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끝나자마자, 나는 급하게 집으로 향했다. 수능이 끝나고 할 일을 작성하다, 당장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자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대문을 부러 탁탁 두들긴 나는 복도를 달려, 거실로 뛰쳐 들어갔다. 플러그가 꽂혀 있는 커피 머신에서 고소한 커피 향이 진하게 난다. 강 대표가 집에 있다. 나는 허겁지겁 2층 서재 계단을 올랐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동종업계끼리 그러면 쓰나….”
작지만, 낮은 음성이 희미하게 들린다.
“대체 내가, 언제까지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못 본 사이에, 중국식 일 처리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나랑 척지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옆모습이 차갑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움찔했다. 강 대표가 내 인기척에 고개를 힐끗 들었다. 시선이 마주한다. 강 대표는 핸드폰을 살짝 내리고 ‘잠깐만.’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다음에 통화합시다. 김 실장.”
그대로 통화를 종료한 강 대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능글맞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러더니 꼭 손주의 안부를 묻는 할아버지처럼 학교에 잘 다녀왔는지, 첫 수업은 어땠는지, 또 땡땡이를 치지는 않았는지 묻는다. 나는 급한 마음에 네, 그냥 그랬어요, 아니요, 하고 짧게 대답했다. 강 대표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뭔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어, 아가야.”
“아저씨. 달력이요. 달력. 어디 있어요?”
“달력은 왜?”
“할 게 있어서요.”
“핸드폰 달력 봐.”
“안 돼요, 핸드폰 달력은. 그냥 달력 없어요?”
강 대표가 짧게 “응.” 하고 대답하더니 시선을 돌려 업무용 핸드폰 액정을 툭툭 터치한다. 나는 투덜거렸다.
“어떻게 사람 사는 집에 달력이 없어요.”
“없어도 지금까지 잘만 살았잖아, 너.”
“원래 막 연말 되면 여기저기서 주고 그러지 않나.”
강 대표는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마치 귀찮게 그런 걸 챙기겠냐는 얼굴이었다. 하긴. 강 대표가 돌돌 말린 커다란 달력을 무료로 받아 오는 모습 자체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 김샜다.
나는 몸에 힘을 쭉 뺐다. 강 대표가 눈을 내리깔고 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웬 달력.”
“그냥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고 싶은 거 있었는데… 김샜어요.”
“조금만 기다려.”
“네?”
“금방 와.”
달력을 어디서 시키나? 갈색 가죽 의자에 앉아 있던 강 대표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그제야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강 대표에게 한걸음에 다가갔다.
“오늘 제가 학교에서 수능 끝나면 하고 싶은 거 다 써 놨어요.”
“뭐 뭐 있는데.”
“음… 그냥, 다른 애들이랑 비슷한 거요. 여행 가고, 열두 시 땡 하면 민증 써 보는 거랑….”
“친구들이랑?”
친구 없는데. 다… 강 대표랑 하고 싶은 건데. 나는 망설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저번에 공원에서 다 들켰는데… 더 이상 친구 없는 애라는 인식이 박히고 싶지는 않았다.
강 대표가 말했다.
“술 마실 거면 나랑 먼저 마셔.”
“아저씨랑요?”
“술은 원래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아가야.”
바라던 바다! 하지만 나는 의연한 척, 겉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자꾸만 의지와 다르게 씰룩거려서 꽤 힘들었다.
“아이고… 아가야.”
강 대표가 돌연 웃음을 터트리며 내 뺨을 톡톡 쳤다.
“왜요?”
“그냥.”
웃음기 섞인 음성이 부드럽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근데요. 아저씨 술 잘 마셔요?”
“적당히 하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옛날에 술 마시고 들어왔을 때를 생각하면, 엄청… 잘 마시는 것 같은데. 내 주량은 잘 모르겠다. 따로 마셔 본 적이 없다. 일곱 살 때, 아빠가 생수통에 넣어 둔 소주를 모르고 마시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 간 걸 제외하고는. 이제는 다 컸으니까, 제대로 마신다면 꽤 잘 마시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강 대표보다 주량이 더 셀지도 모른다. 강 대표의 제대로 취한 모습은 어떨까? 어쩌면 귀여울지도 모른다.
“왜 웃어.”
“그냥요.”
강 대표의 말을 똑같이 옮기자, 강 대표가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책상 위에 앉혔다. 항상 올려다보아야 했던 얼굴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강 대표의 뺨을 슥슥 매만졌다. 그가 맨날 내게 하는 것처럼. 강 대표가 살짝 힘이 들어간 손으로, 내 손을 꽉 붙들었다.
“하지 마.”
미간을 설핏 좁힌 강 대표가 낮게 속삭인다. 어쩐지 곤란해 보인다. 얼굴… 만져지는 거 싫은가? 내 뺨은 맨날 만져 놓고선. 치사하게. 나는 민망함에 손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그럼, 저 그날 우리 위스키… 그 초콜릿도 먹어도 돼요?”
“그래. 하나만 먹어.”
“진짜죠? 저 따로 디데이 셀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 대표의 업무용 핸드폰이 지잉, 지잉, 하고 울렸다. 밝은 액정을 힐끔 확인한 강 대표가 “잠시만.” 하며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듯이 손짓했다.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 쪽으로 걸어 나간 강 대표는 말 그대로 ‘금방’ 돌아왔다. 손에 돌돌 말린 달력을 들고선. 나는 “어?” 하며 벌떡 일어났다. 강 대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사무실에 남아 있더라고.”
“아저씨 회사, 달력도 만들어요?”
“만들 때가 됐지.”
