생각 안 하는데요.”
“거짓말하지.”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강 대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가야. 딱 한 번만 제대로 짚고 가자. 불편해도 참아.”
“네?”
“너. 혹시 백철웅 때문에 그래?”
“아니요?”
“아직도 네 아버지 대신 빚 전부 다 갚겠다, 그런 생각이야? 그래?”
“어, 그건 아닌데….”
“근데.”
나는 머뭇거렸다.
“그래도 아저씨가 저한테 투자한 금액은 갚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능력 키워서 얼른 돈 갚으라고 해 준 거긴 하지만… 일단은 저한테 투자해 준 거니까…… 게다가 우린 따로 계약도 했고….”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말을 뱉으면 뱉을수록 사나워지는 강 대표의 표정 때문이었다.
아빠의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아빠가 돌아왔으니 이제 본인이 진 빚은 본인이 알아서 갚으면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건 아빠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게 천하의 둘도 없는 ‘쌍노무 새끼’처럼 들릴지라도 상관없다. 대신에 나는 강 대표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지원 받은 돈만, 내 몫만 깔끔하게 갚으면 된다.
나는 아빠랑 달라야 한다. 강 대표에게 빚 같은 건 절대 지면 안 된다.
나는 곁눈질로 강 대표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강 대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린다. 눈치 보지 말라고 타박할 것 같았던 강 대표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거실이 점점 멀어진다. 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이제 자러 가요?”
나는 부러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장난스럽게 물었다. 강 대표는 대꾸하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왜… 대답 안 하지? 내가 또 뭘… 잘못 말했나? 딱히 잘못한 건 없는데. 내 몫을 갚는다는 게 뭐 어때서?
나는 이제 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강 대표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다. 그래서 더더욱 내 몫을 갚아야 한다. 책임감 없이 나에게 모든 것을 미뤄 두고 도망간 아빠와는 달리.
만약 내가 아빠와 똑같은 짓을 하면… 강 대표는 자연스레 본인에게 손해를 입힌 아빠를 떠올릴 거다. 그건 내가 어쩔 도리가 없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연상해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마치 아빠가 나를 마주할 때마다, 나를 보며 도망간 엄마를 떠올렸던 것처럼.
지금이야 강 대표도 나를 많이 사랑하지만, 나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언젠간 나를 성가신 존재처럼 여길지 모르는 일이다.
“…….”
“…….”
여전히 불안한 침묵이 흐른다.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강 대표가 나를 내려다본다. 시선은 여전히 내 뺨에 고정되어 있다. 시선을 돌리면, 이번에는 진짜로 싫어할 것 같아서… 나는 꾹 참았다.
“하….”
강 대표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옷장을 벌컥 열어젖힌다. 옷장 내부 서랍장을 뒤지는 손이 꽤나 자연스럽다.
아니. 내 비밀 장소를… 저렇게 다 알고 있다고?
나는 잠시 불안을 잊고 큰 충격에 빠졌다. 아빠의 협박 이후, 나로 인해 강 대표가 발목 잡힐 일이 없도록 계약서를 비밀 장소에 꽁꽁 숨겨 뒀었다. 정확하게 세 번째 서랍장 천장에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둔 계약서를, 강 대표는 어렵지 않게 바로 찾아냈다. 나는 다시 한번 강 대표가 무시무시한 사채업자라는 것을 느낀다.
강 대표가 푸른 잉크가 난잡하게 물들어 있는 계약서 종이를 흔들어 보인다.
“아가야. 네 눈엔 이게 계약서로 보여?”
“…계약서잖아요.”
“그래.”
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뭐 하는 거지? 의문도 잠시, 찌이익, 종이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강 대표가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찢어발겼다.
“아… 아저씨!”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한 번 더 찢는다.
“세상에 어떤 계약서를 이따위로 작성해. 이 종이짝 너덜너덜한 거 좀 봐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왜, 왜… 그럼 애초에 왜 작성했어요.”
“처음 보는 깡패 새끼한테 술집에서 일하긴 싫고, 교복 구해다 주면 깽값 사기 치는 건 생각해 볼 거라고 하는 애한테 방을 그냥 내준다고 하면 선뜻 받아먹겠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강 대표가 그것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처음부터 내가 너한테 그냥 준 거야. 전부. 너한테 받을 돈 없어.”
