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4)

어색한 침묵 속에서 운전대를 잡은 강 대표는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탔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호수 앞 호텔에 멈춘 차는 호텔 파킹 직원에 의해 지하로 사라졌다. 강 대표는 익숙하게 체크인을 하고 카드키를 든 채,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를 끌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여기서 편하게 자.”

카드키를 건네준 강 대표가 “14층이다. 이상한 방 들어가지 말고.” 했다. 나는 울어서 조금 부은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다가, 강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저 혼자 자요?”

“그럼 같이 자?”

강 대표가 기가 찬 음성으로 되묻는다. 마치 헛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따로 잘 필요가 있나? 집도 아니고, 여행까지 와서? 원래 ‘수학여행’은 싫은 사람들끼리도 한방에서 엉켜 자는 거다. 그걸 감수하고 가는 여행인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강 대표가 말 몇 마디에 질질 짜는 구질구질한 사람과 같이 있기 싫어도… 수학여행을 같이 왔으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같이 있어야 한다고.

“같이 자자는 건 아니었는데요.”

“…….”

“그렇다고 따로 잘 거까진 없잖아요.”

“뭐라는 거야, 애새끼가.”

또다시 ‘애새끼’로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아까 ‘지오야’라고 불러 준 건 적선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다. 나는 강 대표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애새끼가 나았다. 불쌍한 것보다 뻔뻔한 게 낫고, 만만한 것보다 영악한 게 백배 나은 것처럼.

동정과 연민이 가득 담긴 ‘지오야’는 내 쪽에서 사양이다. 강 대표가 원하는 게 애새끼라면, 나는 얼마든지 애새끼가 될 수 있다.

“아저씨. 저 미성년자인데요.”

“뭐?”

“호텔에서 혼자 자다가 모르는 사람이 내 방 들어오면 어떡해요? 그럼 경찰 아저씨 불러도 나까지 잡아갈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자고 있었던 건데….”

나는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이 온 어른이 없으니까 내 말 안 믿어 줄 거 아니에요. 그럼 아저씨가 내… 보호자니까 다시 데리러 와야 하잖아요.”

자연스럽게 말해야 하는데, 호흡이 자꾸만 툭툭 끊겼다. 초조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답변을 기다리는데, 강 대표가 “참 나, 씨발… 좆만 한 게 사람을 가지고 노네.” 하면서 나를 엘리베이터 안에 구겨 넣듯이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들린 카드키를 낚아채 터치 패드에 찍고 14층을 눌렀다.

“됐지?”

“네.”

나는 덧붙였다.

“저 먼저 씻을래요.”

“아이고… 가지가지 한다.”

강 대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가지만 해, 한 가지만.”

강 대표는 정말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며 손을 까딱였다.

띵.

경쾌한 엘리베이터 기계음 소리가 들리자마자, 강 대표는 길쭉한 다리 길이를 자랑하며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갔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며 천천히 걸었다.

길게 뻗어 있는 복도가 유난히 더 길었다. 강 대표가 1405호에 카드키를 찍고 문을 열었다. 천천히 걸어가자, 강 대표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문을 열고 기다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그냥 내가 못마땅하다든지.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호텔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천천히 닫힌다. 문가에 선 강 대표가 욕실을 향해 턱짓했다. 먼저 씻으라는 눈빛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또 사라지진 않겠지?

나는 불안감을 가득 안고서 샤워 가운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은 깨끗하고 넓었다. 물론 호텔이라 해서 강 대표 집의 화장실과 별다를 바는 없었지만 느낌이 이상하기는 했다.

새로운 공간이 주는 위압감과 왠지 모를 묘한 기분에 나는 샤워기를 틀고 그 앞에 섰다. 따갑게 쏟아지는 물방울들이 살갗을 세차게 때렸다. 수증기가 일어 거울 위에 김이 뿌옇게 서린다. 스스로 짓고 있는 표정조차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을 즈음, 나는 벽에 머리를 박았다.

‘너를 보호해 주지 않는 어른을 짝사랑하지 마.’

뜨거운 물줄기가 등으로 쏟아져 내렸다. 의미심장한 말을 낮게 읊조리던 강 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인 것 같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꿰뚫는 그 순간,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짝사랑.

