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3권) (7/14)

호텔 로비에서 스위트룸으로 올라오자마자, 나는 “먼저 씻을게요.” 하고 욕실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침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걸터앉은 강 대표가 심란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 보고는 “그래라.” 했다.

“…후.”

어떻게 호텔까지 오긴 왔는데…… 이제 어떡하지? 나는 소금기에 절어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

나는 오늘 강 대표를 자빠트릴 거다. 자빠트려서… 꼭, 확답을 받아낼 거다.

우리는 ‘그런’ 사이라고.

강 대표는 충분히 오리발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니, 먼저 자빠트린 다음에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은 반팔 티셔츠를 벗어 한쪽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동안, 머릿속으로 온갖 ‘수작질’이 스쳐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침대로 유인해서 자빠트리기, 자연스럽게 스킨십으로 자빠트리기, 자연스럽게…….

모두 이상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 없나?

나는 고심하며 평소보다 두 배 느리게 샤워를 했다. 평소대로 빠르게 씻고 나가면 강 대표가 나를 질질 끌고 호텔 방을 빠져나갈 것이 뻔하므로.

아니나 다를까,

“아가. 안에서 뭐 하니.”

30분 남짓 흐르자, 문밖에서 강 대표가 문을 두들겼다. 금방이라도 문을 따고 들어올 것 같은 음성으로.

“잠시만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뭘 해야 하지? 아직 확실한 방법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우왕좌왕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시간을 끌 방법이… 방법이…….

“아.”

나는 충동적으로 한쪽에 가지런히 올려 둔 내 티셔츠를 물이 반쯤 차오른 욕조 한가운데에 던져 버렸다. 반쯤 마른 옷이 한순간에 물에 흠뻑 젖어 들어가, 가라앉는다.

“아… 씨.”

…던지자마자 후회했다.

이건 아니지. 아홉 살 애새끼도 아니고. 강 대표에게 옷이란 그저 사 오면 그만인 걸. 드디어 ‘애새끼’에서 벗어났는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패잔병처럼 힘없이 욕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온 강 대표가 내 얼굴을 살핀다. 나는 부러 시선을 피하며 샤워 가운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감기 걸린다.”

강 대표는 마른 수건 하나를 집어 들곤 내 젖은 머리를 탈탈 털어 줬다. 마치 강아지를 목욕시킨 후 물기를 말리듯이.

“머리만 말리고 가자.”

“…….”

“아저씨도 빨리 씻고 나올게.”

하얀 수건이 시야를 살짝 덮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옷 없어요.”

“…….”

“지금 못 가요.”

“뭐?”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욕조를 가리켰다.

“네가 선녀와 나무꾼이야? 왜 옷을 던져.”

문제의 욕조를 확인한 강 대표가 어처구니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선녀도 아니고 나무꾼도 아니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작게 한숨을 쉰 강 대표가 “거기 서 있다가 자빠지려고.” 하며 나를 욕실 바깥으로 이끌었다.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아저씨.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그래. 여기선 말고.”

“아…!”

강 대표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대화를 시도하려는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 위에 앉혔다.

실패다. 내 ‘자연스러운’ 첫 번째 계획이 바로 차단당했다.

“아가. 왜 그러는데.”

“…….”

“백지오.”

한참 동안 망설이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정공법이다. 구질구질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진짜 좋아하면… 그런 건 전부 상관없어지는 거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니까.

나는 힘을 주어 강 대표를 불렀다.

“아저씨.”

“응.”

“우리 오늘부터 1일 맞죠.”

“…….”

“아. 빨리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짓던 강 대표가 결국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어깨가 작게 들썩이는 것이 보인다.

…비웃는 것 같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진지한데요.”

“아저씨도 진지해.”

“웃는 거 다 보이거든요?”

강 대표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웃을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 남은 엄청 진지한데, 면전에 대고 비웃다니.

설마… 고작 ‘키스’ 가지고는 ‘그런’ 사이가 되긴 부족하다 이건가? 나는 강 대표에게 내 첫 뽀뽀도 주고… 첫 키스도 주고… 다 줬는데.

