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대표의 협박 아닌 협박을 받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매일 매일 외출을 했다. 표면적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친구들과 즐기기 위해서였지만… 사실 강 대표와 집에서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아저씨. 저 친구랑 편의점이요. 고민 있다고 해서 들어주느라 늦어요.’
‘그래.’
‘아저씨. 저 친구랑 소떡소떡이랑 핫도그 사 먹었어요.’
‘응. 잘했어.’
‘승급전 딱 한 번만 도와 달라고 해서 PC방 들렀다 가려고요. 좀 늦어요.’
‘…또?’
‘저 사거리에 있는 서점 왔어요. 수학 문제집 사러 왔는데… 찾는 게 없어서 못 샀어요. 친구랑 학교 앞 서점까지 가 볼 것 같아서 아마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뭔, 씨팔, 대형 서점에 책이 없어.’
주로 그런 식이었다.
나는 강 대표가 ‘협박’한 대로, 한 시간에 한 번씩 카드를 쓰고 정각마다 전화를 했다. 강 대표는 빠짐없이 내 전화를 받았고, 나는 거짓말이 점점 늘어갔다.
은연중에 내가 피하는 걸 느꼈는지, 강 대표는 더 이상 거실 소파에 나와 있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서로 얼굴을 본 지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아… 지겹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빨대로 콜라를 쭉쭉 빨았다. 할 일도 없는데, 늘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도 고역이었다.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한참 동안 지나가는 사람 구경을 하던 나는 고개를 젖혔다. 푸른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평화롭다.
자고로 평화는 깨지기 전에 지키는 거라 했다. 나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의 마음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핸드폰 액정 속 최근 통화 목록을 가득 채운 이름을 꾹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상대방의 음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넘어온다.
—응.
“아저씨. 저 아까 불고기 버거 세트 사 먹었어요.”
—누구랑?
“친구랑요.”
—친구, 누구.
곤란하다. 평소보다 더 디테일을 요구하는 답변에 나는 부러 삐딱하게 받아친다.
“말하면 알아요?”
—알지. 어제 그 친구?
“아니요. 오늘은 다른 친구요. 어… 한 살 많은 형이요.”
—아… 다른 친구.
강 대표의 말투가 의미심장했다. 꼭, ‘아가야. 너 친구 없잖아?’ 하고 되묻는 것만 같았다. 순간 식은땀이 솟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네. 다른 친구요. 아저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 친구 많거든요.”
—이야, 인기 많네.
“네. 많죠.”
사실은 없다. 친구도, 인기도. 하지만 강 대표는 잘 모르니까.
—그래서 오늘은 왜 늦게 들어와.
“늦게 들어간다고 안 했는데요.”
—그래?
금방이라도 ‘어디야. 데리러 갈게.’라고 말할 것 같은 음성이었다. 나는 손톱 거스러미를 툭툭 뜯어냈다.
“아… 잠시만요.”
나는 통화 화면의 ‘소리 끔’ 버튼을 누르고 무음 상태로 속으로 10초를 셌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형이 자꾸 불러서요. 이제 후식 먹으러 가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아마 오늘도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강 대표가 호응하듯 덩달아 건조한 웃음을 터트린다. 왠지 오싹한 웃음이다.
“죄송해요. 끊을게요, 아저씨.”
나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바보 같은 짓인 건 알지만, 도저히 강 대표의 얼굴을 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나는 핸드폰 액정을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밀어 내렸다. 그날, 남겨진 부재중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38통.
누가 전화를 이렇게 무식하게 하지? 전원이 꺼졌으면 꺼진 줄 알지. 잠깐 나간다고 한 거 가지고. 그러는 본인은 원래 일주일 만에 집에 들어오든, 한 달 만에 들어오든 간에 나한테 연락 한 통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그래서다. 강 대표의 얼굴을 보는 순간, 크나큰 망상을 품을 것만 같아서. 어쩌면 강 대표가 ‘채무 금액’이 아닌 나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또 착각할까 봐, 도저히 강 대표와 대면할 수가 없다. 만약 다시 한번 착각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빠드득.
밀려오는 참담한 상상에 플라스틱 콜라잔을 있는 힘껏 쥐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컵이 찌그러지고, 빨대가 끼어있는 컵 리드가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나는 헐레벌떡 달려갔다. 지나가는 행인의 하얀 러닝화 앞코에 콜라 몇 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나는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건네주는 빨대 꽂힌 컵 리드를 받아들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현금은 없고, 강 대표가 준 카드밖에 없는데. 계좌 번호를 받아야 하나?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진짜 죄송합니다. 어… 어떡하지. 저기,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서요. 계좌 번호 찍어 주시면 바로 세탁비 드릴게요.”