강 대표는 무언가를 오래 기다려 온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부업체가 달력도 제작하나? 은행도 아니면서.
의아함도 잠시 나는 달력의 포장지를 벗겨 냈다. 이미 지나간 계절들과 앞으로 다가올 계절을 한번 넘기고서야 바라던 달이 나왔다.
“12월?”
“네.”
“11월을 봐야지.”
너 요즘 공부 열심히 하잖아. 강 대표는 달력에 대학수험능력평가시험이라고 새겨진 날을 가리켰다. 나는 “잠시만요.” 하고 가방 안에서 필통을 꺼냈다. 빨간 펜을 꺼내 들어 수능에 대충 동그라미를 그리고, 다시 달력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러고는 12월 31일과 내년 1/1이 있을 자리인 텅 빈 빈칸에 커다란 타원형 동그라미를 큼지막하게 그리고 중요 표시로 별 3개를 새겨 넣었다.
“뭔데?”
“미성년자 탈출하는 날이요. 저 이날 케이크에 촛불 켜 놓고 불 거예요.”
“축하 파티야?”
“네.”
수능은 왜 별표 표시 안 하냐며, 핀잔을 줄 것 같았던 강 대표가 픽 웃었다.
왜 웃지? 진짜 축하 파티할 건데. 진심인데. 그날, 술도 먹고, 위스키 초콜릿도 먹고, 강 대표도 자빠트릴 건데…….
나는 샐쭉한 눈으로 강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강 대표가 내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고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왜요.”
대답 없이 목 안으로 작게 웃은 강 대표가 내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묻었다, 떼어 냈다.
“그래. 파티하자.”
낮은 저음이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온몸을 울린다. 온몸이, 마음이 간지러웠다.
입술을 살짝 떼어 낸 강 대표가 물었다.
“아가야. 졸업식은 따로 체크 안 해?”
“졸업식이요? 음… 졸업식은 딱히 의미 없는데요.”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그랬다. 졸업식은 의미 없는 날 중 하나다. 학교가 공식적으로 일찍 끝나서 좋은 날이기도 했고…… 아무도 오지 않아서, 같이 사진 찍어 줄 어른이 없어서 민망한 날이기도 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하는 대신 둘러댔다.
“졸업식은 언제인지 아직 몰라요.”
“2월달에 있겠지. 둘째 주에.”
“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아요? 아저씨 졸업 엄청 오래 전에 했잖아요.”
강 대표의 짙은 눈썹이 구겨지려는 찰나, 나는 재빨리 “어. 저 진짜 신기해서… 아니, 방금 한 말 취소요.” 하고 발언을 취소했다. 강 대표가 ‘나이’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강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게 진짜, 나를 가지고 노네.”
“제가 언제요.”
“항상.”
강 대표가 다시 한번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아저씨가 너 졸업식 꼭 갈게.”
“진짜요?”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웃음기를 머금은 새까만 눈동자가 보인다.
“그래. 진짜.”
“진짜죠. 바빠서 못 온다고 하면 안 돼요.”
“약속할게.”
강 대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두 번 흔들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핸드폰 주세요.”
“응?”
“핸드폰이요.”
강 대표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는 캘린더 앱에서 내년 2월 2주차에 일정을 등록했다.
<백지오 졸업식>
알림 2월 8일 - 2월 14일, 매일 09:00
메모 백지오랑 약속함. 꼭 와야 함.
알림까지 설정한 나는 강 대표에게 핸드폰을 다시 돌려줬다. 일정을 확인한 강 대표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알람을 괜히 설정했나…… 조금 후회가 들기는 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강 대표가 내 졸업식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늘 졸업식에 혼자였다. 만약 강 대표가 내 졸업식을 잊지 않고 와 준다면… 강 대표는 내 졸업식을 축하해 주러 온 첫 손님이 될 거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저씨 꼭 와야 해요. 약속했어요.”
나의 모든 ‘처음’은 강 대표가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 * *
꽉 막힌 출근길, 강 대표의 차가 도로 위를 느릿느릿하게 달린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포도 맛 사탕의 껍질을 까서 강 대표의 입에 들이댔다.
“아저씨. 아, 하세요.”
강 대표는 눈을 내리깔고 포도 맛 사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순순히 입술을 열어 사탕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좀 더 느릿한 동작이다. 마치 썩 내키지 않는 듯한.
나는 물었다.
“질렸어요?”
“뭐가.”
운전대를 잡고 있던 강 대표의 고개가 순식간에 내 쪽으로 향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사탕이요. 일부러 포도 맛으로 가져온 건데.”
나는 알맹이가 빠져나간 포도 맛 사탕 껍질을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강 대표의 표정이 설핏 풀린다.
“아저씨 이거 좋아하잖아요.”
“……네가 좋아하지. 아저씨는 단 거 안 좋아해요.”
“네? 아닌데… 아저씨 맨날 포도 맛 사탕만 찾잖아요.”
“네가 줬잖아.”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어 웃은 강 대표가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달아.” 했다.
나는 사탕 껍질을 손안에서 구겼다.
오늘도 강 대표한테 조금, 많이 넘어간 것 같다. 내가 꼬셔야 하는데… 이러다 1월 1일이 되어도 강 대표 자빠트리기 작전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엔 쓴 사탕 가져올게요.”
나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런 게 있나?”
“…찾아볼게요.
“왜 이렇게 지극정성이야, 아가야. 아저씨 버릇 잘못 들게.”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아마 못 찾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강 대표는 모른다. 운전하는 강 대표의 입에 사탕을 직접 입에 넣어 주는 게, 내 지겨운 일상 속 작은 즐거움이라는 걸.