사소하고 하찮은 단어다. 나와 거리가 먼 단어인데… 왜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강 대표가 처음 집을 비웠을 때, 변태 새끼들이 가득한 단톡방에 들어갔던 일이 겹쳐진다. 호감이 있는 거라고, 조금 거리를 두라고 했던 그 조언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 진짜… 강 대표를 좋아하나?

내가? 왜? 강 대표는 성질 나쁜 사채업자일 뿐인데. 어쩌면 국민학교를 나왔을지도 모르는 옛날 사람인데. 강 대표는 그저… 강 대표일 뿐인데. 그뿐인데.

“아가야. 자빠져 자냐.”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 사이로 문밖의 강 대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섞여들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서, 나는 목청껏 대답했다.

“지금 나가요!”

나는 바로 샤워기를 끄고, 수건으로 대충 몸의 물기를 닦아 냈다. 입고 온 옷은 이미 바닷물에 절어서 딱딱하게 굳은 상태라 다시 입을 수가 없어, 부드러운 샤워 가운으로 갈아입고 욕실 문을 열었다. 수증기가 단숨에 빠져나가고, 급격한 온도 차에 몸이 절로 떨렸다.

“…아.”

강 대표는 욕실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공중에서 마주친 새까만 눈동자가 깜빡깜빡 어둠 속에 사라졌다, 나타났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바다에서 호텔로 오는 길 내내 느껴졌던 그 어색한 침묵이었다. 시선을 먼저 돌린 쪽은 강 대표였다.

“씹, 뭔 놈의 호텔이 온도 조절이 안 돼.”

짙은 눈썹을 잔뜩 휘며 인상을 찌푸린 강 대표는 곧장 에어컨을 끄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샤워 가운을 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걸음이 더 빠른 듯했다. 오래 기다리느라 짜증 났나? 나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쏴아아….

욕실에서 물줄기가 바닥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온다. 혹시 강 대표에게도 내가 샤워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을까? 만약 그랬다면, 좀 부끄러울 것 같았다.

“…흠흠.”

나는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에 목을 가다듬었다.

혼자 넓은 방에 우두커니 남은 나는 창가 쪽 침대로 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반대편 침대에는 이미 강 대표의 시계와 핸드폰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흔한 비밀번호조차 걸려 있지 않은 강 대표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내 이름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괜히 오해를 살, 허튼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강 대표가 그 짧은 사이에 질질 짜는 애새끼에게 질려 [백지오]에서 [백철웅 아들]로 다시 저장명을 바꿨을까 봐 조금 두렵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바다에서 나눴던 강 대표와의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또 재생된다. 그 단호했던 음성도.

‘지오야.’

만약 강 대표가 다시 한번 그렇게 불러 준다면….

“…미친.”

상상만으로도 젖은 머리칼 사이로 쭈뼛쭈뼛 소름이 돋았다. 마치 강 대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처럼.

나… 진짜 좋아하나?

내가 생각해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은 이상하다.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내가 강 대표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이 묘하게 울렁거리고, 기분이 강 대표의 행동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더라도… 강 대표 말처럼 내가 정신을 못 차린 ‘애새끼’여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내 ‘변명들’과 달리 강 대표는 내게 다시 돌아와 줘서 그런 걸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걸로는 알 수가 없는 거다.

내가 강 대표를 진짜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지 알려면, 적어도 무언가 특별한 계기는 있어야 한다. 생각보다는 다정하다,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렇게 단순한 거였다면 나는 이미 수십 명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강 대표를 기다리다가 지쳐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살갗에 닿는 푹신푹신한 베개가 부드러웠다. 나는 뺨을 부비다가 두 눈을 감았다. 나른하다.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진다.

강 대표는… 샤워를… 되게 오래 하는 편인 것 같았다. 평소보다 더 오래 하는 것 같은데… 바닷물이 찝찝했나….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수마의 늪에 빠져들었다.

* * *

인간은 모두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평생 어깨 위에 결핍을 짊어지고 살아가며, 결핍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혼자라는 외로움을 깨달아 가는 거라고. 그렇다면 내 외로움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의 크기가 구덩이 정도라면… 나는 내핵을 뚫고 들어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구 반대편까지 튀어 나갈 수도 있다. 내 외로움이 지구를 뚫고 들어가 지구 반대편 사람을 만난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알아주지 않을까? 내 외로움을. 어렸을 때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말이다.