“괜찮아요, 학생.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 이거 몇 번 문대면 지워져요.”
남자는 꽤나 털털한 성격인 듯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학생” 하고 부르는 게, 꼭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물론 얼굴은 아니지만.
내가 핸드폰을 남자 쪽으로 들이민 채 머뭇거리자, 남자가 짐짓 심각한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죠?”
“어, 그건 아닌데요. 진짜 실수로… 죄송합니다.”
“실수면 됐어요. 괜찮아요.”
남자가 미소 지으며 눈인사를 했다. 내 어깨를 툭툭 쳐 주면서, 안심을 시켜 주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생판 모르는 남이 보여 주는 호의에 나도 미소로 화답했다.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저만치 뛰어가는 남자를 보며 나는 등을 돌려 근처 쓰레기통에 플라스틱 콜라잔과 리드를 모두 던져 넣었다.
“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 똑바로.”
강 대표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을 되뇌며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또 어딜 가지. 이러다가 장거리 마라톤에 나가도 될 지경이다. 매일매일 방황하며 하염없이 걷기만 해서.
수능 끝나면 한번 해 볼까…… 마라톤. 어쩌면 숨겨진 재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운동은 싫어해도 옛날부터 사채업자가 쫓아오면 냅다 도망치는 건 잘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공원 입구로 빠져나갈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냥 부르는 것치고는 힘이 조금… 과했다.
“학생.”
중저음의 음성, 낯익은 호칭. 분명 세탁비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새 마음을 바꿨나…? 그냥 처음부터 달라고 하지.
“학생.”
되풀이되는 목소리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근데, 진짜, 이 목소리는 너무 닮았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만 돌렸다. 낯익은 가슴팍이 보였다. 고개를 슬쩍 위로 들며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왜.”
“…….”
“못 볼 것 봤어?”
일주일 만에 보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까는 싱글싱글 예쁘게 잘 웃더니 왜 죽상을 하고 그래, 아가야.”
능글맞은 어투와 달리 눈을 내리깔아 촘촘해 보이는 속눈썹 아래로 이상하리만치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아저씨, 섭섭하게.”
강 대표였다.
“아저씨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어요?”
“왜. 나랑 마주치면 안 돼?”
강 대표가 비뚜름한 미소를 짓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열 받은 것처럼 보였다.
설마 내가 먼저 전화를 끊어서 화났나? 아님 지금까지 한 거짓말들을 모두 들켰나? 설마 혼자 다니던 걸 들킨 건 아니겠지?
…사실 짐작 가는 이유들이 너무도 많아 잘 모르겠다.
속이 시끄러워진다. 나는 메마른 침을 삼키며 부러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놀라서요. 저는 아저씨가 당연히 사무실에 계실 줄 알았죠.”
“친구는.”
강 대표는 대답 대신 질문으로 답했다. 내가 바로 답하지 못하자, 강 대표가 추궁하듯 말을 이었다.
“후식 먹으러 간다며.”
“…….”
“왜 바로 헤어졌어.”
아까 그 남자를 언뜻 보고 친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타이밍도 좋지. 둘러댈 수 있는 변명이라도 생겨 다행이었다.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원래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바쁘다고 해서요.”
“그래?”
“네.”
“그럼 후식은 어쩌고.”
“아…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잠깐 편의점 들렀다 가면 되죠.”
이 와중에 후식을 챙길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대충 둘러댔다. 강 대표는 바쁜 사람이니,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 거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알리바이용 간식을 잔뜩 사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 집에서는 따로 전화할 필요는 없으니, 영수증만 거실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머릿속으로 완벽한 탈출 계획을 짜고 있는데….
“그래. 가자.”
강 대표가 예고 없이 내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뒤로 슬쩍 빼냈다.
“하….”
강 대표가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가가 틈만 나면 도망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니까….”
“…….”
“아저씨가 더 기를 쓰고 막고 싶네.”
강 대표가 짧게 한숨을 토해 냈다.
“오늘은 친구 없으니까 아저씨랑 가. 도망칠 생각 하지 말고.”
나는 움찔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강 대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도망 다닌 게 아니라, 평화를 지키고 있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변명 아닌 변명을 꾸역꾸역 삼키며, 속으로만 투덜댔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 * *
“저는 편의점 갈 생각이었는데요….”