“아저씨.”

“왜. 아가야.”

“아저씨. 저 먹고 버리시는 거예요?”

“뭐?”

순식간에 웃음기가 메마른 강 대표가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씹,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가지고 말을… 뭘 먹어, 먹기는.”

“그럼 우린 무슨 사이인데요. 왜 사귀자고 안 해요.”

나는 뚱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경직된 입가의 근육이 풀린 강 대표가 검지로 내 뺨을 살살 문지른다.

“지금, 그게 문제야?”

핀잔을 주는 말투와 달리 숨기지 못한 애정이 잔뜩 묻어나오는 음성이었다.

“귀엽기는.”

강 대표가 결국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아닌데… 이런 거 보면… 강 대표도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데. 혹시 내가 강 대표의 눈에는 너무 ‘귀엽기만’ 한 게 문제일지도 모른다.

“…저 안 귀여워요.”

나는 슬쩍 강 대표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단단한 근육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침대에 못 눕게 했잖아요, 아저씨가.”

“…….”

“그럼 아저씨랑 같이 소파에 있는 건 괜찮죠?”

“하.”

강 대표가 짧은 숨을 토해 냈다. 그 짧은 숨소리에는 한마디도 안 지네, 하는 뜻이 담긴 걸 내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강 대표가 나를 ‘그런’ 눈으로 봐줄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분위기만 잡힌다면.

나는 곧장 두 번째 계획을 실행했다.

“아저씨.”

“…왜.”

“제가 막… 예뻐 보인다면서요.”

전에는 막, 예뻐하지 않은 적이 없다면서요. 나는 강 대표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마치 뱀이 기어가듯이 허벅지를 살짝 쓸었다. 화들짝 놀란 강 대표가 내 손을 낚아채듯 잡는다.

“우리 아가가 손버릇이 더럽게 고약하네.”

하지 마라. 짓씹듯이 읊조린 강 대표가 여러 번 경고한다. 또 실패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 진짜…!”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고자예요?”

“뭐?”

“아! 왜 줘도 못 먹어요!”

“너, 누가 그딴 소리를… 이게 진짜 혼나려고.”

“제가 뭘요.”

“너는, 씹, 애가 왜 이렇게 저돌적이야? 네가 고삐 풀린 망아지 새끼야? 앞만 보고 달리게?”

강 대표는 당황했는지 목소리 끝이 튀었다. 이렇게 당혹스러워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닌데요. 저돌적인 게 아니고… 솔직한 건데요.”

나는 삐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강 대표가 진지한 낯을 했다.

“너 욕구불만이야?”

“네?”

“하고 싶어서 그래?”

적나라한 질문에 나는 눈알을 굴렸다. 솔직한 건 솔직한 건데… 이 정도로 솔직해도 되나 싶었다. 막, 내가, 엄청 욕구불만이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관계를 확실하게 정립하고 싶었던 건데.

눈을 살짝 내리깐 강 대표가 입술을 당겨 웃는다.

“괜찮아. 네 나이 때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만 맞아도 발딱발딱 세우는 거야.”

“…….”

“정 못 참겠으면 아저씨 얼굴 보면서 해.”

“네?”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

“…네.”

“거봐. 봐 줄 테니까. 해.”

강 대표가 내 손바닥을 끌어다가 본인의 뺨을 툭툭 쳤다. 손바닥 아래로 매끈한 살갗이 맞닿을 때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워진다.

“원하면 빌려주고.”

뭘 하는데? 뭘 빌려주는데? 얼굴은 왜…? 뭐에 쓰라고?

나는 얼빠진 얼굴로 강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대신 얼굴만이야. 손은 안 돼.”

능글맞은 음성이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손을 뒤로 거칠게 빼냈다.

“아! 됐거든요? 무슨, 얼굴… 얼굴에. 아저씨 변태예요?”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거절하자, 강 대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까불지 마라.”

