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4)

그렇게 정확히 4일 만에, 나는 다시 강 대표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가오리 아저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서.

병실에서 복도로 부리나케 뛰어나온 가오리 아저씨가 내게 “한 발 빼고 온다더니, 쓰읍. 뒤져뿐 줄 알았다.” 하며 친근한 척을 하자, 강 대표가 험악한 얼굴로 가오리 아저씨를 응시했다. 가오리 아저씨가 “아니, 아가 비실비실해가꼬 싸돌아다녀서….” 하고 변명하다가 “그럼 대표님… 집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어색한 서울말을 쓸 때까지.

강 대표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투 고치라 했지. 깡패 새끼도 아니고.” 하며 가오리 아저씨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우락부락하게 생긴 가오리 아저씨가 무섭긴 하지만, 강 대표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 후로, 언어를 잃은 가오리 아저씨는 묵묵히 운전을 했고, 강 대표는 이따금씩 이유 모를 짧은 숨을 토해 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익숙한 건물들이 스쳐 지나가는 차창 너머를 초점 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환장할 조합이었다.

강 대표와 내가 둘이 남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

차라리 가오리 아저씨가 중간에서 헛기침을 하는 게 더 낫다고 느껴질 줄이야.

내가 주저앉아 느리게 신발을 벗는 동안, 강 대표는 굳이 현관문 통로 옆에 서서 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꼭 감시하는 사람처럼. 내가 이대로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갈 줄 아나 보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아, 맞다. 학교!

나는 신발 끈을 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저….”

“…….”

“지금 방학인데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에 나는 재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방학 특강 신청 아직 안 했긴 한데… 하면 학교 가긴 가거든요. 그럼 집에 자주 안 있을 거예요.”

그냥 그렇다고요. 알아 두시면 될 것 같아서요.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강 대표를 안심시켰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강 대표가 손을 휙휙 내저었다. 들어가서 쉬라는 뜻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으로 향했다.

“하아….”

방문을 닫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볼썽사나운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나름대로 깔끔하게 잘 행동한 것 같다. 결국 팔자에도 없는 방학 특강을 듣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 어쩌면 잘된 걸지도 모른다.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강 대표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거다. 나는 한 번 망쳐 버린 기회를 두 번 망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이대로만 한다면, 어쩌면 강 대표와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물론 강 대표는 내가 도망칠까 봐 예민하게 굴지만…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다. 더한 눈칫밥도 먹어 봤는데.

“…….”

진짜 별거 아니다.

나는 왠지 모를 서러움에 하얀 반팔 티셔츠를 끌어당겨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옷이 희미하게 젖어 들었다. 다행히도, 악취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틀 동안 악몽으로 인해 땀에 절어 있던 몸이 전혀 찝찝하지 않고, 오히려 잘 말린 비누 냄새가 났다. 꼭, 누가 씻겨 준 것처럼.

원래 1인실 병실에 입원하면, 병원에서 샤워까지 시켜 주나 보다. 매번 끙끙 앓는 사람들로 가득 찬 6인실에만 입원해 봐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집’으로 돌아왔으니 샤워를 할 요량으로 양팔을 교차해 헐렁한 반팔 티셔츠의 밑단을 잡고 반쯤 벗어 낸 순간이었다.

“아가야, 일단 학교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강 대표의 시선이 느리게 얼굴에서 밑으로 떨어진다. 허리선을 타고 내려와 옆구리에서 머물렀다.

“멍든 거 봐라. 볼 때마다 열 받네.”

시선이 닿는 곳이 삽시간에 달아오르는 기분에, 나는 재빠르게 반팔 티셔츠를 내렸다. 내가 옆구리를 보여 준 적이 있었나…?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고 있는 사이, 강 대표가 통보했다.

“의사 부를 테니까 방학 동안 집에 얌전히 있어. 학교 갈 생각 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을 부를 거면 왜 굳이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아저씨… 근데요.”

“왜.”

“의사 선생님은 안 부르면 안 될까요?”

강 대표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진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보험이 없어서요.”

“뭐?”

“아니, 저 건강 보험은 있어요. 근데 따로 들어 놓은 실비 보험이 없어서….”

일순, 강 대표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도통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밀려오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더듬더듬 부연 설명을 했다.

“그게… 의사 선생님이 직접 오시면요… 그럼 진료비가 비싸게 나오잖아요. 출장비인가? 좀 그래서요. 어차피 그거 나중에 제가 다 갚아야 하는 건데. 제가 따로 병원 갈게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칼날 같은 시선에 온몸이 난도질당하고, 무거운 침묵에 압사당하는 기분이 든다. 강 대표는 어쩐지 또… 화가 난 것 같다. 나는 양손을 내저었다.

“아저씨가 저 배려해 주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요. 제가, 그… 지금까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기만 한 거 같아서요. 위약금 물 수도 있는데….”

“위약금은.”

강 대표가 내 말꼬리를 잘랐다.

“위약금은… 네가 나랑 약속 안 지키고, 도망갔을 때나 물리는 거고.”

어쩌면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말이 다르지, 아가야.”

씨팔, 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강 대표가 낮게 읊조렸다. 꼭 아홉 살 꼬마에게 잘못된 단어를 알려 줘서 하루 종일 고통 받는 삼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홉 살이고, 강 대표가 내 삼촌이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왜 욕을 하고 그래요.”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소심하게 항의했다.

“원래도 말라비틀어진 게, 어디서 쥐어 터지고 와선. 지 몸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주제에 병원 가라 했더니 가출이나 하고, 보험 같은 헛소리나 찍찍 해대고. 아저씨가 열 받아, 안 받아.”

내 항의를 무참히 짓밟은 강 대표는 정말 열이 바짝바짝 오르는지, 뒷목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벌써부터 강 대표에게 절대 귀찮게 안 굴겠다는 약속이 깨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말대로 집에서 의사 선생님 만날 테니까… 화내지 마세요.”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집으로 방문할 때는 출장비가 얼마나 들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니 원금 빚만 5억인데 거기서 몇백만 원 더 붙는다 해서 어차피 망한 인생, 더 달라질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언제 오는지만 알려 주시면 그 시간에 거실에서 기다릴게요.”

“너….”

말문이 막힌 듯한 강 대표가 복잡한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내쉰다.

“미안.”

아저씨가 욕해서 미안해. 강 대표가 또 어울리지 않게 사과를 했다. 나는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강 대표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으므로. 강 대표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열 받게 한 거 맞는 것 같은데….

“아가야, 아저씨는 너한테 화난 게 아니야.”

잠시 머뭇거린 강 대표가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는… 아저씨한테 화난 거야. 알았어?”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은 강 대표가 헛기침을 하며 “됐다. 얼른 자라.” 하며 방문을 닫아 주려 했다. 그러다 방문을 살짝 열린 상태로 둔 그가 “열어 놓고 자.” 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악몽은 매일 밤마다 찾아온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물론 강 대표는 이미 내가 질질 짜는 걸 봤지만,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방문을 닫으려 몸을 움직여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내 침대가 보일 정도로만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고개만 돌린 강 대표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아가야.”

선이 굵은 목젖이 느리게 움직인다.

“아저씨는 아픈 애 감금하는 취미 없어요.”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말꼬리를 끌던 강 대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밖으로 나와도 된다는 소리야.”

나는 그의 다정에 속수무책으로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 * *

결국 한숨도 못 잤다. 크림색 커튼 사이로 스며들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환한 아침 햇살로 변하고,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지저귈 때까지. 피로감에 눈알이 뻑뻑했다.