나는 질린 눈으로 강 대표를 바라보았다. 강 대표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응수한다. 그 와중에도, 손가락만 한 디저트가 고급스럽고 커다란 접시 위에 줄줄이 담겨 나왔다. 망고 젤리, 망고 케이크, 망고 빙수로 시작한 디저트 세트는 치즈를 거쳐 초콜릿으로 테마를 바꿨다.
분명 이 광경,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데자뷔 같은데.
내 표정을 살피던 강 대표가 가볍게 턱짓했다.
“왜. 너 이거 좋아하잖아.”
“제가요?”
금시초문이다.
“불량식품 좋아하잖아, 단 거.”
“…….”
“아가야, 많이 먹어.”
강 대표가 입술을 당겨 웃었다.
“부족하면 말하고.”
이미 차고 넘치다 못해, 입 안이 달았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디저트는 질려서 못 먹을 수준으로.
설마 노린 건가.
아니면 강 대표가 나한테 뭐, 바라는 게 있나……?
나는 반절 남은 초콜릿 무스 케이크 앞에 손에 든 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항복의 표시로 고개를 젓자, 강 대표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 대표는 내 손을 끌고 고급스러운 호텔 레스토랑에서 빠져나와 그 옆에 위치한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난생처음 오는 명품관의 분위기에 짓눌려 강 대표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는데, 강 대표가 별안간 뚝 멈춰 선다.
쿵.
단단한 등에 이마를 제대로 박은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심드렁한 얼굴로 ‘지금 시비 거냐?’ 할 것 같았던 강 대표가 “어디까지 가. 이리 와.” 하며 손짓했다.
“카드는.”
“여기요.”
나는 바지 주머니에 곱게 넣어 둔 블랙 카드를 얼른 내밀었다. 강 대표는 카드를 받아 드는 대신 마네킹이 입고 있는 심플한 로고 반팔 티셔츠를 향해 눈짓했다.
“가서 써.”
“네?”
“아저씨가 너 카드 쓰는 법까지 알려 줘야 해?”
“…쓰는 법은 아는데요.”
“난 또. 우리 아가가 카드 쓰는 법을 몰라서 못 쓰는 줄 알았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강 대표의 카드를 사용하며, 찰나의 자유를 차곡차곡 쌓여 가는 빚과 등가 교환하는 멍청한 선택까지 했는데… 내가 카드를 쓸 줄 모른다니. 내가 무슨, 유치원생도 아닌데.
“저 매일 매일 쓰는데요?”
“알아.”
“…네?”
“그럼 뭐해. 제대로 쓸 줄을 모르는데.”
“예?”
나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얼이 빠진 채, 강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귀엽기는. 강 대표가 내 뺨을 검지손가락으로 톡 치며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카드사에서 자꾸 확인 전화 와. 카드 분실됐냐고.”
“카드사에서 전화가 왜 와요?”
“그러게. 누가 한번 긁을 때마다 천 원 단위로 찔끔찔끔 긁나 보지.”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이다.
“아….”
그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한 나는 시선을 돌렸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결제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결제 금액이 적다고 카드사에서 직접 전화할 줄이야. 신용카드는 한 번도 안 써 봐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도 몰랐다.
돈을 써도 뭐라고 하다니… 세상에 무슨 그런 불합리한 일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 하긴, 원래 세상은 불합리한 곳이지만.
“아가야.”
내 표정을 살피던 강 대표가 진지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가난도 습관이다.”
“…….”
“한 푼, 두 푼 궁상맞게 푼돈 아끼다간 인생 고달파진다고. 습관 한번 잘못 들여서, 앞으로 너한테 다가올 수많은 기회들 어영부영하다가 다 놓칠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강 대표가 내 오른손을 잡아 끌어와 손바닥 위에 카드를 내려놓는다.
“꼭 먹는 것에만 쓰지 않아도 돼. 심심하면 이것저것 해 보든가. 돈 주고 살 수 있는 경험은, 그냥 한번 해 보는 것도 중요한 거야. 그래야 시야가 넓어지거든.”
“…….”
“시야가 넓을수록, 기회도 잘 보이는 거야. 돈 벌 수 있는 기회도, 잘 살 수 있는 기회도.”
그렇다고 이상한 경험을 돈 주고 사라는 건 아니지만. 강 대표가 덧붙였다. 듣다 보니 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채업자한테서 나오는 말치고는.
“네.”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자 강 대표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너. 진짜 이상한 거 하면 죽는다.”