‘…아. 어쩌라는 거야.’

누런 천장 아래에서, 나는 인상을 찌푸린다. 싱크대 속 접시는 산처럼 쌓여 있었고, 음식물 찌꺼기들이 모여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엌과 거실 그리고 방이 분리되지 않은 단칸방 안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욕설을 내뱉는다. 한 손으로 낑낑거리며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스펀지를 들었다. 초록색 석고 깁스를 한 상태로 설거지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끼기긱.

‘야! 시끄러워, 인마. 시위하냐?’

신경줄을 긁는 접시 긁히는 소리에 무지막지한 욕설이 날아온다. 개새끼, 씨발 새끼, 좆같은 새끼. 설거지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새끼, 쓸모없는 새끼. 별별 새끼가 다 담긴 욕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구 새낀데. 그래 봤자 지 새끼지.

나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백지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구석에서 초록색 술병을 기울이고 있던 아빠가 언성을 높였다. 쓸데없이 귀는 밝다. 나는 무거운 초록색 석고 깁스를 싱크대 위에 얹은 상태로 고개만 돌려, 얼굴이 벌게진 아빠를 노려본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저 싸가지 없는 새끼. 말버릇하고는. 지 애미랑 똑 닮아가지고.’

나는 입을 꾹 다문다. 평소처럼.

‘어휴, 내 인생, 씨벌. 니들 모자 때문에 조졌지.’

그래, 평소처럼 다물어야 하는데….

‘…그럼 우리 인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 튀어 나간다.

‘아빠는 지금까지 우리한테 뭘 해 줬는데? 나도 좀 알자. 혼자만 알지 말고.’

‘뭐, 이 새끼야?’

‘대체 우리한테… 아니, 나한테 뭘 해 줬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우리. 그 한 단어에, 아빠가 벌떡 일어선다. 중심을 잡으려는 듯 비틀거린다. 흔들리는 두 다리가 꼴도 보기 싫다. 벌게진 얼굴도, 손에 들린 술병도, 지독한 알코올 냄새도 전부.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애비가 만만하냐? 어?’

솥뚜껑만 한 손이 내 뺨을 툭툭 건드린다. 약한 힘으로 치던 손바닥이 어느샌가 마찰음을 낸다. 시야가 거세게 흔들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깁스한 팔을 들어 올린다. 초록색 석고 깁스의 무게에 아빠는 잠시 주춤하더니, 기어코 반대편 틈으로 손을 뻗어 내 뺨을 한 대 더 내려친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돈다. 아빠는 쉬지 않고 고함을 지른다.

‘낳아 주고 키워 줬으면 됐지, 이 욕심 많은 새끼가! 너도 니 애미처럼 내가 뒤졌으면 좋겠어? 어? 그래?’

익숙한 통증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자꾸만 내 구덩이를 파고든다. 지구 반대편까지 뚫을 기세로.

그래…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영원히.

나는 주먹을 꽉 쥔다. 시뻘건 얼굴을 한 아빠의 형상이 괴물처럼 부풀어 오른다. 일순, 내 발밑에는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이 깔린다. 구덩이는 자꾸 아래로 깊어져만 가는데, 그 새까만 어둠 속에서 나는 씩씩거리며 저주를 퍼붓는다.

아빠가 뭔데? 뭘 해 줬는데. 나 욕심 없어. 누가 남들만큼 살자고 했어? 누가 아빠더러 잘해 달라고 했어? 아무것도 안 바랄 테니까. 그냥,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차라리 돌아오지 마. 맨날 뒤진다, 뒤진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나가서 혼자 죽으라고.

아빠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는데… 어쩌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깊은 구덩이 속에서 내가 퍼부은 저주와 한데 엉킨다. 악의에 가득 찬 언어가 구덩이를 가득 메워 숨통이 짓눌린다. 끅끅거리며 구덩이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은 없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아빠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고, 아무도 내가 빠진 구덩이를 봐주지 않는다.

온몸이 짓눌리고,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면 나는 깨닫는다.