‘아저씨는 거실에 있을 거야.’

‘…….’

‘필요하면 불러.’

거실에 강 대표가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현실과 악몽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 추한 모습을 보여 줄까 무섭기도 했고, 왠지 모를 긴장감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기 때문이다.

‘잘 자. 아가야.’

어젯밤, 남의 속도 모르고 인사를 한 강 대표는 거실로 나갔다. 덕분에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살짝 열린 문틈을 노려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강 대표는 불편하지도 않나? 아무리 내가 강 대표 눈에 차지 않는 애새끼여도, ‘그런’ 고백을 했는데… 막말로 내가 덮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역시 어른들의 세계는 조금 다른가 싶다.

나는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대체 언제 나가는 거야.”

삼십 분 전부터 거실에선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렸고, 나는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 올린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강 대표가 집 밖으로 나가면 거실로 나갈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일어나야지.”

“…….”

“아가야.”

머리맡에서 강 대표의 음성이 들렸다. 곧이어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의 음성이 조금 멀리서 들려왔다.

“굳이 안 깨우셔도 됩니다. 주무시는 동안 제가 자세히 한번 보겠습니다.”

“뭘 본다는 겁니까?”

“사실 CT 결과는 나쁘지 않았는데, 걸을 때 절뚝거릴 정도로 통증을 느낀다면 직접 촉진을 해 봐야….”

…의사 선생님? 나는 두 눈을 슬며시 떴다. 그 순간, 이불이 홱 걷혔다. 갑자기 밝아지는 시야에 눈살을 찌푸리자, 여전히 잘생긴 강 대표의 얼굴 뒤로 왕진 가방을 들고 있는 늙은 할아버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백지오. 일어나 봐.”

“…아, 흠흠.”

갈라지는 목소리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자, 옆구리에 찌르르한 통증이 울렸다. 나도 모르게 옆구리를 쥐자, 강 대표가 “이래도 나쁘지 않다는 겁니까?” 했다. 왕진 가방을 내려놓은 의사 선생님이 “어디 한번 봅시다.” 하면서 무릎을 꿇고 앉아 다짜고짜 내 옆구리를 눌렀다.

“읏… 아파요.”

나는 꾹꾹 누르는 손길에 인상을 썼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강 대표의 짙은 눈썹이 덩달아 치켜 올라갔다. 의사 선생님이 내 옷을 위로 들추려는 순간이었다.

“피멍이 들었습니다, 육안상으로는. 굳이 들춰서 볼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 대표는 의사 선생님에게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지만, 그건 분명 질문이 아니었다. 언뜻 듣기에도 정중함을 가장한 협박조에 가까웠다. 연세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잠시 멈칫했다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그럼 옷 위로만 간단하게 촉진을 하지요.” 했다.

강 대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동상처럼 문가에 그대로 서서 진료를 지켜보았다. 옆구리를 꾹꾹 누르던 의사 선생님이 왕진 가방에서 이름 모를 도구들을 꺼내 “아, 해 보세요. 아.” 하며 혀를 짓누를 때도, “차갑습니다.” 하며 알 수 없는 젤리 같은 액체 크림을 치덕치덕 바른 도구로 내 목덜미를 훑을 때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집요한 시선이… 따가웠다.

마지막으로 의사 선생님이 “청진기만 옷 안으로 넣겠습니다.” 하고 차가운 금속의 청진기로 내 가슴과 명치를 정확하게 짚을 때까지, 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강 대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태연하게 진료를 마친 의사 선생님이 무릎을 천천히 펴며 일어섰다.

“내방한 병원에서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엑스레이 촬영 결과나 CT 결과로 봐선 갈비뼈에 금이 가거나 다른 장기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탈수 증세가 있고,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니 당분간은 격렬한 운동은 삼가셔야 합니다. 수분 섭취와 충분한 휴식도 필수입니다.”

강 대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선생님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약 처방전은 평소처럼 사무실에 팩스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졸릴 수 있는 약이 섞여 있으니 한 번 아침, 저녁으로 투약하고 약이 너무 센 것 같으면 아침 약은 빼고 저녁에만 투약하는 걸 권합니다.”

“선생님. 약이 센 것 같은 건 어떻게 아나요?”

“센 것 같은 기준은 일상생활에서 생활할 때 지장이 있는 것입니다. 운동에 지장이 간다 해서 투약을 멈추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격렬한 운동은 절대 삼가셔야 합니다.”

왕진 가방을 챙긴 의사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내가 아닌 강 대표에게 신신당부했다. 의사 선생님의 계속되는 조언에 강 대표의 표정이 시시각각 험악하게 변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은 평온한 얼굴로 “꼭 지키셔야 합니다.” 하며 집을 떠났다.

…저게 바로 연륜인 걸까?

강 대표는 항상 입버릇처럼 ‘아가야. 내 나이 돼 봐라.’ 했지만 저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 앞에서는 강 대표도 ‘아가’ 수준이었다. 나이를 먹을 수록, 남의 시선에 초연해지는 게 맞는 것 같다. 저렇게 따가운 시선도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고.

현관문 앞에서 의사 선생님을 직접 배웅하는 나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는 강 대표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왜 강 대표의 심기가 이렇게 불편한지 모를 일이었다. 평소처럼 약 처방전을 사무실로 보내 준다는 걸 보면, 분명 원래도 잘 알고 지내는 의사 선생님인 것 같은데… 혹시 내 진료 결과 때문인가?

나는 슬쩍 입을 열었다.

“아저씨.”

“왜.”

“…저 운동 진짜 싫어해요.”

“뭐?”

“운동 싫어하니까… 의사 선생님이 말한 거 다 지킬 수 있어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거요.”

나는 빨리 나아서 귀찮게 안 굴겠다는 뜻을 담아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3일 정도만 쉬면 돼요. 금방 나을게요.”

정말 다 지킬 자신이 있었다. 물론 잠을 제대로 잘 수만 있다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강 대표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물렸다. 허탈한 표정을 지은 강 대표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린다.

“아가야.”

“네.”

“모르면 가만히 있어.”

“네?”

씨팔, 이 양반이 진짜. 이런 애를 두고 어떻게 그딴 소리를. 여전히 눈을 가린 강 대표가 들릴 듯 말듯 희미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왜 저러지? 영문 모를 눈으로 강 대표를 올려다보자, 그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오른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일단 밥부터 먹자.”

“…아, 저는 따로….”

“머리 굴리지 말고 따라와.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억지로 떠먹이기 전에.”

살벌한 어투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강 대표를 따라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을 거쳐 식탁 앞으로 갔다. 식탁 위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야채 샐러드와 단호박죽 옆에 된장찌개와 백김치 그리고 떡갈비와 소갈비찜까지. 처음에 먹었던 배달 음식 이후로 종종 가정부 이모가 와서 밥을 해 주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침부터 들리던 부산스러운 인기척은 음식을 해 주시는 이모들이었나 보다.

먼저 자리에 앉은 강 대표가 고개를 까딱였다.

“아가, 아저씨 일어나기 귀찮다.”