“뭐요?”
잠자코 듣고 있던 내가 발끈하자, 강 대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님 말고.”
강 대표가 내 등을 슬쩍 떠밀었다.
“아무튼 돈도 써 본 놈이 쓸 줄 안다고. 지금부터 연습해야지?”
“…….”
“정 모르겠으면 아저씨가 알려 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니에요.”
내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카드를 꽉 쥐고 버티자, 강 대표가 물었다.
“왜. 같이 가 줘?”
“그게 아니라….”
좋은 말이다. 좋은 말인데… 그것도 형편에 맞는 사람이나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게 좋다고 해도, 여기서는 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명품관인데. 모르긴 몰라도 엄청 비쌀 거다. 미래의 내가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는 결국 수치스러운 마음을 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알겠는데요. 제가 원금만으로도 좀… 벅차서요.”
강 대표는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삐딱하게 고개를 젖혔다. 마치 내가 지금까지 하루에 만 원 이하로만 쓴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는 험악한 얼굴을 하고선.
“내가, 씨팔, 구멍가게 장사하냐. 그딴 사소한 것까지 빚으로 달아 놓게?”
“…제가 얼마나 쓸 줄 알고요.”
“한번 해 봐. 아저씨 놀라자빠지게.”
강 대표가 내 등을 힘주어 떠밀었다. 검정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찾으시는 제품 따로 있으십니까?”
“아, 없는데요….”
“상의는 M, 바지는 29 아니, 30으로 주시고. 옷은… 요즘 애들이 입는 걸로 전부 가져다주시죠.”
전부. 마법 같은 한 단어에 직원은 자본주의의 스위치가 눌린 사람처럼 마네킹이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는 물론이고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맨투맨부터 부드러운 털이 박혀 있는 옷들까지 모조리 골라왔다. 강 대표는 ‘사소한 것’이라고 했지만, 직원의 손에 들려 있는 옷들의 가격표는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자. 가서 입어 봐.”
“이걸… 다요?”
“응.”
나는 쭈뼛거리며 옷들을 받아들고, 강 대표에게 떠밀려 탈의실로 향했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하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부자 걱정이라 했다. 나는 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벗어냈다.
“…뭐부터 입지.”
“저거.”
“아…!”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나는 티셔츠로 황급히 몸을 가렸다. 강 대표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볼 거 다 봤는데 뭘 새삼스레 가려.”
언제? 어디서? 내가 언제? 강 대표가 내 몸을? 어디까지…? 속이 다시금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강 대표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너 예전에 입원했을 때 누가 씻겨 주고, 입혀 줬을 것 같아.”
“어… 간호사 선생님?”
“간호사?”
강 대표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간호사가 널 왜 씻겨. 이거 불손한 새끼네. 어디서 이상한 것만 보고 배워가지고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다 간호사 선생님 아닌가? 당황한 내가 눈알을 굴리는데, 강 대표가 험악한 음성으로 “간병인, 간병인. 새끼야.” 했다.
“아, 말 잘못 했어요. 간병인 선생님이요….”
“어디 가서 말실수해라, 또.”
“안 할게요.”
그제야 강 대표의 미간이 펴졌다.
“근데요, 아저씨.”
“왜.”
“다… 보셨어요?”
“뭘.”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 끌었다. 내 시선을 따라가던 강 대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볼 것도 없던데.”
“아저씨!”
“아저씨 귀청 떨어진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 강 대표를 노려보았다. 솔직히 좀 억울했다. 마음을 받아 줄 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아니면서, 왜… 왜 헐거 벗은 몸을 보는지 모르겠다. 강 대표가 헛기침을 하며 변명한다.
“그럼 삼 일 동안 먼지 구덩이에서 식은땀 범벅으로 있던 애, 그냥 내버려 둬? 이게 은혜도 모르고 변태 취급을 하네.”
아저씨가 아파서 쓰러져 있는 애한테 딴생각 품는 씹새끼는 아니에요. 강 대표가 ‘씹새끼’를 강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금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다시 기절하고 싶었다.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강 대표가 나를…….
“그럼 다른 사람한테 시키면 되잖아요. 가오리 아저씨라든지….”
“뭐?”
강 대표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너는, 씹, 생판 모르는 남한테 네 몸을 맡기고 싶냐?”
“……아저씨도 남인데요.”
잘생긴 이목구비에 일순 표정이 사라진다. 강 대표가 늘 강조하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
“…….”