“…알겠어요.”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몸에 힘을 풀자, 강 대표가 내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마저 닦아 내 준다.

“아가야.”

“…왜요.”

“아저씨는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기다릴 테니까 괜히 조바심 내지 마.”

강 대표가 정확히 핵심을 지적했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요. 좀 불안해서요.”

“뭐가.”

“지금 너무 행복해서… 전부 다 금방 사라질 것 같아서요.”

강 대표가 서서히 손에 힘을 푼다.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못 가져 본 것들을… 이렇게 쉽게 받아도 되나 싶기도 하고. 나중에 갑자기 다 사라져 버리면… 그땐 어떡하지 그런 생각도 들고요.”

“…….”

“뭐… 근데, 이건 사실… 제가 평생 빌려다 쓰는 인생이라서 그런가 봐요.”

나는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부러 가벼운 말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백지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저 지금 불쌍한 척하는 거 아니니까요. 진짜요.”

낮아지는 강 대표의 음성에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솔직하게요.”

여전히 묵묵부답인 강 대표의 눈치를 보며 사실을 덧붙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남의 걸 빌려다 쓰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그냥 말씀드린 건데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 강 대표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살살 어루만진다.

“지오야.”

“네.”

“아저씨는… 너한테 빌려준 적 없어.”

그는 비밀을 시인하는 사람처럼 속삭인다.

“그냥 준 거야. 처음부터.”

“…….”

“다 네 거니까, 갚을 생각 하지 마.”

늘 내게 졸업을 조건으로 ‘월세’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성실하게 이행하라고 겁을 주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원래 네가 다 받고 자라나야 마땅한 것들을… 아저씨가 돌려주는 거니까.”

부피를 가늠할 수 없는 애정이 느껴진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아저씨는 땅 파서 장사해요?”

“응.”

강 대표는 진지한 낯을 바꾸지 않고 속삭였다.

“너한테는 그래.”

“…….”

“그러니까, 너는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내가 주는 것만 잘 받아먹으면 돼. 지금도, 나중에도.”

나는 그 한마디에 강 대표에게 나를 ‘인정’ 받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관계가 정립되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강 대표가 좋아서, 죽을 것 같다.

* * *

“으음….”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습관처럼 부드럽고 물컹물컹한 쿠션 위에 뺨을 두어 번 문질렀다.

악몽 없이 이렇게 푹 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꿈결에 강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어젯밤, 강 대표와 도란도란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 입꼬리가 내려올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굳이 불편하게 소파에서 자겠다는 강 대표를 뜯어말릴 때를 빼고는.

근데 쿠션이 왜 점점 딱딱…….

“아가.”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아저씨?”

신문이 보였다.

“일어났으면 비키지?”

“…….”

“아저씨 다리 저리다.”

“아, 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감각이 남아 있는 내 뺨을 두어 번 슥슥 매만지자, 신문을 반으로 접은 강 대표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가서… 세수하고 와.”

“…아저씨.”

“씨팔, 남의 좆에 얼굴 문댄 게 누군데. 그딴 식으로 불러.”

“아저씨. 진짜 변태…….”

“단명이 소원이면 계속 떠들어.”

나는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뭘 봐.”

강 대표가 험악하게 읊조렸다. 살벌한 음성과 달리 귓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젯밤 강 대표가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해 준 것처럼, 나도 배려를 해야 했다. 나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일인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저씨. 섰어요?”

하지만 동시에 나는 변태처럼 실실 웃었다. 배려도 배려지만, 강 대표는 어젯밤 나를 실컷 놀려 먹기도 했으니까. 강 대표는 이제 소파에 한참 동안 앉아 있어야 할 테니, 나도 강 대표를 조금 놀려 먹는 게 뭐 어떠냐 싶었다.

강 대표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간다.

“우리 아가가 이제 내가 많이 편해졌나 봐.”

“…….”

“왜. 아저씨 도와주려고?”