나는 뒷일이 두려워 군말 없이 강 대표 맞은편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강 대표는 의사 선생님보다 더 할아버지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숟가락을 드는데 밥이 너무 많았다. 머슴밥 수준이었다. 이걸 먼저 덜어내야 하나, 아님 나중에 남겨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강 대표가 “먹고 남겨.” 했다. 나는 밥을 따로 덜어내지 않고, 윤기가 흐르는 떡갈비를 반으로 잘라 조각내어 고슬고슬한 흰쌀밥 위에 올려놓고 한 숟갈 떴다. 맛있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미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내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 대표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 오랜만에 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눈 커지는 거 봐라. 맛있냐?”

나는 우물거리며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그의 음성에, 덩달아 괜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호기롭게 “네. 다 먹을게요.” 했다. 만용이었다. 수번의 젓가락질 끝에, 나는 몸을 의자에 푹 기대어 패잔병처럼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위장이 찢어지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음식을 먹으려 해서 그런지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반절 넘게 남긴 밥을 보며 강 대표가 혀를 찼다.

“잘 먹을 거라며, 아가야. 왜 이렇게 못 먹어.”

“아직 아침이라… 잘 안 들어가요.”

“아침은 무슨.”

강 대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오후 한 시다.”

…어쩐지 엄청 배고프다 못해 속이 쓰리더라. 혹시라도 깨어 있는 걸 들킬까, 탁상에 올려 둔 핸드폰 시계를 볼 틈이 없었던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대체 강 대표를 피해 얼마나 오래 누워 있던 건지 모르겠다. 설마 방학 내내 이래야 하는 건 아니겠지?

강 대표가 경악하는 내 표정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특유의 능글맞은 음성으로 나를 놀렸다.

“아가야, 그렇게 잠이 많아서 어떻게 살래. 진짜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네.”

“…솔직히 그 정도까진 아닌데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눈도 못 뜨면서, 뭘. 그래서 사람 구실 하고 살겠어?”

나는 조금 억울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내 방문만 꽉 닫혀있었더라면, 강 대표가 밤새 거실에 있을 거라고 말만 안 했었더라면… 나는 두 다리 쭉 뻗고 편한 자세로 푹 자려고 노력해 봤을 거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지만 강 대표도 강 대표 나름대로 내게 배려를 해 주고 있는 거니, 달리 할 말은 없었다. 딱히 좋은 대답을 찾지 못하고 “네….” 하고 대답했다. 강 대표는 약간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씹, 네가 진짜 사람 구실 못 한다는 게 아니라… 야. 어깨 안 펴?”

나는 강 대표 말대로, 약간 뻣뻣할 정도로 어깨를 활짝 폈다.

“…미치겠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500ml 생수병을 꺼내 든 강 대표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너. 누가 고분고분하게 굴래.”

“예?”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확실하게 말을 해야지. 평생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 거야?”

강 대표는 비약이 심했다. 내가 강 대표의 말을 순순히 듣는다 해서, 다른 사람의 말도 순순히 듣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사달이 나지는 않았을 거다. 김국현에게 얻어터지는 일도 없고, 강 대표에게도 얼떨결에 고백을 할 일도 없었을 거다. 여전히 있는 힘껏 강 대표를 좋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거다. 강 대표는 정말 몰라도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곁눈질로 슬쩍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반박했다.

“저는… 제 마음대로 하고 살 건데요.”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강 대표의 구겨진 얼굴이 조금 펴졌다. 내리깐 속눈썹 밑으로 새까만 눈동자가 반쯤 가려 보인다. 높은 콧대 밑으로 이어지는 반듯한 입술 사이로 사뭇 진지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넌 네 마음대로 하고 살아.”

“…….”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나는 강 대표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쓸데없이 손해 보지 말고, 네 이익이나 챙기면서 사는 거야.”

강 대표는 꼭, 쓸데없이 손해 보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손해. 이익. 셈을 쳐서 모든 것이 환산할 수 있는 수치로 이루어진 강 대표의 세계에서, 강 대표가 굳이 손해를 봐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강 대표가 손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 대표야말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물론 잘 먹고 잘 살지만, 평생 아무 일 없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남의 불행을 뜯어먹고 살지 않아도, 설사 남의 불행을 숫자로 환산하여 살더라도.

물론 도망간 채무자의 아들 주제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강 대표의 언어를 빌리자면, 정말이지 현실 자각 못 하는 애새끼가 따로 없었다.

…이러니까 거절을 당하지.

한심해. 개새끼, 씨발 새끼, 좆같은 새끼, 쓸모없는 새끼… 애새끼.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얻어먹은 별별 새끼가 담긴 욕들을 외며, 자꾸만 뒤집어지는 우선순위를 다잡았다. 악몽을 꾸는 것도 아닌데, 몸이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이 어지럽다. 그때였다.

“지오야.”

강 대표의 부름이 나를 건져 올렸다. 거짓말처럼. 고작 내 이름 하나 불러 줬을 뿐인데, 시야가 바로 잡힌다.

“아저씨가 살면서 더러운 일들을 몇 번 겪어 보니까….”

“…….”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그냥 넘어가면 꼭 더러운 일들이 줄줄이 벌어지더라고.”

강 대표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나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멍이 아직 덜 빠진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살살 달래듯이 만지는 손길에 나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니까 더러운 일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마. 손해 보지 말라는 소리야.”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짙은 눈썹이 휘어진 강 대표가 말을 이었다.

“누가 한 대 때리면 넌 열 대 때려.”

“…….”

“아저씨가 다 책임질 테니까.”

쓸데없이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말고. 알았지? 강 대표가 말했다.

나는 ‘아저씨가 나 책임져 줘요?’와 ‘아저씨가 다 책임져 줘요?’ 보기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ㄴ’과 ‘ㄷ’ 사이는 가깝지만 느껴지는 간극은 사뭇 달랐다. 하지만 나는 안다. 둘 다 오답이라는 걸.

“깽값 물어 준다고요?”

부러 가벼운 말투로 말하자, 그제야 강 대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 솜 주먹으로 때려서 깽깞 나와 봤자 얼마나 나오겠냐.”

내 손을 가리킨 강 대표가 당부했다.

“대신 의자 같은 건 들지 말고. 때려 죽여도 시원찮긴 하지만 그럴 순 없으니까.”

“네.”

“물론 네가 위험한 상황에선 들어도 돼. 근데… 남을 위해선 들지 마. 알았어?”

나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 이 얘기다. 아저씨가 왜… 남인데요. 나한테는 남 아닌데요. 목구멍까지 치솟은 힘 없는 문장들을 꾸역꾸역 삼키는데, 강 대표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아니면 아저씨한테 말해 주든가. 대신 해 줄게.”

…강 대표는 농담을 진담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나는 다시금 강 대표가 얼굴값 못 하는 무서운 사채업자라는 걸 상기한다.

“그러니까 지오야.”

그가 낮게 읊조렸다.

“손해 보지 말고 살자, 우리.”

손해.

강 대표를 좋아하는 게 ‘손해’라는 걸까, 아님 말 그대로 김국현 같은 놈들한테 받은 대로 돌려주고 살라는 말일까.

만약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손해라면, 나는 손해를 본 적이 없다. 내 감정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에. 강 대표도 그걸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순수한 감정도 있다는 걸.

하지만… 나는 이제 강 대표를 안 좋아하기로 약속했으니까. 티 내지 않으려면 나부터 노력해야겠지.

“네. 아저씨도요.”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저 손해 안 볼 테니까… 아저씨도 손해 보는 장사 하지 마세요.”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었는지, 강 대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강 대표가 두 눈을 감으며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큰일 날 소리하네, 얘가.”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꼬리가 시선을 집중시킨다. 나는 강 대표의 의도를 헤아리려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마음껏 담았다.