학교, 집, 학교, 집…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고3 수험생의 생활은 끔찍하다. 지금까지 공부를 안 해 왔던 걸 한꺼번에 몰아서 벌 받는 기분이다. 그나마 매일 아침마다 ‘악수’를 핑계로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강 대표 덕분에 하루하루 버티는 중인데.
나는 핸드폰을 들어 [쓴 사탕] [홍삼 사탕] [대추 사탕] [맛없는 사탕] 따위를 검색해 보며 골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쓴 사탕은 다 맛없어 보인다. 이런 걸 입에 밀어 넣어 주기가… 좀 그렇다. 나는 강 대표를 사랑하는 마음에 주고 싶은 거지, 고문하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만약, 정말 만약에… 마치 다른 커플들처럼 흔한 ‘애정 싸움’을 한 이후라면, 미운 마음에 한 번쯤은 줄 수 있겠지만.
어느새, 저 멀리 학교가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튼 강 대표가 점점 속력을 줄였다. 거의 다 왔다. 나는 끌어안고 있던 가방을 똑바로 어깨에 멨다. 두꺼운 책들 때문에 불룩 튀어나온 가방에 등이 배겨 불편했다. 나는 의자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아, 강 대표를 힐끔 쳐다보았다.
평소와 비슷하게 검은 슈트를 입은 강 대표는 넥타이 없이 하얀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있는 채였다. 굴곡 있는 목젖 아래로 단단한 가슴 근육이 하얀 와이셔츠를 틈 없이 팽팽하게 보이게 한다. 근육이 더 단단하게 부푼 것 같다… 하긴. 요즘 강 대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밤마다, 새벽마다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운동을 하러 나가기는 했다.
질 수 없지. 수능 끝나면, 헬스장부터 등록할 거다. 수능 끝나면. 나는 굳게 결심했다. 운동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아주 큰 결심이다. 아닌가. 지금부터 해야 하나? 지금부터 운동을 해 놔야 1월 1일에 자신감 있게 자빠트릴 수 있을 텐데……. 물론, 내가 머릿속에 ‘그거’ 생각만 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애인한테 잘 보이기 위해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던데… 이래서 하는 거구나.
나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아가야.”
“네?”
“다 왔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터라, 등교하는 애들이 많았다.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걸어가는 무리들을 눈으로 훑던 나는 강 대표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저 이제 가요.”
“가.”
강 대표가 손을 까딱인다. 순간 김이 팍 샜다. 강 대표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주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물론 알아서는 안 되지만… 이건 너무… ‘연인’ 같지 않은 거 아닌가? 무슨, 조카 학교 데려다주는 삼촌도 아니고.
“그게 다예요?”
“그럼.”
“아저씨. 저… 뽀뽀해 주시면 안 돼요?”
“너 학교 앞에서… 새끼가, 겁이 없어.”
“언제는 겁 없어서 좋다면서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진짜.”
강 대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슬쩍 몸을 기울여, 강 대표의 볼에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췄다. 부드러운 뺨이 순간적으로 굳는 게 느껴진다.
“아저씨 차 선팅 엄청 잘돼 있는 거 다 알아요, 저.”
“그게 문제겠니.”
강 대표가 작게 한숨을 쉰다. ‘그럼 뭐가 문젠데요?’ 하고 묻기도 전에, 강 대표가 길쭉한 손을 뻗어 내 뒷목을 가볍게 감싸 끌어당긴다. 숨결이 닿는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내 입술 위에 짧게 입술을 맞추고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죄를 지은 사람마냥,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너 때문에 내가 진짜, 이 나이 먹고….”
강 대표가 작게 욕설을 읊조렸다. 운전대에 고개를 박았다, 뗀 강 대표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땡땡이치지 말고. 수업 잘 듣고. 자지 마라. 밤에 잠 못 잔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이제는 안 들으면 서운한 강 대표의 할아버지 같은 대답을 뒤로하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오늘도 죽을 만큼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다. 교복을 입은 애들을 지나쳐,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본관에 가까워질 즈음이었다.
“백지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내 표정이 급속도로 구겨지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진다. 김국현이었다. 나는 무시하고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자, 김국현이 “잠깐 멈춰봐.” 하고 다시 한번 내 앞을 가로막는다.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분명 강 대표의 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최고의 하루였는데….
“뭐. 비켜.”
“나랑 얘기 좀 해. 백지오.”
“할 얘기 없는데.”
나는 무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장애물을 노려보았다.
“꺼져. 짜증 나게 굴지 말고.”
김국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인다. 마치 화를 삭이는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나를 계단 밑으로 질질 끌고 갈 것 같은 표정이다. 뭐지? 해 보자는 건가? 나는 안 그래도 김국현에게 쌓인 게 많다.
너 때문에… 지난번에 홧김에 고백했다가 차였잖아. 이 개새끼야!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운 이야기가 터져 나오기 전에 나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다 지난 일이다. 지금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짧게 심호흡을 했다.
‘국현인가… 그 학생이랑 놀지 마. 또 다치고 오면 아저씨 진짜 화낸다.’
게다가 개학 바로 직전, 강 대표가 내게 당부한 말이 있다. 나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김국현을 따라갈 생각이 없다. 아니, 없었다.
김국현이 내게 그 한마디를 하기 전까지.
“나랑 대화하기 싫으면… 그냥 듣기만 해. 그 아저씨에 관한 거니까.”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 * *
결국 나는 김국현의 뒤를 따라 소각장으로 향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버려진 책상 위에 걸터앉은 김국현이 적막을 깬다.