짧은 침묵이 흐른다. 강 대표는 대꾸하지 않고 홱 등을 돌려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아, 보호자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님, 그냥 고개만 젓고 말걸. 괜히 있는 그대로 대답해서 마음이 찝찝해졌다.
따지고 보면, 강 대표 말에 틀린 곳이 없는데……
그냥 내가 아직… 미련을 못 버려서 그렇다.
아무리 이뤄질 수 없는 마음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추한 모습 같은 건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인 거다. 물론 이미 못난 모습을 많이 보여 주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모습만 내보이고 싶었던 것뿐인데.
“후우….”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계절 감각을 잃은 옷들을 제외하고 반팔 티셔츠들만 얼추 추려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강 대표는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낯설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선. 흡사 직원과 대치 상태로 서 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었다. 눈치 빠른 직원은 내 뒤에 서 있는 강 대표를 향해 물었다.
“일시불로 도와드릴까요?”
“…….”
“아니요, 어… 네.”
“네. 일시불로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대답 없는 강 대표 대신 내가 뻘쭘하게 대답하자, 직원이 재빠르게 카드를 받아내 결제를 완료했다. 기계에서 길쭉하게 빠져나오는 영수증을 보며 감탄하기도 잠시,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다른 매장으로 끌려갔다.
경험을 사는 일은… 생각보다 고달팠다. 강 대표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손에 쇼핑백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종국에는 열 개가 넘어가는 쇼핑백들이 걸을 때마다 다리를 쳐대서 걷는 데 불편할 정도였다. 길쭉하게 출력되는 영수증을 보고 속으로 감탄하는 것도 다섯 번째 쇼핑에서부터 그만뒀다.
나는 걸리적거리는 쇼핑백을 무릎으로 툭툭 치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손에 든 쇼핑백을 고쳐들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강 대표가 뒤를 홱 돌아본다. 쇼핑 내내 생각에 잠겨 얼빠진 사람처럼 굴던 것치고는 꽤 매서운 반응 속도로.
“너….”
강 대표가 쇼핑백에 가려진 내 하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쇼핑백이 언제 자가복제라도 했냐는 눈빛이었다. 직원들이 마구잡이로 추천하는 옷들에 시선조차 던지지 않은 채, 전부 결제를 해 버리는 본인 때문에 쇼핑백이 늘어난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너는… 씨팔, 말을 해야지.”
“네?”
“거기 앉아 있어.”
작게 욕설을 짓씹은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우락부락한 아저씨 세 명이 몰려왔다. 평화롭게 쇼핑을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에 쏠렸다. 앞으로 튀어나와 직각 인사를 선보인 아저씨가 금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대표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강 대표가 손을 까딱였다.
“우리 학생이나 집까지 잘 모셔다드려. 딴 길로 안 새게.”
강 대표는 ‘학생’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움찔했다. 오늘따라 유독 학생이라고 많이 부르는 것 같은 건 단순히 내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좀… 많이 쪽팔릴 테니까.
강 대표가 말했다.
“먼저 들어가.”
“…네.”
강 대표의 손짓에 우락부락한 아저씨들 중 비교적 순하게 생긴 아저씨가 내 손에서 쇼핑백들을 단번에 앗아 갔다. 그제야 피가 통한 손에 전기가 찌르르 올랐다.
으. 기분 이상하다. 티 나지 않게 손을 살짝 터는데, 강 대표의 미간이 설핏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다음 일정이 현장이었나?”
“네. 태항건설 하청업체 관리하는 임 사장 건입니다.”
“기다리라고 해.”
“…예?”
금니 아저씨의 얼빠진 음성에도 강 대표는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자.”
“…아저씨 바쁘신 거 아니에요?”
“안 바빠.”
분명 바쁜 것 같은데….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강 대표가 내 어깨를 다시 한번 감싸며 말했다.
“아가야. 원래 일을 할 땐….”
“…….”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하나씩 처리해야 하는 거야.”
분명 강 대표가 좋은 마음으로 데려다주려는 건 알겠는데… 좀 무서운 말이었다.
* * *
강 대표의 손에 떠밀려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입구 바로 앞에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정차했다. 뒷좌석에 타려는 순간, 강 대표의 핸드폰이 울린다.
[인천 김실장]
빛나는 푸른 화면이 뱉어 낸 이름을 확인한 강 대표가 내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마치 들키기 싫은 전화처럼.
“…….”
“…….”
지잉, 지잉.
침묵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린다. 그제야 강 대표가 먼저 타라고 눈짓했다. 안 그래도 타려고 했다. 나는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듯이 올라탔다.