“정말 그래 볼까.”

“…….”

“손해 보지 말아 볼까.”

대화도, 독백도 아닌 것을 작게 읊조린 강 대표가 살짝 눈을 뜬다. 눈꺼풀에 숨어 있던 새까만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공중에서 시선이 정확하게 맞부딪힌다.

“그럼 진짜 큰일 날 텐데.”

왠지 훔쳐본 걸 들킨 듯한 느낌에, 나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 대표가 “쫄기는.” 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점점 커지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킬까, 쓰다듬는 손을 복싱 선수처럼 유연하게 피하며 “안 쫄았어요.” 했다. 손가락을 접어 쥔 강 대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가, 그래서 다 먹었고?”

“네.”

“더 안 먹어?”

“배불러요.”

고작 그거 먹고 배부르기는. 강 대표가 평소처럼 혀를 찼다. 자리를 피할 적절한 타이밍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나는 “잘 먹었습니다.” 하며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일어섰다. 그대로 등을 돌려 부엌을 빠져나가 거실 가장자리로 향했다. 현관문에 가까이 위치한 2층 계단을 오를 참이었다.

“어디 가.”

뒤에서 불쑥 나타난 음성과 어깨를 움켜쥐는 악력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딜 가시냐고.”

내가 슬금슬금 멀어지자, 강 대표가 삐딱한 말투로 되물었다. 험악한 조폭 사투리를 구사하는 가오리 아저씨가 돌아온다고 해도, 이 정도로 험악하지는 않을 거다.

나는 대답 대신 서재와 공부방이 있는 2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공부방에 들어가면 강 대표는 늘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내버려 뒀으니까. 올라가서 부족한 잠을 채울 요량이었다.

“하… 공부?”

강 대표는 기가 찬 얼굴을 했다.

“학생. 하루는 쉬지?”

“…저 고3인데요.”

“언제부터 네가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자려던 계획을 들킨 기분에, 나는 괜히 찔려 소심하게 대꾸했다.

“아저씨는… 아저씨는 제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르잖아요.”

“너 공부 못한다며.”

“예전보단 잘하거든요.”

“말 잘해. 거짓말하면 다 티 난다.”

어… 큰일 났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게 생겼다. 성적표 가져오라고 하면 어떡하지? 7등급은 면했지만… 아직 5등급인데. 쪽팔리게. 눈알을 굴리는데 강 대표가 손을 홱홱 내젓는다.

“알았어. 올라가.”

방해 안 할 테니까. 강 대표가 바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며 손을 홱홱 내저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2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여전히 문방구에 가까운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인수한 채권들 중에 특별 관리 채권은 따로 빼서 가져와. 개인적으로 관리할 거니까.”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강 대표의 음성 또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서류도. 박 변한테 말하면 무슨 서류인지 알 거야. ……박 변.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는 거 다 압니다. 당분간은 자택에서 근무할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이쪽으로 사람 보내시고.”

공부방 반대편에 위치한 서재의 문이 열린다. 활짝 열린 서재 안으로 강 대표가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아, 그리고….”

강 대표가 고개만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살짝 열린 틈을 바라본다. 나는 본의 아니게 통화 내용을 엿들은 걸 들킬까, 부러 학용품이 들어 있는 박스 안을 부산스럽게 헤집었다.

“저번에 사무실에 왔던 걔, 이름이 뭐였더라. 걔도 데려오고. 팔아줄 테니까 오라 그래.”

걔?

걔가 누군데. 유독 신경을 긁는 호칭이었다.

강 대표는 아무에게나 ‘걔’라고 하지 않는다. 일적으로 만난 사람이면 직급을 부르고, 가까운 사람이면… 뭐, 아직까지 이름을 부르는 가까운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을 제외하곤. 물론 걔가 누구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이게 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다. 별게 다 신경 쓰이고, 신경을 긁는다. 나는 그럴 위치가 못 되는데도.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에 뱉어질 말을 기다리며, 부스럭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포장된 두꺼운 노트를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통화가 종료된 건지, 아님 상대방이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는 건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강 대표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미처 닫지 못한 문틈 사이로.

“지오야. 공부해.”

아… 잠자기는 글렀다.

* * *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층 빌딩의 사무실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좁은 집 안 서재로 사무실을 옮긴 그는 당당하게 ‘재택 근무 중’이니 집 밖으로 나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방학 특강 신청 시기를 진작에 놓쳐 버린 나는 덩달아 집 안에 갇혔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참다못한 내가 “아저씨… 회사 망하는 거 아니에요? 대표가 회사 안 나가도 돼요?”라고 묻자, 강 대표는 당연한 투로 “아가야, 나한테 누가 뭐라 하겠니.” 했다. 하긴. 강 대표는 ‘대표님’이니까, 어디서 일하든 간에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터였다.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집주인이 집에서 일한다는데….

다만 문제는… 내가 혼자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난 강 대표가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널 어떻게 밖으로 내보내겠어, 아가야. 어디 가서 또 쥐어 터지고 오려고?’

하고 문 앞을 막아서기 일쑤라는 거다.

내가 다시는 혼자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도록 정말 ‘감금’이라도 할 생각인 걸까? 영화에서 보면 최후의 순간에는 침대에 묶어 두기도 하던데. 화장실도 못 가게 막아 두고. 더럽게. 아무리 강 대표라도, 그건 좀 곤란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불리해지는 건 내 쪽이었다. 집을 떠나지 않고, 나를 떠나보낼 생각도 없는 강 대표 때문에 내 수면 패턴은 점점 엉망으로 변해 갔고, 의도치 않게 눈 밑에는 진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

사실 내가 강 대표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버리면 간단한 문제인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으음.”

나는 부드러운 쿠션 위에 습관처럼 얼굴을 문질렀다. 몸을 푹 기댄 소파 위로 떨어지는 여름 오후 햇살이 따사롭다 못해 따갑다. 덩달아 눈 밑 피부가 따끔거렸다. 두 눈을 감으니, 빛이 물들인 하얀 시야가 펼쳐진다. 깊게 잠들지 않고 선잠을 자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강 대표가 또 내려오기 전에 얼른 자야지.

정신이 흐려질 때 즈음이었다.

삐삐삐….

현관문에서 나는 요란한 소음이 허물어져 가는 정신을 바로 세웠다. 분명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안 들렸는데… 벌써 가정부 이모가 청소하러 오셨나?

“누구세요?”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안녕하세요?”

둘 다 아니었다. 생기 넘치는 고운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늘하늘한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활짝 웃었다.

“강 대표님 댁 맞죠?”

“…….”

“대표님이 불러 주셔서 왔는데. 혹시 안에 계실까요?”

20대? 30대? 아니, 분명 20대일 거다. 여자는 ‘누나’에 더 가까워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자연 갈색 머리에 하얀 얼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까지.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주인공 자리를 꿰찰 것 같은 외모였다.

강 대표가 집으로… 여자 직원을 부를 일이 뭐가 있지? 집 안까지 들어오는 강 대표의 사람은 가오리 아저씨나 변호사 아저씨 말고는 따로 본 적이 없는데. 아니, 애초에 그 조폭 아저씨들만 우글거리는 사무실에 여자 직원이 있었던가? 못 봤었는데….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혹시 안 계시나요?”

“…아니요. 계시는데요.”