“백지오. 그날은, 내가….”
“됐고. 아저씨가 뭐.”
김국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연다.
“너… 그 아저씨랑 같이 살지?”
일순, 내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는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김국현은 이미 내 표정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닌데.”
“맞잖아. 삼 년 내내 맨날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올라오던 애가… 갑자기 존나 비싼 차를 타고 오질 않나, 택시를 타고 오질 않나. 그 사람이 너 하나 데려다주러 등교 시간에 맞춰서 매일 매일 나온다고? 씨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백지오.”
남의 멱살이나 잡고, 삥이나 뜯는 줄 알았던 김국현은 예상보다 예리한 편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정말이지, 강 대표가 나 때문에 의미 없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게 싫다. 정말… 싫다. 하지만 강 대표가 내게 실망하는 게 더 싫고… 무섭다.
나는 한 번 꾹 참아 낸다.
김국현은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야. 넌 그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그 아저씨는 존나 위험한 사람이야.”
“…….”
“우리가 싸운 일이 왜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고 생각하냐? 우리 엄마가 받은 명함, 그거 조폭 회사로 유명한 곳 명함이잖아. 겉으로는 멀쩡한 척, 금융 회사인 척하면서 뒤에선 폭력으로 해결하는 더러운 곳.”
“…그래서, 뭐. 사채업자인 거 알아내서 좋아 죽겠나 보다?”
내 날 선 대답에 김국현이 코웃음을 쳤다.
“사채업? 그것만 하는 줄 아냐? 그 사람은 정계에 더러운 일 터지면 가끔씩 뒤처리 도맡아 하는 사람이야. 뉴스에도 못 나올 사건 터지면, 증거 인멸해서 막아 주는 사람이라고.”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건…….”
김국현이 뒷말을 삼킨다.
뻔하다. 아빠한테 들은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집에서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몰래 엿들었거나. 김국현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인 건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이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아무튼 그 아저씨는 존나 위험한 사람이고,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차라리 나와. 갈 곳 없어서 그러는 거면, 내가….”
“상관없어.”
“뭐?”
“나한테만 안 그러면 상관없어.”
“너한테 안 그런다는 보장 있냐?”
“응.”
김국현은 똥 씹은 표정을 했다.
“뭘 믿고.”
“그걸 너한테 왜 말해야 하는데.”
“…….”
“신경 꺼라, 김국현.”
“씨발!”
김국현이 악을 쓰는 사람처럼 욕설을 짓씹는다. 분이 안 풀리는 듯, 이미 다리 하나가 사라진 책상을 발로 뻥 차 버린다. 우당탕, 불안한 소음이 고막을 찌른다.
“너 진짜 후회한다.”
김국현이 내게 경고조로 윽박질렀다. 지가 뭔데. 나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너 그거 이상한 거야.”
“…….”
“정신 차려. 백지오, 이 병신아.”
나는 김국현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강 대표에게서라면 몰라도. 이건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다. 강 대표와 나만의 일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욱했다.
“후회를 해도 내가 하는 거지. 네 말대로, 아저씨한테 뒷구멍 대 주는 애한테 뭔 관심이 이렇게 많아, 이 개새끼야.”
뒷구멍 대 주는 애.
그 한마디에, 본인이 나한테 뭐라도 되는 듯이 뻔뻔하게 굴던 김국현이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린다.
“…뒷구멍.”
본인이 뱉은 말에 되레 본인이 상처 받은 얼굴을 한다. 어이가 없었다. 이 자리에 강 대표가 있었다면 ‘웃기는 새끼네, 이거.’ 하고 ‘학생. 정신 좀 차리지?’ 하면서 뺨을 가볍게 툭툭 칠 거다. 그래도, 미성년자니까 선을 넘지 않고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면서. 지금 김국현이 나열하는 것과 정반대의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 줄 텐데. 아니다. 보여 주기도 싫다.
나는 경고했다.
“혹시라도 헛소문 퍼트리면 너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너….”
“먼저 교실 올라가.”
“…….”
“싫으면 내가 먼저 가고.”
내가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묵묵부답으로 서 있던 김국현이 “…씨발, 진짜.” 하며 먼저 등을 돌렸다. 익숙한 적막감이 다시 찾아온다.
“후우….”
나는 텅 빈 소각장 가운데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뱉는다. 그럼에도 답답한 무언가가 가슴에 꽉 끼어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
“후….”
이제 나는 이걸로는 부족하다. 남들 몰래 숨어서, 겨우 숨을 쉬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강 대표가 필요하다. 아니, 나를 ‘그 애’가 아닌 ‘나’ 자체로 봐주는 강 대표가 절실하다. 강 대표가 보고 싶다. 지금 당장.
나는 소각장 한가운데에 버려진 책상을 질질 끌어 비교적 낮은 담장 앞으로 갔다. 드르륵, 드르륵. 철이 콘크리트에 갈리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후문의 담장을 넘는다.
후문으로 빠져나온 나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딱, 딱, 딱….
“학생. 손톱 좀 그만 뜯어. 거슬려서 운전을 못 하겠네.”
택시 아저씨의 짜증 섞인 일갈에 나는 “…죄송합니다.” 하며 뻘쭘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초조함에 나도 모르게 손톱을 뜯은 모양이었다. 이게 다 김국현 그 새끼 때문이다.
‘너한테는 안 그런다는 보장 있냐?’
김국현의 목소리가 자꾸만 속을 시끄럽게 만든다.