또다. 또 이 꿈이다. 아빠가 사라진 이후로, 거의 매일 밤 꾸고 있는 악몽이었다.

나는 이미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잘못했어요.’

나는 두 눈을 감는다.

‘잘못했어요.’

여기서 죽는 거다.

죄책감의 무게만큼 뼈가 으깨지고, 숨통이 틀어막히는 고통을 기대하며 주먹을 꽉 쥐는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허어억.”

나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나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천장을 확인했다. 누런 천장이 아닌… 높고 하얀 낯선 천장이다. 젖혀져 있는 커튼 사이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어, 은은하게 호텔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커다란 손이 보였다. 나를 구덩이 속에서 잡아 준 손이 보였다.

“쉬이… 괜찮아.”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강 대표는 내 가슴 위에 손바닥을 얹고 느리게 토닥였다.

“아저씨 여기 있다.”

내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그래, 천천히 숨 쉬어.”

“…아저씨.”

내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공중으로 흩어지자, 강 대표는 허리를 숙여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생수병을 돌려 뚜껑을 깐 강 대표가 “자.” 하며 내게 건넸다. 나는 몸을 살짝 일으켜 꿀꺽꿀꺽 물을 들이켰다. 작은 한숨을 뱉은 강 대표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이거 봐. 나만 보면 목 타는 거 맞다니까.”

퍽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강 대표의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강 대표가 또 능글맞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을 거다. 나는 조용히 두 눈을 깜빡였다.

새벽녘의 빛을 등지고 있는 강 대표의 뚜렷한 이목구비에 음울한 음영이 져 있다. 그는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지도, 웃고 있지도 않았다. 목젖이 느리게 움직이는 게 보인다.

“아가야.”

“…….”

“아저씨는….”

강 대표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나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강 대표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한다.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명백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림자가 드러낸 민낯이었다. 그의 눈빛이 나를 다시 한번 꿰뚫는다.

“아저씨는 네가 가난에 10대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강 대표의 나지막한 음성에 거짓말처럼 악몽에 놀란 속이 가라앉고, 한없이 고요해진다.

“네 20대는 내가 알아서 가져갈 테니까, 너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열아홉으로 남아 있으면 돼.”

“…….”

“적어도 그건 해 줄 수 있으니까.”

강 대표의 언어는 어딘가 허점이 있었다. 사채업자 주제에, 내게 돈을 받아 내기 위해 투자하는 중인 주제에… 꼭, 나를 생각해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처럼 들린다.

언어뿐만이 아니다.

내 모습을 담고 있는 저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 저 눈빛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 저 다정한 시선이… 숨을 쉴 수 있게 만든다. 무엇이든지 괜찮게 만든다.

마치 소각장에 숨어든 것처럼.

“아….”

일순, 파도처럼 밀려오는 깨달음에 나는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내 부정해 왔던 정답을 알아낸 까닭이었다. 명백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주관식의 정답을.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켜켜이 쌓아 올린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순간들이 모여 나도 모르는 사이 스며든다는 것을.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계기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강 대표를 좋아한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 * *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아는 순간, 분홍빛 꽃잎들이 주변을 휩쓰는 기분이 들 거라 생각했다. 마치 마법처럼. 나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애초에 상대방이 나를 철저하게 애새끼 취급을 하는데, 꽃잎들이 날아 다닐리가. 감정의 정체를 알아낸 순간, 나의 ‘수학여행’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우리는 하루 더 일찍,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로 위를 달렸다. 강 대표는 수학여행에 걸맞은 교육적인 장소에 가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 이번 여행은 ‘수학여행’이 아닌 그냥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강 대표와의 첫 여행.

비록 질질 짜기도 하고… 추한 꼴은 다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여행은 여행이었다. 그 누구도 좋아하는 사람과의 첫 여행에 정숙한 어머니상 위인이 살던 생가에 ‘교육적인’ 목적으로 방문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가야.”

내내 조용히 운전을 하던 강 대표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평소와 같은 부름에도 쿵, 쿵, 쿵. 심장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뛰었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강 대표가 나를 다시 부르지 않기를 바라며.

“안 자는 거 다 안다.”

내 소소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답 안 하지?”