“그럼 들어가도 될까요?”

“네.”

나는 황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신발을 벗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자연스레 뒤로 넘긴 여자가 “열어 줘서 고마워요. 초인종 눌렀는데 집 안은 고요하지, 문 한번 잡아당기니까 갑자기 경보음 울리지, 저 잡혀 가는 줄 알았잖아요.”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성격도 꽤… 좋아 보인다.

혹시….

설마…… ‘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근데… 누나는 누구세요?”

어머. 누나래. 감탄하듯 읊조린 여자가 “나는….” 하자마자 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 옆으로 커다란 손이 쑥 튀어나왔다.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윤 팀장.”

“뭘요, 저번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 대표님.”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를 했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위아래로 흔들리는 손을 응시했다.

3초

2초

1초

…왜 손을 안 떼지?

스포츠 경기에서는 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린다던데. 3초면 충분히 긴 시간 아닌가?

물론 강 대표는 원래 악수하러 다니는 사람이며, 악수를 해야만 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손을 저렇게 오래 잡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것도 단순한 거래처 사람이라면.

아니면 원래 악수를 자주 하는 ‘그런’ 사이인 걸까?

얇은 손등을 덮은 커다란 손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겨우 다 잡은 마음이 거세게 흔들리는 순간, 그제야 두 사람의 손이 멀어진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윤 팀장이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해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계약 건에 대해 미처 다 말씀 못 드린 부분이 있어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그거 말고. 개인적인 일 때문에 부른 겁니다.”

…개인적인 일?

다시 얼어붙은 내 곁을 스쳐 지나간 강 대표가 “이쪽으로.” 하며 거실로 향했다. 윤 팀장이 바로 강 대표의 뒤를 따랐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19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의 강 대표와 170cm에 가까워 보이는 윤 팀장의 체격 차이는 TV에서 떠들어대는 ‘이상적인 연인의 키 차이’의 표본 같았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실제로 누군가가 강 대표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니, 상상 속에서보다 더… 기분이 더럽다.

“뭐하고 서 있어.”

“…….”

“백지오.”

“네?”

고개만 돌린 강 대표의 짙은 눈썹이 잔뜩 휘어져 있었다. 강 대표가 내 시선을 쫓아 윤 팀장을 슬쩍 본다. “얼타기는. 눈알 빠지겠네.” 하고 작게 중얼거린 강 대표가 내게 손을 까딱였다.

“안 와?”

“…저요? 왜요?”

“왜긴.”

강 대표가 덧붙였다.

“네가 있어야 하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윤 팀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당혹감은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것도 잠시, 윤 팀장이 ‘어른’답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요, 빨리 와요.” 하며 손짓했다. 강 대표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시선으로.

아무래도 강 대표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강 대표가 일부러 보여 주려고 부른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구질구질한 ‘애새끼’에 불과하고, 강 대표는 저렇게 드라마 주인공처럼 생긴 예쁜 ‘어른’과 잘 어울린다는 걸 직접 보여 주기 위해서. 생각해 보니까 열 받는다. 누구는 잠도 못 자고 이러고 있는데.

집으로 데려온 강 대표에게도, 집으로 달려온 윤 팀장한테도 조금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굳이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로 약속한 것도 있고, 애새끼임을 입증할 필요가 없으니까.

“네. 누나.”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할 수 있는 만큼 밝게 웃어 보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강 대표는 기가 찬 얼굴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용히 윤 팀장의 뒤를 따랐다.

강 대표가 소파 위에 먼저 앉고, 그 맞은편 미니 소파에 앉은 윤 팀장이 옆자리에 가죽 핸드백을 올려놓았다. 자연스레 남은 자리는… 강 대표의 옆자리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 대표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태블릿 PC를 꺼낸 윤 팀장이 “다들 식사는 하셨어요? 저는 오는 길에 편의점 들렀다 왔는데, 오늘 자리가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과자 좀 사 올 걸 그랬어요. 맛있어 보이는 거 많던데. 단 거 좋아하세요?”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끌어 나갔다. “불량 식품….” 하고 말문을 연 강 대표가 나를 슬쩍 보더니 “좋아하지.” 하고 끝을 맺었다.

강 대표는 불량 식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거리 음식도 좋아하지 않고, 내가 새로 나온 젤리나 초콜릿을 하나씩 살 때마다 “아가, 이 썩는다.” 하며 내 이마를 톡톡 치곤 하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그런 사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런’ 사이로 발전될 사이인가? 온 신경이 곤두선다. 물론 내가 이제 강 대표를 안 좋아할 거라곤 했지만… 이렇게 데려온 거 보면 신경 쓰라고 데려온 거 아닌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신경을 쓰는 게 싫었으면 다른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으면 된다. 아니면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 주면 된다. 그렇게 간단한 거다. 도통 협조를 해 주지 않는 강 대표 대신 윤 팀장을 바라보았다.

“근데요. 제가 이 자리에 왜… 왜 필요해요?”

“글쎄요.”

윤 팀장이 태블릿 PC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갸우뚱거렸다.

“본인 동의 없이 조회하는 건 아무래도 불법이니까?”

아무도 읽지 않는 설명서에 적혀 있는 경고 문구를 읽는 듯이 단조로운 말투였다. 태블릿 PC의 화면 잠금을 해제한 팀장 누나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자연 갈색빛의 머리칼이 자연스레 흘러내린다. 얇은 눈썹이 찡그려지고, 부드러운 눈매가 고운 모양으로 휘어진다.

예쁘긴… 엄청 예쁜 것 같다.

“대표님. 말씀 안 하셨어요? 동생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저한테도 따로 말씀 안 해 주시고.”

윤 팀장의 타박에도 강 대표는 끝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왜 대답을 안 하나 싶어 강 대표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강 대표와 시선이 공중에서 정통으로 맞부딪혔다.

“…….”

“…….”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지?

새까만 눈동자가 미동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눈길이었다. 나는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야각 사이로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팀장 누나를 조금… 빤히 쳐다봤다고 이러는 거라면, 강 대표는 연애할 때 ‘정도’나 ‘밀당’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따로 있을 때는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나는 서로를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한다. 서로에게 눈길을 빼앗기지 않는 두 사람을, 타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순간 질투에 차 있는 강 대표를 상상한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이 먹고도 그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면 따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중증이다. 그건 연애를 안 해 본 나도 안다. 설마 30대 사채업자 강 대표가 일개 고등학생 양아치인 박건수보다 연애를 못 하지는 않겠지.

“대표님?”

계속되는 침묵에 윤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짧은 침묵이 더 이어졌지만, 윤 팀장은 당황하지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아쉬워서 그렇죠. 단체 건인 줄 알고 뭐가 부족한지, 뭘 더 채워 넣어야 하는지 설계를 제대로 못 해 왔잖아요. 먼저 말씀을 해 주셔야 제가 더 완벽하게 준비를 해 오죠.”

단체? 설계?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윤 팀장이 내 팔뚝을 톡톡 부드럽게 매만졌다.

“특별히 몸 안 좋은 곳이나 아니면 최근에 병원에 다닌 적 있어요? 정기적으로.”

“어… 갈비뼈요?”

“어머, 갈비뼈는 왜요.”

두들겨 맞았는데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나는 “그냥, 아파서요.” 했다. 윤 팀장이 웃어넘겼다. 

“어디 가서 보험 들기 전에 아프다고 하지 마요. 그럴 땐 그냥 아픈 데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아픈 곳은 없고. 아직 학생이죠?”