나라고 강 대표를 의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강 대표와의 첫 만남에는 무섭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 만남에는 내 장기를 노리는 줄 알았고, 세 번째 만남에는 무서운 조폭이니 아빠를 죽여도 진작에 죽였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대표는 한결같은 태도로 나를 대해 줬다. ‘동네 양아치’가 아닌 ‘대표님’으로서.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강 대표는 본인 손해임이 분명한데도 나를 받아 줬다.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강 대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적어도 나한테는.
게다가 강 대표는 나랑 약속까지 했다. 아빠의 소식을 알려 주기로. 만약 발견하면, 무사히 보내 주기로. 악몽에 대해 들킨 이후로는 아빠에 대하여 따로 언급한 적은 없기는 하지만…… 그전에는 내내 강 대표에게 아빠의 행방을 물어봐 왔으니 잊지 않았을 거다.
나는 강 대표를 믿는다. 강 대표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강 대표는 나를 좋아하니까. 강 대표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나를 배신할 리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세한 건 하나도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어떻게 얻은 마음인데… 간신히 얻어 낸 행복인데, 그걸 내 손으로 무너트리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나는 굴러들어 온 행복을 걷어차는 병신이 아니다. 그건 복에 겨운 놈들이나 하는 거다. 집에 엄마도, 아빠도 다 있으면서 힘들다고 찡찡거리는 복에 겨운 놈들이나.
내가 갑자기 사무실에 나타나면 강 대표는 분명 심각한 얼굴로 ‘아가야, 어디 아파? 왜 벌써 왔어.’ 하며 내 이마에 손부터 가져다 댈 것이다. 열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면 ‘이게 빠져가지고. 이래서 대학이나 가겠어?’ 하면서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퇴의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강 대표는 그런 사람이니까.
딱, 딱.
운전석에서 쓰읍,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는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붉어진 손톱 끄트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아래로 내렸다.
이건 습관이다. 나쁜 습관.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는지도 모르고 해 버리고야 마는 그런 습관. 아마 이 자리에 강 대표가 있었다면, 내 손을 꽉 잡아 못 하게 막았을 거다. 어쩌면 묶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에 익은 건물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차창 밖을 빤히 바라보았다. 학교 가는 길 만큼이나 익숙해진 풍경들이다. 드디어 강 대표의 건물이 보인다.
“저기 건물 앞에서 세워 주세요.”
“만 삼천 원.”
“여기요. 감사합니다.”
나는 현금을 내고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지하 주차장에서 새까만 차들이 연이어 올라와 끼이익, 하고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내가 잠시 멈칫한 사이, 로비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다. 모두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어….”
건물의 외부 유리 안에 양복 무리의 맨 뒤에서, 아침에 본 것과 같은 검은 슈트를 입은 강 대표가 빠른 속도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태블릿 피시를 든 사람이 강 대표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는 듯했다. 강 대표가 연신 고개를 까딱이다, 뚝 멈춰 서서 한껏 표정을 구긴다.
“누가 조회를 해? 씨팔. 내 허락도 없이 누가 조회를 해.”
제법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습관적으로 손목을 들어 올려 확인한 강 대표가 멈칫하더니 업무용 핸드폰을 확인한다. 동시에 나는 내 손목에 있는 강 대표의 시계를 움켜쥐었다.
잔뜩 열이 받은 듯한 얼굴의 강 대표가 몇 마디를 더 얹는다. 입 모양은 언뜻 보이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우르르 나온다.
“아직 변제 안 한 사무실들 싹 돌라신다. 다들 그 변호사 새끼 쌍판은 알지?”
“그걸 다 돕니까? 오늘 안에 말입니까? 그럼 인천항은….”
“오늘 안은 무슨. 4시간 안에, 인마. 인천항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사무실 돌다가 전국노래자랑 찍게 생겼다. 야. 애들 데리고 나눠서 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나누는 대화 중간중간 ‘변호사 새끼’ ‘인천항’ 등등 익숙한 단어들이 뭉텅이로 들려온다. 변호사? 조회? 4시간? 나는 기시감에 멍하니 서 있다가, 움찔했다.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4시간 후라면… 내 하교 시간인데. 아무래도 지금은… 집에 가야 할 것 같지?
나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지금은 강 대표 앞에 태평하게 나타날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 잘 안다. 이제 와서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고… 곧장 집으로 가야겠다. 점점 출구 쪽으로 다가오는 강 대표의 모습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내 보폭보다 강 대표의 보폭은 항상 크다는 걸. 내가 건물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보다, 강 대표가 로비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이래서 혓바닥이 긴 새끼들은….”
음산하게 욕설을 짓씹듯이 읊조린 강 대표의 얼굴에는 피곤이 내려앉아 있다. 뻐근한 듯 목덜미를 주무르며, 목을 까딱인다. 나는 반대편으로 걸어가면서도 은근슬쩍 강 대표를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안 있을 때는 저런… 모습이구나. 꼭, 두 번째 만남 때의 강 대표와 느낌이 비슷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한다.
짙은 눈썹이 올라간다.
들켰다.
눈을 가늘게 뜬 강 대표가 손을 까딱였다. 내가 슬금슬금 뒤로 피하자, 강 대표가 큰 보폭을 자랑하며 한걸음에 내게 다가왔다.
“우리 아가가 왜 여기 있지?”
화를 꾹꾹 누른 음성이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보고 싶어서 왔는데… 안 좋은 타이밍인 줄 몰랐어요.”
“…….”
“다음부턴… 연락하고 올게요. 아니, 절대 허락 없이 안 올게요.”
“그게 아니라….”
강 대표가 마른세수를 하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혼자 왔어?”
“네.”
“오는 길에 아무도 안 만났어?”