강 대표는 다소 험악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협박에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요?”

“이게 안 자면서 자는 척은.”

“자는 척한 거 아니에요. 그냥, 눈 감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아저씨가… 조수석에선 자는 거 아니라면서요.”

“눈은 왜 감고 있었는데.”

“…눈, 눈 아파서요. 햇빛 때문에.”

강 대표가 내 심장 소리를 들었을까 봐, 나는 구차한 변명을 덕지덕지 붙여댔다. 다행히도 강 대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우리 아가가 쪽팔려서 눈치 보는 줄 알았지. 질질 짜서.”

그것도 맞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 부정했다.

“아닌데요.”

“아님 말고.”

강 대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기가 형사 아저씨도 아니면서 심문은 잘했다. 조폭과 형사는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이제 끝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강 대표가 눈치 없이 다시 질문했다.

“근데 너. 원래 밤에 잠 잘 못 자냐?”

“네?”

“평소엔 신생아처럼 처자더니. 왜 그렇게 밤새도록 끙끙대.”

평소? 밤새도록?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강 대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눈이 조금 충혈된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물었다.

“아저씨. 저 자는 거 안 자고 지켜봤어요?”

“뭐?”

“네?”

“뭐라는 거야, 내가 왜 널….”

강 대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는 원래 아침잠이 없어요.”

너도 나이 먹어 봐라. 아침잠이 그대로 가는지, 아닌지. 그가 변명하듯 둘러댔다. 강 대표의 변명은 설득력이 없었다. 70대 노인도 아니고 끽해 봐야 30대면서. 내가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을 짓자, 강 대표가 “그래. 아직 애새끼한테 뭘 바라겠냐, 내가.” 하며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여전히 설득력은 없었다.

그래도 강 대표가 나를 밤새도록 지켜봐 줬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다. 자매품처럼 뒤따라온 ‘애새끼’라는 단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강 대표는 여전히 나를 애새끼 다루듯이 덧붙였다.

“집 가면 바로 씻고 자. 내일 또 학교 지각한다, 너.”

“…아직 3시도 안 됐는데요.”

“집 도착하면 밤이야.”

나는 슬쩍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았다. 도착 시간은 7시 50분이었다.

“제가 무슨 아홉 살이에요? 여덟 시가 어떻게 밤이에요.”

“아가야. 어제 네가 잠든 시간을 생각해 봐.”

“그건….”

나는 눈치를 보며 슬쩍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그건 아저씨가 샤워를 너무 오래 해서 그런 거잖아요.”

“…….”

“아저씨가… 평소보다 씻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기다리다가 잔 건데요. 일찍 자려고 잔 게 아니라.”

강 대표가 내가 강 대표에게 얼마만큼 평소에 관심이 있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강 대표가 내 평소 수면량을 아는 것처럼. 나도 강 대표가 얼마나 오래 씻는지… 잘 알고 있다고. 너무 변태 새끼처럼 들리려나? 그래도 관심의 표시니 괜찮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연애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상대방이 질색하지 않을지 알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여자애들이 고백하면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중학교 때부터는 그런 애도 없었기에, 내 인생에 있어 누군가를 사귄다는 개념은 모호하기만 하다.

강 대표는 어떨까? 나는 곁눈질로 강 대표의 옆모습을 흘겨보았다. 높은 콧대와 입술을 타고 날렵하게 떨어지는 턱선이 보인다. 저렇게 생긴 사람이 연애를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른이 사귀는 건… 정말 어른의 영역이 아닌가? 어린 애들이 사귀고, 좋아하고, 연애 놀이하는 거랑은 다를 텐데.

강 대표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걸 상상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다.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다. 강 대표와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조금 무섭고, 많이….