“그럼… 아저씨 돈은 누가 돌려줘요.”
“아저씨는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단다, 아가야. 나쁜 짓을 아주 많이 했거든.”
‘나쁜 짓’에 힘을 주어 말한 강 대표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당겨 웃었다. 양 손바닥을 털어 쓰레기통에 ‘계약서’였던 종잇조각을 버린 강 대표가 침대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내 뒤통수를 끌어당겨 나를 끌어안았다.
“백지오.”
쿵, 쿵, 쿵.
그의 숨결만큼이나 거친 심장 박동 소리가 느껴진다.
“너는 너야.”
“…….”
“너는 백철웅이 아니야.”
나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오야.
“…….”
“백철웅 아들 백지오 말고… 그냥, 백지오로 나한테 와.”
강 대표가 속삭였다.
“기다릴게.”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저씨, 저는….”
“지오야.”
“…….”
“이건 네가 기회를 주는 거야, 나한테.”
강 대표가 낮게 읊조렸다.
“내가 너한테 한 번만, 제대로 된 기회를 달라고 비는 거야.”
“…….”
“잘 생각해 봐, 아가.”
눈물이 핑 돌 것 같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 대표의 품에 얼굴을 푹 묻었다. 강 대표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내 등을 쓸어내려 줬다.
* * *
또 다른 일주일이 흘렀다. 강 대표와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침대 위에서 잠에 드는, 그런 소소한 날들의 반복이 이어졌다. 내가 꿈에 그리던 강 대표와의 ‘어른의 연애’였다.
강 대표는 예전과 달리 더 이상 내게 학교에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내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출석 관련 서류는 얼마든지 준비해 줄 수 있으니, 학교는 내가 가고 싶을 때 가라고 했다. 그것도 싫으면 검정고시를 보면 되는 일이니 큰 걱정 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마치 모든 것을 내 선택에 맡기겠다는 듯이.
그날, 그 말들의 연장선일까?
‘백철웅 아들 백지오 말고… 그냥, 백지오로 나한테 와.’
‘…….’
‘기다릴게.’
그런 말들은 난생처음 들어봤다. 나를 나 자체로 인정해 주겠다는 말, 나를 기다리겠다는 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내 인생에서, 나는 종종 이름이 없었다. ‘그 빚쟁이 새끼 아들’ 혹은 ‘그 집 나간 여자 아들’ 그리고 다양한 헛소문의 ‘그 애’였다.
그런 나에게, 강 대표는 콕 집어서 ‘백지오’를 기다리겠다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내 인생에서 기다림은 언제나 내 몫이었는데….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이런 말을 들을 기회가 있을까? 이렇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본 건 많다. 그런 사랑 이야기는 드물다.
강 대표는 역시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없는 거다.
지금까지는 나만 강 대표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감히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강 대표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 강 대표가 내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처럼, 나도 강 대표에게 뭐든지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강 대표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변명하고 싶지 않다. 내 인생에 변명들을 핑계로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다. 달력에 붉은 펜으로 표시를 하고, 해의 마지막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다. 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남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고 도망간 아빠와 달리.
‘내가 너한테 한 번만, 제대로 된 기회를 달라고 비는 거야.’
나는 진짜 어른이 되어서, 강 대표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럼 일단…….”
머릿속으로 우선순위를 세우던 도중이었다.
띠띠띠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나는 소파 위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으로 달려 나갔다. 강 대표는 이미 내가 뛰쳐나올 걸 예상한 사람처럼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저씨!”
나는 신발을 벗지도 못한 강 대표의 품으로 온몸을 던졌다. 강 대표가 어렵지 않게 나를 번쩍 안아 든다. 뒤로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기다렸어요.”
나는 강 대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양손으로 내 허리를 감쌌던 강 대표가 손을 옮겨 내 엉덩이를 받쳐 올린다. 나는 소곤거렸다.
“저 잘 뛰죠. 이제 다 나았어요.”
“응. 집 안 다 무너지는 줄 알았다.”
“뭐요?”
내 반응에 작게 웃은 강 대표가 특유의 능글맞은 음성으로 받아친다.
“아이고… 이걸 누가 데려가나.”
“아저씨가요.”
“그래?”
“네.”
“그래야지, 뭐.”
강 대표가 내 볼에 짧게 뽀뽀를 했다.