쾅.
힘 조절에 실패해 문이 생각보다 거세게 닫혔다. 반항한 것처럼 보일까 봐, 나는 슬쩍 창문 밖 눈치를 봤다. 다행히도 창문 밖에서 강 대표는 통화에 집중한 듯 보였다.
“하이고… 없는 아도 떨어지긋다.”
운전석에 탄 아저씨가 낄낄대는 농담조로 읊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우락부락한 근육에 목만 돌리는 것이 불가한지, 상체가 반쯤 기울어진 상태로.
“동기야. 잘 있었나.”
가오리 아저씨였다.
“이야. 얼굴 폈네. 딴 사람 같다.”
솥뚜껑 같은 손을 들어 올리는 그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안녕하세요.”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벨트 매라. 오늘은 토낄 생각 말고.”
“저 도망간 적 없는데요.”
내 칼답에 가오리 아저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낄낄댔다.
“안 도망가긴. 니 없어짔다 할 때마다 내 간이 철커덩 철커덩 한다. 아가 와 그리 싸돌아다니나.”
“제가 언제…….”
일순, 부재중 통화 38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저씨도… 저 찾으러 다녔어요?”
가오리 아저씨는 그 ‘아저씨’가 강 대표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는 강 대표의 부재로 인해 말문이 트인 가오리 아저씨의 사투리 가득한 무용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신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채워진다.
강 대표가… 강 대표가 나를 찾아 헤맸을지도 모른다고.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나를 ‘애타게’ 찾아 헤맸을지도 모른다고.
애초에 가오리 아저씨는 강 대표의 명령이 아니면 나를 찾으러 다닐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이건,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 아닌 거다.
“아니요. 아저씨 말고… ‘우리’ 아저씨요. 대표님이요.”
신나게 떠들던 가오리 아저씨가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문다. 나는 이참에 꼬치꼬치 캐물을 요량으로 상체를 쭉 앞으로 빼고 “동기 아저씨.” 하고 불렀다. 당황한 가오리 아저씨가 “아가 와 이라노. 안 비키나.” 했다. 덩치 큰 아저씨가 움직이니까 차체가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툭툭.
때마침 두들겨진 창문에 가오리 아저씨가 곧장 창문을 아래로 내렸다.
“씨팔, 뭐하냐.”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비스듬히 세운 강 대표가 작게 욕을 씹었다.
“네가 왔네?”
“대표님 모시는데 제가 안 오면 누가….”
“진용아. 내려라.”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예. 대표님.”
가오리 아저씨가 운전석에서 빛의 속도로 내렸다. 강 대표가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가고, 도로로 진입하는 동안 나는 손톱을 톡, 톡, 톡 건드리며 백미러로 강 대표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
“…….”
백미러 속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점점 가늘어진다.
“아가야.”
“…네?”
“할 말 있으면 해. 똥강아지처럼 눈치 보지 말고.”
나는 망설이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아저씨. 혹시 오늘… 저 따라오셨어요?”
“어.”
예상외의 솔직한 답변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요?”
“왜긴. 네가 자꾸 집에 안 들어오려 하니까 잡으러 왔지.”
네가 가출 청소년이냐? 적당히 해라. 강 대표가 이를 악물고 웃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내가 입술을 앙다물자, 강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너 인마, 깡패 새끼들 무섭다며. 말만 씨팔. 겁대가리 없이 친하게 지낼 생각 하지 마라.”
“…….”
“길 가다가 모르는 새끼한테 말 걸지도 말고. 그 새끼가 어떤 새끼인 줄 알고 들이대. 이게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역시 다 지켜본 것 같다. 나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시에 삐딱한 의문이 생겼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거짓말을 한 걸 다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했으면서, 오늘은 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거지? 일주일 내내 서투른 거짓말을 용인하며 꾹꾹 눌러 참다가 인내심이 폭발해서?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람한테 핸드폰을 들이미는 걸 봐서?
그것도 아니라면….
“내일은 하루 쉬어. 나가지 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너도… 아무한테나 가서 들이대지 마. 알았어?’
만약 강 대표가 그 팀장 누나랑 정말 ‘그런’ 사이가 아니라면, 정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들이댈까 봐 내가 뱉었던 말을 모두 기억해 다시 뱉은 거라면….
필사적으로 억누른 마음이 자꾸만 부풀어 오른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저씨. 제가 다른 사람한테 들이대는 게 싫으세요?”