…보험?

나는 눈알을 굴렸다.

보험이라고?

나는 강 대표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느새, 강 대표는 업무용 핸드폰을 확인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럼 ‘그런’ 사이가 아니라, 설마 내가 저번에 실비 보험이 없다고 해서….

고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끼어든다.

“학생 맞죠?”

“…네? 네.”

“대학생?”

“저 고등학생인데요.”

“고등학생이요?”

윤 팀장이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경계심을 풀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네. 누나. 고3이요.”

태블릿 PC 액정 위를 톡톡 터치하던 윤 팀장이 다시 한번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누나… 뭐 먹고 싶어요? 말만 해요.”

“초콜릿이요.”

나는 태연스럽게 받아쳤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강 대표가 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윤 팀장이 “고등학생한테 누나 소리 들어 본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요. 자꾸 감격하게 되네.” 했다.

“19살이라니. 진짜 좋겠다. 내년에 대학 가면 신나게 놀 수 있겠네요. 동아리도 들고, 캠퍼스에서 CC도 하고….”

“…….”

“아, 혹시 지금 여자친구 있어요?”

강 대표와 시선이 마주쳤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마 강 대표는 속으로 ‘우리 아가는 호모 새끼인데. 저런 거 물어보면 안 되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없어요.”

내 대답에 강 대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찮아요. 고3이니까. 원래 여자친구는 대학 가서 사귀어야 더 즐겁게 만날 수 있거든요. 팁 하나 알려 줄까요? 통학은 하지 마요. 기왕이면 자취해요.”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강 대표가 혀를 찼지만, 윤 팀장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새터 가면… 아, 요즘은 OT라고 하나? 아무튼 신입생 때 새터 가면 선배들이 이상형 물어볼 텐데, 그때 대답 잘해야 대학 생활 재밌게 보낼 수 있어요. 생각보다 소문이 오래 가거든요. 말 한번 잘못했다가 정말 큰일 나요.”

소문.

소문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지긋지긋하다. 내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자, “거봐요. 생각해 보니까 끔찍하죠?” 하며 윤 팀장의 고운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누가 이상형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거예요?”

“…예쁜 사람이요.”

“에이, 그렇게만 대답하면 안 되죠. 먹이를 던져 줘야지. 구체적으로.”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구체적인 이상형은… 쉽다.

다정하고 배려 있는 사람. 손가락이 길고 예쁜 사람.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만드는 사람. 그 이상을 원하게 만드는 사람.

“눈이 예쁜 사람이요. 새까만 눈동자가… 예쁜 사람이요.”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이상형의 기준을 세워 준 사람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을.

윤 팀장이 물개 박수를 쳤다.

“와, 난리 나겠다.”

“…왜요?”

“말도 못 하고 뒤에서 몰래 좋아하는 애들, 벌써부터 우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요. 대표님, 그쵸?”

강 대표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홀로 고독한 탐색전을 벌였던 나와 달리 윤 팀장은 나를 진짜… 강 대표의 동생으로서 내내 귀여워해 준 것 같아서. 자괴감, 그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새터 가서는 그렇게 뜸 들이면서 대답하지 마요. 알았죠?”

“제가요? 안 그랬는데….”

괜히 민망해진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태블릿 PC를 가져간 강 대표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화면을 훑었다. 이미 켜져 있던 어플 화면 위에 숫자를 입력하더니 “백지오. 생일 언제야.” 했다.

“1월 4일이요.”

강 대표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6자리를 슥슥 써 내려갔다. 그러고는 뒷자리 첫 번째 숫자에 자연스레 1을 입력했다.

“그다음은?”

나는 우물쭈물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1 아니고 3인데요. 아저씨.”

강 대표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강 대표가 다시 입술을 굳게 닫았다. 강 대표의 눈빛은… 마치 ‘그 시대에 사람이 태어나기도 해?’ 하던 패스트푸드 햄버거집 알바생 누나들과 같은 눈빛이었다.

“에이, 대표님. 요즘은 다 3으로 시작하지, 누가 1로 시작해요.”

윤 팀장이 다시 한번 너스레를 떨었다. 험악하게 구겨진 그의 표정에도 굴하지 않은 채. 저 누나는 강 대표가… 무섭지도 않나? 강 대표를 무서워해야 하는데. 왜 무서워하지 않지?

둘이 진짜 설마….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상상의 회로가 또 제멋대로 돌아갔다. 강 대표가 눈을 내리깔고, 태블릿 PC 위 숫자들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콧대가 두드러진다.

윤 팀장이 “대표님, 잠시만요. 일단 동생분이 동의를 먼저 해 줘야 해서요.” 하며 강 대표가 들고 있는 태블릿 PC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들의 손이 다시 점점 가까워진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집중된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는 곧장 거실 코너에 있는 화장실로 뛰쳐 들어갔다. 세면대에 물을 가득 틀어 놓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 본심이 자꾸만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강 대표는 강 대표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강 대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한테 해 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한테 잘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 빼고 다들 강 대표를 무서워했으면 좋겠다.

어린 생각인 건 잘 안다. 바보 같은 말인 것도 잘 안다. 근데 나는 강 대표보다 훨씬 어리니까… 이런 생각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민폐 끼치는 것도 아니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생각만 하는 건데.

나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최악이었다. 누가 봐도 불안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 까칠해 보이는 얼굴은 덤이었다.

…티, 엄청 나네.

나는 마음을 다잡고 흐르는 물에 덕지덕지 묻은 절망을 씻어 냈다. 페이퍼 타월로 물기를 닦아 내고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어….”

나는 멈칫했다. 화장실 문 앞에 강 대표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역시 귀신같이 사람을 쫓는 사채업자다운 솜씨다.

나는 옆으로 비켜 나와 부러 태연자약한 태도로 “아저씨. 써요. 냄새 안 나요.” 했다. 강 대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안 가요?” 하고 물었다. 한참 동안이나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강 대표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예뻐?”

“…누가요?”

“윤 팀장. 네 눈엔 예뻐 보이냐고.”

…자랑하는 건가?

“네. 예쁘신데요. 성격도 좋으시고.”

누구랑 다르게. 성격이 진짜… 엄청나게 좋은 것 같은데요. 나는 덧붙였다. 잠시 머뭇거린 강 대표가 물었다.

“너.”

“…….”

“너… 여자도 좋아하냐?”

나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의 다부진 턱선이 느리게 움직인다. 꼭, 어딘가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지금은 여자친구 없다며.”

“아….”

“그거 진짜야?”

지금은 없다 했지, 그게 초등학생 때라고는 안 했다. 하지만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초등학생 때 하는 연애는 연애도 아니고, 고등학생의 시선에서 볼 때도 소꿉놀이 장난으로 보이는데, 강 대표의 기준에서 그게 연애의 축에라도 낄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강 대표가 못마땅한 음성으로 재촉했다.

“아가, 빨리 대답해야지. 너, 씹,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엉덩이에 털 난다.”

다행히도 나는 몸에 털이 거의 없는 편이다. 거기에도 털이 없으니 엉덩이에도 털이 나지 않을 게 뻔했다. 무섭지도 않은 협박이었다.

“네. 진짜예요.”

내 대답에 짙은 눈썹이 일그러진다.

“야. 둘 다 좋아하면 안 되지. 그건 반칙이지.”

“왜요?”

“뭐?”

“저는 딱히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그 사람이 좋으면 좋은 건데요.”