“흠흠….”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많이… 좋을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른의 연애도 별 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잤어?’ 따위의 흔한 안부 인사로 시작해 같이 식사를 하고 각자의 일상을 보내다가 다시 둘만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나누면 된다. 자기 전에는 서로의 품을 내주며 잠에 드는 일상을 보내는 것, 그게 어른의 연애 아닌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다 그렇게 하던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다시 힐끔 강 대표를 바라본다. 강 대표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어쩌면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대답 대신 차가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일순, 나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상상하고, 좋아하는 나 자신이… 누가 봐도 ‘짝사랑’을 하는 것이 뻔한 나 자신이 너무 하찮게 느껴진다. 맨날 씹히기나 하고. 나는 감히 강 대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로봇처럼 정면만 주시하며 레이싱 같은 운전을 하는 강 대표와 자는 척 고개를 푹 숙인 나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공간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심장이 쿵,쿵, 쿵 거세게 방망이질 쳤다. 강 대표의 말대로,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감을 뚫고 내비게이션의 음성이 울렸다.

—잠시 후 좌회전입니다. 도착 예정 시간 6시 45분, 6시 45분입니다.

거의 한 시간이나 단축된 도착 시간에, 슬쩍 실눈을 뜬 내 시야 안으로 눈에 익은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 대표의 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여행이 끝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그게 조금… 아쉽다. 나는 새벽녘을 떠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나의 새벽을 구성했던 강 대표의 모든 것이 떠오른다. 핏줄 선 손등, 따뜻한 체온,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삑.

차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차가 부드럽게 멈추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다 일어난 척 게슴츠레 눈을 뜨고 강 대표를 바라보았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낸 강 대표가 뜬금없이 내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톡 밀었다.

“아저씨가 너 운 거 비밀로 해 줄게.”

“…….”

“그러니까 하던 대로 해, 아가야.”

눈치 보면서 자는 척하지 말고. 내내 기계처럼 운전만 하던 강 대표가 정곡을 찔렀다.

분명 아니라고 쳐내야 하는데. 아저씨야말로 왜 내 말을 씹고 운전만 했냐고 물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우물쭈물거리자, 강 대표가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로 나를 놀린다.

“이건 뭐, 거짓말도 못하고, 농담도 못하고. 너 어떻게 살래?”

그는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강 대표의 얼굴에 얼룩진 음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마치 나만 알고 있는 강 대표의 비밀 같은.

나는 새벽을 다시 떠올린다.

왠지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났다. 분명 기분이 안 좋았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나는 강 대표를 마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럼 비밀이에요.”

강 대표는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으니까 활짝 웃을 거다. 강 대표가 보기에는 감정 기복이 심해 보여도 말이다.

“그렇다고 쳐요.”

나는 덧붙였다. 원래 잘못을 빨리 인정하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라고 했다. 내가 틀렸다. 분홍빛 꽃잎들이 주변을 휩쓸지 않아도, 애새끼 취급을 받아도 아무렴 상관없다.

강 대표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마법처럼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괜찮다.

나는 이미 마법에 빠져 있었다.

* * *

첫사랑의 시작과 함께 여름이 들이닥쳤다. 강 대표는 강 대표대로, 나는 나대로 새 일상에 적응했다. 강 대표는 더 이상 집을 비우지 않았고, 종종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나란히 소파에 앉아 서로의 일상을 나누기도 하는데—주로 성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답지 않은 대화조차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가끔 강 대표를 빤히 쳐다보면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뜨거나, 갑자기 집 밖에 나가려고 하는 것만 빼면 다 좋았다. 그렇게 강 대표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가장 큰 고민이 나를 찾아왔다.

어떻게 해야 강 대표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지?

나는 현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짝사랑의 끝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만약 다짜고짜 강 대표에게 고백을 하게 된다면 그냥… 개무시당할 거다. 내 사랑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코웃음 칠 일이니까. 원금만 5억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뒤집어 흔들 사람에게 반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정말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긴 하는데….

근데… 내 마음인데. 내 마음 하나 마음대로 못 하나?

좀 억울했다. 나도 좋아하기 싫은데… 그냥 좋은 건데. 강 대표는 내게 유일하게 손을 뻗어 준 사람이고, 사채업자답지 않게 다정하고, 안 그렇게 생겨선 엄청 성실하다.

…또 엄청 잘생겼기도 하고.

나는 강 대표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떠올리며 수능 특강 책을 덮었다. 나는 습관처럼 손톱으로 손가락을 툭, 툭 건드렸다. 너덜너덜한 대일밴드 한쪽이 기어코 뜯어졌다. 분홍 속살 사이로 하얗게 질린 내 손가락이 보인다. 나는 가방에서 새 대일밴드를 꺼내 다시 붙였다. 열 손가락 중 벌써 네 손가락이 대일밴드 신세였다.