끼이익.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몸이 앞으로 쏠린다. 순식간이었다. 강 대표의 단단한 팔이 보호하듯 뻗어 나와 내 몸이 튀어 나가는 걸 막았다.
깜짝 놀란 내가 “으…! 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자, 강 대표가 바로 차선을 바꾸어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안전벨트를 푼 그가 내 뺨을 양손으로 감싸듯 잡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내 턱이 움직이자, 강 대표의 단단한 손가락도 덩달아 움찔거린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황급히 손을 거둔 강 대표가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운전을 이상하게 해서 머쓱한 모양이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강 대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냥 물어본 건데요.”
“…….”
“전에도 아저씨 시간 다 줄 테니까 아무한테나 들이대지 말라면서요.”
지나간 일을 이런 식으로 들추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일이지만, 나는 아직 어른이 되기까지 4개월이나 남았으니까 괜찮다. 게다가 중요한 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먼저 말한 건 강 대표다.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자꾸 착각하게 만들고, 오해하게 만드는 강 대표가 못된 거다.
“그런 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들이대는 게 싫은 게 아니면. 그때, 왜 그런 말 하셨는지 이해가 안 가서요. 저한텐 좀 중요한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강 대표가 답변을 회피할 것만 같아, 나는 쐐기를 박았다.
“제가 갑자기 미련이라도 남아서, 아저씨 다시… 좋아한다고 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좋아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협조해 줘야죠.”
잘생긴 이목구비 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얼마나 당황한 건지, 귓불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건, 새끼야… 그냥 그런 거지. 너는 사리 분별 없이 무작정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경향이 있거든. 겁도 없이.”
그러다가 어디 으슥한 데 끌려가서 장기 다 털리면 어쩌려고, 아가야. 오래오래 살아야지, 응? 강 대표가 이상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강 대표는 내 장기가 털리든 말든, 내게서 돈을 회수할 능력이 충분히 있다. 내가 궁금한 건… 왜 강 대표가 굳이 본인의 시간을 내게 내주면서까지 남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하냐는 거다.
나는 빤히 강 대표를 바라보았다.
“…….”
“…….”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백기를 들었다.
“그땐, 아저씨가… 실언했어.”
“…….”
“네 시간과 내 시간의 가치가 다른 거 뻔히 알면서 아저씨가 헛소리한 거야. 당연히 시간 낭비고, 손해 보는 장사인데.”
물론 강 대표가 바쁜 건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내가 거짓말을 좀 하긴 했지만, 놀아 달라고 매달린 것도 아닌데.
나는 울컥했다.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강 대표가 어처구니없는 음성으로 “표정 봐라.” 하며 “이게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했다.
“아가, 네 시간이 훨씬 값진 거다.”
“…….”
“어른이 된 후에는… 시간이 그냥 흐르거든.”
특히 나 같은 사람의 시간은 더더욱 가치가 없고. 강 대표가 낮게 읊조렸다.
“네 나이 때 1년이랑 내 나이 때 1년은 흐르는 속도 자체가 달라. 네 시간이 훨씬 느리고 압축적이지. 모든 경험이 다 새로우니까.”
“…….”
“그래서 누구랑 함께하는지가 중요해. 그 경험이 쌓여서 너라는 사람을 이루게 되거든.”
새까만 눈동자가 그대로 나를 담는다. 나는 그 안에 담긴 나를 본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정에 빠져 죽을 정도의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시간 낭비라고 한 건… 네 귀한 시간, 괜히 나 같은 거에 낭비하지 말라고 한 거야.”
강 대표가 턱짓했다.
“아저씨는 너 깡패 새끼 만들 생각 없다고 했지?”
“…….”
“깡패 새끼랑 시간을 많이 보내면 깡패 새끼가 되고, 의사 선생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면 의사 선생이 되는 거야. 사람을 가려 사귈 줄 알아야지. 아무나 만나서 시간 흘려보내고 아무나 될 거야?”
‘아무나’에 힘을 주어 말한 강 대표는 고해성사를 마친 사람처럼 한결 가벼운 얼굴을 했다.
기대하던 백기가 아니었다. 협조할 기미가 도통 보이지 않던 강 대표는 협조를 해도 너무 잘했다. 혹시라도 내가 자신에게 미련을 갖는 게 죽어도 싫은 모양이었다. 그럴 거면 왜 ‘실언’을 하면서까지, ‘미행’을 인정하면서까지 나를 찾으러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이야 아무나 만나서 평생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든 말든. 어차피 빚 갚으면 볼일 다 끝난 사이인 주제에. 사람을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드는 강 대표의 모든 행동에 약이 바짝바짝 오른다.