“여자도, 아니 여자여도 상관없다고?”

줏대가 없어, 새끼가. 꽤 당황한 음성이었다. 어쩐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강 대표는 그간 내가 정말 구제 불능의 호모 새끼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냥… 강 대표라서 좋아한 것도 모르고.

“그게 뭐 어때서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 사람이 좋으면 성별 상관없이 좋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강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 너… 사람이 그렇게 싸게 넘어가면 안 되는 거야.”

“…뭐요?”

“누가 와서 뭐 사 준다고 먹는 걸로 꼬시면 안 돼요, 싫어요, 하는 거야. 알았어?”

“아저씨는 내가 무슨 아홉 살인 줄 알아요?”

“아홉 살은 무슨. 시커먼 열아홉으로 보인다. 왜.”

강 대표가 ‘시커먼’을 강조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3으로 시작하는 새끼가… 발랑 까져가지고는. 이게 어디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넙죽 누나라 불러.”

기가 막혔다. 나를 뭘로 보고. 처음 보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온 사람이 누군데. 내가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공백을 채우기 급급했던 고백 이후, 강 대표가 불편할까 봐 최대한 피해 다니고, 피해 주지 않으려 잠까지 줄여 가면서 노력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결국 울컥했다.

“그럼 아줌마라고 해요?”

“뭐?”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면서요. 그럼 저 누나는 아저씨보다 훨씬 어린데 아줌마라고 부르냐고요.”

이게 은근히 멕이네. 강 대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분을 못 이겨 씩씩댔다.

“내가 아저씨 때문에 방학인데도 집 밖에 못 나가는데, 집에 온 누나한테 누나라고도 못 불러요? 그럼 애초에 데려오지 말든가요. 왜… 왜 보험 들어 준다고 팀장 누나 데려와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데요. 누가, 누가 보험 필요하다고 했어요. 아저씨가 데려왔잖아요. 그 누나.”

감정을 숨겨야 하는데, 들끓는 질투심에 자꾸만 목소리 끝이 튄다. 누가 봐도 질투에 가득 차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 애새끼가 따로 없었다. 나는 ‘핏덩이’처럼 목놓아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내 표정을 살피던 강 대표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평정심을 되찾은 강 대표가 “아이고… 누나 못 불러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냐. 너 인마. 걔… 나랑 나이 차이 얼마 나지도 않아.” 하면서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하지 마요.”

내가 억지로 힘을 주어 고개를 들려 하자, 강 대표의 커다란 손이 달래듯이 부드럽게 내 뒷머리를 쓸어내린다. 목덜미까지 체온이 전해진다. 일순,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찌릿찌릿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강 대표의 손을 쳐냈다. 얼마나 세게 쳐낸 건지, 찰싹 하는 마찰음이 들릴 정도였다.

“아… 그게 아니라….”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죄송해요. 그렇게 세게 칠 생각은, 아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더듬더듬 사과를 했다. 강 대표가 공중에서 밀려난 본인의 손등을 내려다본다. 늘 여유로운 표정에 가려져 있던 날카로운 눈매가 본연의 모습대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원래 인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했다. 나는 강 대표 옆에 머무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강 대표를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은 거다. 그러므로 화낼 명분도 없으며, 슬퍼할 명분 또한 없는 거다.

강 대표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기회라도 얻은 게 어디냐고 좋아했던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또….

“아가야.”

나는 다시 한번 오답 취급을 당할 각오를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저씨가… 불안해서 그러지.”

불안하다고?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너처럼 사람 무서운지도 모르고,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애가… 나 말고 또 어떤 씹새끼한테 그럴지 불안해서 그런다. 왜.”

강 대표가 변명하는 사람처럼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내 돈 갚기 전까지는… 멀쩡해야 하니까.”

“…….”

“그래서 그래. 별 뜻 없어.”

강 대표가 “어깨 펴. 의자로 사람도 패는 새끼가 이 정도로 얼어붙기는.” 하면서 내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아저씨는 네가 이렇게 진절머리 나도록 싫어하는지 몰랐어요. 입 뒀다 뭐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지금처럼 확실하게 말하지 그랬어.”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특유의 능글맞은 음성에 나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말했는데요.”

“동태눈깔로 맨날 산송장처럼 네, 네 거리니까 이 정도로 싫어하는지 몰랐지. 아가야.”

“싫어요.”

“그래. 잘만 하면서.”

잠시 숨을 고른 강 대표가 낮게 속삭였다.

“아저씨가 너 많이 데리고 나갈게. 그러니까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찾아놔.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하고. 그게 어디든, 언제든 상관없어. 아저씨가 네 시간에 맞출게.”

언젠가 내가 강 대표에게 했던 말을 강 대표가 내게 그대로 뱉는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새까만 눈동자가 직선으로 나를 꿰뚫는다.

“내 시간, 다 너한테 줄게. 지오야.”

“…….”

“그러니까 너도… 아무한테나 가서 들이대면 안 돼. 알았어?”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랑 약속해.”

그건 악수가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게 엄지와 새끼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접은 강 대표가 재촉했다.

“빨리 해.”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뒷짐 지듯 양손을 뒤로 숨겼다.

“…안 할래요.”

“뭐?”

강 대표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못 지킬 것 같아서요.”

물론 신경도 안 쓰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정말 ‘아무한테나’ 들이댄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서둘러 “아저씨 바쁘잖아요.” 하고 덧붙였다. 짙은 눈썹을 치켜뜬 강 대표가 말했다.

“아가야, 아저씨는 시간 충분히 낼 수 있어.”

“제가 얼마나 내달라고 할 줄 알고요.”

“…….”

“됐어요. 괜찮아요.”

나는 다시 거절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강 대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선이 굵은 다부진 턱이 꿈틀거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서려 있다.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윤 팀장을 몰래 훔쳐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그 새까만 눈동자에 어린 경계심을.

“걱정 마세요. 아저씨.”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저씨가 따로 시간 안 내줘도… 저는 팀장 누나한테 들이댈 생각 전혀 없으니까요.”

나는 강 대표의 연애 사업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뜬 강 대표가 “씨팔. 그런 게 아니란다. 아가야.” 하며 속 터져 죽겠다는 음성으로 부인했다. 나한테 욕 안 하기로 해 놓고…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역시 ‘아무한테나’라고 통틀어 말했지만, 콕 집어 말하자면 팀장 누나가 맞았던 모양이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순식간에 다시 차오르는 질투심에 속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동시에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아저씨가 내 시간에 맞춰 줄 거예요?’

내가 강 대표에게 했던 말들이 다른 의도로 돌아와 나를 달래는 데에 쓰이는 건… 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 나를 좋아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내가 했던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그걸로 나를 꾀어내려는 건 아무리 이것저것 셈해서 받아 내는 사채업자라 해도 괘씸하다.

이제야 나는 내 분수를 똑똑히 깨닫는다. 그나마 남아 있는 마음이라도 더 빼앗기지 않으려면, 있어도 없는 척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 또한. 강 대표의 말마따나,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강 대표가 이번에도 옳았다. 사람 마음에도 손해라는 게 있었다.

…목이 멨다.

“아저씨.”

“…….”

“저… 아저씨 이제 안 좋아해요.”

일순, 강 대표가 숨 쉬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미동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

“그 누나 앞에서 헛소리할까 봐… 굳이 안 달래 주셔도 괜찮다고요. 저 입 무거워요.”