크나큰 오산이었다. 강 대표는 흉흉하다 못해 흉측한 사이즈의 그것을 가리지도 않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뒷걸음질로 두세 걸음 물러날 때마다, 강 대표가 한 걸음 만에 쫓아왔다. 저게 원래 저 정도로, 부피감이…….

“왜 안 까불어.”

“…….”

“나 안 도와줄 거야?”

그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어… 제가, 그… 손으로요?”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다. 공중에 손을 흔드는 시늉을 해 보니까,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강 대표가 “너, 씹, 어디 가서 남들한테도 이러냐?” 하며 내 머리를 꾹꾹 눌렀다.

“누가 씨발 이런 개좆같은 소리를 하면, 그 새끼 좆을 까든가 해야지. 뭐, 도와줄까요? 손으로? 어떤 개씨발 좆같은 새끼가 가르쳤어.”

“……욕, 안 한다면서요.”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욕설이었다. 태어나서 욕을 하루 이틀 얻어먹은 건 아니지만, 강 대표가 하는 욕은 그 무게가 달랐다. 도와준다고 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다 강 대표한테 배운 건데. 조금 억울하고, 많이 무서웠다.

내 표정을 살피던 강 대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화장실로 질질 끌고 갔다.

나를 왜 화장실에 데려갈까? 화장실에서 뭘 하려고… 나 드디어… 드디어 하나? 마음 굳게 먹은 어제는 안 하고, 왜 오늘…!

머릿속에 별별 상상이 다 스쳐 지나가는데, 단단한 손가락이 스치듯이 내 목덜미를 쓸었다. 메마른 침을 삼키는 순간, 내 목덜미를 덥썩 잡은 강 대표가 세면대를 향해 내 고개를 살짝 숙이게 했다. 목덜미에서 심장이 쿵, 쿵, 쿵 울린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저씨….”

“입 다물어.”

“아, 차가!”

세면대에서 물이 거센 소리를 내며 콸콸콸 흘러나왔다.

“어으… 눈에 물, 물 들어가요.”

“눈 감아.”

커다란 손이 내 뺨을 박박 닦아 내기 시작했다.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것처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내 오른쪽 뺨이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어깨 너머의 강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강 대표의 턱이 꿈틀거린다.

“너, 진짜… 어쩌려고 이러냐.”

“…….”

“무슨 꼴을 보려고.”

“제가 뭘… 아!”

이번에는 미지근한 물이 얼굴을 덮쳤다.

“누가.”

나는 눈을 뜨려 노력했지만, 다시 성난 물세례가 쏟아졌다.

“사람 돌아버리게 그딴 식으로.”

결국 나는 눈을 꼭 감고 입을 다물었다.

“치대더니, 어?”

지는 태평하게 자빠져 자고 있질 않나, 남의 좆에 얼굴 문대더니, 도와준다고 하질 않나. 이게 진짜 대가리에 뭐가 들었지? 너 계속 까불다가 한번 크게 혼난다. 강 대표가 이를 악문 채로 경고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건 죄송해요, 했다.

“아저씨 근데요. 저는, 진짜 그냥 아저씨 도와주려고….”

“조용히 안 해?”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 * *

그날, 나는 강 대표에게 다시는 까불지 말아야겠다는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더 이상 관계를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바보 같은 짓도 하지 않았다. 강 대표가 나를 얼마나 ‘있는 힘껏’ 기다려 주고 있는지, 뼈저리게 알았기에.

그때 그… 말, 말자지 같은…… 그걸 본 이후로는.

강 대표는 정말 혼혈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꼭 진지하게 물어봐야지.

“으….”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한 방울 남은 홍삼 원액을 꿀꺽 삼키고 인상을 구겼다. 강 대표의 명령 아닌 명령이었다. 개학하기 전에 남은 홍삼 원액을 다 마셔 버리라는….

“그렇게 맛없어?”

“…아저씨가 드실래요?”

“아저씨는 없어도 괜찮다니까.”

네가 필요하지. 안경을 쓴 강 대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본 게 있어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조금 재수 없었다.