“네?”
“올 때 어떻게 왔어.”
“택시 타고 왔어요.”
“그래, 잘했어. 안 그래도 아저씨가 데리러 가려고 했어. 일단은…….”
강 대표가 손을 뻗었다.
“따라와.”
타이밍 좋게, 차가 미끄러지듯 우리의 앞에 선다. 유리창이 한 번에 쭉 아래로 내려간다. 가오리 아저씨의 굳은 얼굴이 보인다. 차체를 왼손으로 짚은 강 대표가 허리를 굽혀 운전석에 있는 가오리 아저씨에게 말한다.
“진용아. 인천항엔 네가 직접 가서 물건값 치르고 와라.”
“예. 대표님.”
“셈은 잘 쳐 주고.”
“알겠습니다.”
가오리 아저씨가 우렁차게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강 대표의 뒤에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본다. 묘하다. 나는 표정을 읽어 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가오리 아저씨가 앞차의 꽁무니를 쫓아 떠난다.
“가자, 아가야.”
강 대표가 나를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 강 대표는 말이 없었다.
“아가.”
“…네.”
“핸드폰 좀 줘 봐.”
“여기요.”
강 대표가 핸드폰을 두어 번 기둥에 내리찍더니 바닥에 던져 한 번 더 구둣발로 짓밟는다. 액정이 단숨에 설탕처럼 쩍쩍 갈라졌다. 처음 보는 과격한 행동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뭐해요?”
“핸드폰 새로 사자.”
“…네?”
“번호도 바꾸고.”
“아저씨 왜 그러는데요.”
나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강 대표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쓸어올린다.
“미안.”
“…….”
“아저씨가… 일이 겹쳐서 그래.”
강 대표가 조용히 내 눈치를 봤다.
강 대표에게 일이 겹치는데, 굳이 내 핸드폰을 으깰 필요가 있나? 혹시 저번처럼 내 번호가 다른 사채업자들한테 또 팔린 걸까? 아니면 설마… 변호사 새끼라는 게, 그… 박 변호사 아저씨를 말하는 건가? 그 아저씨가 내 정보를 팔았나? 그래서 유심만 갈아 끼워도 될 내 핸드폰을 깨부순 건가? 아니지. 내가 뭐라고. 내 정보의 가치가 그 정도나 될 리가 없다. 게다가 이 세상에 변호사가 박 변호사 아저씨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직접 질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미움 받고 싶지 않다.
그때였다. 강 대표가 예상외의 질문을 했다.
“아가, 상속 포기라는 게 있어. 네 부모가 진 빚, 법적으로 제할 수 있는 기회고. 할래?”
강 대표가 저런 제안을 하는 건 처음이다. 만약 상속 포기를 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강 대표와의 접점은 아예 사라지는 걸까?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에 아저씨가… 네 애비 죽었다 생각하는 게 여러 사람 편하다는 거, 기억나지?”
“…네.”
“말 그대로야. 백철웅이 죽으면 넌 안전하게 상속 포기할 수 있거든.”
강 대표가 물었다.
“그래도 네 애비 살았으면 좋겠어?”
붉게 물든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왜, 그런 당연한 소리를….”
“당연한 건 아니지.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 죽이고, 자식이 부모 죽이는 세상인데.”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정통으로 꿰뚫는다.
“언제는 죽었다고 생각할 거라며.”
“…….”
“아저씨는 그런 거 가지고 너 판단 안 해.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도 괜찮아. 그래도 돼. 세상엔 그래도 싼 새끼들이 널렸어. 우연히 네 애비가 그런 부류인 거지. 네 잘못이 아니니까.”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빈틈없이 채워지는 시선에 메마른 침을 삼켰다.
“저는 그래도… 아빠가, 살아 있으면 좋겠는데요.”
눈을 살짝 내리깐 강 대표가 한참이나 침묵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
“역시 돈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제일 어렵지?”
이래서 어른들이 돈 많이 벌어 두라는 거야, 웬만하면 다 돈으로 쉽게 해결하라고. 강 대표가 씩 웃으며 덧붙인다.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매 덕분에 날카로웠던 인상이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진다. 나는 강 대표가 가벼운 농담을 던진 사람처럼 웃어넘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뭘 하긴. 누가 너보고 뭐 하래?”
“…….”
“넌 대학이나 가. 까불지 말고.”
맨날 이렇게 땡땡이나 쳐서 쓰겠어? 졸업이나 하면 다행이지. 강 대표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상황을 정리하려 들었다. 지은 죄가 있는 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갈 수 있거든요.”
“알아. 할 수 있는 거.”
이상하게도, 그는 어딘가 안심한 얼굴처럼 보였다.
반대로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강 대표는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아까 그 아저씨들이 하던 대화도 그렇고, 나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우리 관계에서 굳이 달갑지 않을 대화 주제를 선뜻 꺼내는 것도 이상하다. 늘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먼저 화제를 돌렸으면서. 이건 마치….
나는 불안감을 삼키고 묻는다.
“아저씨.”
“응.”
“혹시 우리 아빠… 찾았어요?”
강 대표가 잠시 입을 다문다.
“아니.”
강 대표가 부정한다.
“못 찾았어.”
새까만 눈동자는 촘촘한 속눈썹에 반쯤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잠잠한 수면 아래로 불안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나는 강 대표의 손을 꽉 잡았다. 강 대표의 시선이 맞잡은 두 손에 머문다. 그제야 새까만 눈동자가 제대로 보인다. 나는 강 대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택시 타고 오는데요. 아저씨가 안 잡아 줘서 손톱 또 뜯었다가 기사님한테 혼났어요.”