“야! 나 콜라 맛!”

“포도 없냐, 포도?”

아이들이 깔깔댔다. 교실은 평소보다 더 어수선했다. 김국현이 없는 김국현 패거리들이 사물함 뒤에 서서 떠들고 있었다. 막대사탕 하나씩 입에 물고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 교실 안에서, 반팔 체육복 위에 담요를 덮어쓴 반장이 한 명당 하나씩 춥파춥스 막대 사탕을 나눠 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미술 시간이었지만, 사실상 자습이었다. 분명 수업 시간인데.

“…그 누나는 대학생이니까 시간이 자유롭단 말이야. 근데 씨발, 내가 맨날 선생들 눈치 보느라 수업 시간에 연락 안 돼 봐라. 그럼 끝이야. 학교 때문에 연락 제때, 제때 안 되면 존나 어려 보이잖아.”

“우와. 그럼 이제 며칠 됐어?”

“엊그제가 50일.”

우리 반도 아니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 반에 섞여 있는 박건수가 물어보지도 않은 연애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공재민은 옆에서 “와. 쩐다.” “연상 킬러네.”와 같은 과장된 추임새를 내뱉었다. 반에서 대화 한번 안 해 본 키 큰 애가 “미친. 그걸 일일이 세고 앉아 있냐?” 하며 놀랍다는 듯 목청을 키웠다.

“당연히 챙겨야지. 기본 아니냐? 기본?”

이거 하려면. 허리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포즈를 취한 박건수가 오픈 카톡방의 변태 새끼처럼 웃었다. 박건수는 멈추지 않고 연상이 느끼는 ‘피로감’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늘어놓다가, 공재민의 어깨를 탁탁 쳤다.

“너도 괜찮은 애 있으면 한번 낚아 봐. 공재민.”

“나는 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직 없는데?”

“그냥 찔러 보는 거지.”

“아. 그런가.”

공재민의 어색한 대답 후에 곧장 박건수의 어쭙잖은 조언이 따라붙는다.

“지금부터 밑작업 해 둬. 두 달 뒤면 고백 데이잖아. 거기에 맞추면 100일이 크리스마스거든? 여자들은 이런 거 또 좋아한다고.”

“오, 역시 건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박건수가 끊임없이 거들먹거렸다. 꼴에 대학생 누나랑 사귄다고, 애들이 떠받들어 주니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였다.

“근데 건수야. 그 누나는 어떻게 만났어? 대학생인데.”

“야, 연상 꼬시는 게 제일 쉬워.”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스킨십 하면서 간 좀 보고. 다 그런 거지.”

“거기에 넘어온다고?”

“그냥 스킨십만 쳐 하겠냐. 생각을 해라, 생각을.”

박건수는 연애학 박사처럼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연상은 연하의 귀여움을 좋아하는 거지, 받아 주진 않아. 애새끼처럼 찡찡거리면 아주 피곤해한단 말이야. 근데 또 귀엽게 굴면 뻑 가. 그 강도를 네가 잘 조절해야지.”

…일리가 있다. 박건수가 처음으로 인생에 도움 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눈을 감고도 그려 낼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리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포인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중간중간 치고 들어가는 거야.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줘야 이게 열린다고.”

“마음이?”

“마음이겠냐? 공재민 이 븅신 새끼.”

미친놈. 어쩐지 쓸 만한 조언을 한다 했다. 나는 가슴을 쭉 내미는 박건수를 외면하고 수능 특강 책을 폈다. 미리 페이지를 접어 둔 수능 특강 책을 뒤적였다. 별표 표시를 해 놓은 문제들을 눈으로 훑는 사이, 3분단에 있던 반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백지오.”

반장은 필기로 가득한 내 수능 특강 책을 보곤 조금 놀란 눈을 했다. 7등급이 웬일로 공부하나 싶은 것 같았다. 반장이 사탕 통을 쭉 내밀었다.

“자. 무슨 맛 먹을래?”

“아무거나 줘.”

“아무거나 없거든? 먹고 싶은 거 골라.”