“예뻐가지고.”
조금… 부끄럽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강 대표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강 대표가 천천히 움직이며, 거실로 향했다.
“오늘 악수하고 사무실도 잠깐 들렀다 왔어. 진행 중인 사업 현황 체크 좀 하느라.”
어느 순간부터 강 대표는 자신이 왜 늦는지 혹은 늦었다면 늦은 이유에 대해 꼬박꼬박 말해 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미지의 불안에 떨 틈이 없었다. 강 대표가 집에 없어도, 미친놈처럼 맨발로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됐다. 신경은 엄청 쓰이기는 하지만.
강 대표가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조금밖에 안 기다렸어요. 저도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정신없었거든요.”
강 대표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뭐 했는데.”
“그냥 이것저것 생각이요.”
나는 강 대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강 대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에 소파 위에 나를 내려놓고, 홍삼 스틱을 가지고 왔다.
꼭 견주들이 외출을 하고 오면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듯이, 강 대표는 외출을 하고 오면 나에게 홍삼 스틱을 줬다. 기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체력을 회복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군말 없이 홍삼 스틱을 쪽쪽 빨며 강 대표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모든 것을 훤히 드러내는 인조적인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잘생긴 이마와 매끈하게 이어지는 높은 콧대가 두드러진다. 빨리 어른이 돼야지. 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내 시선을 감지한 강 대표가 “왜. 아저씨 얼굴 뚫린다.” 했다.
“아저씨. 저 학교 가려고요.”
“그래? 우리 아가가 드디어 졸업할 마음이 생겼나 봐?”
누가 들으면 인생 막장을 달리는 자퇴 준비생인 줄 알 거다. 나는 반박했다.
“원래도 졸업은 하려고 했어요. 그게 아니라, 저… 대학도 갈 거예요.”
강 대표가 힘들어할 때 내가 의지가 되려면… 일단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걸로는 부족할 것 같다. 수능을 잘 봐서, 좋은 대학교에 가야 한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미래를 가꿔 놔야 한다. 강 대표가 스스로를 낮추게 만드는 ‘깡패 새끼’ 짓을 하지 않아도, 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미래를.
강 대표는 내가 생각보다 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강 대표는 나를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내가 먹여 살려서… 강 대표가 나 없이는 못 살게 만들 거다.
“좋은 대학 갈 거예요.”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 대표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우리 아가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발끈했다.
“원래 제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다 잘해 왔거든요?”
“누가 뭐래?”
“지금까지는… 타이밍이 안 좋아서. 아빠가 죽은 줄 알았다가, 아빠가 사실 살아 있었고… 나를 팔아넘겼다는 걸 안 지 얼마 안 돼서 잠시 정신이 없던 거였고요. 그때, 아저씨한테 고등학교 졸업장 필요 없다고 했던 건….”
“…….”
“제가… 사랑 받은 게 처음이라서, 이렇게 사랑 받은 게 태어나서 처음이라서 들떠서…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했었어요. 졸업장 필요 없다고 하면… 아저씨가 평생 저랑 함께할 거라고 은연중에 믿었던 것 같아요.”
강 대표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강 대표의 손을 꽉 잡았다.
“전 이제 아저씨가 저 넘치도록 사랑해 주는 거 다 알아요.”
“…….”
“그때, 저 위해서 그런 말 해 준 것도 다 알고요.”
“아가.”
“저는요.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아빠처럼 책임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아저씨가 힘들 때, 슬플 때, 외로울 때… 언제든지 제 어깨에 기대어 쉴 수 있도록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제 새로운 꿈이에요. 아저씨한테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되는 거요. 아저씨가 나한테 좋은 사람인 것처럼요.”
나는 씩 웃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빨리 커서 아저씨한테 갈게요.”
입술을 달싹이던 강 대표가 결국 말없이 내 손을 끌어당겼다. 특유의 시원한 체향이 느껴짐과 동시에 내 얼굴이 단단한 가슴팍에 푹 묻힌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쓸어내리고, 반대쪽은 허리를 옥죄이듯 끌어안는다.
“아가.”
“네.”
“이렇게 멋있는 말만 해서… 어쩌려고 그래.”
가둬 두고 싶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작게 웃었다.
“농담 아닌데….”
나는 웃음을 멈췄다. 강 대표가 곧장 덧붙였다.