“아무한테서나 혼나고 다니면 안 되지.”
강 대표가 힘을 주어 내 손을 제대로 잡아 준다.
“지오야.”
“네.”
“앞으로도 무슨 일 있으면 아저씨한테 곧장 오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요.”
“그래, 착하다.”
강 대표가 만족스러운 듯 작게 웃었다. 나도 슬쩍 따라 웃었다. 강 대표가 나를 힐끗 본다. 여전히 따뜻한 눈빛이다. 이걸로 만족한다.
나는 강 대표를 믿는다. 강 대표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 * *
요즘 강 대표와 나는, 그러니까 우리 사이는… 아주 좋다. ‘좋다’ 의 사전적 의미로만 따지자면.
강 대표가 내 마음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고, 강 대표의 눈치를 보며 내 마음을 숨겨야 되는 것도 아니고, 강 대표가 내 마음을 받아 줬으니 만족스럽긴 한데…….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내 마음에 싹튼 이유 모를 불안감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가, 뭐 먹을 거야?”
“음….”
“하나만 골라라. 이 다 썩는다.”
“저 양치 열심히 하는데요.”
강 대표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린다. 나는 행사 상품으로 나온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짧게 고민하다가 결국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아가.”
고개를 드니, 강 대표가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들고 있었다. 뭐야. 결국에는 둘 다 고를 거면서. 텅 빈 계산대에 간식을 하나둘씩 올리는데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따라왔다.
“아가야. 누가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하면 따라가면 돼, 안 돼.”
“장난해요? 제 나이가 몇인데.”
“빨리.”
“…안 돼요.”
“누가 와서 네 부모님이랑 나랑 친구인데 같이 가자 해도 믿고 따라가면 돼, 안 돼.”
강 대표는 사뭇 진지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아저씨는 제가 무슨 아홉 살인 줄 아세요?”
“대답해야지.”
“아. 안 따라가요!”
“그래. 착하다.”
유괴 방지 교육을 받을 나이는 좀… 많이 지난 것 같은데. 강 대표가 이렇게 굴 때마다 나는 어쩐지 조금 부끄럽다. 아니나 다를까, 창고에 들어갔다 나온 편의점 알바생의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저 먼저 나가요.”
뒤도 안 돌아보고 편의점을 빠져나온 나는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까서 상어바를 입에 물었다. 곧이어,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강 대표가 한 손에 커다란 편의점 비닐봉투를 들고 걸어 나온다.
“혼자 다녀도 돼, 안 돼.”
“그만해요.”
나는 경고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는 바람에 ‘그마해여’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강 대표가 “아이고… 무섭다. 협박하네.” 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뱉었다.
“애새끼 취급 안 한다면서요.”
“안 하지. 아가 취급이지.”
아니다. 한다. 요즘 강 대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중이다. 이게 바로 그 문제다. 나는 강 대표 ‘연인’이지, ‘아가’가 아닌데…….
강 대표의 건물 앞에 찾아갔다가 애꿎은 핸드폰만 부서진 그 날이 기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행선지에 대해 강 대표에게 꼬박꼬박 보고를 해야 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내 행선지라 해 봤자 학교—집—학교의 반복이니까. 보고를 핑계로 짧게나마 강 대표와 통화하는 것도 좋았고.
하지만 바쁜 강 대표를 대신하여 강 대표의 부하—쇼핑몰에서 본 비교적 인상이 순한 아저씨—가 불시에 불쑥 학교 앞으로 찾아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강 대표의 부하 직원은 대뜸 나를 차 앞에 데리고 가더니, 강 대표와 내가 통화 연결이 되지 않으면 차에 탈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로는 내가 정말 ‘백지오’가 맞는지,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그럼 안 탄다고 했더니, 혼자 걸어가지도 못하게 온몸으로 막아섰다. 바쁜 강 대표의 전화가 연결될 때까지. 무려 삼십 분 동안! 결국 녹초가 되어 집에 도착한 내가 항의하자, 강 대표는 뻔뻔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아가야. 모르는 사람은 차에 무작정 태우면 안 되지. 타서도 안 되고.’
‘…아저씨가 시켰죠.’
‘역시 똑똑하네.’
‘그럼 이상한 아저씨들 보내지 마세요. 차라리 가오리 아저씨를 보내든가요.’
‘걔도 똑같지. 나 말고 다른 깡패 새끼들은 다 모르는 사람이야. 알겠어?’
‘모르겠는데요.’
‘몰라도 알았다 해.’
아무리 우리 관계가 정립이 제대로 안 됐어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누가 들어도,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대화가 절대 아니다. 갑자기 애를 떠맡은 삼촌과 아홉 살 난 조카라면 몰라도. 안 그래도 엄청나게 보수적인 강 대표 때문에 우리는 공식적인 연인 관계도 아니고, 아직 ‘그런’ 짓도 못 하는데…… 강 대표는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나만 애가 닳는 것 같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진짜 하지 마세요.”
나는 강 대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미안.”
안 할게. 강 대표가 내 뺨을 가볍게 톡톡 건드린다. 고작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뒤집어졌던 마음이 다시 바로 세워지려고 한다. 이건 반칙이다. 강 대표는 나를 너무 쉽게 다룬다. 어쩌면 이것도 문제다.
“…됐어요.”
나는 괜히 투박하게 대답했다.
“같이 가야지.”
강 대표가 슬쩍 내 손을 잡아 준다. 나는 커다란 손아귀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손을 꼭 잡았다. 강 대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는다.
“강아지 아니에요, 저.”