“표정 봐라.”

강 대표가 입술을 당겨 웃곤, 결재 서류 뭉치를 다시 잡아 든다. 그는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집중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강 대표는 종종 재택근무를 했다. 강 대표의 재택근무 스케줄에는 식사 챙기기, 건강식품—홍삼을 포함한 수많은 영양제들— 챙기기, 산책 시키기, 제시간에 재우기 등 내 건강에 관한 스케줄이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가끔씩 잠을 설칠 때마다, 눈을 뜨면 거짓말처럼 강 대표가 내 곁에 있곤 했다. 어쩔 때는 품에 밀어 넣고 등을 토닥여 주며 다시 잠을 청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의자를 끌고 와 침대맡에서 손을 잡아 준 채 잠에 들어 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온전히 사랑받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온전히 사랑받아 본 적도 없으면서… 이게 온전한 사랑인 걸 잘 알았다.

그걸 주는 게, 강 대표라는 것 역시 웃기는 점이었다. 사채업자 주제에. 다정하고 따뜻해서. 역시 강 대표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차라리 얼굴값을 했어야 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강 대표와 내가 만날 접점은 없었겠지만.

“후….”

나는 질세라 강 대표의 옆에 앉아, 영어 단어장을 펴 놓고 암기를 시작했다.

벌써 네 번째 외우는 단어장이라, 안 외워지는 것들만 따로 별표 표시를 해 놓은 탓에 양은 적었다.

근데… 집중이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아저씨. 저 졸려요.”

“가서 눈 감고 있어. 곧 갈게.”

“진짜 너무 졸려요. 졸린데… 잠이 안 와요.”

안경을 벗은 강 대표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손짓했다.

“…이리 와.”

나는 단어장을 들고 강 대표 곁으로 달려갔다. 확인하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려놓은 강 대표가 내 허리에 손을 휘감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이제 곧 성인인데… 한 손으로 가볍게 드는 건 사기 아닌가?

“아저씨.”

“왜.”

“저도 홍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운동 열심히 해서… 아저씨 나중에 들어 줄게요.”

“나중에 언제. 다음 생에?”

장난스레 대꾸한 강 대표가 거실을 가로질러 내 방으로 향했다. 나를 바삭바삭한 침대 이불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이내 데굴데굴 굴린다.

“아저씨!”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이불로 나를 돌돌 말아 버린 강 대표가 씩 웃었다. 옴짝달싹 못 하겠다. 내가 진짜 무슨 아홉 살 애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김밥말이를 하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 물론 내가 잘못한 전적이 있긴 하지만……. 도끼눈을 치뜨자, 강 대표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자.”

“…….”

“이야.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너. 아저씨 얼굴 찢어지겠는데?”

강 대표가 내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떼었다. 갑작스러운 뽀뽀에 내가 두 눈을 깜빡이자 강 대표가 씩 웃었다.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

“…….”

“우리 아가가 노려보다가 찢어지면… 나만 손해지.”

그러니까 아저씨 그만 노려봐라. 강 대표가 능글맞게 덧붙였다. 김밥말이의 여파로 바닥에 떨어진 단어장을 주워 든 강 대표가 내 너덜너덜해진 단어장을 눈으로 훑는다.

“근데. 너 요즘 공부 열심히 한다?”

강 대표가 작게 감탄했다.

“어떻게. 과외 선생을 붙여 줘야 하나….”

“대학생 과외요?”

“아니. 아저씨는 경력자만 취급해요. 20년 경력 정도는 되어야지. 기왕이면 머리 다 벗겨진 경력자로. 프로답게.”

프로의 기준이 조금 이상하다. 진심인가? 구하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내가 섣불리 대답하지 않자, 강 대표가 되물었다.

“왜. 대학생 과외 하고 싶어?”

“음.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요? 20년 전은… 학력고사 아니에요? 최근에 수능 본 사람이 해 주는 과외가 더…….”