“장난이야.”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나도 조금 혹할 뻔했다. 나는 강 대표의 가슴팍에 뺨을 두어 번 문지르다가 마음을 다잡고 준비한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아저씨… 저 따로 살려고요.”
“뭐?”
강 대표가 나를 가슴팍에서 팍 떼어 냈다. 짙은 눈썹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애가 잘 나가다가 갑자기 왜 삐딱선을 타지? 하는 표정이었다.
“어딜, 어딜 따로 살아.”
“기다려 주신다고 했잖아요.”
“나는 너 어른 되는 걸 기다린다고 했지. 집 나간 가출 청소년 기다린다고는 안 했는데.”
사나운 기세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나한텐 가출하지 말라며… 혹시 아저씨 가출했다고 이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저씨. 저 수능 세 달도 안 남았는데요.”
“…….”
“아저씨가 제 옆에 있으면 집중 안 된단 말이에요. 신경 쓰여요. 안 들어오면 왜 안 들어오나, 들어오면 지금 뭐하나 궁금하고. 차라리 아예 멀리 떨어져 있으면 몰라도. 딱 세 달만요. 그것도 못 참아요?”
“수험생이라고 상전처럼 모시고 살았는데 무슨 고생을 하려고 집 놔두고 어딜 나가. 갈 곳도 없으면서.”
나는 강 대표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저 아저씨가 현금으로 준 용돈 다 모았어요. 밖에서 반년은 거뜬히 살 수 있어요. 월세랑 생활비랑 해서 다요.”
“야. 그건 내가 너 까까 사 먹으라 준 돈이지, 아저씨 까 버리라고 준 돈이 아니야.”
“아저씨… 요즘 과자 값 모르죠. 누가 과자 값으로 돈을 그렇게 많이 줘요.”
강 대표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저 기다려 주신다면서요.”
“…….”
“얼른 커서 아저씨가 좋아하는 백지오로 갈게요.”
하. 짧은 한숨을 뱉은 강 대표가 마른세수를 했다. 강 대표가 “내가 전생에 무슨 업보를 쌓아서… 아니지, 전생까지 갈 필요도 없지.” 하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물었다.
“그럼 허락하는 거죠?”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진지하게 되묻는다.
“너. 진짜 가야겠어?”
“네.”
“진짜?”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진짜 싫은데요. 아저씨랑 더 오래오래 붙어 있으려고 가는 거니까…… 보내 주세요.”
“우리 아가가 말을 너무 잘해서 가끔씩 열 받을 때가 있는데… 들어 보면 다 맞는 말이라 뭐라고 못 하겠네.”
강 대표가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나는 강 대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아저씨. 제가 한국대는 못 가도, 대학 꼭 합격할 테니까요. 대학 들어가면 아저씨 제가 먹여 살릴 거예요.”
“아이고… 든든하다.”
작게 탄식한 강 대표가 내 뒤통수를 느리게 쓸어내린다. 나의 착각일까, 그의 단단한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가야. 나는 네가 뭘 하든 간에 네 편이야. 내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
“기다릴게. 아저씨 시간은 다 네 거야. 그러니까 너무 늦게 오지는 마.”
나는 대답 대신 강 대표를 끌어안은 팔에 더 꽉 힘을 주었다. 쿵, 쿵, 쿵. 그의 불안정한 심장 소리에 안정을 얻은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강 대표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저씨. 제가요. 아저씨 정말 많이 사랑해요. 그건 잊으시면 안 돼요.”
강 대표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움직임에, 나는 다시 한번 내 입술로 강 대표의 입을 막았다.
“대답은 지금 안 하셔도 돼요. 제가… 꼭 대학 붙어서 돌아올게요. 그때 대답해 주세요. 그동안 다른 사람이랑 악수는 3초 이상 하면 안 돼요. 알았죠?”
강 대표가 크게 웃었다.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요. 빨리 저랑 약속해요.”
“그래. 약속.”
강 대표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강 대표가 내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뗀다.
아저씨. 진짜 금방 돌아올게요.
나는 속으로 다짐하듯 읊조렸다.
나는 이제 안다. 강 대표가 나를 절대 버리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안다. 강 대표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 줄 거라는 걸 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은 건, 내가 할 일을 잘해 내면 되는 것뿐이다.