반장이 통 자체를 기울여 내게 보여 줬다. 나는 통 안에서 눈에 띄는 보라색 껍질 사탕을 꺼냈다. 포도 맛 사탕. 단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굳이 뽑자면 포도 맛이 좋았다. 강 대표가 좋아하는 맛이니까.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고마워. 반장.”

“어… 어. 하나 더 고를래? 남을 거 같은데.”

근데 너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본다. 반장이 중얼거리며 통을 흔들었다. 사탕이 마구 뒤섞인다.

그런가? 하긴, 지금까지 학교에서는 웃을 일이 별로 없기는 했다. 반 애들과 대화할 접점도 딱히 없기도 했고….

“괜찮아. 고마워.”

나는 민망함에 짧게 인사했다. 어깨를 으쓱한 반장이 알록달록한 춥파춥스 통을 흔들며 뒤로 넘어갔다. 나는 바로 사탕 껍질을 벗기려고 시도했지만, 검지손가락에 붙인 대일밴드 때문에 쉽지 않았다. 끙끙대며 시도하는데, 커다란 선물 바구니를 들고 오는 김국현이 눈에 띄었다. 사실, 눈에 띄었다기보다는 들렸다.

“이열. 김국현. 클라스 보소. 지렸다.”

“이 새끼 곰 인형 들고 오는 거봐.”

“누가 고백했냐? 3반 걔? 2반 걔?”

“비켜. 새끼들아. 좀 앉게.”

웃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바로 옆 분단에 김국현이 다리를 꼬고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앉았다. 못생긴 복숭아뼈가 훤히 드러나고, 바지는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사탕 껍질 벗기기에 열중하다가 결국 장렬하게 실패하고 바지 주머니에 사탕을 넣었다.

“야. 너 먹어라. 친구야. 너도.”

그때, 김국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구니 속에 든 초콜릿과 과자 그리고 사탕을 던져서 뿌리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던 반 애들의 머리에 맞거나, 몸통으로 떨어지거나 했다. 몇몇은 운동 신경이 좋은지 한 번에 낚아챘다.

“그걸 나눠 줘? 선물해 준 애 울겠다.”

“어쩌라고. 내가 받은 거 내가 나눠 주겠다는데 꼽냐?”

박건수의 질문에 김국현이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박건수가 낄낄댔다.

“걔한테 지금 가서 하나 더 사 달라고 하시든가요. 아, 누군지 불쌍하다. 김국현 같은 새끼한테 꽂혀서.”

“원래 좋아하는 애한테는 선물도 안 아까운 거지, 뭐.”

김국현이 너스레를 떨며 사탕을 한 움큼 쥐고 공중에 던졌다. 내 책상에도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국현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바로 마주쳤다. 김국현이 곧장 내 앞으로 다가와 바구니 바닥에 남은 초콜릿을 모조리 내 책상 위에 부었다. 알록달록한 포장지가 눈에 띄는 초콜릿과 사탕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몇몇 개는 책상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많이 먹어라? 백지오.”

시비를 거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행동을 보면 시비 거는 것 같은데, 또 얼굴을 보면 무언가 기대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고마워.”

“…그게 다냐?”

“그럼?”

“됐다.”

갑자기 얼굴을 확 구긴 김국현이 사물함 뒤에 몰려 있는 패거리를 향해 뛰어가 가만히 서 있던 공재민에게 니킥을 날렸다.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는 공재민의 신음 소리와 함께 “씨발. 뭘 봐? 뭘 보냐고!” 하는 김국현의 고함 소리가 울렸다. 어수선한 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저건 왜 또 지랄이야.

역시 시비였나 보다. 김국현은 가끔 친구인 것마냥 굴고, 자주 등신 찐따 새끼처럼 굴었다. 양아치 새끼.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사탕들을 책상 서랍 안에 넣고, 한쪽으로 밀어냈다. 떨어진 건 굳이 줍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까기 쉬운 봉지 사탕을 한 번에 까 입에 넣고 혀로 굴렸다. 인공적인 딸기 맛이었다. 조금 역겨웠다. 그때, 핸드폰이 웅웅 울렸다. 까만 액정이 노란 채팅창을 띄웠다.

아저씨 악수 다 끝내고 왔다 방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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