물론 그렇다고 아저씨랑 평생 놀러 안 나가겠다는 건 아니고요. 어차피 집엔 계속 있을 거긴 한데… 근데 여름 방학 끝나면 곧 9월 모의고사 보잖아요. 준비해야 돼서… 원래 대한민국 고3은 바쁜 거예요, 아저씨.

나는 강 대표와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덕지덕지 덧붙였다. 그러다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아,

“저… 저 먼저 가 볼게요. 화장실 잘 다녀오세요. 전 사인해야 해서….”

대충 둘러대고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귀신보다 더 귀신 같은 사람이기에 또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은 다행이었다. 강 대표가 내게 한 번 더 물어봤으면, 나는 거기와 엉덩이에 모두 털이 난 사람처럼 냉큼 강 대표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을 거다. 손해임을 알면서도.

거실 중앙에 다다르자, 홀로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윤 팀장이 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왔어요?”

그러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게 태블릿 PC를 바로 건넸다.

“여기, 여기 체크하고 이 밑에 서명하면 돼요. 생년월일은 이미 입력했으니까 주민등록번호 끝까지 입력 부탁해요.”

“네.”

나는 자리에 앉아 윤 팀장이 가리키는 체크박스를 모두 선택하고, 서명란에 내 이름을 정자로 또박또박 썼다.

“이거 다음 버튼 누르면 돼요?”

“네. 저 주세요. 제가 한번 볼게요.”

버튼을 누르기 전, 태블릿 PC를 다시 가져간 윤 팀장이 액정을 터치하며 “오… 음.” 하는 애매한 호응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음. 부모님이 해 준 거 말고, 직접 보험 따로 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죠?”

“…네. 아마도요.”

“생각보다 꽤 잘 들어 있는 축에 속해서 뭘 더 추가적으로 설계할지 고민되네요. 사실 몇 가지 항목은 보장이 과할 정도인데… 아하, 실손은 따로 없네요.”

윤 팀장이 “실손이네, 실손.” 하면서 경쾌하게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딱, 하고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윤 팀장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보험 같은 경우에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들어주신 걸 쭉 들고 가기도 하니까요. 잘 모를 수 있어요. 실손 보험이 흔히들 아는 실비 보험이에요.”

윤 팀장이 “어디 한번 직접 볼래요?” 하면서 내게 태블릿 PC를 넘겼다. 살짝 기울어진 액정에 가입되어 있는 보험 목록들이 언뜻 보였다. 생각보다 스크롤이 꽤 길었다.

…내가 가진 보험이 이렇게 많았나?

제대로 보기 위해 태블릿 PC 모서리를 잡고 제대로 고쳐 잡는 순간이었다.

“아가, 이건 아저씨가 볼게.”

내 머리 위에서 평소보다 다소 거친 음성이 울린다.

대체 언제 온 건지, 내 뒤에 서 있던 강 대표가 손을 쭉 뻗어 태블릿 PC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태블릿 PC가 검은 화면을 뱉어 낸다. 살짝 기울어진 상체가 내 등에 닿을 듯 말듯 가깝게 느껴진다. 뜨거운 온기가 손가락에 스치고, 태블릿 PC가 강 대표 손에 넘어갔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호기롭게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말해 놓고서는 정작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를 들킬까 두려워, 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강 대표가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윤 팀장.”

“네?”

“본인 동의 받았으니까 이제 알아서 조회하고 계약까지 끝내시고.”

강 대표가 고개를 까딱였다.

“따로 우편으로 보내든가, 아님 박 변호사한테 넘기면 확인하겠습니다.”

윤 팀장이 떨떠름하게 “예?… 아, 네.” 하면서도 짐을 하나둘씩 챙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강 대표가 뜬금없이 제3자의 이름을 입 밖에 냈다.

“혹시 박 변도 봤습니까?”

그제야 윤 팀장이 상황을 이해한 듯이 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에이, 대표님. 제가 이걸 왜 선재한테 보여 주나요. 가족이라도, 제 고객 정보는 아무도 몰라요. 개인정보 보호법 아시잖아요. 금융 업계에서도 개별적으로 조회하기 어려우니까 늘 저 부르시는 거고.”

윤 팀장이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고정시키며 대답했다.

“게다가 오늘은 동생분 개인 보험 조회하는지도 모르고 왔는걸요.”

“쭉 몰라야 될 겁니다.”

“대표님도 참. 매일 같이 붙어서 일하시면서 아직도 못 믿으세요? 선재 저번에 보너스 받은 이후로 개인 고객들 케이스에서 완전히 손 뗐다 하던데요.”

박 변? 박 변호사 아저씨? 왜 그 아저씨가 가족이지, 둘은 성이 다른데? 나는 혼돈에 빠졌다.

윤 팀장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신에… 저번에 말씀 드린 단체 보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검토 부탁드릴게요, 대표님.”

“협상은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

“네. 저희 아버지가 사업하시잖아요. 각자 어머니들을 안 닮아서 다행이죠.”

윤 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복 남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 팀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박 변호사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시선을 감지한 윤 팀장이 “음.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하며 말갛게 웃었다.

그래서 윤 팀장이 강 대표를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던 걸까? 그럼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강 대표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못 잡아먹어 안달난 부하 직원—사실 변호사‘님’이지만—과 유전자가 겹치는 사람과는 연애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그냥 약속할걸… 괜히 안 했다.

밑져야 본전인데, 속는 셈 치고 그냥 넘어갈걸. 강 대표가 외출을 미끼로 내 입을 막으려는 줄 알고 선수 친 나는 조금 후회했다.

그럼… 강 대표는 왜 그렇게 불안해 보였지?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윤 팀장과 강 대표가 업무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대표님, 요즘은 급여만 많이 준다고 좋은 회사가 아니라 복지가 좋아야 좋은 회사거든요. 그래야 직원분들이 오래 다니신다니까요. 특히 외부 활동 많은 금융업 종사자는 더더욱이요. 한번 고려해 주세요.”

강 대표와 나를 번갈아 본 윤 팀장이 “그럼 일단은 동생분이랑 잘 대화해 보시고… 나중에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동생 분도, 다음에 기회 있으면 건강하게 또 만나요. 꼭 내년에 대학 가길 바랄게요.” 하며 마무리했다.

현관문 앞에서, 나는 “누나. 안녕히 가세요.” 했고, 강 대표는 “연락하겠습니다.” 하며 배웅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내게 손을 흔들던 윤 팀장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강 대표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가야.”

“…네?”

“아저씨 잠깐 나갔다 올게.”

강 대표가 습관처럼 내 뺨을 톡 치려다 말고, 공중에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집에 있어야 한다.”

어쩐지 절박함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당부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 대표는 정말… 나 때문에 불안했던 걸까?

내가 ‘아무한테나’ 들이댈까 봐?

…날 좋아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걱정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과 함께 굳게 닫히는 현관문을 보며, 나는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생각지도 않은 질투와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느라 몸도 마음도 피로했다. 무엇보다 강 대표가 없을 때 미리 자 둬야 했다.

* * *

강 대표는 ‘잠깐’ 다녀오지도 않았고, ‘금방’ 돌아오지도 않았다. 장장 열여섯 시간을 자고 일어난 내가 한 시간을 더 소파 위에서 뭉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약속을 안 했으니, 목 빠지게 기다릴 일도 없었다. 진짜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메시지를 재차 확인했다.

아저씨.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7:2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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