* * *
날씨는 점점 선선해지고, 가끔씩 교문 밖에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찾아와 등하교하는 학생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 선생님들이 교무실에 가서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머리를 맞대며 열을 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퍼진 ‘그 애’ 소문에 금세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 애’가 엄청 잘사는 집안의 사생아였고, 조폭같이 생긴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재력가 집안에서 붙여 준 보디가드라는 소문. 그러니까 삼 년 내내 학교를 대충 다닌 이유가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는 거다.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뒤늦게 후계자 수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함께 돌았다.
우습지도 않은 소문이었다. 적어도 반절은 맞았다. 조폭같이 생긴 사람들은 실제로 강 대표가 붙여 준 조폭 아저씨들이고, 삼 년 내내 학교를 거지같이 다닌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 소문들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강 대표에게 돌아가기 전까지, 내가 해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았다.
9월, 늦가을이 찾아왔다. 모의고사 등급이 생각보다 좋았다. 3년 내내 성적으로 담임과 상담을 한 적이 없었는데, 담임이 내게 수시 논술 전형을 권했다. 내신 등급은 엉망인데, 모의고사 등급이 꽤 잘 나와서라 했다.
나는 신중하게 쓰라는 담임의 의견을 무시하고 수시 원서를 6개 전부 상향으로 썼다. 담임이 화가 나서 지금 도박하냐고 추궁했다. 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그 핏줄이 어디 안 가나 싶어서.
10월, 한 달 앞으로 바짝 다가온 수능 시험 날짜를 하루하루 세 가며 달력에 X자를 쳤다. 강 대표의 집에서 가져온 문방구 물품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강 대표가 생각날 때마다, 박스를 하나하나씩 개봉한 까닭이었다. 가끔은 스케치북 위에 지우개 도장을 찍어 보기도 하고, 쓰지도 않는 컴퍼스를 꺼내 연필을 끼워 넣고 완벽하게 동그란 원을 그렸다. 다가온 수능 때문에 조금 긴장이 됐다.
11월, 수능 시험을 봤다. 전날, 집 앞에 이상하게 생긴 하얀 찹쌀떡 한 팩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수능 시험이 끝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논술 시험장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능이 끝난 후, 학교에서 현장 체험학습을 다녔다. 나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수능이 끝난 후, 긴장이 풀린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과거에 깔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시험 하나로 운명이 갈리는 걸 지켜보는 기분은 조금 이상했다.
12월, 담임이 내가 지원하면 벽돌 쌓아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 상위권 대학에서 예비 번호를 받았다. 담임이 멋쩍어하며 내가 성공할 줄 알았다 했다. 희망이 생겼다. 나는 추가 합격 전화를 놓칠세라, 핸드폰을 꽉 쥐고 살았다. 강 대표에게 돌아갈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1월, 수시에 탈락했다. 예비번호는 예비번호에 불과했다. 정시 지원을 했다. 생각보다 수능 점수가 엄청 잘 나와서 수시에 넣었던 대학들 중 세 군데에 그대로 원서를 썼다.
예전에 작성했던 버킷리스트처럼 성인이 된 기념으로 케이크 위의 초를 불며 자축할 틈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강 대표에게 뛰어가서 ‘아저씨. 저 이제 미성년자 아니에요.’ 하고 말하고 싶은 것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대학 합격 발표가 나지 않았기에.
내가 선택한 가시밭길 위에서 나는 지쳤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2월, 수시로 떨어진 대학에 정시로 합격했다. 문을 닫고 들어간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합격은 합격이었다.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이제 등록금만 벌어서 내면 끝이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다. 강 대표에게 내가 직접 이룬 것들을 보여 줄 수 있는 거다. 이제 강 대표에게 돌아갈 수 있다. 당당하게.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 스스로 이뤄 낸 것들에 대한 희열과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나는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나는 등록금을 위해 알바를 다시 시작했다. 패스트푸드 햄버거집인데,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퍽 평온했다. 바쁘게 움직이면 잡생각이 나지 않아 좋은 점이 많다. 종종 알바 가는 길에 사거리에 위치한 술집 거리를 지나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경찰서에 끌려간 일이 떠오르곤 했다. 초면이나 다름없는 주제에 내 보호자 역할을 자청하던 강 대표도.
띠띵.
나는 반사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