나는 삐딱하게 대꾸했다.
“아저씨는 비약이 늘, 조금… 심한 것 같은데요. 제가 아저씨랑 시간 보낸다고 해서 제 꿈이 세계 최고 조폭이 되는 건 아닌데요.”
“…….”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고요.”
나는 이어 쏘아붙였다.
“그리고 제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아무나 만나서 아무나 좋다고 따라가진 않거든요? 뭐 아홉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내 인생에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 그 정도 분간은 할 줄 아는데요.”
일순, 진지한 자세로 잠자코 듣던 강 대표가 조소를 터트린다.
“분간은 무슨.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발에 달렸어. 인마.”
대놓고 무시하는 말투에 나는 결국 발끈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목소리를 키웠다.
“눈이 왜 발에 달려요. 저 눈 높거든요?”
“나 같은 놈도 좋다고… 했던 것 보면 딱 견적 나오지.”
“아저씨가 뭐 어때서요.”
“뭐?”
“네?”
방심한 사이 튀어 나간 진심에 당황한 나는 재빨리 수습했다.
“저 얼굴 봐요.”
“…….”
“아저씨는 조폭이고, 나이도 많지만… 잘생겼잖아요.”
강 대표가 기가 찬 표정을 했다.
“아가야, 얼굴 가죽은 벗겨지면 그만이다.”
“그래도 벗겨서 다닐 건 아니잖아요, 제가.”
“이게 진짜.”
“그리고 저 인성도 봐요. 사람 됨됨이요.”
강 대표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진다. 흡사 본인의 지난 행적을 돌아보는 얼굴이었다. 엉망임이 틀림없다. 나는 명백한 증거인 강 대표의 일그러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공손하게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아저씨는 탈락인데요.” 했다.
강 대표가 어처구니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진짜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또 슬슬 기어오르지.”
“아저씨가 저를 언제… 언제 예뻐해 줬다고 그래요. 예뻐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부정했다. 뱉고 나니, 강 대표에게 제발 나 좀 예뻐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부러 어깨를 과장스럽게 으쓱해 보였다.
“됐어요. 아저씨 말고 저 예뻐해 줄 사람 많아요. 널렸어요.”
강 대표가 진지하게 낯을 굳힌다.
“내가 널 안 예뻐했다고?”
“…….”
“그런 적 없는데.”
순간의 찰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받아칠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나보다 더 딱딱한 모습으로 굳어 있던 강 대표가 변명처럼 둘러댔다.
“…지금처럼 입 다물고 있으면, 예쁘다고.”
강 대표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엄청난 악력에 내 몸이 힘의 방향대로, 옆으로 기울어지자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잡은 강 대표가 “홍삼 안 챙겨 먹냐?” 하며 윽박질렀다.
강 대표는 내 홍삼을 모조리 훔쳐 먹은 사람처럼 벌게진 얼굴을 하고선 다시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얼얼한 어깨를 부여잡고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방금, 뭐였지?
* * *
친절하게 카드 사용법을 알려 준 강 대표는 내게 하루에 한 번씩 꼭 카드를 ‘제대로’ 사용하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강 대표에게 즉시 사용 문자가 발송되어 가맹점 이름만으로 나의 대략적인 위치와 동선을 알 수 있었다. 정각마다 강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가짜 보고를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 이후로 나는 굳이 ‘가출 청소년’처럼 밖으로 나돌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결제를 시작했다. 정각마다 걸던 확인 전화도 그만뒀다. 카드를 ‘제대로’ 쓰는 일도 없었다.
강 대표는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채업자다.
“하아….”
나는 쿠션 위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널 안 예뻐했다고?’
귓가에 자꾸 그날의 음성이 맴돈다.
‘그런 적 없는데.’
강 대표가 나를… 예뻐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강 대표가 나를….
무슨, 마치, 나를 좋아한다는 듯이.
얼굴이 벌게져선 예쁘다고 했다.
나는 강 대표를 안 좋아한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강 대표가 나를 만약에, 만약에 나를 좋아해 준다면…….
“아가야. 자?”
쿵.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사람이 어쩜 이렇게 인기척 없이 다닐 수 있나 싶다.
나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환한 불빛이 시야를 잡아먹었다. 눈살을 찌푸리자, 뚜렷해지는 초점에 빛을 발하는 핸드폰 액정 속 문자 메시지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