그놈의 학력고사. 강 대표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아가. 한국대는 못 가도 인서울은 해야지? 대학생이랑 놀다가, 어디 인서울 하겠어?”

“언제부터 제 학력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어요.”

“처음부터.”

강 대표가 단호하게 못 박았다.

“서울에서 다녀.”

강 대표는 이렇게 극성맞았나 싶을 정도로 집요했다.

인서울. 내가… 할 수 있나? 나조차도 모르겠다. 물론 모의고사 성적을 7등급에서 5등급으로, 5등급에서 3등급 후반까지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인서울은 좀….

강 대표가 툭 던지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야 가까이서 편하게 다니지. 자취 안 하고.”

“…네?”

“네 집이 여기 있는데… 지방 내려가서 살 거야, 그럼?”

“아니요.”

나는 냉큼 대답했다.

내 집.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꼭, 강 대표와 둘이서 계속 살 거라고 가정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성인이 돼도, 우리의 ‘졸업’을 조건으로 한 월세 계약이 끝나도. 어렴풋이 성인이 되면 따로 떨어져 살 거라 생각해 왔는데…….

갑자기 의욕이 활활 불탄다.

“저 공부 열심히 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강 대표는 마치 선수를 격려하는 데 성공한 코치처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나를 돌돌 말고 있는 이불을 번쩍 들어 올렸다. 번데기처럼 침대 헤드에 나를 앉힌 강 대표가 껍질을 벗겨 내듯이 이불을 내 허리까지 끌어 내렸다. 그제야 양손이 자유를 얻었다. 내가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하며 까딱거리는 사이, 강 대표가 잠시 거실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손.”

강 대표의 손바닥 위에 순순히 손을 올리니, 차가운 금속이 오른쪽 손목에 와 닿는다. 강 대표가 느릿하게 그것을 내 손에 채운다.

“잘 맞네.”

“어, 이거….”

“저번에 맡긴 거 찾아왔어.”

강 대표가 천천히 내 손등을 뒤집었다. 고급스러운 손목시계였다. 강 대표의 것이었던 손목시계.

“하던 대로만 해, 아가야.”

“…….”

“잘할 거야. 열심히 하니까.”

강 대표가 내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뗀다. 간지럽다. 나는 부러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강 대표가 따라 웃었다.

“고마워요.”

“그래.”

“맨날 차고 있을게요. 잘 때도, 공부할 때도, 학교에 갈 때도. 아, 씻을 때만 빼고요.”

강 대표가 여전히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그래라.” 했다. 나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제 아저씨 시간, 저 다 주신 거죠?”

그 말까지 기억할 줄 몰랐다는 듯, 그가 연신 헛기침을 하며 “그런 걸 왜 물어.” 했다. 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귓불이 점차 붉어지는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진실을 말해 주는 법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강 대표를 덥석 껴안았다. 사실상 품에 폭 안긴 것에 가까웠지만.

강 대표는 “애가, 왜 이래… 네가 강아지야?” 하면서도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한참 동안 강 대표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귓가에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강 대표 때문이었다.

“이제 자야지. 졸리다며.”

사실 강 대표랑 대화하고 싶어서 둘러댄 거였는데…….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전에, 강 대표가 나를 침대 위에 똑바로 눕혔다.

“아가야. 너 개학할 때 맞춰서 아저씨 출장 다녀와야 할지도 몰라.”

인위적인 형광등을 끄고 은은한 간접 조명등의 밝기를 세심하게 맞추던 강 대표가 흘러가듯이 말했다. 나는 가장 최근 강 대표가 ‘출장’ 다녀왔다고 말한 곳을 떠올렸다.

“인천항에요?”

“그래. 인천항도 다녀와야지.”

강 대표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든다.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 기색이었다.

“왜요?”

“…….”

강 대표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강 대표가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저씨 출장 가면, 너 며칠 동안은 혼자 자야 해. 할 수 있어?”

어이가 없었다.

“제가 아저씨 눈엔 아직도 애새끼로 보여요? …할 거 다 해 놓고.”

“야. 뭘 다 해.”