“누가 강아지래, 너더러.”
마주 잡은 손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나는 마치 고자질하는 사람처럼 속삭였다.
“예전에 아저씨가 저보고 그랬잖아요. 맨날 아이고… 이래서 개새끼 키우나 보다 그랬으면서. 지나가는 강아지 구경하는 사람처럼.”
“귀여워서 그랬나 보지.”
맞잡은 손의 힘을 느슨하게 푼 강 대표가 별거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다. 지나가는 강아지를 귀여워하고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 강 대표는 나를 사랑해야 하는데. 물론 우리는 아직 공식적으로 시작도 못 했지만, 나는 강 대표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원래 맛있는 걸 먹을 때 같이 먹고 싶고, 좋은 걸 볼 때 같이 보고 싶으면 사랑이라 했다. 나는 깨어 있는 시간 내내 강 대표만 생각하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사랑인 것 같은데. 얼렁뚱땅 말하기는 했지만, 강 대표에게 사랑한다고도 말하기도 했고.
그때, 강 대표는 내게 사랑은 어려운 거라고 했다. 혹시 강 대표가… 아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럼 언제 사랑해 줄 건데?
나는 물었다.
“아저씨. 맛있는 거 먹으면 저 보고 싶어요?”
“갑자기 왜.”
“빨리요.”
“딱히… 별로.”
뭐? 딱히… 별로?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심드렁한 말투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맞잡은 손이 떨어진다. 지금 뭘 들은 거지? 급작스럽게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 걸음 앞에 서 있던 강 대표가 내게 다가온다.
“아이고… 아가야.”
잔뜩 상기된 내 뺨을 쓸어내린다.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
“아저씨는 맛있는 건 너랑 먹지. 혼자 안 먹거든.”
“아….”
“보고 있는데 뭘 보고 싶어. 앞에 쳐다보면 되는데.”
강 대표가 씩 웃었다.
“우리 아가가 아저씨를 자꾸 시험하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래. 거창한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강 대표가 나를 조금만 더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보호자로서 좋아해 주는 게 아니라, 연인으로서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물론 보호자는 키스를 하지 않을 테니, 강 대표가 내 진짜 보호자가 아닌 건 잘 알지만… ‘예비 연인’으로서 그 비중을 조금만 더 높여 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제가 어떻게 아저씨를 시험해요.”
“…….”
“저는 맛있는 거 먹으면 아저씨 보고 싶거든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그냥, 궁금해서….”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려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차가움에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뜩 든다. 아이스크림 조각을 혀 위에서 살살 빨아서 녹여 먹었다.
“지금도?”
“네. 저는 막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데요. 누구랑 다르게.”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 조각을 우물거리며 답하자, 눈을 살짝 내리깐 강 대표가 내 뺨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나도 질세라, 새까만 눈동자에 담긴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틈없이 파고드는 시선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강 대표가 느릿하게 입을 연다.
“아저씨도 그래.”
“…….”
“단 거 보면, 너 생각나.”
중얼거리듯 읊조린 강 대표가 “가자. 늦었다.” 하고 먼저 등을 돌렸다. 나는 멀어져 가는 강 대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덜미가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생각을… 하긴 하나 보다. 그럼 이제… 사랑도 해 주나?
나는 서둘러 강 대표의 옆으로 뛰어갔다.
“아저씨. 아저씨. 그럼 오늘 우리 맛있는 거 먹을까요?”
강 대표가 설핏 표정을 구긴다.
“아… 오늘도 외근 나가요?”
“응. 너 데려다주고.”
조금 실망했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애새끼’처럼 보일 마음은 없었다. 강 대표의 말대로 우리는 함께 보낼 시간이 많으니까. 나는 최대한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바쁠 수도 있죠. 이번에도 인천항 가요? 저번에 건물 앞에서 아저씨들도 막… 인천항 가야 한다고 하던데.”
강 대표가 잠시 멈칫한다.
“…아니. 인천항은 이제 안 가도 돼. 물건이 도착했거든. 값도 치렀고. 누가 중간에 가로채 갔지만.”
항구에 물건이 도착했다. 값을 치렀다. 평범한 단어들의 조합인데, 강 대표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어쩐지 무시무시하게 들린다. 저런 말들은, 배신이 난무하는 누아르 영화 속에서 많이 들어봤는데…….
설마…… 마약은 아니겠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강 대표가 내 이마를 툭 쳤다.
“아!”
“이게 누굴 약쟁이로 보나.”
“…제가, 제가 언제요.”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인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에요.”
다 들켰다. 나는 횡설수설 둘러댔다.
“아니, 말을 그렇게 하니까 그렇죠. 막 영화 대사같이… 아저씨가 말하면 다 영화 속 대사 같단 말이에요. 잘생겨가지고.”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강 대표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는다. 마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가야.”
“네?”
“너는 가끔씩… 좀 뻔뻔한 구석이 있어.”
난데없는 타박에도 나는 히죽 웃었다.
“아저씨 지금 부끄러워서 그런 거죠? 다 알아요.”
강 대표가 입을 닫았다.
* * *
9월 모의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자습을 했다. 어차피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생활기록부는 물론 내신 또한 말아먹었기 때문에… 굳이 학교 내신 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선생님들은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내가 뭘 하든 간에.
“수업 끝. 반장 인사해라.”
포니테일 머리를 한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자가 드르륵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나도 반 아이들을 따라 “감사합니다.” 하고 입을 벙긋하며 소리 없는 인사를 했다. 내 시선은 여전히 모의고사 기출 문제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왜 또 연락이 없지?
아저씨. 오늘 급식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 나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