빠르게 반박한 강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강 대표는 말을 고르고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내 악몽에 대해서, 내 아빠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만, 조심스러운 것 같았다.

“괜찮아요.”

나는 선수를 쳤다. 강 대표의 미간이 설핏 구겨진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냥 한 소리 아니에요.”

“…….”

“아빠는…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아저씨 말대로.”

“표정은 죽상을 해가지고 그런 말 하면 누가 믿겠냐.”

“진짠데요.”

강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

“…….”

짧은 침묵이 흐르고, 두 눈을 살짝 감았다 뜬 강 대표가 수긍했다.

“그래. 원래 부모 같지 않은 부모도 포기가 어려울 수 있지.”

“…아저씨도 그런 적 있어요?”

“아니.”

강 대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저씨는 바로 손절 했지.”

“아.”

내가 짧은 탄성을 뱉자, 강 대표가 지나가는 말투로 “보고 배운 게 이딴 거밖에 없어서 결국 깡패 짓이나 하고 살지만.” 했다.

나는 작은 단서 하나 놓치지 않고 되묻는다.

“보고 배운 거요?”

“내 애비도 깡패 새끼였거든.”

“…….”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됐어. 처음엔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같이 살았어요?”

“응. 일 년 정도는.”

“그 뒤로는요?”

“그 뒤로는… 독립했지. 영원히. 야구 방망이로 얻어맞다 뒈질 뻔했거든.”

강 대표가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직접 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사무실 구경을 하다 얻어걸린 야구 이야기를 제외하곤.

…그래서 야구 방망이만 봐도 지겹다고 한 거였구나. 좋아하는 야구가 싫어질 정도로 맞았던 걸까?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끼리는 감정이 쉽게 통하는 게 맞았다.

나는 ‘아저씨도… 가족 때문에 포기한 게 많아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는다. 나는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기에. 물론 궁금하지만, 강 대표가 직접 말해 줄 때까지 참을 수 있다.

게다가 나에게는 그것보단… 더 큰 문제가 있으니까.

나는 몸에 힘을 꽉 주고 강 대표를 응시했다. 내 표정을 살핀 강 대표가 내 뺨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왜 또 그런 얼굴을 해.”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강 대표 같은 사람도 결국 보고 배운 게 깡패 짓이라 깡패 짓을 한다고 했는데… 그건 직업이라도 있지. 나야말로 딱히 보고 배운 게 없었다. 아빠에게 배운 거라곤, 돈 여기저기서 빌리기, 매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기, 물건 집어 던지기…… 또…….

한숨이 나오는 목록이다.

강 대표랑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좀 잘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거 같은데…… 앞길이 캄캄했다.

불안감이 문득 엄습한다.

만약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면, 좋은 직장을 못 얻게 되고… 그러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남게 될 테고… 사람들이랑 여기저기 ‘악수’하러 다니느라 바쁜 강 대표는 나보다 더 잘나가고, 나보다 더 예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던 나는 소심하게 고민을 토로했다.

“제가… 잘 살 수 있을까요.”

“아저씨도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잘 모르지.”

“…….”

“그건 너만 아는 거야.”

강 대표가 선을 그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이 담긴 음성으로.

“네가 정답이거든.”

뭘 하든 간에.

이상하게도 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제대로 한번 살아 보고 싶어졌다.

* * *

요즘 내 생활 패턴은 지극히 단순하다. 눈을 뜨고, 공부를 하고,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놀다가 잔다.

말 그대로, 제대로 된 고3 수험생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내가 짠 방학 시간표를 확인했다.

9:00 - 10:00 침대 위에서 눈 뜨고 누워 있기

10:00 - 12:00 공부 - 오답노트 확인

12:00 - 13:00 식사하기 (w 강 대표)

13:00 - 18:00 공부 - 모의고사 기출

18:00 - 19:00 식사하기(w 강 대표)

19:00 - 21:00 공부 - 영어 단어 암기

21:00 - 22:00 자유시간(w 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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